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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블루
혜니는 인우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

혜니는 씩씩거리며 나래를 인우의 품에 안겨 버렸다.

“아예 가져가세요. 드릴게요. 하루에 우유 네 번 마시고, 당근은 안 먹고, 해산물 알레르기 있어요.”

인우는 말랑말랑하고 포근한, 옅은 우유 냄새가 나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잠시 어쩔 줄 몰랐다.

“이름이 뭐야?”

인우가 물었다.

“저는 윤나래예요. 다들 나래라고 불러요. 엄마랑 언니는 ‘우리 콩알이’라고도 불러요.”

나래는 까만 포도알 같은 큰 눈을 반짝이며 또박또박 자신을 소개했다.

인우가 혜니를 가리켰다.

“저 사람은 누구야?”

“언니요, 잘생긴 아빠.”

나래가 또 한 번 그렇게 부르며 작은 두 팔로 인우의 목을 감쌌다.

인우는 어쩐지 딸이 둘이나 생긴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아,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빠라고 부르지 마.”

와앙!

그 말에 놀란 나래가 울음을 터뜨렸다.

인우는 순간 당황했다.

지금껏 한 번도 아이를 달래 본 적이 없었다.

인우는 급히 손을 뻗어 나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한 올을 살짝 뽑은 뒤, 아이를 다시 혜니의 품에 안겼다.

“우리 콩알이, 울지 마. 언니가 미끄럼틀 태워 줄게.”

혜니는 나래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다가, 인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한인우, 네 살짜리 애까지 괴롭혀? 진짜 대단하다.”

혜니는 일부러 나래의 출생일을 실제보다 반년 앞당겨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려 두었다.

나중에 인우가 제대로 캐 보더라도 시기가 맞지 않을 테고, 나래가 인우의 딸이라는 사실까지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혜니는 그렇게 말한 뒤, 나래를 달래며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인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서리가 내려앉을 듯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혜니와 사소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인우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면 됐다.

차 문을 닫은 뒤에도 혜니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혜니는 깊게 숨을 두 번 들이마신 뒤, 경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인간, 역시 나래 머리카락 뽑아 갔어.”

‘다행이네. 경서가 똑똑하게도 미리 손을 써 둔 덕분에...’

...

저녁 7시, 만찬 자리는 팰리스호텔의 VVIP 프라이빗 룸에 마련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혜니는 안쪽에 앉아 있는 세 남자를 보았다.

한인우, 심윤모, 고이헌.

윤모는 인우의 오랜 친구이자 N시 재계 서열 2위 가문의 후계자였다.

소문난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고이헌은 고씨 가문의 차남이었다.

겉으로는 젠틀하고 품격 있어 보였지만, 심각한 여성 기피증이 있었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발작하듯 예민해졌다.

그 때문에 이헌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치료하겠다며 병원 두 곳을 통째로 인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인우가 자리를 가리키자, 혜니는 조용히 그곳에 앉았다.

그러자 이헌이 먼저 잔을 들었다.

“윤 비서님, 젊고 유능하신 데다 한 대표의 오른팔 같은 분이시잖습니까. 이 잔은 제가 꼭 드려야겠습니다.”

혜니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예의 바르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잘 못해서요. 차로 대신 하겠습니다.”

옆에서 구경하던 윤모가 재미있다는 듯 술잔을 흔들며 끼어들었다.

“윤 비서님, 이러면 재미없죠. 사업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술 한 잔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번 남성도 개발 프로젝트 주도권은 RW그룹에 있는데, 오늘 윤 비서가 한 잔 마시면 5%, 두 잔 마시면 10% 양보하죠.”

혜니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인우에게 향했다.

인우는 상석에 앉아 느긋하게 술잔을 굴리고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시선이 혜니에게 닿아 있었지만, 나서서 도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인우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결국 혜니는 이를 악물고 술잔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헌과 윤모는 번갈아 가며 혜니에게 술을 권했다.

음식은 몇 젓가락 먹지도 못했는데, 술은 한 잔, 또 한 잔 이어졌다.

태유그룹의 투자 의향서에는 30%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혜니는 끝내 여섯 번째 잔까지 비웠다.

뜨거운 술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속은 불이 붙은 것처럼 쓰리고 뜨거웠다.

혜니의 흰 뺨에는 이미 붉은 기운이 올라와 있었다.

그 모습이 유난히 화사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혜니는 공용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토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복도 모퉁이에 선 혜니는 겨우 경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서야... 나 좀 데리러 와...”

전화를 끊고 나자, 혜니는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차가운 벽을 짚고 선 혜니의 눈은 흐릿하게 풀려 있었고, 몸에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인간... 결국 하나도 안 도와줬어.’

예전의 인우라면 절대 혜니에게 술을 마시게 두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결혼하던 날, 혜니가 술에 취해 첫날밤에 완전히 난리가 난 뒤로, 인우는 혜니가 술잔에 손대는 것조차 꺼렸다.

사람은 정말 변하는 모양이었다.

인우는 이제 예전의 인우가 아니었다.

혜니만 바보처럼 기다린 셈이었다.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동안 눌러 두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때 힘 있는 손이 뒤에서 뻗어 와 혜니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혜니의 몸이 그대로 단단하고 뜨거운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익숙하고도 위험한 시더우드 향기가 혜니를 감쌌다.

“집에 데려다줄까?”

인우의 낮은 목소리가 혜니의 귓가에 닿았다.

혜니는 힘껏 인우를 밀어냈다.

하지만 술기운에 풀린 손에는 별다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표님 번거롭게 할 생각 없습니다.”

혜니는 힘겹게 말을 뱉었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인우는 혜니가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곧이어 팔에 힘을 주더니, 혜니를 그대로 번쩍 안아 올렸다.

품 안의 혜니는 너무 가벼웠다.

몸은 힘없이 풀려 있었다.

인우는 고개를 숙여 혜니를 내려다보았다.

술도 여전히 이렇게 못 마시면서, 대체 비서 일은 어떻게 버텨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곁에 없던 동안에도 이 여자... 이렇게 취한 적이 있었을까?’

정체 모를 분노가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품 안에 가둬 놓고, 다시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흐트러뜨리지 못하게 벌주고 싶었다.

혜니는 인우의 품 안에서 불안한 듯 몸을 조금 비볐다.

따뜻한 곳을 찾는 작은 고양이 같았다.

혜니는 흐릿하게 풀린 눈으로 인우의 선명한 턱선을 올려다보며, 취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인우... 나... 널... 용서 안 해...”

인우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혜니를 안은 걸음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안정적이었다.

“나도 널 용서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벌받을 건 받아야지.”

그때 윤모와 이헌이 룸에서 나왔다.

윤모는 혜니의 가방을 인우에게 건네며 목소리를 낮췄다.

“정한 거야? 저 여자가 다시 너한테 매달릴까 봐 겁 안 나?”

인우는 긴 다리로 걸음을 옮기며 앞만 보았다.

“그럴 배짱 없어.”

이헌이 무표정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보기엔 이제 너한테 감정이 남은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놔줘.”

“네 눈이 삔 거지.”

인우는 이헌을 싸늘하게 흘겨본 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호텔 정문을 나서자마자, 귀를 찢는 듯한 엔진음이 멀리서부터 가까워졌다.

강렬한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화려하게 드리프트 하듯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정확히 롤스로이스 앞을 가로막았다.

차 문이 열리고, 경서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기세 좋게 걸어왔다.

“한 대표, 우리 혜니 내려놓으시죠.”

인우의 표정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취했어요. 제가 집에 데려다줄 거예요.”

경서는 차갑게 웃었다.

팔짱을 낀 채 인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혼한 싱글 여성이 술까지 취했는데, 그걸 뻔뻔한 전남편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요? 그거 완전 호랑이 굴에 밀어 넣는 꼴 아닌가요? 혜니 이리 달라고요.”

인우는 혜니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넘겨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경서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한 대표, 제가 경찰 부르는 꼴 보고 싶으세요? N시 신문 가십면 톱으로 올라가고 싶으신가 봐요?”

인우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내 여잡니다.”

경서가 웃었다.

그 웃음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이미 오래전에 아니게 됐죠. 우리 혜니가 깨어난 뒤 평생 당신을 미워해도 상관없으면, 데려가 보세요.”

그 말은 정확히 인우의 약점을 찔렀다.

결국 인우는 굳은 얼굴로 품에 안고 있던 혜니를... 조심스럽게 빨간 스포츠카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인우는 몸을 숙여 혜니의 안전벨트까지 꼼꼼히 채워 주었다.

알고 있었다.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것을.

빨간 스포츠카의 배기통이 굉음을 남기며 밤거리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윤모는 옆에 서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희뿌연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 잡은 고기 놓쳤네.”

인우는 담배를 받지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스포츠카가 사라진 방향만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여자를 네 여자로 만들어.”

“하경서. 하동테크 외동딸이야. 그쪽 집안이랑 너희 RW그룹도 거래가 꽤 있잖아. 힘으로 누르는 건 어렵지 않을 거고.”

윤모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저런 성깔 있는 여자는 트럭으로 갖다줘도 사양이야. 얼굴이야 괜찮다 쳐도, 잘못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리겠더라.”

인우가 고개를 돌렸다.

눈빛에는 뜻밖에도 제법 진지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손에 넣고 나면, 그때 똑같이 물어뜯어.”

“프로젝트 투자금 6천억 원 더 얹어 줄게. 딱 3개월 준다. 그 안에 하경서 잡아.”

윤모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3개월? 날 너무 우습게 보네.”

그가 느긋하게 웃었다.

“한 달이면 충분해. 한 달 안에 저 여자, 나한테 먼저 매달리게 만들어 주지.”

윤모에게 3개월 안에 여자 하나를 사로잡으라는 건 거의 모욕에 가까웠다.

윤모의 얼굴과 집안, 가진 배경이라면 침대까지 따라오고 싶어 하는 여자가 N시 남쪽부터 북쪽까지 줄을 설 터였다.

하동테크 정도 되는 집안의 딸 하나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윤모는 오랜만에 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미가 동했다.

“돈이나 잘 준비해 둬. 내가 저 여자 질려서 버리는 날, 제대로 축하 파티 열 거니까.”

인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볼 안쪽을 혀끝으로 한 번 밀어 올린 뒤, 몸을 돌려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때 이헌이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다 몸 어디 한 부분 잃어도 후회하지 마.”

윤모는 피식 웃었다.

“그보다 굶어 죽는 게 더 무섭거든.”

그때의 윤모는 알지 못했다.

그 선택의 결말이 얼마나 처참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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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30화

    “강제후 본부장, 본인이 직접 정예 인력으로 팀원 다섯 명 더 뽑으면 돼.”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은 진지했다.“네, 대표님.”인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새연에게 향했다.“소 비서는 프로젝트팀 지원을 맡아. 모든 진행 상황은 대표실로 직접 보고하고.”“네, 대표님.”새연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확 번졌다.회의실 안은 조용했다.남성도 프로젝트는 투자 규모만 수천억 원대에 달하는 사업이었다. 인우가 태유그룹을 맡은 뒤 처음으로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였으니, 중요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혜니는 인우가 제후를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중책을 맡길 줄은 몰랐다.마지막으로 인우가 발표했다.“이달 말, 프로젝트팀 전원은 남성도로 현장 답사를 간다.”회의가 끝나자 혜니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래도 회사 일에 사감은 안 섞었네. 그 정도 그릇은 되나 보지.’...비서실로 돌아오자 새연은 행복한 새처럼 거의 뛰어오를 기세였다.“너무 좋아! 앞으로 강제후 본부장이랑 마주칠 일이 많아지겠네!”새연은 들뜬 얼굴로 혜니의 팔을 붙잡았다.“혜니야, 화 안 나지?”새연은 옆에 있던 미나도 바라보았다.“미나야, 너도 화 안 나지?”새연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무실에 제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혜니는 웃었다.“화 안 나. 프로젝트 잘 따라가.”미나는 아쉬운 얼굴로 턱을 괴었다.“대표님... 완전 사랑의 큐피드 아니야? 사람들 인연 이어주려고 내려오신 줄 알았네. 내 인연은 언제쯤 이어주시려나?”혜니의 가슴이 세게 움츠러들었다.‘아, 속셈이 여기 있었구나.’인우는 새연과 제후를 엮어 주려는 것이었다.‘쯧쯧, 그 미친놈...’미나가 다시 물었다.“혜니야, 내일 네 생일이잖아. 어떻게 보낼 거야?”“다 같이 회전식 레스토랑 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살게.”혜니가 웃으며 말했다.“진짜?”새연이 맨 먼저 벌떡 일어났다. 손발 다 들어 찬성하는 표정이었다.그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혜니는 전화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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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니의 머리가 3초쯤 정지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망했어! 사람을 잘못 봤어!”‘왜 하필 제후 씨였어?’혜니는 제후의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물방울이 매끄러운 턱선을 따라 굴러내리더니, 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셔츠 깃 안으로 스며들었다.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그 존재감은 화면을 뚫고 나올 만큼 강했다.경서는 옆에서 거의 넋을 놓고 있었다.혜니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뜨거운 기운이 목덜미에서 귓가까지 번졌다.“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혜니는 겨우 목소리를 되찾고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저는 다른 사람인 줄 알고...”제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물을 한 번 닦아 냈다. 검은 눈동자는 조용히 혜니를 바라보고 있었다.눈빛은 깊었다. 감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혜니는 제후가 분명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누가 갑자기 물벼락을 맞고 기분이 좋겠는가?“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혜니는 그 말만 남기고 곧장 침실로 뛰어갔고, 장롱을 뒤져 새 목욕타월을 꺼냈다. 이어 다시 바람처럼 돌아와 제후의 품에 밀어 넣었다.“빨리 닦으세요! 감기 걸리면 어떡해요!”수건은 크고 부드러웠다. 막 빨아 햇볕에 말린 듯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제후는 수건을 받아 들었다.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을 닦는 동작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했다.제후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공기 중으로 번졌다.아카시아꽃 향기였다.맑고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기였다.“괜찮습니다. 오히려 시원하네요. 오늘 밤이 조금 후텁지근했거든요.”제후의 첫마디는 혜니의 죄책감을 절반 이상 씻어 냈다.물기에 젖은 제후의 목소리에는 살짝 낮은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깊고 듣기 좋았다.제후는 머리를 반쯤 말린 뒤, 수건을 팔 위에 걸쳤다. 시선은 혜니에게 닿아 있었다.“혜니 씨가 답장이 없어서 걱정됐어요. 무슨 일 생긴 건 아닌가 해서 올라와 봤고요. 다음부터는 꼭 도어락 화면 확인하고 문 여세요.”“네...”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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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7화

    “네가 시범 보여 달라며? 행동이 말보다 설득력 있잖아.”인우는 원하는 대로 됐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혜니는 말문이 막혔다.“한 대표님, 안녕하십니까.”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 뒤에서 들려왔다.인우와 혜니가 함께 고개를 돌렸다. 혜니는 깜짝 놀랐다.‘제후 씨가 왜 여기 있어?’‘혹시 방금 봤나?’제후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 곁에 서 있었다. 여자는 정교한 메이크업에 우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천 대표, 안녕하십니까.”인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한 대표, 보내 주신 투자 계획안은 잘 검토했습니다.”천리야는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인우는 천리야의 말을 성의 있게 들었다. 이어 몇 가지 전문적인 용어로 답했다.혜니는 몹시 민망했다. 지금 이 와중에도 혜니는 여전히 인우의 품 안에 붙잡혀 있었다.마지막에 인우가 제후를 향해 말했다.“천 대표님께 잘 응대해 주세요. 태유그룹의 진심과 성의를 충분히 느끼실 수 있도록.”“네, 대표님.”제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눈동자 깊은 곳에는 억눌린 감정이 스쳤지만, 제후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인우는 혜니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혜니는 뒤돌아볼 용기조차 나지 않고, 뒤통수가 화끈거렸다.인우는 혜니를 테라스로 데려갔다. 이어 난간과 두 팔 사이에 혜니를 가둔 채 내려다보았다.“한인우, 일부러 그런 거지?”“뭘 일부러 해?”인우는 모르는 척 물었다. 인우의 얼굴이 혜니 가까이 다가왔다. 또 기습이라도 할 것 같은 거리였다.혜니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지. 이 사람... 제후 씨가 나한테 고백한 걸 어떻게 알아?’사실 인우는 혜니가 밤에 국수 한 그릇을 끓였고, 그 위에 청경채가 몇 줄 올라갔는지까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진정이 사진까지 찍어 보냈기 때문이었다.‘감히 다른 남자한테 국수를 끓여 줘?’하나하나 다 기억해 둘 작정이었다.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벌을 줄 생각이었다.“놔.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6화

    옆에 있던 남자 하나가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한 대표님 품에 들어온 분답네요.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십니다.”혜니는 담담하게 한마디했다.“저는 그냥 한 대표님 비서입니다.”혜니는 곧바로 인우와 선을 그었다.인우가 혜니의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더했다.“잠시 실례하겠습니다.”인우는 혜니를 데리고 사람이 적은 구석으로 향했다.혜니는 바로 자신의 허리에 두른 인우의 큰 손을 떼어 냈다.“이렇게 붙잡지 마. 불편해.”인우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누가 너한테 이렇게 입으래?”혜니는 어이가 없었다.‘무슨 뜻이야?’“이거 네가 진 비서님 시켜서 보낸 드레스 아니야? 난 또 나가서 접대라도 하라는 줄 알았지.”인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인우는 그저 진정에게 가장 최신 디자인의 드레스 한 벌을 골라 혜니에게 보내라고 했을 뿐이었다.그런데 빌어먹을 진정이 이렇게 몸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옷을 골랐을 줄은 몰랐다.그 시각, 침대 옆에 앉아 나래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정은 갑자기 몸을 떨었다.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인우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계집애, 좀 더 성숙해졌네. 나무토막 같던 애가 제법 여자가 됐어.’인우는 외투를 벗었다. 체온과 은은한 시더우드 향기가 배어 있는 재킷이 그대로 혜니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자신감은 어디서 나와? 네가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누가 널 쳐다본다고.”혜니는 말문이 막혔다.“한 대표는 시력이 꽤 안 좋나 봐. 나한테 한 번에 100억 원을 부르다니.”혜니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윤혜니, 나 지금 네 상사야.”인우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흥.’‘말로 안 되니까 이제 직급으로 누르겠다 이거지.’‘진짜 엿 같네.’“대표님께서 이렇게 급하게 부르신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혜니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꼭 혜니여야 한다던 그 급한 일이 대체 뭔지 들어나 보자는 뜻이었다.인우는 느릿하게 소매 끝을 정리했다.“난 다른 여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5화

    혜니는 나래의 머리를 말려 주고 옷까지 입혔다. 그런 뒤 따뜻한 우유를 한 병 데워 나래가 침대에 누워 혼자 안고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그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야 혜니는 체념한 사람처럼 방으로 향했다.10분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낸 혜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급스러운 금빛 슬립 드레스는 혜니의 가늘고도 균형 잡힌 몸매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는 느슨하게 틀어 올려져, 곧고 예쁜 어깨와 목선이 드러났다.혜니는 8센티미터 굽의 하이힐을 신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칼끝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혜니는 진정에게 주의할 점을 몇 가지 꼼꼼히 일러 준 뒤에 문을 열고 나갔다.집 아래에는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혜니가 차 문을 열자 김 기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제발 오늘 밤에는 문 세게 닫지 말아 주십시오, 윤 비서님.’‘또 그러시면 제가 수리비 청구서를 받아야 합니다.’‘그때는 정말 보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혜니는 핸드폰을 꺼내 경서에게 카톡을 보냈다.[나 한인우한테 잡혀서 강제로 끌려가는 중이야. 조금 있다가 집으로 와서 나래 좀 봐 줘.]경서는 곧바로 책상을 뒤엎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미친! 그 쓰레기... 사람 맞아? 너 오늘 교통사고 났다며?]혜니는 입꼬리를 희미하게 당긴 뒤 답장을 썼다.[본인이 그러더라. 나 아니면 안 된대.][우웩! 완전 가스라이팅이잖아! 내가 사람 데리고 구하러 갈게!]경서의 답은 바로 도착했다.혜니는 화면을 바라보며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오지 마.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나래나 좀 봐 줘.][알았어.]...차는 결국 한적하고 은밀한 프라이빗 멤버십 클럽 앞에 멈췄다.입구에는 낮고 묵직한 블랙 골드 톤의 대문이 있었다. 간판 하나 없었고, 유니폼을 입은 도어맨들만 양쪽에 공손히 서 있었다.혜니는 도어맨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카펫을 밟고, 구불구불 이어진 복도를 지나갔다.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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