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남편은 ‘나’바라기: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공주님, 얼른 신발 신자. 늦겠다!” 바쁜 아침, 시간에 쫓기는 윤혜니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싫어! 오늘 어린이집 안 갈래!” 나래는 미꾸라지처럼 몸을 비틀며 말랑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아이고, 우리 착한 아가. 오후에 엄마가 딸기 생크림 케이크 사 줄게. 딸기 맛이야.” 혜니는 온갖 방법을 다 써 목소리를 한껏 부드럽게 낮췄다.달콤한 회유가 통하자 나래는 마지못해 조그만 발을 내밀었다.혜니는 잽싸게 신발을 신기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핸드폰을 꺼내 소새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새연아, 살려줘! 나 늦을 것 같아. 잠깐만 내 자리 좀 봐 줘. 금방 갈게!”[알았어.]겨우 어린이집 앞에 도착한 혜니는 나래를 차에서 내려 주다가 책가방 지퍼가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손을 뻗어 잠그려는데 안쪽에서 딱딱한 사진 한 귀퉁이가 삐져나와 있었다.혜니가 꺼내자 사진 속에는 한인우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혜니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숨까지 멎은 듯했다.‘이 사진이 왜 여기 있어?’“이 사진 어디서 찾았어?” 혜니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떨렸다.나래가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저씨 엄청 잘생겼잖아! 엄마, 우리 반 친구들은 다 아빠가 있어. 나도 이 아저씨가 내 아빠였으면 좋겠어!”혜니의 가슴이 꽉 막혔다. 두 사람은 이혼한 지 4년이었다. 한인우는 이미 자기 가정을 꾸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로 행복하게 살지도 몰랐다.혜니는 사진을 책가방에 다시 넣고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삼켰다. 아이를 어린이집 안으로 들여보낸 뒤 차에 오르자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자 새연이 외쳤다. [어디야? 늦으면 큰일 나. 오늘 회사에 대형 사건이 터졌어.]“무슨 일인데?”[회사 인수됐어. 왕 대표가 지분 정리하고 세계여행 간대. 새 대표님이 곧 오시고.]혜니는 3초 동안 멍해졌다. “바로 갈게.”...오전 9시, 태유그룹 본사 앞. 대표이사 비서실 비서들과 각 부서 임원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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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혜니는 이를 악물고 보고서를 다시 확인했다.한 번으로는 부족해 두 번이나 더 들여다보았다.그렇게 시계가 밤 9시 반을 가리킬 때가 되어서야, 겨우 보고서 검토를 끝낼 수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결과는 같았다.오류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혜니는 보고서를 챙겨 다시 대표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보고서를 정중히 올려놓았다.“검토 끝났습니다.”인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보고서를 한 번 훑더니, 태연하게 말했다.“미안해. 윤 비서. 내가 잘못 본 것 같다.”혜니는 할 말을 잃었다.‘잘못 봤다고?’‘그 한마디 하려고 나를 이 시간까지 붙잡아 둔 거야?’속에서는 열불이 치밀었지만, 혜니는 가까스로 표정을 눌러 참았다.그때 인우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늦었네. 내가 데려다주지.”“괜찮습니다. 저 차 있습니다.”혜니는 곧바로 대답했다.“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말을 마친 혜니는 인우가 더 붙잡기라도 할까 봐, 거의 도망치듯 대표실을 빠져나갔다....밤 10시 정각.혜니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강변에 자리한 고급 레스토랑 바 안으로 들어섰다.은은한 조명이 실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용하고 차분했다.창가 쪽 자리에는 오늘 혜니의 맞선 상대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였다.금테 안경을 쓴 얼굴에는 단정한 분위기가 어려 있었고, 전체적인 인상도 무척 온화하고 점잖아 보였다.“정우진 씨 맞으시죠?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었어요.”혜니는 정우진을 향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윤혜니 씨, 앉으세요.”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사적으로 의자를 살짝 빼 주었다.“늦은 시간이라 배고프실 것 같아서, 버섯 수프와 빵을 먼저 주문해 뒀습니다.”말이 끝나기 전에 직원이 따뜻한 수프와 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우진은 곧 메뉴판을 혜니에게 건넸다.“더 보시고, 드시고 싶은 것 편하게 주문하세요.”혜니는 메뉴판을 받아 들고, 평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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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혜니는 기분이 확 상해 곧바로 말했다.“대표님, 비서가 세 명이나 있잖아요. 박 비서에게 동행하라고 하셔도...”‘아무리 그래도 나만 붙잡고 끝까지 갈아 넣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인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한마디를 던졌다.“윤 비서가 대표야, 내가 대표야?”“그야 당연히 대표님이십니다.”혜니는 이를 악물고 두 글자를 짜냈다.‘악덕 자본가.’“47분 남았어.”인우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덧붙였다.혜니는 토끼보다 빠르게 뛰쳐나갔다.‘젠장...’집까지 가는 데 30분.화장하고 옷 갈아입는 데 17분.목을 매달라고 재촉하는 것보다 더 빡빡한 일정이었다.혜니는 뛰어가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엄마, 오늘 저녁에 나래 좀 데리러 가 줘. 나 대표님이랑 접대 자리에 가야 해.”[그래.]...혜니가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눈에 확 띄는 롤스로이스가 이미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때, 뒷좌석 문이 열렸다.혜니가 차에 오르자, 인우가 고개를 돌려 혜니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다.감출 생각도 없이 혜니의 얼굴에서 쇄골로... 다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혜니는 오늘 푸른색 튜브톱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새하얀 어깨는 가녀린 뼈대가 살짝 드러나 더 아슬아슬해 보였고, 가슴 앞 라인은 과하지 않게 아름답게 잡혀 있었다.허리선은 완벽하게 들어가 있어, 혜니의 몸 선을 고스란히 살려주었다.정성껏 손본 얼굴까지 더해지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사람을 끌어당기는 모습이었다.“그렇게 부하 직원을 빤히 보는 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혜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무 집요한 인우의 눈빛에, 혜니는 괜히 겁이 날 정도였다.인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윤 비서, 그동안 남자친구 없었나?”“그건 또 어디서 보신 건데요?”혜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하게 쏘아보았다.“완전 말라비틀어진 막대기가 됐잖아. 예전엔 손에 잡히는 맛이 꽤 있었는데.”인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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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내가 취한 건가?’샴페인 한 잔 마셨다고 이럴 리가 없었다.혜니는 접시를 내려놓고 서둘러 인우를 찾았다.인우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하지만 또다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그때 키 큰 남자 하나가 갑자기 혜니의 앞을 가로막았다.“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저랑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죄송합니다.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혜니는 남자를 피해 지나가려 했다.그러나 남자는 웃으며, 휘청이는 혜니의 몸을 덥석 붙잡았다.“좀 취하신 것 같은데요. 제가 정원에 모시고 나가서 바람 좀 쐬게 해 드릴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혜니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혜니를 억지로 후문 쪽으로 끌고 갔다.후문 밖은 정원과 귀빈 휴게실로 이어져 있었다.혜니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제대로 버틸 힘조차 나지 않았다.“놔요!”혜니는 힘껏 남자를 밀어냈지만,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아무리 밀어도 소용없었다.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남자의 다른 손이 혜니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읍... 읍읍...!”혜니는 공포에 질려 버둥거렸다.하지만 남자는 혜니를 그대로 끌고 밖으로 나갔다.마침 정원 쪽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심윤모가 그 장면을 스치듯 보았다.윤모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그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네 여자, 누가 물고 갔다.”통화가 끝난 지10초도 지나지 않아, 인우가 서늘한 기운을 몰고 뛰쳐나왔다.“어디야?”윤모가 한쪽을 가리켰다.“저 휴게실로 들어갔어.”윤모는 곧장 달려가려는 인우의 팔을 붙잡았다.“설마 이렇게 빨리 그 여자한테 넘어갈 생각은 아니지? 예전에 네가 그 여자 아버지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거, 잊었어?”“그런데 그 여자는 너한테 이혼하자고 난리 치고, 가난하다고 버렸잖아.”인우는 윤모의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쉽게 나를 갖게 해 줄 생각 없어.”인우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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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인우의 주변 공기가 한껏 낮게 가라앉았다.그는 나래의 앳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까만 포도알 같은 큰 눈, 눈처럼 흰 피부, 인형처럼 예쁜 얼굴.이런 유전자가 자기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 것이란 말인가?“하. 대표님, 상상도 참 마음대로 하시네요.”혜니의 한마디가 인우를 단번에 현실로 끌어내렸다.혜니는 속으로 치미는 당황을 가까스로 누른 뒤, 품에 안긴 어린아이에게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말해 봐. 왜 이분한테 아빠라고 했어?”나래는 또박또박 대답했다.“할머니가 그랬어. 엄청 잘생겼으면 아빠라고 하고, 그냥 잘생긴 사람은 삼촌이라고 하고, 안 잘생겼으면 오빠라고 하랬어.”이 꼬맹이는 이미 혜니의 어머니 손에서 야무지게 길러졌다.“그럼 이렇게 힘들게 너를 데리러 온 나한테는 왜 안 불러 줘?”“언니, 오늘 언니한테 좋은 냄새 나.”입이 단 나래는 혜니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혜니는 그제야 인우를 돌아보며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대표님, 나래는 저희 엄마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예요. 가족관계도 엄마 쪽으로 정리돼 있고요. 그래서 저한테 언니라고 부릅니다.”이어 혜니는 담담하게 덧붙였다.“아이가 좋으시면, 다른 분과 낳으시면 됩니다.”인우는 혜니가 자신 몰래 아이를 낳은 줄 알았다.그런데 한순간 말문이 막혀, 비꼬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저는 먼저 나래를 집에 데려다주겠습니다. 대표님은 편하신 대로 하세요.”혜니는 두 걸음쯤 가다가 다시 돌아보며 한마디를 던졌다.“참고로, 미행은 매우 교양 없는 행동입니다.”혜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좌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운 뒤, 차를 몰고 그대로 떠났다.인우의 잘생긴 얼굴은 금방이라도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번호 하나를 눌렀다.“윤혜니의 지난 4년간 연애 이력 전부 조사해. 출산으로 병원에 입원한 기록이 있는지도 확인하고.”혜니는 룸미러로 멀어지는 인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 엄마가 앞을 내다본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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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혜니는 인우를 힘껏 밀쳐 내며 소리쳤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인우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등, 완벽한 역삼각형 몸매로 갑판 위에 서 있었다.마치 예리하게 깎아 세운 차가운 조각상 같았다.물빛에 비친 날카로운 윤곽은 더 선명하고 차갑게 보였다.“후회돼?”인우가 입을 열었다.말투에는 묘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후회?’혜니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인우는 다시 덧붙였다.“나랑 이혼한 거, 후회 안 하냐고.”“네가 조금만 더 버텼다면, 이 모든 게 네 것이 됐을 텐데.”“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고, 누구 앞에서도 고개 숙일 일 없이 살았겠지.”인우의 눈빛에는 의기양양한 조롱이 어려 있었다.하지만 혜니는 알아차렸다.인우는 지금 자신이 이룬 것을 자랑하는 동시에, 혜니를 모욕하고 있었다.“후회해.”혜니가 차분하게 세 글자를 뱉었다.“그래?”인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 대답이 꽤 마음에 든 듯했다.혜니는 인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너랑 혼인신고 한 거. 너랑 결혼한 거. 그 소중한 결혼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후회해.”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이 실려 있었다.혜니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가 어려 있었다.혜니는 인우를 너무 믿었다.그래서 완전히 패배했다.인우가 차갑게 웃었다.“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당당했으면 좋겠어.”혜니는 언제나 인우를 화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그렇다면 인우도 더는 혜니를 봐줄 필요가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둘이 아름다운 여성 파트너들을 데리고 요트에 올랐다.“한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왕 대표님, 이 대표님. 안으로 드시죠.”요트 내부의 호화로운 공간에는 이미 카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남자들은 카드 게임을 하며 수백억 원대 투자 건을 가볍게 주고받았다.인우는 다리를 꼰 채 혜니를 가리켰다.“차 따라.”혜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그러고는 찻주전자를 들어 몇몇 대표들 앞에 차례로 차를 따랐다.술을 채우고, 수건을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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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혜니는 인우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혜니는 씩씩거리며 나래를 인우의 품에 안겨 버렸다.“아예 가져가세요. 드릴게요. 하루에 우유 네 번 마시고, 당근은 안 먹고, 해산물 알레르기 있어요.”인우는 말랑말랑하고 포근한, 옅은 우유 냄새가 나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잠시 어쩔 줄 몰랐다.“이름이 뭐야?”인우가 물었다.“저는 윤나래예요. 다들 나래라고 불러요. 엄마랑 언니는 ‘우리 콩알이’라고도 불러요.”나래는 까만 포도알 같은 큰 눈을 반짝이며 또박또박 자신을 소개했다.인우가 혜니를 가리켰다.“저 사람은 누구야?”“언니요, 잘생긴 아빠.”나래가 또 한 번 그렇게 부르며 작은 두 팔로 인우의 목을 감쌌다.인우는 어쩐지 딸이 둘이나 생긴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아,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아빠라고 부르지 마.”와앙!그 말에 놀란 나래가 울음을 터뜨렸다.인우는 순간 당황했다.지금껏 한 번도 아이를 달래 본 적이 없었다.인우는 급히 손을 뻗어 나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한 올을 살짝 뽑은 뒤, 아이를 다시 혜니의 품에 안겼다.“우리 콩알이, 울지 마. 언니가 미끄럼틀 태워 줄게.”혜니는 나래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다가, 인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한인우, 네 살짜리 애까지 괴롭혀? 진짜 대단하다.”혜니는 일부러 나래의 출생일을 실제보다 반년 앞당겨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려 두었다.나중에 인우가 제대로 캐 보더라도 시기가 맞지 않을 테고, 나래가 인우의 딸이라는 사실까지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혜니는 그렇게 말한 뒤, 나래를 달래며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인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서리가 내려앉을 듯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혜니와 사소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인우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면 됐다.차 문을 닫은 뒤에도 혜니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혜니는 깊게 숨을 두 번 들이마신 뒤, 경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인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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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스카이 주택단지.경서의 차가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경서는 곧바로 여성 가사도우미를 불렀고, 두 사람은 진땀을 뺀 끝에야 만취한 혜니를 겨우 집 안으로 옮길 수 있었다.혜니를 손님방 침대에 눕히자, 경서는 비로소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혜니가 갑자기 몸을 뒤척이더니, 낮게 욕을 뱉었다.“한인우... 이 나쁜 자식아.”“나... 우리 콩알이... 너한테 안 줘.”“너는... 왜... 나를 배신했어?”경서는 한숨을 삼켰다.역시 술에 취한 혜니는 ‘비밀 스피커’나 다름없었다.인우에게 혜니를 넘기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경서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 꿀물을 타 왔다.그런데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침대 위에는 혜니가 없었다.혜니는 인형 하나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드레스룸 구석에 웅크려 앉아 울고 있었다.“인우야... 너무 보고 싶어. 언제 돌아올 거야... 흐으...”혜니는 날개가 꺾인 작은 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낮 동안 칼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둘렀던 가면이, 술기운 앞에서 벗겨지고 있었다.지난 몇 년 동안 혜니가 어떤 고통을 견뎠는지는 혜니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았다.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다시 N시로 돌아왔다.다른 이유는 없었다.오직 인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혜니는 인우가 왜 두 사람의 결혼을 배신했는지, 그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인우는 아름다운 독 같았다.향기에 취해 다가가면, 결국 속까지 망가뜨리는 지독한 독.“나... B시로 갈래...”“B시... 가야 해...”“그래, 그래. B시로 가자. 우리 지금 일어나서 비행기 타러 가자.”경서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경서는 혜니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일으킨 뒤, 달래고 속이다시피 해서 다시 침대에 눕혔다.경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2년 동안, 혜니는 B시에 스무 번도 넘게 다녀왔다.힘들게 모은 월급의 절반은 항공권 구입 비용으로 사라졌다.대체 어느 못된 동창이 B시에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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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혜니에게 이 버릇은 정말 치명적이었다.술만 마시면 ‘비밀 스피커’가 되어, 숨겨야 할 일까지 줄줄 새어 나왔다.신혼 첫날밤에도 그랬다.혜니는 술에 취한 채 인우의 목을 끌어안고,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어릴 때 옆집 오빠가 자신에게 정말 잘해 줬다고.크면 혜니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게다가 혜니는 한술 더 떠서, 어릴 땐 그 오빠를 꽤 좋아했으며, 그 오빠가 유학만 가지 않았어도 한인우가 자신과 결혼할 차례는 오지 않았을 거라고까지 말했다.그 뒤의 일은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인우는 그 자리에서 제대로 화가 났고,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밤새 전쟁이라도 치른 사람들처럼 난리가 났다....경서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혜니를 보더니,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내가 보기엔 그 인간, 일부러 너 취하게 만든 거야. 네 입에서 뭐라도 캐내려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 술은 입에 대지도 마. 그러다 나래까지 들키면 진짜 끝이야!”혜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고개를 저었다.“안 마셔. 죽어도 안 마셔!”점심 무렵, 혜니와 경서는 마트에 들렀다.선물 몇 가지와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거리를 잔뜩 산 뒤, 함께 혜니의 어머니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진춘심은 아직 감기가 다 낫지 않아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하지만 혜니와 경서가 함께 찾아오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경서는 부엌에 서서 진춘심을 도와 함께 음식을 만들었다.“어머니, 이건 제가 할게요.”“어머니, 이거 간 좀 봐 주세요.”“...”경서는 말끝마다 ‘어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었고, 진춘심의 입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진춘심의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역시 경서가 딸보다 더 살가웠다.정작 친딸인 혜니는 매일 바빠서 얼굴 보기조차 힘든데 말이다.식탁에 앉자, 진춘심은 쉬지 않고 두 사람의 그릇에 반찬을 올려 주었다.“혜니야.”진춘심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목을 가다듬었다.“옆집 강린 이모 기억하지? 그분한테 젊은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대학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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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나가. 여긴 널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어.”인우는 혜니의 예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하지만 혜니는 곧바로 그의 손을 탁 쳐 냈다.“이 독한 여자. 오늘은 무조건 해장국 끓여 줘야 해.”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태연하게 소파에 앉았다.날카로운 눈매가 집 안을 한 바퀴 훑더니, 곧 어린 나래에게 멈췄다.“안 그러면 네 동생 잡아먹는다. 청양고추 송송 썰고, 대파 올려서 푹 쪄 먹을 거야.”혜니는 눈을 흘겼다.‘진짜 취했네, 이 인간.’“기다려.”혜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생강과 구기자, 꿀을 넣고 한참 끓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해장차를 들고나왔다.그런데 어느새 나래가 인우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인우는 긴 팔로 나래를 감싸안은 채, 그림책 속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주고 있었다.그 눈빛은 믿기 어려울 만큼 다정했다.나래는 그림책을 넘기며 눈웃음을 지었다.작은 눈썹까지 초승달처럼 휘어 있었다.그 광경이 혜니의 마음을 세게 흔들었다.혜니는 이런 장면을 여러 번 꿈꾼 적이 있었다.인우가 배신만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좋은 아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해장차 여기 있어. 이거 마시고 바로 가.”혜니는 차갑게 말하며 찻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그리고 곧장 다가가 나래를 품에 안아 들었다.그대로 아이를 아기방에 데려다 놓고 문을 닫았다.오늘 나래는 경서가 준비해 준 작은 가발을 쓰고 있지 않았다.인우가 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가져가면 큰일이었다.띵동-초인종이 다시 울렸다.혜니가 문을 열자, 낯선 얼굴이 서 있었다.키가 크고 말끔하게 생긴 남자였다.“안녕하세요. 대표님 갈아입으실 옷입니다.”남자는 옷을 혜니의 손에 넘겨주고는 곧바로 돌아섰다.혜니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중얼거렸다.“이게 무슨 뜻이에요?”인우는 느긋하게 찻잔을 내려놓더니 한마디했다.“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목욕물 받아 놔.”‘목욕물은 무슨...’혜니의 얼굴에 거부감이 떠올랐다.“우리 집에 빈방 없어. 누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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