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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야기보따리
진가영은 처음부터 아들의 결혼을 못마땅해했다. 며느리도 아들처럼 훌륭한 사람이어야만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발전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고 향락만 좇는 평범한 아내를 부양해야 하다니, 생각할수록 아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심유빈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가방에서 예쁜 선물 상자를 꺼내 고하슬에게 다가갔다.

“하슬아, 이모가 선물 준비했어.”

고하슬이 놀란 얼굴로 선물을 받았다.

“이게 뭐예요?”

“하슬이가 직접 뜯어봐.”

심유빈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향수 냄새가 소예지의 코끝을 스쳤다. 매일 고이한에게서 나던 냄새와 똑같은 냄새였다.

심유빈이 고이한의 옆에 서서 선물을 건넸는데 몸을 굽히면서 일부러 고이한의 어깨를 터치했다.

그 모습을 본 소예지는 찻잔을 든 채 얼굴을 돌렸다.

고하슬은 선물 상자를 뜯어 안에 담긴 예쁜 크리스털 볼을 보고는 좋아서 폴짝폴짝 뛰었다.

“와. 너무 마음에 들어요.”

심유빈이 사랑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하슬이가 좋아하니까 이모도 너무 기뻐.”

자리로 돌아간 후 소예지의 덤덤한 눈빛과 마주쳤다. 심유빈이 웃고 있긴 했지만 그 미소 속에는 남들이 알아챌 수 없는 도발이 숨겨져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최현숙은 맛을 보면서 요리법을 연구했고 진가영은 옆에서 함께 대화를 나눴다. 소예지는 딸에게 반찬을 집어주었고 고이한의 신경도 온통 딸에게 쏠려 있었다.

“이거 먹기 싫어요. 아빠가 드세요.”

고하슬은 소예지가 집어준 브로콜리를 골라냈다. 소예지는 고하슬이 고기와 채소를 골고루 먹기를 바랐다.

고이한은 아이가 골라낸 브로콜리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고기만 먹으면 안 돼. 채소도 좀 먹어야지.”

고하슬이 닭 다리를 뜯으면서 턱에 기름을 가득 묻힌 채 오물거리며 고이한에게 말했다.

“아빠, 닦아줘요.”

고이한은 사랑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물수건으로 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소예지는 고하슬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다가 무심결에 고이한이 그 브로콜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소예지는 가슴을 바늘로 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심유빈도 그 모습을 봤다. 고개를 숙이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소예지는 입맛이 사라져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님,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녀는 화장실에서 10분 정도 머물렀다. 살짝 열린 룸의 문틈으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빈아, 많이 먹어. 넌 너무 말랐어. 몸보신 좀 해야지.”

“고마워요, 어머님. 어머님은 저한테 너무 잘해주세요.”

“당연한 거 아니야? 앞으로 이한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어려워하지 말고.”

“오빠도 저한테 충분히 잘해주고 있어요.”

소예지는 복잡한 기분을 안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소예지는 이 식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8시 30분쯤 고이한이 종업원을 불러 계산을 부탁하자 종업원이 웃으며 심유빈을 가리켰다.

“저 여자분이 이미 계산하셨습니다.”

최현숙과 진가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치더니 진가영이 한마디 했다.

“유빈아, 우리가 너한테서 얻어먹으면 안 되지.”

“어머님, 제가 평소에 너무 바빠서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건 당연한 거죠.”

심유빈이 입술을 적시며 웃었다.

“너도 참...”

진가영의 미소에 철이 든 심유빈을 칭찬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모두가 일어설 때 심유빈은 재빨리 최현숙을 부축했다.

“할머니, 천천히 일어나세요.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최현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가영의 눈에 그녀에 대한 칭찬이 가득했다. 오늘 밤에는 소예지보다 심유빈이 더 훌륭한 며느리 같았다.

진가영은 키 크고 잘생긴 아들과 또 유능하고 예쁜 심유빈을 번갈아 보았다.

‘이한이가 예지 말고 유빈이랑 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매일 속상할 일도 없을 텐데.’

심유빈과 비교하고 나니 소예지가 조용히 있는 모습이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유빈은 최현숙을 차에 태울 때까지 계속 부축했고 차 문 앞에 서서 진가영이 차에 타는 것까지 지켜봤다.

“어머님, 할머니, 다음에 뵐게요.”

“그래. 다음에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어.”

진가영이 반갑게 초대했다.

옆에 있던 고이한이 딸을 안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운전 조심하세요.”

그들이 탄 차가 먼저 출발했다. 심유빈이 고이한의 옆에 서서 고하슬에게 말했다.

“오늘 하슬이 너무 예뻐. 아 참, 이모 가방에 먹을 것도 있는데 먹을래?”

“네.”

먹을 것이라는 소리에 고하슬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심유빈은 가방에서 헤이즐넛 초콜릿을 꺼내 고하슬의 고사리 같은 손에 쥐여주었다. 초콜릿인 걸 보자마자 고하슬의 눈이 다 빛났다.

그 모습에 소예지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심유빈이 고하슬에게 몰래 단 것을 먹인 것 때문에 줄곧 화가 나 있었다.

“집에 가자.”

소예지가 고이한에게 말했다.

“하슬아, 다음에 봐. 이모한테 뽀뽀해주면 안 될까?”

심유빈은 볼을 내밀며 고하슬에게 뽀뽀를 요구했다.

아이는 초콜릿을 받고 기분이 좋았던 터라 기꺼이 심유빈에게 뽀뽀하려 했다.

고하슬이 고이한의 품에 안겨 있어 심유빈은 발꿈치를 살짝 들고 자연스럽게 고이한의 어깨를 붙잡은 다음 얼굴을 고하슬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하슬아, 차에 타야지.”

소예지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 고이한의 품에서 딸을 빼앗고는 차에 올라탔다.

심유빈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고이한에게 말했다.

“오빠, 운전 조심해.”

고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올라탔다. 차가 떠날 때도 심유빈은 그 자리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하슬도 손을 흔들자 소예지는 딸을 꽉 껴안았다. 지금 마음속에서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엄마, 너무 꽉 껴안아서 숨을 못 쉬겠어요.”

고하슬의 말에 소예지는 그제야 힘을 빼고 고하슬을 놓아주었다. 창문을 열어 찬바람을 조금 맞고 나니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우리 언제 귀국해?”

소예지가 운전하는 고이한에게 물었다.

“3일 후에.”

고이한이 답했다.

그 후 이틀 동안 고이한은 집에서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가끔 서재에 들어가 일을 처리했다.

3일 후 최현숙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먼저 귀국했다. 떠날 때 최현숙이 소예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예지야, 설 전에 우리도 귀국할 생각이야.”

소예지는 최현숙이 귀국하는 날을 기대하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23시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고하슬을 안고 집에 들어온 순간 소예지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양희순이 고하슬을 씻기는 사이 소예지도 방에 들어가 샤워했다.

10시 30분, 고하슬은 그녀의 품에 안겨 조용히 잠이 들었다. 소예지도 딸을 안은 채 바로 꿈나라에 빠졌다.

집에서 이틀 쉰 후 고하슬을 유치원에 보냈다.

오전 9시, 소예지가 서재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예지야, 시간 있어? 지금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

그녀 아버지의 제자인 윤혁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만날까요?”

소예지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실험실 설립 계획을 이젠 진행해야 할 때가 왔다.

카페.

소예지는 윤혁이 혼자 온 게 아니라는 걸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박사님이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윤혁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너의 그 충격적인 실험 계획 프로젝트 때문에 오셨지.”

“앉으세요, 박사님.”

소예지가 깍듯하게 말했다.

“네 연구 계획을 봤는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더라고.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다 이론적 기초 단계에 있어. 네가 윤혁이랑 힘을 합쳐 하루빨리 실험 단계에 돌입했으면 좋겠어. 만약 돌파구가 생긴다면 그건 의학계, 나아가 전 인류의 복지가 될 거야.”

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하게 말했다.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다만 연구실을 건설할 자금이 부족하고 사람을 모으기도 어려워요.”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전 세계의 이목이 의학 분야에 집중되어 있어서 너의 실험을 지원해줄 사람이 분명 있을 거야. 난 믿어. 그나저나 예지야, 이 실험 이론은 어떻게 생각해낸 거야?”

이성열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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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44화

    고하슬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이한이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 마침 목이 말랐던 소예지는 두말없이 받아 들었다.“고마워.”고이한은 잠시 소예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소예지, 연구라는 게 마음먹는다고 쉽게 놓을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하슬이랑 시간을 많이 못 보낸다고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지금은 하슬이가 다 이해하지 못해도 크면서 조금씩 알게 될 거야. 자기 엄마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소예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자신이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던 고민을 고이한이 알아채고 있을 줄은 몰랐다.생각지도 못한 위로여서인지 그 말은 유난히 마음 깊이 와닿았다.“언젠가는 하슬이도 당신을 자랑스러워할 거야. 지금 당신이 하는 선택도 결국 하슬이한테 좋은 모습으로 남을 거고.”차분한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늘 장난스럽게 굴거나 고집을 부리던 모습과 달리 지금만큼은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소예지는 그동안 연구자와 엄마라는 두 역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왔다. 연구에 몰두할수록 딸과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미안함이 남았다.거실에서 놀고 있는 고하슬을 바라보던 소예지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잠시 아이를 바라보던 소예지는 다시 고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고마워.”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하지만 이번에 건넨 고맙다는 말에는 조금 더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자신의 일을 이해하고 응원해 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무엇보다 고하슬을 자연스럽게 돌보며 아빠로서 제 몫을 다해주는 모습이 고마웠다.“도와줄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고이한의 말에 소예지는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았다.“응.”정말 고씨 과학기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기꺼이 부탁할 생각이었다.“이제 마음 놓고 일해. 하슬이 학교 문제는 내가 맡을게. 인테리어도 사람 시켜서 끝까지 챙길 테니까 9월 전에는 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43화

    그날 밤 고이한은 취할 만큼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레드 와인 두 잔이 전부였다.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든 소예지는 지금 그 물음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늦었어. 먼저 들어가.”소예지가 문을 열자 젤리가 냉큼 뛰쳐나와 두 사람의 발치 사이를 오가며 신나게 뛰어다녔다.고이한은 손을 뻗어 젤리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소예지를 바라봤다.“젤리는 내가 데리고 내려갈게.”소예지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젤리가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꼬리를 흔들며 고이한의 다리 주위를 맴돌자 결국 짧게 대답했다.“응.”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강준석을 보러 병원에 들렀다.상처는 예상보다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정신도 평소와 다름없이 또렷했고 비서는 아예 업무 자료까지 병실로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준석이 일에 얼마나 매달리는 사람인지 소예지는 잘 알고 있었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 억지로 일을 못 하게 하면 오히려 밀린 업무를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게 뻔했다.소예지는 과일을 씻어 건네고 한동안 업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자 강준석은 오히려 자기 걱정은 그만하고 돌아가서 일을 보라며 재촉했다. 자신 때문에 소예지의 일정이 미뤄지는 걸 원치 않는 듯했다.오후에는 연구실로 돌아왔다.현미경으로 세포 배양 접시를 들여다보던 소예지의 표정이 문득 달라졌다. 숨을 죽인 채 초점을 세밀하게 맞추고 표시해둔 부분을 하나씩 차례로 확인했다.“찾았다. 찾았어.”소예지의 들뜬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옆에 있던 이지원이 손에 든 펜을 내려놓고 급히 다가왔다.“소예지, 찾은 거야?”소예지가 자리를 비켜주자 이지원은 곧장 현미경 앞으로 다가가 들여다봤다. 몇 초 뒤, 이지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낮게 외쳤다.“딱 네가 예상한 대로야. 억제제가 진행을 늦추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회복까지 촉진하고 있어.”“그게 다가 아니야.”소예지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이 메커니즘은 예전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42화

    “강 선배가 이번에 목숨까지 걸고 나를 구해줬어.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직 모르겠지만 당신이 말하는 그런 식은 절대 아니야.”그 말을 듣자 고이한의 굳어 있던 눈빛이 조금씩 누그러졌다.“알겠어.”그제야 자신이 혼자 너무 멀리까지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머지 소예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자각했다.엘리베이터에 오른 소예지가 28층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고이한은 27층을 누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소예지가 대신 손을 뻗어 버튼을 눌러줬다.“집에 수면제 남았어? 한 판만 더 줘.”뜬금없는 말에 소예지가 놀란 눈으로 고이한을 바라봤다.“지난번에 준 거 벌써 다 먹었어?”고이한의 눈가에 옅은 웃음기가 번졌다.“왜, 안 돼?”“수면제 그만 먹고 병원부터 가.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서 그래?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소예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수면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이한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지난번에 받은 거, 어디 뒀는지 모르겠어서.”소예지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바라봤다.“내 집에도 이제 없어. 김 비서한테 보내달라고 해.”말을 마치고 나서야 소예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애초에 수면제가 필요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고이한은 그저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자 예상대로 웃음기 어린 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역시 소 박사님, 나 꽤 걱정해 주네.”낮은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말에 소예지는 시선을 돌려 층수 표시만 바라봤다.“진짜 할 일도 없다.”고이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안 주면 오늘 밤도... 아마 또 못 잘 텐데.”말끝에 은근히 다른 뜻이 묻어 있었다. 소예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단번에 알아차렸다.마침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27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소예지는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41화

    고하슬도 손수 만든 카드를 고이한에게 내밀었다.고이한은 딸이 삐뚤빼뚤 눌러쓴 글씨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아빠, 생일 축하해요. 저는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오래오래 사랑할 거예요!]글을 읽어 내려가던 고이한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작은 카드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자니 딸이 어느새 이렇게 훌쩍 자랐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와닿았다.언제까지나 품 안에서 울고 보채기만 할 줄 알았던 아이가 이제는 제 마음을 글로 담아 전할 만큼 자란 것이다.고이한은 손을 뻗어 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고맙다, 우리 딸.”9시가 넘자 소예지도 슬슬 돌아갈 채비를 했다.그날따라 마당이 유난히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인지 고하슬은 좀처럼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소예지는 아이를 조금 더 놀게 두고 혼자 가방을 챙겨 먼저 밖으로 나왔다.대문을 나서자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왔다. 돌아보니 고이한이 선물 봉투를 든 채 따라오고 있었다.“차 좀 태워줄 수 있어?”고이한이 웃으며 물은 뒤 한마디 덧붙였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소예지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타.”고이한은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차는 고택을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었다. 구시가지답게 도로가 제법 막혔지만 소예지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그 펜 말인데.”고이한이 불쑥 다시 펜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은근히 신경 쓰고 있다는 기색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났다.“진짜 아무 생각 없이 고른 거야?”소예지가 고개를 돌려 고이한을 한 번 바라봤다.“그럼 뭐겠어.”“난...”고이한이 무언가 더 말하려 하자 소예지가 먼저 말을 잘랐다.“별 뜻 없어. 하준 씨한테도 줬고 현욱 씨한테도 줬으니까.”고이한의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잠시 말이 없던 고이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다 똑같은 거였어?”“응.”소예지의 대답은 짧고 담담했다.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고이한이 손에 든 펜을 내려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40화

    지금 이 순간, 고이한은 깨달았다.고이한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온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가족들이 앞으로도 평온하고 행복하게,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길 바랐기 때문이었다.“오빠, 뭐 그렇게 멍하니 있어! 오늘 오빠가 주인공이잖아. 빨리 와!”“이한아, 너만 기다리고 있단다.”최현숙도 고이한에게 손짓했다.고이한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눈빛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고이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족들이 기다리는 따뜻한 자리로 향했다.“아빠.”고하슬이 자리에서 내려와 신이 난 얼굴로 고이한에게 달려왔다.고이한은 딸을 품에 안아 올린 뒤 식탁으로 향했다. 소예지 옆자리에 딸을 앉힌 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소예지에게 시선을 돌렸다.소예지도 고개를 들어 고이한을 바라보면서 이번에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생일 축하해.”담담한 말이었지만 고이한의 눈빛은 순간 깊어졌다. 고이한이 웃으며 답했다.“와줘서 고마워.”생일 파티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최현숙이 직접 분위기를 이끌었다. 모두가 잔을 들어 고이한의 서른 번째 생일을 축하했다.오늘 밤만큼은 사업과 관련된 자리도, 서로의 의도를 계산하는 대화도 없었다. 그저 가족들 사이의 웃음과 따뜻한 정만이 가득했다.최고급 셰프가 준비한 요리를 모두 맛본 뒤, 고수경이 주문했던 삼단 케이크가 도착했다.고하슬은 고이한의 품에 안긴 채 함께 소원을 빌고 촛불을 껐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예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마음이 멈칫했다.그제야 소예지는 이번이 바로 고이한의 서른 번째 생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소예지는 고이한과 처음 만났던 시절을 떠올렸다.그때 고이한은 겨우 열아홉 살이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눈빛에는 또래와 다른 침착함과 깊이가 있었다.소예지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오래 머물렀다.희끗한 머리카락이 섞인 고이한은 지금 훨씬 더 성숙하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흔들리는 촛불빛이 고이한의 살짝 내려앉은 속눈썹과 소원을 비는 진지한 표정을 비추었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39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자. 나 만년필 고르는 것 좀 도와줘.”소예지가 박시온을 끌며 말했다.박시온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소예지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이한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행동의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으니까.“가자! 그런데 정말 만년필로 정한 거야?”“응.”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확실히 정한 선택이었다.“만년필도 괜찮긴 한데 혹시 고이한이 언젠가 이 펜으로 너희 재혼 서류에 도장 찍는 상상까지 하는 거 아니야?”박시온은 점점 더 엉뚱한 추측을 이어갔다. 소예지의 시선이 박시온에게 향했다.“박시온.”“알았어, 알았어. 장난 그만할게. 가자. 앞에 몽블랑 매장 있어.”박시온은 더는 소예지를 놀리지 않았다.만년필을 구입한 뒤, 두 사람은 아동복 매장도 함께 둘러보았다. 소예지는 마침 겸사겸사 아기를 위해 옷 세 벌도 골라주었다.오후 세 시, 소예지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밀린 일을 처리했다.그렇게 일찍 고씨 저택으로 갈 생각은 없었기에 오후 다섯 시 반이 되어서야 차를 몰고 출발했다.고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 고수경은 이미 성대하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정원 곳곳에는 생일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알록달록한 조명들이 반짝였다. 풍선들이 하늘에 떠 있었고 커다란 영문 장식 조명은 저무는 햇살 아래 은은하게 빛났다.잔디밭 중앙의 석판 위에는 긴 식탁이 놓여 있었다. 하얀 테이블보 위에는 정교한 식기와 꽃 장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통일된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식탁 사이를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모든 것은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씨 저택에서 이렇게 성대한 자리를 마련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이것도 고수경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소예지가 선물을 들고 거실 안으로 들어서자 최현숙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예지야, 왔구나.”“할머니.”소예지가 최현숙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노부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좋아 보였다.“이렇게 성대하게 함께 밥 먹어본 지도 오래됐구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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