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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뜻밖의 상황에 심유빈은 멍해졌다. 당연히 소예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망설임 없이 피아노로 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유빈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소예지가 피아노를 칠 줄 알아?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가정주부 아니었어?’

고이한의 시선이 피아노 앞에 앉은 소예지에게 향했다. 부드러운 조명과 그림자가 그의 잘생긴 얼굴에 복잡하게 얽혀 속을 알 수 없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피아노 앞에 앉은 소예지는 밤에 피어난 백합처럼 맑고 우아했다.

무심하게 건반을 두드려 첫 음이 흘러나온 순간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봤다고 말이다.

심유빈은 저도 모르게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었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치는 소예지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심장에 박히는 듯했다.

‘말도 안 돼.’

소예지는 몇 년 동안 피아노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가 싫어했던 건 피아노가 아니라 피아노를 치는 여자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길고 음악과 함께하기로 했다. 하여 피아노를 배웠고 꽤 잘 치게 되었다. 물론 심유빈처럼 세계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칭찬받을 만한 실력은 충분히 되었다.

연주가 끝난 후 소예지는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심유빈의 표정을 살피는 대신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때 귓가에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대단하네요.”

소예지는 고개를 들고 칭찬 어린 눈빛의 강준석을 쳐다보았다. 그의 칭찬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이한이 와인을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가볼게.”

“이한이 집에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있으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하종호도 재빨리 일어났다.

고이한은 절친 윤하준을 보면서 심유빈을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윤하준은 그녀를 데려다주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들던 소예지는 그 모습을 포착하고는 심유빈을 힐끗 쳐다보았다. 쑥스러워하면서 고이한의 관심을 당연하다는 듯이 누렸다.

소예지는 가방을 들고 일어나 강준석에게 말했다.

“강준석 씨, 다음에 또 봐요.”

“그래요. 잘 가요.”

강준석이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웃었다.

문 앞, 소예지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고이한은 액셀을 힘껏 밟아 산 아래의 큰길로 향했다.

소예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여 고이한을 돌아보았다. 그의 기분이 지금 매우 불쾌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오늘 심유빈이 날 망신 주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심유빈의 기세를 눌러서?’

그냥 집에 가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에 더는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고이한이 가는 모임에는 가능한 한 참석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이틀 동안 고이한이 낮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소예지는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후 3시, 고이한이 가랑비를 뚫고 집으로 들어왔다. 약간 젖은 외투를 벗어 도우미에게 건네주고는 딸을 안으려고 몸을 숙였다.

한창 놀이에 열중하던 고하슬이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고이한이 볼에 뽀뽀하려 하자 고하슬이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아빠, 뽀뽀하지 말아요. 집이 넘어지려고 하잖아요.”

소예지의 시선이 고이한에게 닿았다. 고이한의 옷깃에 립스틱 자국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는데 여자가 그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다가 무심코 묻은 것처럼 바로 목젖 아래였다.

“알았어.”

고이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5시 30분, 도우미가 소예지에게 10분 후에 온 가족이 외식하러 나갈 거라고 알렸다.

식당은 시내 중심가의 고급 식당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리에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고 오랜만의 가족 외출에 다들 기분이 매우 들떠 있었다.

식당에 도착한 후 고하슬은 고이한의 품에 얌전히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빠, 나 유빈 이모 봤어요.”

고하슬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소예지가 딸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 자리에 정말로 심유빈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유빈아,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너도 밥 먹으러 왔어?”

진가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쩜 여기서 다 만나요? 어머님은 여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심유빈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가려고?”

진가영이 물었다.

“방금 친구한테서 전화 왔는데 급한 일이 생겼다고 못 온다고 해서 그냥 가려고요.”

그러고는 고하슬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슬아, 다음에 이모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이모, 가지 말아요.”

고하슬이 작은 손을 뻗으며 애타게 불렀다.

“우리도 금방 도착했는데 같이 먹을래?”

진가영도 그녀를 붙잡았다.

소예지는 이 모든 상황을 침착하게 지켜봤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유빈은 미리 식당에 와 있었고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나가려고 했다는 것을. 심지어 풀 메이크업까지 한 상태였다.

‘고이한의 계획일까? 내연녀를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해서 가족들이랑 함께 식사하게 하려고? 고이한도 참 정성이 지극해.’

“아니에요, 어머님. 가족들끼리 식사하는데 제가 방해하면 안 되죠.”

심유빈의 말에 최현숙도 한마디 거들었다.

“만난 김에 같이 먹자. 자리 하나 더 놓으면 되는데 뭐.”

“같이 먹자.”

고이한이 입을 열고 나서야 심유빈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너무 바빠서 어머님이랑 할머니께 인사도 못 드렸는데 만난 김에 그럼 같이 식사라도 하죠.”

소예지는 심유빈이 자연스럽게 식사에 합류하는 모습을 쭉 지켜봤다. 그녀가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리에 앉을 때 심유빈은 진가영과 최현숙의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고이한과 고하슬, 소예지, 최현숙을 모시는 도우미가 나란히 앉았다.

“오랜만에 외식하러 나와서 이 식당에 새로운 메뉴가 뭐가 있는지 모르겠네.”

진가영의 말에 심유빈은 종업원을 불러 메뉴판을 가져오게 한 다음 새 메뉴가 무엇인지 꼼꼼하게 물었다.

심유빈과 시어머니가 메뉴를 정하는 동안 고하슬은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았고 소예지는 찻잔을 들고 딸을 지켜보았다.

“유빈아, 요즘은 뭘 하고 지내?”

최현숙이 물었다.

“최근에는 국내 콘서트 준비랑 회사 일로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진가영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유빈이는 참 다재다능해. 젊은 나이에 회사도 운영하고 콘서트도 열고. 전에 네 광고도 많이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젊은 사람은 역시 패기가 있어야 해.”

진가영은 그 말을 마치고 나서야 며느리도 옆에 있다는 게 떠올라 소예지를 힐끗 쳐다봤다. 눈빛에 적잖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집에서 우리 아들 등골만 빼먹는 여자는 유빈이랑 비교도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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