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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Auteur: 이야기보따리
소예지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장시간의 기초 연구와 아버지의 노트를 바탕으로 전 세계 여러 선진 의학 실험실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서 생각해낸 거예요.”

“아주 좋아. 학문에는 끝이 없는 법이지. 예지야, 네가 생각해낸 이론은 정말 놀라워.”

그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얘기를 나눴다. 이따가 회의가 있어 먼저 가봐야 했던 이성열이 떠나기 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예지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연구실을 꼭 세워야 해. 난 전적으로 널 지원할 거야. 너도 네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어.”

소예지와 윤혁은 두 시간 동안 더 얘기를 나눴고 고하슬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혁이 그녀에게 장담했다.

“연구실 설립에 관해서는 나한테 맡겨.”

고하슬을 유치원에서 데려온 후 소예지는 딸과 함께 근처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봄옷을 사주었다.

딸의 손을 잡고 로비에 나오자마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는데 바로 심유빈이었다. 매니저와 함께 인파 속을 걷고 있었고 이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매니저가 일상용품을 가득 들고 있는 걸 본 소예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심유빈이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온 거야? 이한 씨가 이사 오라고 했겠지. 그래야 사적으로 만나는 게 더 편리할 테니까.’

소예지는 고하슬이 심유빈을 발견하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떠나려 했다.

“저기 강아지 있어요. 너무 귀여워요. 엄마, 나도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면 안 돼요?”

고하슬은 강아지를 데리고 지나가는 한 여자아이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전에는 딸이 강아지에게 물릴까 봐 죽어도 안 된다고 했었다. 그런데 심유빈네 집에 강아지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계속 가보고 싶다고 졸랐다.

소예지가 고하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키우고 싶어?”

“네.”

고하슬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예지도 동의했다.

“그래. 엄마랑 강아지 고르러 가자.”

“정말요? 진짜 강아지를 키워도 돼요? 아빠가 반대하면 어떡해요?”

고하슬의 작은 얼굴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만 동의하면 돼.”

소예지가 활짝 웃어 보였다.

“앗싸. 강아지 사러 간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 고급 애견 가게로 향했다. 고하슬은 강아지들을 보자마자 비글 새끼를 골랐고 가게 주인은 이 강아지가 조용하고 말도 잘 듣고 사람을 잘 따른다고 했다.

소예지가 돈을 내고 가게 주인이 강아지를 고하슬의 손에 쥐여주자 고하슬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엄마, 너무 귀여워요. 강아지가 너무 예뻐요.”

“이제 집에 데려갈까?”

딸이 웃자 소예지도 함께 웃었다.

양희순은 고하슬이 강아지를 안고 집에 들어오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지러워지는 걸 용납 못 하는 대표님께서 과연 강아지를 키우는 걸 허락하실까?’

고이한이 허락할지 소예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고하슬이 원하는 거라면 고이한은 절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고하슬은 직접 강아지 이름을 젤리라고 지었다.

저녁노을 아래 소예지는 찻잔을 들고 딸이 강아지와 함께 이리저리 뛰어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이 순간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이혼까지 했다면 더 완벽했을 텐데.’

고이한이 저녁 늦게 들어온 후 고하슬은 강아지를 안고 신난 얼굴로 그에게 달려갔다.

“아빠, 나 강아지 생겼어요. 이름은 젤리인데 마음에 들어요?”

고이한은 몸을 숙여 아이가 안고 있는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강아지가 겁에 질려 덜덜 떠는 걸 본 순간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젤리? 네가 지은 이름이야?”

“네. 내가 지었어요. 이름 예쁘죠?”

“예쁘네.”

고이한이 칭찬했다.

“괜찮아, 괜찮아. 아빠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아빠도 널 좋아할 거야.”

고하슬은 떨고 있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애어른처럼 위로했다.

그때 소예지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양복 외투를 벗던 고이한은 소예지가 옆으로 다가오자 긴 팔을 뻗어 자연스럽게 외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소예지는 흠칫 놀라며 그를 올려다봤고 고이한의 시선도 그녀에게 향했다. 예전이었더라면 바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양희순에게 다리라고 시켰을 것이다.

몇 초 후 고이한은 외투를 다시 거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소파에 툭 던지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고이한에게서 풍기는 냉랭한 기운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다가가면서 양희순더러 고이한의 양복 외투를 정리하라고 했다.

저녁 식사 시간, 고이한이 편안한 홈웨어 차림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짙은 남색의 얇은 스웨터를 입어 귀티가 더 흘러넘쳤다. 만약 그가 외도하지 않았다면 아주 완벽한 남편이었을 텐데.

“엄마, 새우 껍질 까줘요.”

고하슬이 빨간 새우를 보며 군침을 삼키자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엄마가 까줄게.”

소예지는 큰 새우 다섯 마리를 까서 고하슬에게 준 다음 손을 씻으러 갔다. 맞은편에 앉은 고이한은 먹다가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빠, 내가 새우 한 마리 줄게요.”

고하슬이 껍질을 벗긴 새우 한 마리를 고이한의 그릇에 놓았다.

“괜찮아. 하슬이 먹어.”

고이한은 새우를 다시 딸에게 돌려주었다.

손을 닦고 식탁으로 돌아온 소예지는 계속 우아하게 밥을 먹었다. 먹는 내내 딸에게만 신경을 쏟았다.

고하슬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엄마, 아빠를 안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소예지가 대충 웃어 보였다.

“그럼 왜 아빠한테는 새우 안 까줘요? 전에는 까줬잖아요.”

이젠 다섯 살이 되어가니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소예지는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손이 아파서 그래.”

“아파요? 어디 봐봐요.”

소예지는 손가락을 고하슬에게 보여주었다. 상처도 없고 붓지도 않았지만 고하슬이 손가락을 불어주는 걸 보고는 바로 눈웃음을 지었다. 조명까지 더해지니 더욱 밝고 아름다워 보였다.

“하슬이는 정말 착한 아이야.”

소예지가 칭찬했다.

그때 맞은편의 고이한이 젓가락을 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소예지는 딸을 씻긴 다음 젤리의 집을 소예지의 방으로 옮겨왔다. 고하슬과 젤리는 함께 놀다가 잠이 들었다.

벽의 조명이 부드럽게 비추는 가운데 소예지는 고하슬이 잠든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때 고이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막 샤워를 마치고 검은색 잠옷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옷깃 사이로 단단한 가슴 근육이 보여 무척이나 섹시했다.

소예지는 그를 무심하게 쳐다봤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그가 알몸으로 그녀 앞에 서 있는다고 해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바로 그때 소예지는 그의 가슴에 새로운 문신이 새겨진 걸 발견했다. 알파벳 Y와 B였는데 심유빈의 약자인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고이한이 고하슬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이 소예지의 볼을 스쳤다.

그 순간 소예지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고이한의 커다란 손이 갑자기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막기도 전에 고이한이 남편의 권리를 행사했다.

그다지 다정하지 않은 손길에 도발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소예지가 숨을 들이쉬자 고이한이 손을 빼내면서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방으로 와.”

그 뜻은 분명했다. 부부 관계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소예지는 가소롭기만 했다. 밖에서 바람을 피우면서 아내의 생리적인 욕구를 형식적으로 충족시켜주려고 하다니.

이런 베풂은 소예지도 원치 않았다.

소예지는 고이한의 잠자리 요구를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가 다시 방에 들어올까 봐 가차 없이 방 문을 잠가버렸다.

아침이 되어서야 소예지는 고하슬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고이한이 식탁 앞에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고하슬은 아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애교를 부리며 그의 팔을 잡았다.

“아빠,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밥 먹고 아빠가 유치원에 데려다줄게.”

“네.”

고하슬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한이 차 키를 들고 문을 나서던 그때 소예지가 딸에게 달콤하게 웃어 보였다.

“하슬아, 오후에 봐.”

“엄마, 오후에 젤리랑 같이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

고하슬은 강아지와 헤어지기 아쉬웠다.

“물론이지. 젤리랑 데리러 갈게.”

소예지가 웃으며 답했다.

오전 9시, 소예지는 차를 몰고 나가 친구 박시온을 만났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소예지의 얘기를 모두 들은 박시온이 그녀를 말렸다.

“정말 이혼하려고? 지금 그 자리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탐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원한다면 양보하면 되지.”

“자산이 수조 원인 재벌가의 사모님 자리를 포기할 수 있겠어?”

“내 딸 하슬이 말고는 다 포기할 수 있어.”

소예지의 눈빛에 미련이 없었다.

“고이한도?”

박시온이 떠보듯 물었다.

“바람을 피운 남자는 그냥 줘도 싫어. 더러워.”

“그런데 충고하는데 이 소송 쉽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이 바람을 피우는 현장을 잡지 못하면 고이한도 양육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어. 그리고 너 5년 동안 가정주부로만 살아서 수입도 없고 권력도 없잖아. 뭐로 고이한이랑 양육권을 다툴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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