연지는 눈치 빠르게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맞아 맞아, 아린아. 네 말이 딱 맞아!”...한편, 신랑 대기실.윤제 옆에는 신랑 들러리로 선재가 함께 있었다.선재는 무심코 확인한 핸드폰 화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예진의 시험 결과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와, 이게 진짜야?”순간 벌떡 일어나 앉은 선재의 과장된 반응에, 넥타이를 매던 윤제가 고개를 돌렸다.“뭐야, 왜 호들갑이야?”선재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합격했어요!”“뭐가 합격인데?”선재는 핸드폰을 윤제 앞에 내밀며 화면을 확대했다.“전 형수요. 변호사 시험에 붙었어요, 그것도 1등으로요. 설마 동명이인인가? 아무리 그래도 형 뒤치다꺼리하느라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게 진짜 가능해요?”윤제는 순식간에 선재의 핸드폰을 낚아채더니, 화면 속 이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그리고 곧 굳은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었다.선재는 윤제의 굳은 표정을 보며,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히죽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가져갔다.“아이, 뭐... 사실 형이랑은 이미 끝난 얘기잖아. 오늘은 형 결혼식이니까, 전부 다 과거일이지.”그러나 윤제는 대꾸하지 않았다.대신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고예진... 결국 해낸 거야?’남자끼리 통하는 게 있는 법, 선재는 단번에 윤제의 기색을 알아챘다. 그는 슬쩍 떠보듯 물었다.“설마... 형, 아직 전 형수님한테 미련 있는 거예요?”윤제는 코웃음을 치며 단칼에 잘라냈다.“내가? 전처한테 미련이 있다고? 웃기지 마.”하지만 선재는 윤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형적인 ‘죽어도 아니라고 우기는’ 타입.예전엔 늘 예진이 윤제 곁을 맴돌며 챙겼지만, 지금은 완전히 등을 돌린 상황. 새로운 삶을 시작한 건 예진 쪽이었다.‘형은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고예진 얘기만 나오면 저렇게 흔들리잖아.’‘마음속에선 아직 정리 못 한 거지.’선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오늘은 형의 결혼식 날이니, 분위기를 더 험
매니저는 마지막으로 예진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옆으로 물러났다.예진의 얼굴에 번진 여유로운 미소를 본 아린은, 주먹이 으스러질 듯 손에 힘이 들어갔다.‘고예진, 뭐가 그리 잘났다고...’‘결국 부윤제 덕 좀 보거나, 고씨 집안 덕 좀 본 것뿐이잖아.’‘내가 단지 출신이 약할 뿐이지, 어디 하나 뒤처지는 것도 없는데.’아린은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렸다.‘어차피 이런 허접한 매장이 뭐 대단하다고...’‘돈만 있으면 어디서든 더 좋은 걸 살 수 있어.’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아린은, 문 앞에서 예진 곁을 스치듯 지나치다 걸음을 멈췄다.코끝으로 비웃듯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너, 너무 우쭐대지 마. 두고 보자고.”예진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분을 못 이긴 아린이 발을 꽝 구르며 다시 쏘아붙였다.“참, 윤제 오빠랑 곧 결혼하니까 꼭 와야 해. 따지고 보면 네 덕분이야. 그동안 오빠 잘 챙겨줘서 고마워.”예진은 오래전부터 이런 유치한 ‘영역 표시’가 전혀 부럽지 않았다.결제한 넥타이를 챙기고 고개를 들어 아린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오히려 연민이 엿보였다.“굳이 나한테 이런 걸 자랑할 필요 없어. 나는 부윤제랑 함께 있는 게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네가 내 전철만은 밟지 않길 바랄 뿐이야.”아린은 콧방귀를 뀌며 당장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예진은 이미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대꾸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린은 애써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괜찮아. 이제 부윤제는 내 사람이야.’‘내일이면 우린 부부가 돼.’‘고예진은 그저 스쳐간 에피소드일 뿐, 아무 의미도 없어.’...윤제와 아린의 결혼식은 주말에 열렸다.시간도 빠듯했고,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도 많아 요란하게 치르기는 어려웠다.그래서 결혼식은 비교적 단출하게 준비됐다.신랑 신부 입장 전에 흔히 있는 들러리 이벤트나 시끌벅적한 사회자의 장난 같은 건 없
잠시 정적이 흐르는 사이, 아린은 비죽 웃으며 예진을 내려다봤다.“나는 윤제 오빠 결혼식 때 해줄 넥타이를 고르러 온 거야. 고예진, 괜히 여기서 존재감 찾으려 애쓰지 마. 소용없으니까.”예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웃기고 있네. 먼저 온 것도 나고, 먼저 고른 것도 난데...’‘네가 왜 여기서 존재감 운운해야 하지?’“결혼한다고? 그럼 축하해야겠네. 딱 잘 어울려. 쓰레기 남자랑 내연녀, 세트로 완벽하잖아.”아린의 미소는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말로 자극 안 해도 돼, 고예진. 어쨌든 이 게임에서 내가 이겼어. 네가 뭐라 해도 날 흔들 순 없어.”예진은 차갑게 웃으며 눈빛을 날카롭게 세웠다.“그래? 그럼 다른 방식으로 물어볼까? 부윤제가 나랑 있을 때도 널 못 잊어 했다면, 네 옆에 있을 땐 다른 여자를 못 잊을 거라는 보장이라도 있어?”“남자란 원래 못 가진 게 더 탐나는 법이지. 특히 부윤제 같은 인간은, 개가 똥 먹는 걸 못 끊는 거랑 똑같아. 네 생각은 어때?”“너...!”아린은 이를 바득 깨물었다.‘언제부터 고예진이 이렇게 독하게 변한 거지?’‘분명 그 변호사랑 붙어 다니더니 닮아버린 거야.’팽팽한 기류가 감도는 순간, 매니저가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아린이 곧장 나섰다.“이 넥타이, 제가 두 배 가격으로 사겠어요. 매니저님, 장사하는 사람이 돈 마다 할 이유 없잖아요?”분명히 예진의 형편을 알고 있다는 듯, 가격으로 압박을 주려는 의도였다.아린의 얼굴에는 확신에 찬 미소가 번졌다.그러나 매니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고객님,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높은 값을 주신다 해도, 이 넥타이는 고객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아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매니저는 아린을 흘끗 보더니 곧장 예진 앞으로 다가왔다.“고객님, 저희 사장님께서 이 넥타이에 대해서 특별히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선물하실 거라면, 그냥 드릴 수는 없으니 반값에 모시라고요.”예진은 전혀 놀라지 않
윤제가 매던 넥타이는 늘 깔끔하고 단조로운 디자인뿐이었다. 너무 개성이 강하거나 화려한 건 싫어했고, 또 그 무뚝뚝한 성격과도 어울리지 않았다.예진은 혼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친구 줄 거예요. 이게 더 잘 어울릴 것 같네요.”직원은 자신이 방금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말을 돌렸다.“역시 예진 씨 눈썰미는 여전하시네요. 이건 저희 매장에서 올해 메인으로 내세운 제품이에요. 패턴에도 좋은 의미가 담겨 있고요.”예진은 손끝으로 매무새를 천천히 더듬으며 시선을 고정했다.“이거... 매화무늬인가요?”“네, 맞습니다. 매화는 예로부터 길함과 평안을 뜻했어요. 꽃잎 다섯 장은 행복, 부귀, 장수, 기쁨, 재물을 상징하죠. 굉장히 의미 있는 무늬입니다.”그 말을 듣자 예진의 마음은 단번에 기울었다.‘민혁 씨한테 딱 맞겠다.’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곧장 입을 열었다.“이거 얼마예요?”직원이 대답하려던 찰나, 매장 안에 아린의 목소리가 불쑥 울려 퍼졌다.“그 넥타이, 제가 살게요.”예진은 순간 고개를 돌렸다.언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아린이 비웃음이 섞인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집어 든 넥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예진은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아린이 윤제가 입던 브랜드를 눈여겨봤고, 그 취향을 공략하기 위해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분명히 선물 핑계로 윤제의 환심을 사려는 속셈일 터였다.‘하필 오늘...’예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정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직원은 난처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고객님, 이 넥타이는 이 고객님께서 먼저 고르신 거라...”아린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직원을 노려보더니, 곧장 카드를 꺼내 쥐어 주었다.“누가 먼저 계산하느냐가 중요한 거잖아요?”“그게...”직원은 난처한 듯 예진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예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역시 류아린하고 마주치면 좋은 일이 없어. 그래도 이번만큼은 양보 못 해.’
고환일은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민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명 더 깊은 신뢰와 인정이 담겨 있었다....한편 은주는 전날 있었던 일 때문에 술집에서 밤새 술을 마셨다.토요일 아침, 겨우 눈을 뜬 뒤에야 예진의 답장이 도착해 있는 걸 확인했다.은주는 곧장 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예진은 이미 아침을 먹고, 주말이라 오랜만에 푹 자보려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그런데 은주의 전화가 오자, 졸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은주는 전날 데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줄줄 털어놓았다.얘기를 들은 예진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그래서, 그 후로 둘이 연락은 했어?”은주의 목소리는 축 처져 있었다.[아니, 내가 먼저 전화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사과는 영호 씨 쪽에서 해야지.]예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그래도 두 사람이 솔직하게 얘기는 해야지. 계속 이렇게 어긋나면 서로 더 힘들어.”물론 은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도무지 허락하지 않았다.[에휴, 그냥 됐어. 너한테 하소연이라도 하니까 속이 좀 풀리네. 아 몰라. 어쨌든 내가 먼저 전화는 안 해. 그 사람이 안 하면... 난 그냥...]끝내 ‘헤어질 거야’라는 말은 삼킨 채, 은주는 전화를 끊었다.예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화해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이건 둘 사이 문제야.’‘내가 계속 끼어드는 건 좋지 않지.’게다가 영호가 나중에 은주가 예진에게 다 털어놨다는 걸 알게 된다면, 또 다른 오해가 생길지도 몰랐다.그래서 예진은 결국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이틀 뒤면 이연과 나정 사건이 드디어 개정된다.그날은 공교롭게도 민혁의 생일이기도 했다.예진은 ‘선물은 꼭 준비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마침 오늘 민혁은 의뢰인을 만나러 나갔고, 예진은 쉬는 날이었다.그녀는 옷을 차려 입고 밖으로 나섰다.민혁이 돈이 많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값비싼 선물을 사더라도, 아마 그다지 놀라지도 않을 터였다.예진은 오래 고민하며 가게들을 둘러봤다.여러 번 망설인
고환일은 아내의 들뜬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애들 밥 먹으라고 부르러 간다더니, 애들은 어딨어?”송승예의 입가에는 더 큰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살짝 다가가 남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여보, 이번엔 진짜 뭔가 있어요. 내가 방금 위에 올라갔을 때, 두 사람 뭐 하고 있었는지 알아요?”“뭐 하고 있었는데?”“서로 껴안고 있더라니까!”송승예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허벅지를 탁 치며 말했다.고환일은 눈이 동그래지더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뭐라고? 내가 올라가서 확인해 봐야겠어.”그러자 송승예가 황급히 그의 어깨를 눌러 다시 의자에 앉혔다.“아이고, 지금 올라가면 분위기 다 깨잖아요. 애들 일은 애들 속도대로 두는 게 좋아요.”그녀는 옆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며칠 지켜보니까, 민혁이 참 성실한 아이더군요. 일찍 자고, 아침마다 조깅까지 하고... 몸이 건강하니까 생활도 규칙적인 거죠.”그러더니 송승예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몸이 건강해야 부부 사이도 원만하지 않겠어요? 그게 부부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니까.”고환일은 마시던 물을 급히 삼키다 기침을 할 뻔했다.“아니, 당신은 무슨 그런 소리를... 생각이 너무 앞서가잖아.”송승예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저었다.“당신은 몰라요. 우리 예진이는 재혼이잖아요. 그러니까 더 신중해야 해요. 여자는 남자보다 실수할 수 있는 기회도 훨씬 적으니까.”말은 다소 직설적이었지만, 고환일 역시 속으로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시각, 위층에서 다리에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서 있던 민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제 몸은 괜찮죠?”“네?”예진은 순간 얼어붙었다.민혁은 괜히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덧붙였다.“이렇게 안기니까 쉽게 못 놓겠죠. 제가 그동안 괜히 운동한 게 아니거든요.”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예진은 황급히 몸을 바로 세우며 뒤로 물러났다.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피한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예진은 입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