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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or: 이야기보따리
뜻밖의 상황에 심유빈은 멍해졌다. 당연히 소예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망설임 없이 피아노로 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유빈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소예지가 피아노를 칠 줄 알아?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가정주부 아니었어?’

고이한의 시선이 피아노 앞에 앉은 소예지에게 향했다. 부드러운 조명과 그림자가 그의 잘생긴 얼굴에 복잡하게 얽혀 속을 알 수 없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피아노 앞에 앉은 소예지는 밤에 피어난 백합처럼 맑고 우아했다.

무심하게 건반을 두드려 첫 음이 흘러나온 순간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봤다고 말이다.

심유빈은 저도 모르게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었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치는 소예지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심장에 박히는 듯했다.

‘말도 안 돼.’

소예지는 몇 년 동안 피아노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가 싫어했던 건 피아노가 아니라 피아노를 치는 여자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길고 음악과 함께하기로 했다. 하여 피아노를 배웠고 꽤 잘 치게 되었다. 물론 심유빈처럼 세계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칭찬받을 만한 실력은 충분히 되었다.

연주가 끝난 후 소예지는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심유빈의 표정을 살피는 대신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때 귓가에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대단하네요.”

소예지는 고개를 들고 칭찬 어린 눈빛의 강준석을 쳐다보았다. 그의 칭찬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이한이 와인을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가볼게.”

“이한이 집에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있으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하종호도 재빨리 일어났다.

고이한은 절친 윤하준을 보면서 심유빈을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윤하준은 그녀를 데려다주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들던 소예지는 그 모습을 포착하고는 심유빈을 힐끗 쳐다보았다. 쑥스러워하면서 고이한의 관심을 당연하다는 듯이 누렸다.

소예지는 가방을 들고 일어나 강준석에게 말했다.

“강준석 씨, 다음에 또 봐요.”

“그래요. 잘 가요.”

강준석이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웃었다.

문 앞, 소예지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고이한은 액셀을 힘껏 밟아 산 아래의 큰길로 향했다.

소예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여 고이한을 돌아보았다. 그의 기분이 지금 매우 불쾌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오늘 심유빈이 날 망신 주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심유빈의 기세를 눌러서?’

그냥 집에 가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에 더는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고이한이 가는 모임에는 가능한 한 참석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이틀 동안 고이한이 낮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소예지는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후 3시, 고이한이 가랑비를 뚫고 집으로 들어왔다. 약간 젖은 외투를 벗어 도우미에게 건네주고는 딸을 안으려고 몸을 숙였다.

한창 놀이에 열중하던 고하슬이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고이한이 볼에 뽀뽀하려 하자 고하슬이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아빠, 뽀뽀하지 말아요. 집이 넘어지려고 하잖아요.”

소예지의 시선이 고이한에게 닿았다. 고이한의 옷깃에 립스틱 자국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는데 여자가 그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다가 무심코 묻은 것처럼 바로 목젖 아래였다.

“알았어.”

고이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5시 30분, 도우미가 소예지에게 10분 후에 온 가족이 외식하러 나갈 거라고 알렸다.

식당은 시내 중심가의 고급 식당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리에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고 오랜만의 가족 외출에 다들 기분이 매우 들떠 있었다.

식당에 도착한 후 고하슬은 고이한의 품에 얌전히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빠, 나 유빈 이모 봤어요.”

고하슬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소예지가 딸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 자리에 정말로 심유빈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유빈아,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너도 밥 먹으러 왔어?”

진가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쩜 여기서 다 만나요? 어머님은 여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심유빈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가려고?”

진가영이 물었다.

“방금 친구한테서 전화 왔는데 급한 일이 생겼다고 못 온다고 해서 그냥 가려고요.”

그러고는 고하슬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슬아, 다음에 이모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이모, 가지 말아요.”

고하슬이 작은 손을 뻗으며 애타게 불렀다.

“우리도 금방 도착했는데 같이 먹을래?”

진가영도 그녀를 붙잡았다.

소예지는 이 모든 상황을 침착하게 지켜봤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유빈은 미리 식당에 와 있었고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나가려고 했다는 것을. 심지어 풀 메이크업까지 한 상태였다.

‘고이한의 계획일까? 내연녀를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해서 가족들이랑 함께 식사하게 하려고? 고이한도 참 정성이 지극해.’

“아니에요, 어머님. 가족들끼리 식사하는데 제가 방해하면 안 되죠.”

심유빈의 말에 최현숙도 한마디 거들었다.

“만난 김에 같이 먹자. 자리 하나 더 놓으면 되는데 뭐.”

“같이 먹자.”

고이한이 입을 열고 나서야 심유빈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너무 바빠서 어머님이랑 할머니께 인사도 못 드렸는데 만난 김에 그럼 같이 식사라도 하죠.”

소예지는 심유빈이 자연스럽게 식사에 합류하는 모습을 쭉 지켜봤다. 그녀가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리에 앉을 때 심유빈은 진가영과 최현숙의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고이한과 고하슬, 소예지, 최현숙을 모시는 도우미가 나란히 앉았다.

“오랜만에 외식하러 나와서 이 식당에 새로운 메뉴가 뭐가 있는지 모르겠네.”

진가영의 말에 심유빈은 종업원을 불러 메뉴판을 가져오게 한 다음 새 메뉴가 무엇인지 꼼꼼하게 물었다.

심유빈과 시어머니가 메뉴를 정하는 동안 고하슬은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았고 소예지는 찻잔을 들고 딸을 지켜보았다.

“유빈아, 요즘은 뭘 하고 지내?”

최현숙이 물었다.

“최근에는 국내 콘서트 준비랑 회사 일로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진가영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유빈이는 참 다재다능해. 젊은 나이에 회사도 운영하고 콘서트도 열고. 전에 네 광고도 많이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젊은 사람은 역시 패기가 있어야 해.”

진가영은 그 말을 마치고 나서야 며느리도 옆에 있다는 게 떠올라 소예지를 힐끗 쳐다봤다. 눈빛에 적잖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집에서 우리 아들 등골만 빼먹는 여자는 유빈이랑 비교도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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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6화

    심유빈은 자신이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화면 속 두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 억눌러두었던 질투와 미련 그리고 원망이 걷잡을 수 없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그러나 이제 자신이 어떤 감정을 품든 저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세계 정상에 서서 수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자신은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기에 이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의지할 가족 하나 남지 않았다.심유빈은 저택을 나와 차에 올라탄 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제9군구 기지.하루 훈련이 막 끝난 뒤라 벽에 걸린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임현욱은 식판을 들고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막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터라 몸에는 아직 먼지와 피로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잠시 후 구온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무심코 TV를 올려다본 구온이 웃으며 말했다.“빨리 뉴스 봐.”임현욱이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마침 뉴스 화면이 바뀌면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고 임현욱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TV 속 소예지는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시상대 위에 서 있었다.“우리나라 과학자가 상 받았대.”“대단하다.”“소예지? 이 이름 되게 익숙한데? 우리 기지에 온 적 있지 않아?”“맞아. 생각났다. 나도 저번에 본 적 있어.”식당 안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임현욱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다 입가에 천천히 미소를 띠었다.소예지가 해냈다.그것도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해냈다.“예지 씨, 진짜 대단하다.”구온이 감탄하듯 말했다.임현욱은 그제야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응. 예지 씨는 충분히 받을 만한 사람이야.”화면에는 고이한의 모습도 비쳤다.임현욱은 TV 속 고이한을 바라보았다.지금 보니 저 사람은 확실히 소예지의 곁에 설 만한 사람이었다.그때 한 대원이 달려와 물었다.“대위님, 소 박사님이랑 친하시지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5화

    1년 후.10월, 스톡홀름.아침 햇살이 호텔 커튼 틈새로 스며들어 바닥을 금빛으로 물들였다.소예지는 통유리창 앞에 서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유 없이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그때 뒤에서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잠이 안 와?”막 잠에서 깬 고이한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가 소예지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소예지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대며 작게 대답했다.“응.”고이한이 그녀의 목덜미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긴장돼?”소예지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조금.”고이한은 그녀의 몸을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아침 햇살 속에서 그의 두 눈은 유난히 밝게 빛났다.“결과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선 이미 당신이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소예지는 고이한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으로 따뜻한 감정이 밀려들었다.지난 1년 동안 수많은 일을 겪었고 그 모든 순간마다 고이한은 늘 그녀의 곁에 있었다.“고마워.”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고이한이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그게 끝이야?”“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내가 당신한테 누군데?”그제야 고이한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아챈 소예지가 피식 웃었다.소예지는 평소 고이한을 ‘여보’라고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처음 결혼했을 때부터 그런 호칭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아무래도 누군가는 그 말을 무척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소예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고마워, 내 남편.”그제야 만족한 듯 고이한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난 당신이 그렇게 부르는 게 좋더라.”고이한은 상이라도 주듯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웃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 가자. 이제 준비해야지.”노벨상 시상식은 콘서트홀에서 열렸다.소예지는 맞춤 제작한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긴 머리는 단정하게 올려 아름다운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이한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소예지를 향해 있었다.소예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4화

    고이한은 소예지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정말... 나랑 다시 결혼해줄 거야?”고이한의 목소리가 떨렸다.소예지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당신이 싫으면 뭐...”“할 거야.”고이한이 갑자기 그녀를 품으로 세게 끌어안았다.“할 거야. 당연히 해야지.”소예지는 그의 품에 기대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마음 정한 거 맞아?”고이한은 그녀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다시 한번 확인했다.“정했어. 당신 돈도 많고 잘생겼고 내 딸 친아빠잖아. 거기다 그쪽으로도 잘하고... 다른 여자 좋은 일 시켜주기 싫어.”소예지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 말에 고이한이 웃음을 터뜨렸다.“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 맞아?”소예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진심이야.”고이한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입가로 가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럼 이제 호칭 바꿔야겠네. 여보.”소예지의 심장이 쿵 뛰었다.창밖의 햇살이 커튼 틈새로 스며들어 두 사람을 비췄다.“귀국하면 바로 혼인신고 하는 거야. 마음 바꾸면 안 돼.”고이한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안 바꿔.”소예지도 확실하게 대답했다.고이한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길고도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다시 되찾은 사람을 향한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당신, 사랑해.”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고백했다.매일 밤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 때마다 고이한은 이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곤 했다. 그럴 때는 소예지도 정신이 없어 제대로 들을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고백이 선명하게 가슴에 닿았다.이틀 뒤 고이한은 소예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렸다.두 사람을 마중 나온 사람은 김경환이었다.“서류는 전부 챙겼지?”고이한이 확인하듯 물었다.“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전부 챙겨왔습니다.”김경환이 웃었다.‘대표님의 행복이 걸린 일인데 내가 발목을 잡을 수는 없지.’오전 10시.혼인신고를 위해 찾은 구청에는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고이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3화

    “이제 괜찮아.”고이한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는 소예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달랬다.“이제 내가 왔어으니까 괜찮아.”소예지는 눈을 감았고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지난밤은 정말 견디기 힘들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고이한이 올 거라는 생각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희망이 되어주었다.복도에서는 구조대원들이 층마다 돌며 투숙객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고이한은 소예지의 손을 꼭 잡고 밖으로 향했다.호텔을 빠져나가기 위해 로비에 들어선 순간 흰 천에 덮인 십여 구의 희생자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소예지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광경에 가슴이 철렁하는 건 고이한도 마찬가지였다.이번 테러는 그나마 소규모에 그쳤다. 만약 더 큰 규모의 공격이었다면 어떤 참변이 벌어졌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바닥 곳곳에는 총탄의 흔적과 핏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고이한은 소예지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께로 끌어당겨 감쌌다.“보지 마.”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품에 기댄 채 밖으로 향했다.호텔을 빠져나오자 수많은 투숙객의 얼굴에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듯한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소예지도 마찬가지였다.두 사람은 밖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고 고이한은 이곳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소예지를 데려갔다. 경호 인원도 늘어나 세 대의 차량이 함께 부촌으로 향했다.차는 곧 조용한 고급 주택가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는 최고급 저택들이 즐비했고 보안 수준 역시 매우 높았다.이곳은 고이한 명의로 된 여러 부동산 중 하나였다. 소예지도 예전에 한동안 이곳에 머문 적이 있었다.정기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 집 안은 지금도 깨끗하고 아늑했다.“먼저 씻고 푹 자.”따뜻한 물줄기가 몸 위로 쏟아지자 소예지는 그제야 다시 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밤 내내 느꼈던 공포와 긴장 그리고 무력감도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하지만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는 여전히 떨쳐낼 수 없는 수많은 장면이 떠올랐다.샤워를 마친 소예지가 잠옷을 입고 밖으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2화

    폭발의 진동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컵과 휴대전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창밖에서는 날카로운 경보음이 쉴 새 없이 울렸고 사람들의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까지 뒤섞여 들려왔다.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고이한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무슨 일이야?”소예지는 몸을 숙여 휴대전화를 주워 들었다.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아무래도... 호텔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아.”말을 마친 소예지는 휴대전화를 든 채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에서는 짙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그 순간 또 한 번 폭발음이 터졌다.쾅!충격에 유리창이 덜덜 떨렸다.“창문에서 떨어져.”고이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말 잘 들어. 방에 있어. 당분간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마. 지금 바로 경호원들 올려보낼게.”소예지의 심장도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알았어. 방에 있을게.”“경호원들한테 바로 연락할게. 더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라고 할 테니까.”고이한은 다급하게 말을 마치고 영상 통화를 끊었다.소예지가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메시지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이번 과정에 함께 참가한 동료가 보낸 것이었다.[소 박사님, 호텔이 테러 공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래층에 아직 테러범들이 있다고 해요. 당분간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메시지를 확인한 직후 고이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소예지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내 말 잘 들어. 무슨 일이 생겨도 겁먹지 마. 내가 바로 갈게.”소예지가 놀라 되물었다.“당신이 온다고?”“응. 지금 바로 공항으로 출발할 거야.”“하지만...”“기다려.”고이한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소예지는 밖에서 울리는 사이렌과 폭발음에 몸이 굳은 채였다. 테러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벌어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바로 그때 창밖에서 총성이 들려왔다.소예지의 심장이 순간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1화

    오랫동안 서류를 작성한 탓에 소예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자리에서 일어나 고이한의 품에 기대자 그는 긴 팔로 소예지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을 무릎 아래로 넣어 가뿐히 안아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고이한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창밖으로 밤은 점점 깊어갔고 방 안에는 따뜻하고 은은한 불빛이 내려앉아 있었다.고이한은 유독 불을 켜두는 걸 좋아했다. 소예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늘 제멋대로였다.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봄이 찾아왔고 만물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모든 것이 유난히 아름다운 계절이었다.어느덧 계절은 5월에 접어들었다.따뜻하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는 동안 주변의 일들도 차츰 제자리를 찾아갔다.주경화의 병세는 매우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었고 이제는 퇴원해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지난주에는 소예지가 딸과 고이한을 데리고 윤하준의 집에 다녀왔는데 주경화가 직접 요리까지 해 세 사람을 대접했다.송세아에게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새로운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칩을 이식한 뒤 신경 신호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지난주 영상 통화에서는 무려 1분 동안 혼자 서 있는 데 성공했고 화면 속 송세아의 상태도 무척 좋아 보였다.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소예지는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M국에서 온 초청장을 바라보았다.M국의 최고 명문 교육기관에서 보내온 초청장으로 한 달간 진행되는 특별 과정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이번 과정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세계 정상급 연구진이었다. 소예지의 연구에도 큰 돌파구가 될 수 있는 기회였기에 고이한 역시 이번만큼은 그녀가 가기를 적극적으로 권했다.비록 두 사람이 한 달 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말이다.소예지는 컴퓨터 앞으로 가 답장을 보내며 이번 일정을 확정했다. 저녁에는 딸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했고 고하슬은 엄마가 공부하러 가는 것을 적극 찬성했다. 그런 엄마가 무척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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