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9화

작가: 이야기보따리
뜻밖의 상황에 심유빈은 멍해졌다. 당연히 소예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망설임 없이 피아노로 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유빈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소예지가 피아노를 칠 줄 알아?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가정주부 아니었어?’

고이한의 시선이 피아노 앞에 앉은 소예지에게 향했다. 부드러운 조명과 그림자가 그의 잘생긴 얼굴에 복잡하게 얽혀 속을 알 수 없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피아노 앞에 앉은 소예지는 밤에 피어난 백합처럼 맑고 우아했다.

무심하게 건반을 두드려 첫 음이 흘러나온 순간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봤다고 말이다.

심유빈은 저도 모르게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었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치는 소예지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심장에 박히는 듯했다.

‘말도 안 돼.’

소예지는 몇 년 동안 피아노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가 싫어했던 건 피아노가 아니라 피아노를 치는 여자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길고 음악과 함께하기로 했다. 하여 피아노를 배웠고 꽤 잘 치게 되었다. 물론 심유빈처럼 세계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칭찬받을 만한 실력은 충분히 되었다.

연주가 끝난 후 소예지는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심유빈의 표정을 살피는 대신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때 귓가에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대단하네요.”

소예지는 고개를 들고 칭찬 어린 눈빛의 강준석을 쳐다보았다. 그의 칭찬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이한이 와인을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가볼게.”

“이한이 집에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있으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하종호도 재빨리 일어났다.

고이한은 절친 윤하준을 보면서 심유빈을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윤하준은 그녀를 데려다주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들던 소예지는 그 모습을 포착하고는 심유빈을 힐끗 쳐다보았다. 쑥스러워하면서 고이한의 관심을 당연하다는 듯이 누렸다.

소예지는 가방을 들고 일어나 강준석에게 말했다.

“강준석 씨, 다음에 또 봐요.”

“그래요. 잘 가요.”

강준석이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웃었다.

문 앞, 소예지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고이한은 액셀을 힘껏 밟아 산 아래의 큰길로 향했다.

소예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여 고이한을 돌아보았다. 그의 기분이 지금 매우 불쾌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오늘 심유빈이 날 망신 주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심유빈의 기세를 눌러서?’

그냥 집에 가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에 더는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고이한이 가는 모임에는 가능한 한 참석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이틀 동안 고이한이 낮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소예지는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후 3시, 고이한이 가랑비를 뚫고 집으로 들어왔다. 약간 젖은 외투를 벗어 도우미에게 건네주고는 딸을 안으려고 몸을 숙였다.

한창 놀이에 열중하던 고하슬이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고이한이 볼에 뽀뽀하려 하자 고하슬이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아빠, 뽀뽀하지 말아요. 집이 넘어지려고 하잖아요.”

소예지의 시선이 고이한에게 닿았다. 고이한의 옷깃에 립스틱 자국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는데 여자가 그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다가 무심코 묻은 것처럼 바로 목젖 아래였다.

“알았어.”

고이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5시 30분, 도우미가 소예지에게 10분 후에 온 가족이 외식하러 나갈 거라고 알렸다.

식당은 시내 중심가의 고급 식당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리에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고 오랜만의 가족 외출에 다들 기분이 매우 들떠 있었다.

식당에 도착한 후 고하슬은 고이한의 품에 얌전히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빠, 나 유빈 이모 봤어요.”

고하슬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소예지가 딸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 자리에 정말로 심유빈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유빈아,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너도 밥 먹으러 왔어?”

진가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쩜 여기서 다 만나요? 어머님은 여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심유빈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가려고?”

진가영이 물었다.

“방금 친구한테서 전화 왔는데 급한 일이 생겼다고 못 온다고 해서 그냥 가려고요.”

그러고는 고하슬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슬아, 다음에 이모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이모, 가지 말아요.”

고하슬이 작은 손을 뻗으며 애타게 불렀다.

“우리도 금방 도착했는데 같이 먹을래?”

진가영도 그녀를 붙잡았다.

소예지는 이 모든 상황을 침착하게 지켜봤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유빈은 미리 식당에 와 있었고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나가려고 했다는 것을. 심지어 풀 메이크업까지 한 상태였다.

‘고이한의 계획일까? 내연녀를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해서 가족들이랑 함께 식사하게 하려고? 고이한도 참 정성이 지극해.’

“아니에요, 어머님. 가족들끼리 식사하는데 제가 방해하면 안 되죠.”

심유빈의 말에 최현숙도 한마디 거들었다.

“만난 김에 같이 먹자. 자리 하나 더 놓으면 되는데 뭐.”

“같이 먹자.”

고이한이 입을 열고 나서야 심유빈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너무 바빠서 어머님이랑 할머니께 인사도 못 드렸는데 만난 김에 그럼 같이 식사라도 하죠.”

소예지는 심유빈이 자연스럽게 식사에 합류하는 모습을 쭉 지켜봤다. 그녀가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리에 앉을 때 심유빈은 진가영과 최현숙의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고이한과 고하슬, 소예지, 최현숙을 모시는 도우미가 나란히 앉았다.

“오랜만에 외식하러 나와서 이 식당에 새로운 메뉴가 뭐가 있는지 모르겠네.”

진가영의 말에 심유빈은 종업원을 불러 메뉴판을 가져오게 한 다음 새 메뉴가 무엇인지 꼼꼼하게 물었다.

심유빈과 시어머니가 메뉴를 정하는 동안 고하슬은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았고 소예지는 찻잔을 들고 딸을 지켜보았다.

“유빈아, 요즘은 뭘 하고 지내?”

최현숙이 물었다.

“최근에는 국내 콘서트 준비랑 회사 일로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진가영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유빈이는 참 다재다능해. 젊은 나이에 회사도 운영하고 콘서트도 열고. 전에 네 광고도 많이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젊은 사람은 역시 패기가 있어야 해.”

진가영은 그 말을 마치고 나서야 며느리도 옆에 있다는 게 떠올라 소예지를 힐끗 쳐다봤다. 눈빛에 적잖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집에서 우리 아들 등골만 빼먹는 여자는 유빈이랑 비교도 안 되지.’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96화

    “아니야.”“그럼 내일이나 모레 만나서 이야기하자. 시간도 늦었으니까 이제 쉬어.”강준석은 결국 통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소예지도 더 이야기하지 않고 대답했다.“응. 만나서 이야기하자.”통화를 끊은 소예지는 찻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시간을 확인했다.어느새 밤 열 시였다.2층으로 올라가자 객실 쪽 욕실에서 고이한이 샤워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소예지는 서재로 돌아가 컴퓨터를 끄고 나왔다. 이미 샤워를 마친 상태였지만 아직 잠이 오지 않아 2층 거실에 앉아 조금 더 책을 읽기로 했다.잠시 후 고이한이 잠옷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조명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예지를 발견한 그의 눈빛에 웃음이 스쳤다.“강 박사랑 이야기 끝났어?”말투에는 분명 장난스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끝났어.”소예지는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고이한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넓은 소파에 자리가 충분했지만 굳이 소예지 바로 옆에 붙어 앉았다.그러고는 깊어진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막 책에 집중하려던 소예지는 또다시 방해를 받자 그를 살짝 밀어냈다.“먼저 가서 쉬어. 난 아직 안 잘 거야.”고이한은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잠이 안 와?”그 말투를 듣는 순간 소예지는 그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당신이나 가서 자.”고이한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기다릴게.”그 말을 남긴 고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잠시 후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다시 올라왔다.“우유 마셔. 잠 잘 올 거야.”소예지는 말없이 손을 뻗어 우유를 받아 들었다.고이한은 다시 그녀의 옆에 앉아 TV를 켰다. 소리는 끈 채 축구 경기를 틀어 놓고 화면만 바라보았다.늦가을 밤이 깊어지자 소예지의 발끝도 조금씩 차가워졌다.그녀가 자연스럽게 고이한 쪽으로 발을 뻗자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러고는 차가워진 두 발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와 두 손으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95화

    소예지는 잠시 말없이 할머니가 남긴 소장품들을 떠올렸다.도자기와 서화, 옥기까지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다. 모두 할머니가 평생에 걸쳐 모은 귀한 소장품들이었다.잠시 생각하던 소예지가 입을 열었다.“그럼 일단 보관할게.”그녀는 손에 들린 유언장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나중에 하슬이에게 물려주면 될 것 같아.”고이한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그럼 내가 당신이랑 하슬이를 위해 따로 전시관 하나 지어 줄게.”소예지가 살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전시관?”고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가 남기신 소장품 중에는 귀중한 문화재도 많아. 일반적인 환경에서 보관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전문적인 보존 시설을 갖춘 공간이 필요해.”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앞으로 당신이 좋아하는 물건들도 거기에 같이 보관하면 되고.”소예지는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당신이 맡아서 해 줘.”그때 고하슬이 예쁘게 포장한 꽃다발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소예지에게 다가와 꽃다발을 내밀었다.“엄마, 봐요. 이거 제가 엄마한테 주는 꽃이에요.”뒤따라 들어온 진가영이 다정하게 말했다.“예지야, 왔구나. 오늘 저녁은 여기서 먹고 가.”소예지는 딸이 건넨 꽃다발을 받아 들고 진가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럴게요.”“조금 있다가 수경이도 집에 올 거야.”그날 저녁은 모두 고씨 저택에서 함께 먹었다.식사를 마친 뒤에도 고하슬은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고수경 역시 일부러 조카를 붙잡았다. 오빠와 소예지가 둘만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보낼 수 있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고수경은 두 사람을 흘끗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조만간 나도 호칭을 바꿔 불러야 하려나.”밤이 되어서도 고하슬이 고씨 저택에 남겠다고 하자 소예지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마침 고이한에게는 저녁 여덟 시 반에 화상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김경환에게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94화

    창밖의 밤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고 방 안의 온도도 서서히 올라갔다.희미한 조명 아래에서도 고이한의 눈빛은 유난히 선명했다. 입을 맞추면서도 그는 품 안의 소예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을 알아차린 소예지는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가렸다.고이한이 낮게 웃자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못 보게 하는 거야?”소예지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을 가린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고이한의 짙은 속눈썹이 그녀의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간지러움이 느껴졌다.고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그의 입술이 귓불을 스치고 턱선을 지나 목선을 따라 내려갔다. 닿는 곳마다 뜨거운 온기가 번지는 듯했다.소예지는 가까이 맞닿은 그의 몸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눈을 가리고 있던 손에서도 서서히 힘이 풀렸다.고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예지야...”낮게 그녀를 부른 그는 소예지의 손목을 잡아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하지만 다시 이어진 입맞춤은 오히려 부드러웠다. 길고 다정하면서도 쉽게 헤어나기 힘든 입맞춤이었다.한참 뒤 입술이 떨어지자 고이한은 팔로 몸을 지탱한 채 소예지를 내려다보았다.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이번에는 조금 전처럼 그녀의 반응을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쇄골 위에 닿았고 뜨거운 손길이 부드럽게 이어졌다.“예지야...”고이한이 다시 낮게 그녀를 불렀다.“응?”“당신은 내 거야.”그날 밤은 길고 깊게 흘러갔다.다음 날은 주말이었다.두 사람은 아침부터 서둘러 시내로 돌아가지 않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오후 두 시가 되어서야 리조트를 나섰다.고하슬은 주말 동안 고씨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고이한은 소예지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며 함께 고씨 저택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오는 길 내내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소예지도 굳이 자세히 묻지 않았다.고씨 저택에 도착하자 고하슬은 정원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93화

    마치 소예지가 참석하는 회의라면 어떤 자리든 따라가려 했던 것처럼 고이한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라 해도 반드시 그 자리에 있고 싶어 했다.그저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지난 3년 동안 그에게 돌아온 것은 대부분 소예지의 싫다는 표정과 차가운 눈빛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뻔뻔할 정도로 그녀의 주변에 계속 나타났다.소예지는 알지 못했다.자신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고이한이 얼마나 많은 중요한 일정을 미뤘는지, 길 위에서 얼마나 초조하게 시간을 계산하며 겨우 맞춰 도착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렇게 애정을 담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거부감뿐이었지만 고이한은 늘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겼다.고이한은 곁에 있는 소예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게 나한테 얼마나 다행인지 알아?”소예지는 그를 바라보다 문득 이혼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이혼할 때 당신이 붙인 조건은 정말 너무했어.”고이한은 그녀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당신이 나를 미워했어도 그 조건은 넣었을 거야.”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때 나는 정말 방법이 없었어.”고이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뒤통수를 천천히 쓸어내렸다.“나한테 마지막 기회라도 남겨야 했어.”소예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하슬이 양육권으로 나를 압박하면 안 됐잖아.”고이한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예지야, 알아. 내가 잘못했어.”그는 소예지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그때 당신은 너무 단호하게 이혼을 원했고 내가 아무리 붙잡아도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어.”고이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래서 하슬이를 이용했고 그 여덟 개 회사도 이용했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서라도 당신과의 연결을 끊고 싶지 않았어.”“내가 당신을 볼 수 있는 이유를 남기고 싶었어.”소예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마음속으로 복잡한 감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92화

    소예지의 시선을 붙잡은 고이한은 그대로 테라스 난간 쪽으로 걸어가 밤바다를 바라보았다.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넓은 어깨를 따라 흘러내렸다. 탄탄한 등선을 타고 내려간 물방울은 이내 허리에 두른 수건 끝자락으로 스며들었다.오랫동안 꾸준히 관리해 온 사람다운 균형 잡힌 몸이었다.고이한은 손에 든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닦았다. 물에 젖은 회백색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짙어 보였고 군데군데 자라난 검은 머리카락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이마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그때 고이한이 고개를 돌렸다.소예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입가에 느릿한 웃음이 번졌다.“뭘 봐?”소예지는 얼른 시선을 아이패드로 돌렸다.“아무것도 아니야.”고이한은 웃음을 참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에게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소예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논문에 집중하려 했지만 자꾸만 신경이 옆으로 쏠렸다.“소 박사님.”고이한이 불쑥 그녀를 불렀다.소예지가 고개를 들었다.“아이패드 거꾸로 들고 있어.”소예지는 반사적으로 아이패드를 내려다봤다.멀쩡했다.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은 소예지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노려보자 고이한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재밌어?”“응.”“유치해.”고이한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녀의 아이패드 모서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소 박사님.”“왜?”“논문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소예지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안 유치해?”“난 진지한데.”고이한이 몸을 기울이며 가까이 다가오자 소예지는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밀었다.“장난치지 마.”고이한은 그 손을 그대로 잡아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장난 아니야.”그가 소예지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나도 좀 봐줘.”소예지는 결국 아이패드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계속 같이 있었잖아.”“그래도 당신은 계속 논문만 보고 있잖아.”소예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91화

    멀지 않은 곳에 몇몇 관광객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예지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이한을 밀어냈다.고이한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낮게 웃었다.어느새 낮게 내려앉은 노을이 바닷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빛이 고이한의 잘생긴 얼굴 위로 비치자 선명한 이목구비가 한층 깊어 보였다.소예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괜히 호흡이 빨라졌다. 길게 뻗은 눈썹 아래 깊은 눈빛은 유난히 다정했다.결국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소예지는 고개를 돌려 바람에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배고파.”“가자. 밥 먹으러.”호텔의 해산물 레스토랑은 2층에 있었다.통유리창 너머로는 넓게 펼쳐진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밤이 완전히 내려앉아 달빛을 머금은 바다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고이한은 미리 창가 자리를 예약해 두었다.테이블에는 정갈한 식기와 차갑게 준비된 화이트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고 주문한 메뉴 역시 모두 소예지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소예지는 메뉴를 훑어보다 그를 바라보았다.“당신은?”“당신이 좋아하는 건 나도 좋아해.”고이한이 웃으며 대답했다.생각해 보면 고이한은 먹는 것에 관해서 한 번도 까다롭게 군 적이 없었다. 양희순은 늘 소예지의 입맛에 맞춰 음식을 준비했지만 고이한은 음식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도 없었다.고이한은 화이트 와인을 반 잔 정도 따라 그녀 앞에 놓고 자신의 잔을 들었다.“축하할까?”소예지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뭘 축하해?”“우리 다시 시작하고 나서 첫 데이트잖아.”소예지는 잠시 멈칫했다가 잔을 들어 그의 잔과 가볍게 부딪쳤다.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달콤하면서도 살짝 떫은 맛과 함께 은은한 과일 향이 입안에 퍼졌다.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차례로 나왔다. 보기 좋게 담긴 해산물 요리들이 테이블 위를 채우자 고이한은 자연스럽게 몇 가지 음식을 그녀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오늘은 많이 먹어둬.”그 말을 들은 소예지가 고개를 들었다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