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은 ‘나’바라기

전남편은 ‘나’바라기

Por:  블루Actualizado ah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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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년 동안,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뜨겁게 사랑했던 두 사람. 하지만 결혼한 지 겨우 2년 만에 이혼했다. 한인우가 물었다. “내가 고작 며칠 떠나 있었다는 이유로 이혼하자는 거야? 그동안 나랑 연락이 안 됐다고?” 윤혜니는 차갑게 대답했다. “내 사랑이 식었어. 이제 너한테 질렸어. 그리고 한인우, 너 너무 가난하잖아.” 그렇게 두 사람은 정말로 끝났다. 그날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4년 뒤. 한인우는 수십조 원대 자산가가 되어 돌아왔다. 혜니가 다니는 회사를 인수한 것도 모자라, 하루아침에 혜니의 직속 상사가 되었다. 겉으로는 사적인 감정을 일로 되갚기라도 하듯 사사건건 비꼬고 몰아붙였지만, 이상하게도 인우는 혜니를 누구보다 귀한 공주처럼 꾸며 주었다. 혜니는 인우가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우는 말없이, 회사 안팎에서 혜니를 향해 날아드는 칼날을 막아 주고 있었다. 혜니는 인우가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우는 오래전 혜니가 적어 두었던 소원 목록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고 있었다. 혜니는 자기 마음이 이미 차갑게 식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인우의 거침없는 공세 앞에서 심장은 다시 제멋대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혜니가 그저 평범한 직장 동료 사이로 남자며 선을 긋자, 인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아이를 낳아 줘. 우리, 평생 함께하자.” 이 전남편, 속셈이 너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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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제1화

“공주님, 얼른 신발 신자. 늦겠다!”

바쁜 아침, 시간에 쫓기는 윤혜니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싫어! 오늘 어린이집 안 갈래!”

나래는 미꾸라지처럼 몸을 비틀며 말랑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아이고, 우리 착한 아가. 오후에 엄마가 딸기 생크림 케이크 사 줄게. 딸기 맛이야.”

혜니는 온갖 방법을 다 써 목소리를 한껏 부드럽게 낮췄다.

달콤한 회유가 통하자 나래는 마지못해 조그만 발을 내밀었다.

혜니는 잽싸게 신발을 신기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핸드폰을 꺼내 소새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연아, 살려줘! 나 늦을 것 같아. 잠깐만 내 자리 좀 봐 줘. 금방 갈게!”

[알았어.]

겨우 어린이집 앞에 도착한 혜니는 나래를 차에서 내려 주다가 책가방 지퍼가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손을 뻗어 잠그려는데 안쪽에서 딱딱한 사진 한 귀퉁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혜니가 꺼내자 사진 속에는 한인우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혜니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숨까지 멎은 듯했다.

‘이 사진이 왜 여기 있어?’

“이 사진 어디서 찾았어?”

혜니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떨렸다.

나래가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저씨 엄청 잘생겼잖아! 엄마, 우리 반 친구들은 다 아빠가 있어. 나도 이 아저씨가 내 아빠였으면 좋겠어!”

혜니의 가슴이 꽉 막혔다.

두 사람은 이혼한 지 4년이었다. 한인우는 이미 자기 가정을 꾸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로 행복하게 살지도 몰랐다.

혜니는 사진을 책가방에 다시 넣고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삼켰다.

아이를 어린이집 안으로 들여보낸 뒤 차에 오르자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새연이 외쳤다.

[어디야? 늦으면 큰일 나. 오늘 회사에 대형 사건이 터졌어.]

“무슨 일인데?”

[회사 인수됐어. 왕 대표가 지분 정리하고 세계여행 간대. 새 대표님이 곧 오시고.]

혜니는 3초 동안 멍해졌다.

“바로 갈게.”

...

오전 9시, 태유그룹 본사 앞.

대표이사 비서실 비서들과 각 부서 임원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기는 조용했지만 팽팽했다.

검은 롤스로이스 팬텀이 건물 앞에 미끄러지듯 멈췄다.

수행 비서가 문을 열자, 최고급 슬림핏 정장 바지에 감싸인 긴 다리 하나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

곧게 뻗은 바지선에는 주름 하나 잡혀 있지 않았다.

이어 큰 키의 남자가 몸을 낮춰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하이엔드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 비현실적인 신체 비율.

마치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주인공인 양 완벽한 몸이었다.

남자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타고난 귀티와 압도적인 분위기가 정면으로 밀려와, 보는 이들을 그대로 무릎 꿇게 할 것만 같았다.

남자가 긴 다리로 로비 안에 들어서자, 환한 조명이 그의 얼굴 전체를 비췄다.

주변의 공기마저 그대로 멎어 버린 듯했다.

신임 대표는 숨이 막힐 만큼 훌륭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아무도 감히 고개를 들어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부대표 엄준이 가장 먼저 웃으며 다가갔다.

“대표님, 환영합니다.”

인우는 대답하지 않고 사람들을 훑었다. 눈빛이 차갑게 멈췄다.

‘한 명이 부족하네.’

“10분 뒤 회의. 본부장급 이상 전원 참석.”

말을 남긴 인우는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임원들이 흩어져 위층으로 뛰어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때, 다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혜니는 바람처럼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조금만 더 늦었거나 몸이 아주 조금만 더 무거웠어도 문틈에 끼일 뻔했다.

“아!”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혜니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듯 인우의 품에 부딪혔다.

남자의 정장 원단 아래로 닿아 온 가슴팍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인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휘청이는 혜니의 허리를 안정적으로 붙잡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혜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동안 품에 안기는 법이라도 배웠나 보지?”

‘이 목소리...’

혜니가 고개를 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의 잘생긴 얼굴.

선명한 윤곽과 높게 뻗은 콧대.

뼛속까지 새겨져 있을 만큼 익숙한 얼굴이었다.

혜니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놀란 나머지 숨마저 멎을 것 같았다.

‘뭐야, 이게?’

‘한인우!’

‘내 전남편...’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을 건데?”

인우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끝자락에는 옅은 조롱마저 묻어 있었다.

혜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떼었다.

서둘러 몸을 바로 세운 혜니는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입고 있던 오피스룩의 재킷 자락을 괜히 한 번 잡아당겼다.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그대로 굳어 버린 듯했다.

사실 혜니는 어젯밤에도 인우의 꿈을 꾸었다.

...

은행나무 아래, 매트, 별빛, 이혼하던 날의 마지막 작별.

혜니가 울부짖었고, 인우는 뜨거운 숨을 귓가에 뿌리며 끝을 정하는 건 자신이라고 했다.

“한인우, 이제 그만해.”

혜니가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마음까지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인우는 낮게 숨을 내쉬며 혜니를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기운이 가까이 닿았지만, 인우의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소리칠 힘은 남아 있네.”

담담한 말투였다.

그 안에는 다정함도, 미련도, 위로도 없었다.

이혼을 말한 건 혜니였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붙잡을 기회를 요구한 건 인우였다.

두 사람 모두 그게 끝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둘 중 누구도 누구에게 빚진 건 없다고, 그렇게 믿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혜니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흐려졌던 정신이 단번에 맑아졌고, 혜니는 급히 인우의 어깨를 밀어냈다.

“잠깐만. 이건 아니지!”

인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둠 속에서 마주친 인우의 깊은 눈동자는 서늘했다.

그 안에는 어떤 감정도 쉽게 읽히지 않았다.

“언제 끝낼지는 내가 정해.”

혜니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물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생기면 어떡해?”

인우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위자료에서 10만 원 더 쳐줄 테니까, 그걸로 사후피임약이나 사.”

그 한마디가 더 잔인하게 들렸다.

혜니의 눈가가 붉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오른 감정이 끝내 목소리로 터져 나왔다.

“너 진짜 최악이야!”

인우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인우는 비틀린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최악을 못 알아보고 결혼했던 사람이 너야.”

듣는 순간, 혜니는 숨이 턱 막혔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아팠다.

분명 상처 주려는 말인데, 끝내 놓지 못한 집착처럼 들렸다.

그날 이후 인우는 하루 낮과 밤을 꼬박 혜니와 보내고, 혜니의 세상에서 사라졌다.

대학 시절 마음을 확인했던 은행나무는 끝내 이별의 장소가 되었다.

...

띵-

최상층에 도착했다.

소새연과 박미나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혜니의 심장이 세게 내려앉았다.

‘새 대표가 한인우라니...’

‘이혼할 때 빈손으로 나가며 모든 돈을 나에게 남기고 떠난 남자가...’

‘겨우 4년 만에 수천억 원대 태유그룹을 인수했다니...’

‘세상이 미친 걸까, 내가 미친 걸까?’

혜니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새연 곁으로 달려가 섰다.

자리를 맞추고, 허리까지 곧게 폈다.

인우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서늘한 시선이 비스듬히 비서들을 스쳐 지나갔다.

대표이사 비서실의 비서 세 명은 모두 눈에 띌 만큼 외모가 뛰어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혜니는 단연 돋보였다.

인우는 담담히 말했다.

“저는 한인우입니다. 지금부터 태유그룹 대표이사직을 맡습니다. 커피에는 설탕을 넣지 않습니다. 향수 냄새를 싫어합니다. 부하 직원의 지각도 싫어합니다. 모두 잘 기억하세요.”

“네, 대표님.”

한인우의 시선이 혜니에게 닿았다.

“윤혜니 씨?”

혜니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 이름을 모른다고? 뇌혈관이라도 막혔어?’

“네, 대표님.”

인우는 손목에 찬 고가의 시계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1분 지각했네. 이번 달 개근 수당과 성과급, 전부 삭감.”

혜니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라고?’

‘본보기로 잡는 거야?’

‘내가 그 본보기야?’

‘나를 희생양 삼아서 기강 잡겠다는 거야?’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혜니는 결국 이를 악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억울해도 삼켜야 했다.

혜니는 엄마도 부양해야 했고, 나래도 챙겨야 했다.

무엇보다 이 직장을 잃을 수는 없었다.

인우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자료를 보니까, 이혼 경력이 있던데.”

‘이 망할 인간, 일부러 이러는 거지?’

혜니는 최대한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이혼 사유는?”

인우가 이어서 물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부하 직원의 사생활을 캐묻는 취미는 없지만, 내 곁에 둘 사람이라면 적어도 흠 잡힐 일은 없어야 하니까.”

‘이제 대놓고 사적인 감정으로 괴롭히겠다는 거야?’

혜니는 망설임 없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부부 관계가 맞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인우의 눈빛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맞지 않았다고?’

‘하루에 다섯 번도 부족했다는 건가?’

‘그 정도면 세상 어떤 남자도 윤혜니 마음에 들 수 없겠네.’

인우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아이는?”

“없습니다.”

“좋군.”

인우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혜니는 그런 인우를 한 번 바라보았다.

‘좋긴 뭐가 좋아.’

‘그때 남겨 놓은 네 ‘보물’ 때문에 내가 죽을 뻔했어!’

“됐어. 회의 있습니다.”

인우가 새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 비서, 따라와.”

“네, 대표님.”

새연은 기쁜 얼굴로 회의록을 적을 노트를 챙기러 갔다.

...

결국 회의는 세 시간이나 이어졌다.

새연의 키보드는 불꽃이라도 튈 듯 쉴 새 없이 두드려졌다.

‘우리 새 대표님... 확실히 칼 같고 무서운 사람이야.’

회의 석상에서 인우는 고위 임원 세 명을 해고했고, 엄준 부대표까지 정리했다.

세 시간 뒤, 새연은 영혼이 빠진 얼굴로 돌아왔다.

심지어 몸무게가 1kg은 빠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역시 재벌 남주는 일 중독자야. 무서워. 근데 우리 새 대표님은 금욕적인 느낌이라 그쪽은 엄청 셀 것 같아.”

혜니가 멈칫했다.

‘이 말은... 틀리진 않지.’

‘하지만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야.’

“혜니야, 네 전남편은 부부생활 안 맞았다며? 우리 새 대표님 한번 노려봐. 분명 장난 아닐걸.”

새연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거기까지만 해. 내가 감히 넘볼 분이 아니야.”

혜니는 생각할 틈도 없이 말을 잘랐다.

계단 모퉁이에 서 있던 인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감히 넘볼 분이 아니라고? 이미 다 알면서.’

예전의 혜니는 저렇게 조심스러운 척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인우에게 고백했었다.

“한인우, 넌 윤혜니만의 남자여야 해!”

그렇게 한인우는 윤혜니만의 남자, 남편이 되었다.

그런데 결혼 2년 만에 혜니는 사랑이 식었다며, 인우가 가난하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이혼 서류가 눈앞에 놓인 그 순간, 인우는 깨달았다.

윤혜니라는 여자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

새연이 혜니를 쿡 찔렀다.

“히히, 혹시 오늘 밤 소개팅 상대가 엄청 잘생긴 거 아니야?”

새연이 장난스럽게 혜니의 팔을 툭 건드렸다.

“응, 뭐. 나쁘진 않아.”

혜니는 대충 대답했다.

‘소개팅?’

인우의 눈빛이 더 차갑게 식었다.

‘나한테는 미련이 조금도 없다는 거구나.’

‘내가 없는 동안 다른 남자도 꽤 많이 만났겠지.’

“윤 비서. 커피 한 잔 가져와.”

계단 쪽에서 인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여자는 동시에 흠칫 놀랐다.

대표실이 있는 최상층은 복층 구조였다.

대표실은 위층, 비서실은 아래층에 있었다.

“네.”

‘한인우... 왜 직접 내려온 거지?’

혜니는 속으로 이상했지만, 여전히 서둘러 탕비실로 향했다.

잠시 뒤, 혜니는 문을 두드리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커피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대표님, 커피입니다.”

인우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커피 타는 솜씨는 늘었는데, 머리는 오히려 나빠졌네.”

탁!

두툼한 보고서 한 뭉치가 책상 위로 내던져졌다.

“이 보고서에 오류가 있어. 다시 확인해. 끝나면 나한테 가져오고.”

혜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전에 꼼꼼히 검토했던 보고서였다.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대표님, 어느 항목에 문제가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인우의 표정이 더 차갑게 굳었다.

“윤 비서가 한 실수를, 내가 직접 짚어 줘야 하나?”

혜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혹시... 내일 드려도 될까요?”

이 보고서는 급한 자료도 아니었다.

“하...”

인우가 짧게 웃었다.

“윤 비서. 일 다 끝내기 전엔 퇴근할 생각 하지도 마.”

‘그렇게 소개팅에 가고 싶어?’

‘꿈도 꾸지 마.’

혜니는 끝내 참지 못하고 한마디 받아쳤다.

“대표님, 지금 일부러 저를 괴롭히시는 거잖아요.”

인우가 느릿하게 시선을 들었다.

“괴롭힌다고?”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을 던졌다.

“내가 어느 정도인지, 윤 비서가 모를 리 없잖아.”

혜니는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이 개 같은 인간... 진짜 일부러 나 엿 먹이는 거야!’

그때 인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수리 옥션에 가서 목걸이 하나 받아와.”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했다.

“절대 잃어버리지 마. 잃어버리면 윤 비서의 평생 연봉으로 갚아도 못 갚을 테니까.”

혜니가 멈칫하더니 곧바로 말했다.

“대표님, 그렇게 귀한 물건이면 직접 가서 받으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예 손대지 않는 게 제일 안전했다.

건드리지 않으면 사고도 나지 않을 테니까.

인우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것까지 전부 내가 할 거면, 비서는 왜 두지?”

그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내 속이나 뒤집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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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얼른 신발 신자. 늦겠다!” 바쁜 아침, 시간에 쫓기는 윤혜니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싫어! 오늘 어린이집 안 갈래!” 나래는 미꾸라지처럼 몸을 비틀며 말랑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아이고, 우리 착한 아가. 오후에 엄마가 딸기 생크림 케이크 사 줄게. 딸기 맛이야.” 혜니는 온갖 방법을 다 써 목소리를 한껏 부드럽게 낮췄다.달콤한 회유가 통하자 나래는 마지못해 조그만 발을 내밀었다.혜니는 잽싸게 신발을 신기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핸드폰을 꺼내 소새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새연아, 살려줘! 나 늦을 것 같아. 잠깐만 내 자리 좀 봐 줘. 금방 갈게!”[알았어.]겨우 어린이집 앞에 도착한 혜니는 나래를 차에서 내려 주다가 책가방 지퍼가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손을 뻗어 잠그려는데 안쪽에서 딱딱한 사진 한 귀퉁이가 삐져나와 있었다.혜니가 꺼내자 사진 속에는 한인우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혜니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숨까지 멎은 듯했다.‘이 사진이 왜 여기 있어?’“이 사진 어디서 찾았어?” 혜니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떨렸다.나래가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저씨 엄청 잘생겼잖아! 엄마, 우리 반 친구들은 다 아빠가 있어. 나도 이 아저씨가 내 아빠였으면 좋겠어!”혜니의 가슴이 꽉 막혔다. 두 사람은 이혼한 지 4년이었다. 한인우는 이미 자기 가정을 꾸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로 행복하게 살지도 몰랐다.혜니는 사진을 책가방에 다시 넣고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삼켰다. 아이를 어린이집 안으로 들여보낸 뒤 차에 오르자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자 새연이 외쳤다. [어디야? 늦으면 큰일 나. 오늘 회사에 대형 사건이 터졌어.]“무슨 일인데?”[회사 인수됐어. 왕 대표가 지분 정리하고 세계여행 간대. 새 대표님이 곧 오시고.]혜니는 3초 동안 멍해졌다. “바로 갈게.”...오전 9시, 태유그룹 본사 앞. 대표이사 비서실 비서들과 각 부서 임원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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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혜니는 이를 악물고 보고서를 다시 확인했다.한 번으로는 부족해 두 번이나 더 들여다보았다.그렇게 시계가 밤 9시 반을 가리킬 때가 되어서야, 겨우 보고서 검토를 끝낼 수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결과는 같았다.오류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혜니는 보고서를 챙겨 다시 대표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보고서를 정중히 올려놓았다.“검토 끝났습니다.”인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보고서를 한 번 훑더니, 태연하게 말했다.“미안해. 윤 비서. 내가 잘못 본 것 같다.”혜니는 할 말을 잃었다.‘잘못 봤다고?’‘그 한마디 하려고 나를 이 시간까지 붙잡아 둔 거야?’속에서는 열불이 치밀었지만, 혜니는 가까스로 표정을 눌러 참았다.그때 인우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늦었네. 내가 데려다주지.”“괜찮습니다. 저 차 있습니다.”혜니는 곧바로 대답했다.“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말을 마친 혜니는 인우가 더 붙잡기라도 할까 봐, 거의 도망치듯 대표실을 빠져나갔다....밤 10시 정각.혜니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강변에 자리한 고급 레스토랑 바 안으로 들어섰다.은은한 조명이 실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용하고 차분했다.창가 쪽 자리에는 오늘 혜니의 맞선 상대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였다.금테 안경을 쓴 얼굴에는 단정한 분위기가 어려 있었고, 전체적인 인상도 무척 온화하고 점잖아 보였다.“정우진 씨 맞으시죠?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었어요.”혜니는 정우진을 향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윤혜니 씨, 앉으세요.”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사적으로 의자를 살짝 빼 주었다.“늦은 시간이라 배고프실 것 같아서, 버섯 수프와 빵을 먼저 주문해 뒀습니다.”말이 끝나기 전에 직원이 따뜻한 수프와 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우진은 곧 메뉴판을 혜니에게 건넸다.“더 보시고, 드시고 싶은 것 편하게 주문하세요.”혜니는 메뉴판을 받아 들고, 평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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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혜니는 기분이 확 상해 곧바로 말했다.“대표님, 비서가 세 명이나 있잖아요. 박 비서에게 동행하라고 하셔도...”‘아무리 그래도 나만 붙잡고 끝까지 갈아 넣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인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한마디를 던졌다.“윤 비서가 대표야, 내가 대표야?”“그야 당연히 대표님이십니다.”혜니는 이를 악물고 두 글자를 짜냈다.‘악덕 자본가.’“47분 남았어.”인우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덧붙였다.혜니는 토끼보다 빠르게 뛰쳐나갔다.‘젠장...’집까지 가는 데 30분.화장하고 옷 갈아입는 데 17분.목을 매달라고 재촉하는 것보다 더 빡빡한 일정이었다.혜니는 뛰어가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엄마, 오늘 저녁에 나래 좀 데리러 가 줘. 나 대표님이랑 접대 자리에 가야 해.”[그래.]...혜니가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눈에 확 띄는 롤스로이스가 이미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때, 뒷좌석 문이 열렸다.혜니가 차에 오르자, 인우가 고개를 돌려 혜니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다.감출 생각도 없이 혜니의 얼굴에서 쇄골로... 다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혜니는 오늘 푸른색 튜브톱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새하얀 어깨는 가녀린 뼈대가 살짝 드러나 더 아슬아슬해 보였고, 가슴 앞 라인은 과하지 않게 아름답게 잡혀 있었다.허리선은 완벽하게 들어가 있어, 혜니의 몸 선을 고스란히 살려주었다.정성껏 손본 얼굴까지 더해지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사람을 끌어당기는 모습이었다.“그렇게 부하 직원을 빤히 보는 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혜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무 집요한 인우의 눈빛에, 혜니는 괜히 겁이 날 정도였다.인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윤 비서, 그동안 남자친구 없었나?”“그건 또 어디서 보신 건데요?”혜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하게 쏘아보았다.“완전 말라비틀어진 막대기가 됐잖아. 예전엔 손에 잡히는 맛이 꽤 있었는데.”인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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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내가 취한 건가?’샴페인 한 잔 마셨다고 이럴 리가 없었다.혜니는 접시를 내려놓고 서둘러 인우를 찾았다.인우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하지만 또다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그때 키 큰 남자 하나가 갑자기 혜니의 앞을 가로막았다.“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저랑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죄송합니다.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혜니는 남자를 피해 지나가려 했다.그러나 남자는 웃으며, 휘청이는 혜니의 몸을 덥석 붙잡았다.“좀 취하신 것 같은데요. 제가 정원에 모시고 나가서 바람 좀 쐬게 해 드릴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혜니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혜니를 억지로 후문 쪽으로 끌고 갔다.후문 밖은 정원과 귀빈 휴게실로 이어져 있었다.혜니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제대로 버틸 힘조차 나지 않았다.“놔요!”혜니는 힘껏 남자를 밀어냈지만,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아무리 밀어도 소용없었다.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남자의 다른 손이 혜니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읍... 읍읍...!”혜니는 공포에 질려 버둥거렸다.하지만 남자는 혜니를 그대로 끌고 밖으로 나갔다.마침 정원 쪽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심윤모가 그 장면을 스치듯 보았다.윤모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그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네 여자, 누가 물고 갔다.”통화가 끝난 지10초도 지나지 않아, 인우가 서늘한 기운을 몰고 뛰쳐나왔다.“어디야?”윤모가 한쪽을 가리켰다.“저 휴게실로 들어갔어.”윤모는 곧장 달려가려는 인우의 팔을 붙잡았다.“설마 이렇게 빨리 그 여자한테 넘어갈 생각은 아니지? 예전에 네가 그 여자 아버지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거, 잊었어?”“그런데 그 여자는 너한테 이혼하자고 난리 치고, 가난하다고 버렸잖아.”인우는 윤모의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쉽게 나를 갖게 해 줄 생각 없어.”인우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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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인우의 주변 공기가 한껏 낮게 가라앉았다.그는 나래의 앳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까만 포도알 같은 큰 눈, 눈처럼 흰 피부, 인형처럼 예쁜 얼굴.이런 유전자가 자기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 것이란 말인가?“하. 대표님, 상상도 참 마음대로 하시네요.”혜니의 한마디가 인우를 단번에 현실로 끌어내렸다.혜니는 속으로 치미는 당황을 가까스로 누른 뒤, 품에 안긴 어린아이에게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말해 봐. 왜 이분한테 아빠라고 했어?”나래는 또박또박 대답했다.“할머니가 그랬어. 엄청 잘생겼으면 아빠라고 하고, 그냥 잘생긴 사람은 삼촌이라고 하고, 안 잘생겼으면 오빠라고 하랬어.”이 꼬맹이는 이미 혜니의 어머니 손에서 야무지게 길러졌다.“그럼 이렇게 힘들게 너를 데리러 온 나한테는 왜 안 불러 줘?”“언니, 오늘 언니한테 좋은 냄새 나.”입이 단 나래는 혜니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혜니는 그제야 인우를 돌아보며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대표님, 나래는 저희 엄마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예요. 가족관계도 엄마 쪽으로 정리돼 있고요. 그래서 저한테 언니라고 부릅니다.”이어 혜니는 담담하게 덧붙였다.“아이가 좋으시면, 다른 분과 낳으시면 됩니다.”인우는 혜니가 자신 몰래 아이를 낳은 줄 알았다.그런데 한순간 말문이 막혀, 비꼬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저는 먼저 나래를 집에 데려다주겠습니다. 대표님은 편하신 대로 하세요.”혜니는 두 걸음쯤 가다가 다시 돌아보며 한마디를 던졌다.“참고로, 미행은 매우 교양 없는 행동입니다.”혜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좌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운 뒤, 차를 몰고 그대로 떠났다.인우의 잘생긴 얼굴은 금방이라도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번호 하나를 눌렀다.“윤혜니의 지난 4년간 연애 이력 전부 조사해. 출산으로 병원에 입원한 기록이 있는지도 확인하고.”혜니는 룸미러로 멀어지는 인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 엄마가 앞을 내다본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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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혜니는 인우를 힘껏 밀쳐 내며 소리쳤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인우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등, 완벽한 역삼각형 몸매로 갑판 위에 서 있었다.마치 예리하게 깎아 세운 차가운 조각상 같았다.물빛에 비친 날카로운 윤곽은 더 선명하고 차갑게 보였다.“후회돼?”인우가 입을 열었다.말투에는 묘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후회?’혜니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인우는 다시 덧붙였다.“나랑 이혼한 거, 후회 안 하냐고.”“네가 조금만 더 버텼다면, 이 모든 게 네 것이 됐을 텐데.”“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고, 누구 앞에서도 고개 숙일 일 없이 살았겠지.”인우의 눈빛에는 의기양양한 조롱이 어려 있었다.하지만 혜니는 알아차렸다.인우는 지금 자신이 이룬 것을 자랑하는 동시에, 혜니를 모욕하고 있었다.“후회해.”혜니가 차분하게 세 글자를 뱉었다.“그래?”인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 대답이 꽤 마음에 든 듯했다.혜니는 인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너랑 혼인신고 한 거. 너랑 결혼한 거. 그 소중한 결혼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후회해.”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이 실려 있었다.혜니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가 어려 있었다.혜니는 인우를 너무 믿었다.그래서 완전히 패배했다.인우가 차갑게 웃었다.“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당당했으면 좋겠어.”혜니는 언제나 인우를 화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그렇다면 인우도 더는 혜니를 봐줄 필요가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둘이 아름다운 여성 파트너들을 데리고 요트에 올랐다.“한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왕 대표님, 이 대표님. 안으로 드시죠.”요트 내부의 호화로운 공간에는 이미 카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남자들은 카드 게임을 하며 수백억 원대 투자 건을 가볍게 주고받았다.인우는 다리를 꼰 채 혜니를 가리켰다.“차 따라.”혜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그러고는 찻주전자를 들어 몇몇 대표들 앞에 차례로 차를 따랐다.술을 채우고, 수건을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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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혜니는 인우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혜니는 씩씩거리며 나래를 인우의 품에 안겨 버렸다.“아예 가져가세요. 드릴게요. 하루에 우유 네 번 마시고, 당근은 안 먹고, 해산물 알레르기 있어요.”인우는 말랑말랑하고 포근한, 옅은 우유 냄새가 나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잠시 어쩔 줄 몰랐다.“이름이 뭐야?”인우가 물었다.“저는 윤나래예요. 다들 나래라고 불러요. 엄마랑 언니는 ‘우리 콩알이’라고도 불러요.”나래는 까만 포도알 같은 큰 눈을 반짝이며 또박또박 자신을 소개했다.인우가 혜니를 가리켰다.“저 사람은 누구야?”“언니요, 잘생긴 아빠.”나래가 또 한 번 그렇게 부르며 작은 두 팔로 인우의 목을 감쌌다.인우는 어쩐지 딸이 둘이나 생긴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아,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아빠라고 부르지 마.”와앙!그 말에 놀란 나래가 울음을 터뜨렸다.인우는 순간 당황했다.지금껏 한 번도 아이를 달래 본 적이 없었다.인우는 급히 손을 뻗어 나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한 올을 살짝 뽑은 뒤, 아이를 다시 혜니의 품에 안겼다.“우리 콩알이, 울지 마. 언니가 미끄럼틀 태워 줄게.”혜니는 나래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다가, 인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한인우, 네 살짜리 애까지 괴롭혀? 진짜 대단하다.”혜니는 일부러 나래의 출생일을 실제보다 반년 앞당겨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려 두었다.나중에 인우가 제대로 캐 보더라도 시기가 맞지 않을 테고, 나래가 인우의 딸이라는 사실까지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혜니는 그렇게 말한 뒤, 나래를 달래며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인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서리가 내려앉을 듯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혜니와 사소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인우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면 됐다.차 문을 닫은 뒤에도 혜니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혜니는 깊게 숨을 두 번 들이마신 뒤, 경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인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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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스카이 주택단지.경서의 차가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경서는 곧바로 여성 가사도우미를 불렀고, 두 사람은 진땀을 뺀 끝에야 만취한 혜니를 겨우 집 안으로 옮길 수 있었다.혜니를 손님방 침대에 눕히자, 경서는 비로소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혜니가 갑자기 몸을 뒤척이더니, 낮게 욕을 뱉었다.“한인우... 이 나쁜 자식아.”“나... 우리 콩알이... 너한테 안 줘.”“너는... 왜... 나를 배신했어?”경서는 한숨을 삼켰다.역시 술에 취한 혜니는 ‘비밀 스피커’나 다름없었다.인우에게 혜니를 넘기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경서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 꿀물을 타 왔다.그런데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침대 위에는 혜니가 없었다.혜니는 인형 하나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드레스룸 구석에 웅크려 앉아 울고 있었다.“인우야... 너무 보고 싶어. 언제 돌아올 거야... 흐으...”혜니는 날개가 꺾인 작은 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낮 동안 칼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둘렀던 가면이, 술기운 앞에서 벗겨지고 있었다.지난 몇 년 동안 혜니가 어떤 고통을 견뎠는지는 혜니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았다.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다시 N시로 돌아왔다.다른 이유는 없었다.오직 인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혜니는 인우가 왜 두 사람의 결혼을 배신했는지, 그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인우는 아름다운 독 같았다.향기에 취해 다가가면, 결국 속까지 망가뜨리는 지독한 독.“나... B시로 갈래...”“B시... 가야 해...”“그래, 그래. B시로 가자. 우리 지금 일어나서 비행기 타러 가자.”경서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경서는 혜니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일으킨 뒤, 달래고 속이다시피 해서 다시 침대에 눕혔다.경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2년 동안, 혜니는 B시에 스무 번도 넘게 다녀왔다.힘들게 모은 월급의 절반은 항공권 구입 비용으로 사라졌다.대체 어느 못된 동창이 B시에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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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혜니에게 이 버릇은 정말 치명적이었다.술만 마시면 ‘비밀 스피커’가 되어, 숨겨야 할 일까지 줄줄 새어 나왔다.신혼 첫날밤에도 그랬다.혜니는 술에 취한 채 인우의 목을 끌어안고,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어릴 때 옆집 오빠가 자신에게 정말 잘해 줬다고.크면 혜니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게다가 혜니는 한술 더 떠서, 어릴 땐 그 오빠를 꽤 좋아했으며, 그 오빠가 유학만 가지 않았어도 한인우가 자신과 결혼할 차례는 오지 않았을 거라고까지 말했다.그 뒤의 일은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인우는 그 자리에서 제대로 화가 났고,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밤새 전쟁이라도 치른 사람들처럼 난리가 났다....경서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혜니를 보더니,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내가 보기엔 그 인간, 일부러 너 취하게 만든 거야. 네 입에서 뭐라도 캐내려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 술은 입에 대지도 마. 그러다 나래까지 들키면 진짜 끝이야!”혜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고개를 저었다.“안 마셔. 죽어도 안 마셔!”점심 무렵, 혜니와 경서는 마트에 들렀다.선물 몇 가지와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거리를 잔뜩 산 뒤, 함께 혜니의 어머니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진춘심은 아직 감기가 다 낫지 않아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하지만 혜니와 경서가 함께 찾아오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경서는 부엌에 서서 진춘심을 도와 함께 음식을 만들었다.“어머니, 이건 제가 할게요.”“어머니, 이거 간 좀 봐 주세요.”“...”경서는 말끝마다 ‘어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었고, 진춘심의 입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진춘심의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역시 경서가 딸보다 더 살가웠다.정작 친딸인 혜니는 매일 바빠서 얼굴 보기조차 힘든데 말이다.식탁에 앉자, 진춘심은 쉬지 않고 두 사람의 그릇에 반찬을 올려 주었다.“혜니야.”진춘심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목을 가다듬었다.“옆집 강린 이모 기억하지? 그분한테 젊은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대학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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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나가. 여긴 널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어.”인우는 혜니의 예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하지만 혜니는 곧바로 그의 손을 탁 쳐 냈다.“이 독한 여자. 오늘은 무조건 해장국 끓여 줘야 해.”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태연하게 소파에 앉았다.날카로운 눈매가 집 안을 한 바퀴 훑더니, 곧 어린 나래에게 멈췄다.“안 그러면 네 동생 잡아먹는다. 청양고추 송송 썰고, 대파 올려서 푹 쪄 먹을 거야.”혜니는 눈을 흘겼다.‘진짜 취했네, 이 인간.’“기다려.”혜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생강과 구기자, 꿀을 넣고 한참 끓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해장차를 들고나왔다.그런데 어느새 나래가 인우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인우는 긴 팔로 나래를 감싸안은 채, 그림책 속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주고 있었다.그 눈빛은 믿기 어려울 만큼 다정했다.나래는 그림책을 넘기며 눈웃음을 지었다.작은 눈썹까지 초승달처럼 휘어 있었다.그 광경이 혜니의 마음을 세게 흔들었다.혜니는 이런 장면을 여러 번 꿈꾼 적이 있었다.인우가 배신만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좋은 아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해장차 여기 있어. 이거 마시고 바로 가.”혜니는 차갑게 말하며 찻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그리고 곧장 다가가 나래를 품에 안아 들었다.그대로 아이를 아기방에 데려다 놓고 문을 닫았다.오늘 나래는 경서가 준비해 준 작은 가발을 쓰고 있지 않았다.인우가 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가져가면 큰일이었다.띵동-초인종이 다시 울렸다.혜니가 문을 열자, 낯선 얼굴이 서 있었다.키가 크고 말끔하게 생긴 남자였다.“안녕하세요. 대표님 갈아입으실 옷입니다.”남자는 옷을 혜니의 손에 넘겨주고는 곧바로 돌아섰다.혜니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중얼거렸다.“이게 무슨 뜻이에요?”인우는 느긋하게 찻잔을 내려놓더니 한마디했다.“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목욕물 받아 놔.”‘목욕물은 무슨...’혜니의 얼굴에 거부감이 떠올랐다.“우리 집에 빈방 없어. 누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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