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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오늘 밤 출장 갔다가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다. 소예지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고하슬은 아빠를 일주일 동안 못 본다는 소리에 밥도 먹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이한이 선물을 사주겠다고 달래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소예지는 일하면서 딸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실험실 설립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소예지는 고하슬을 데려다준 다음 곧장 A시 의대로 향했다. 오늘 회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동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뒷모습의 누군가가 문 앞에서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다. 소예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바로 강준석이었다.

그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얘기를 나누면서 긴 손가락으로 습관적으로 금테 안경을 올렸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강준석이 고개를 돌리자 소예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소예지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졌고 강준석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지야, 또 만났구나.”

그녀는 재빨리 감정을 억눌렀다.

“준석 선배.”

강준석이 웃으면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저번에 봤을 땐 네 아빠랑 닮았다는 걸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참 많이 닮았구나. 특히 눈이.”

소예지도 웃어 보였다.

“선배는 여기에 무슨 일로 왔어?”

“국내에 세계 최대 유전자 검사 기지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 온 김에 임용 절차도 밟고.”

소예지가 흥분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서 일하게 된 거야?”

강준석이 안경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어”

“환영해. 선배랑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소예지는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강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 좋게 너의 아빠랑 일했었고 또 너랑 동문도 되었는데 이번에는 동료가 돼서 나도 너무 기뻐.”

그때 옆 복도에서 두 사람이 서류를 안고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안채린이었는데 강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남자한테 첫눈에 반했어?”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를 툭 쳤다.

안채린의 예쁜 얼굴에 수줍음이 감돌았다.

“저 남자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강준석이라고 M국 의학계 천재야.”

안채린의 두 눈에 흠모하는 빛이 가득했다.

“뭐야? 지금 강준석이랑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소예지 아니야?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안채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소예지를 훑어봤다. 최근 회의마다 참석하는 걸 보면 소예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 덕에 겨우 들어온 거라고 추측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중요했다. 소예지의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회의에서 강준석은 실험팀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의학계의 젊은 천재가 자발적으로 귀국하여 이 실험에 참여했다는 건 실로 뜻밖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예지야, 토요일 저녁에 강 박사 환영회를 열기로 했는데 꼭 참석해. 알았지?”

윤혁의 말에 소예지가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가야죠.”

“강 박사 덕분에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

그때 강준석이 선배들과 얘기를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자 윤혁이 웃으며 말했다.

“강 박사님, 그럼 전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가볼게요. 오늘 밤 환영회에서 다시 얘기 나누고 술도 한잔해요.”

“그럽시다.”

강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강준석이 놀란 표정으로 소예지에게 물었다.

“종양이 미세 환경에서 CAR-T 세포 생존 시간을 90일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이건 소예지가 지난 6년 동안 계속 연구해온 과제였다.

“아빠가 제공해주신 몇 가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견해를 대담하게 제시해봤어. 물론 지금은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아.”

소예지의 말에 강준석의 두 눈에 존경심이 가득해졌다.

“너의 분석 보고서를 봤는데 모두 매우 선구적이고 실험 가능성이 높아. 사실 내가 귀국한 이유도 너 때문이야.”

그녀가 깜짝 놀라자 강준석이 서둘러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 내 말은 너의 견해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야.”

소예지가 피식 웃었다.

“선배랑 함께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저녁, 소예지는 딸에게 줄 풍경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별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자 고하슬은 매우 좋아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고하슬이 기뻐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가 왔나 봐요.”

소예지가 뒤쫓아 나왔을 때 고하슬은 이미 고이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 보고 싶었어?”

“네. 아빠, 선물은요?”

고이한은 다시 차 트렁크로 돌아가 예쁜 인형을 꺼냈다.

“마음에 들어?”

“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에게 향했다.

“네 선물은 내일 줄게.”

그러자 소예지가 무심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어.”

고이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의 선물을 뜯어주려고 가위를 찾았다.

소예지는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이한이 돌아와 고하슬과 놀아줘서 잠시 일할 틈이 생겼다.

저녁 식사 시간 고이한이 고하슬에게 말했다.

“할머니랑 왕할머니가 귀국하셨어. 내일 만나러 갈까?”

소예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출장 갔다더니 어머님이랑 할머니를 모시고 온 거였어?’

고하슬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럼 할머니 집에서 지내도 돼요?”

“내일 주말이니까 아빠가 데려다줄게.”

고이한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설이 다가와 함께 설을 쇠려고 고이한이 시어머니와 할머니를 미리 모셔왔고 설 이후에 국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소예지는 생각했다.

저녁, 소예지는 고하슬을 재운 다음 서재에 가려 했다. 그때 고이한이 안방에서 나오면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달래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지금 갈게. 몇 분 안에 도착할 거야.”

잠시 후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별장에서 몇 분 거리면 심유빈의 집이겠지.’

...

아침 식사 시간, 양희순은 무심코 고이한이 새벽 2시에 들어왔다고 말해버렸다. 말한 후에는 소예지의 표정을 몰래 살폈다.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때 고이한이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양희순은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일을 봤다.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사랑스럽고 예쁜 헤어스타일을 해주고 핑크 패딩을 입혔다. 젤리가 옆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는데 아이와 많이 친해 보였다.

“아빠, 젤리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요?”

고하슬이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고하슬의 패딩 지퍼를 올려주었다.

“할머니 집이 너무 커서 혹시라도 젤리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젤리는 요 며칠 엄마한테 맡기자.”

고하슬은 약간 시무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고이한이 차를 몰고 집을 나섰고 소예지는 그의 차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아주머니, 점심이랑 저녁 다 집에서 안 먹으니까 내 건 하지 않아도 돼요.”

소예지가 뒤돌아 양희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오늘 실험실에서 강준석의 환영회를 열기로 했기에 저녁은 밖에서 먹어야 했다. 점심은 실험실에 갔다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소예지는 의대 실험동에 도착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혁을 만났다. 윤혁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지야, 좋은 소식이 있어. 여러 회사에서 협력 의향서를 보내왔는데 모두 실력 있는 대기업들이야.”

소예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수고가 많네요.”

“수고는 무슨. 아 참. 네 남편도 의약계에 관심이 있어? 의약 쪽에 투자할 의향은 없대?”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가장 먼저 바라지 않았던 게 바로 고이한이 이 실험실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소예지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심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은 과학기술과 석유 쪽 투자를 좋아하거든요.”

“시간 되면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 좀 해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잖아.”

“네. 그렇게 할게요.”

소예지는 일단 알겠다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고이한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오후 5시 30분, 실험팀 전체가 윤혁이 예약한 고급 호텔 안의 식당으로 출발했다.

소예지는 계획서를 쓰느라 늦어진 데다가 교통사고 때문에 길이 막혀 7시가 돼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윤혁의 재촉 전화가 또 걸려오자 소예지가 전화를 받았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어요. 금방 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쪽으로 오자마자 소예지는 걸음을 멈췄다. 심유빈이 중요한 연회라도 참석하려는지 섹시한 샴페인 골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바로 소예지의 남편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심유빈과 고이한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침 일찍 하슬이를 어머님 댁에 데려다준 게 혹시 심유빈이랑 단둘이 주말을 보내기 위해서였어?’

비록 지금 고이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그의 외도 장면을 직접 목격하니 여전히 치가 떨렸다.

소예지가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이미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고 윤혁이 그녀를 맞이했다.

“예지야,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얼른 강 박사님 옆에 앉아. 이따가 술도 한잔 따라드려야지.”

소예지가 강준석의 옆에 앉자 몇몇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안채린도 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윤혁이 말린 바람에 앉지 못했다. 알고 보니 소예지를 앉히려고 일부러 강준석의 옆자리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는 강준석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명 아래 소예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강준석은 더욱 멋있고 젠틀했다. 나란히 앉아 있으니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안채린은 질투 섞인 눈빛으로 소예지를 째려봤지만 앞으로 일하면서 전문 지식으로 소예지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윤혁이 일어나 잔을 들었다.

“실험실을 설립한 건 매우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일단 가장 큰 공을 세운 소예지 씨에게 한잔 올립시다. 소예지 씨가 있었기에 실험실을 설립할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안채린이 속으로 비웃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애가 그런 방안을 세웠다고?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방안을 베낀 거겠지.’

소예지는 웃으면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잔을 들었다. 나이는 젊어도 침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고 겸손하면서 비굴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늘 밤의 남자 주인공에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바로 천재 의학 박사 강준석 씨입니다. 강준석 씨의 합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강준석에게 술을 올렸다. 강준석은 안경을 올리며 남다른 분위기로 잔을 들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라 흥겹게 얘기를 나눴고 앞으로 실험실을 운영해나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9시 30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환영회가 끝이 났다. 강준석은 소예지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렸다.

부드럽게 열린 문 뒤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바로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고이한이 깊은 눈빛으로 문밖에 있는 소예지와 강준석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이한 씨, 여기서 다 뵙네요.”

강준석은 고이한에게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이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지 씨, 먼저 가세요. 다음에 또 봐요.”

강준석은 소예지에게 폐를 끼칠까 봐 함께 가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소예지는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내렸다.

소예지는 차를 가져왔기에 고이한과 함께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실외 주차장으로 가서 잠금을 해제하고 차에 타고는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빌라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예지는 갑자기 아랫배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생리인 걸 알아채고는 차를 빌라 단지 옆의 백화점 앞에 세워두고 생리대를 사러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온 후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오늘 밤 휴가 낼 수 있을까요? 제 딸이 아파서요.”

소예지가 서둘러 말했다.

“얼른 딸한테 가보세요.”

양희순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양희순이 나가고 소예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샤워했다. 그리고 꿀물을 타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연구 계획서를 쓸 준비를 했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소예지는 피곤한 나머지 미간을 주물렀다. 그때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이한이 들어온 것이었다.

오늘 밤은 고하슬도 집에 없고 양희순도 휴가를 내어 집에 그녀와 고이한 둘뿐이었다.

문득 불편해진 소예지는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방이 2층에 있어 3층에서 내려가는데 고이한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소예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를 건넸다.

“왔어?”

고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심유빈의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소예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이를 닦았다. 책을 잠깐 보다가 잘 생각이었다.

20분 후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고이한이 검은색 잠옷 가운을 걸치고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 뒤로 젖혀져 있었는데 막 샤워를 마친 듯했다.

“무슨 일이야?”

소예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슬이 집에 없으니까 각방 쓸 필요 없지.”

고이한이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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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엥그리멍
양육권 가지려면 직업도 있어야하고 딸하고 유대감도 쌓아야하니 엄청 뒤에나 이혼이 시작하려나요? 당당히 바람피우고 온 시댁 식구들 한테 무시당하면서 남편과 강제 잠자리까지 하는건 아니겠죠? 이제 100화 좀 넘은듯 한데 이거 지금 시작안하는게 나을듯.속만 터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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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예지가 차에 올라탔을 때는 어느덧 오후 네 시 반을 훌쩍 넘긴 뒤였다. 슬슬 딸을 데리러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려 퍼졌고, 소예지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하던 소식은 아니었다.소예지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임현욱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직업을 떠올리자 지금 같은 시기엔 국내로 연락을 취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자연스레 떠올랐고 그 사실이 이해되면서도 마음 한편이 묘하게 허전해졌다.한편, 안씨 가문 저택.오늘은 드물게 가족이 모두 집에 모이는 날이었다.회사 상장 이후, 안영수는 눈에 띄게 더 바빠졌다.회사 일과 접대가 하루를 가득 채우다 보니 집에서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장인화 역시 그런 남편에게 불만이 없지는 않았지만 회사가 이만큼 큰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마냥 타박하기도 어려웠다.그저 이 모든 재산은 언젠가 딸에게 돌아갈 몫이니 결국엔 다 자식들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안채린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잠시 후 심유빈이 거실로 들어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소예지, 아직 안 나갔어?”심유빈의 질문에 안채린은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야. 걔가 맡고 있는 신약 테스트가 끝나지 않았거든.”“설마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요즘 들어 소예지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던 심유빈은 그녀의 속내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같은 실험실에서 일하고 있는 안채린이라면 조금 더 잘 알 거라 생각한 것이다.안채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듯 심유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나 MD의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프로젝트에 들어가고 싶어. 형부한테 이야기 좀 해줄 수 있어?”이 집에서 ‘형부’라는 호칭은 이미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었다.고이한이 심유빈의 미래 남편이라는 사실은 사실상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었다.안채린 역시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그 부탁에 심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579화

    게다가 이 바닥은 믿음보다 술수가 먼저인 곳이었다.상대가 내미는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가는 어느새 발목을 잡히기 십상이었다.“그 안에 어떤 의도도 없어.”고이한은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앞으로 하슬에게 남겨줄 안정적인 미래를 마련해주고 싶을 뿐이야.”하지만 소예지의 눈빛은 싸늘했다.이 남자의 사고방식은 이미 예전부터 똑같았다. 한 번 무너진 신뢰를 되돌리는 데는 수백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그 차가운 반응은 고이한의 눈에도 분명하게 들어왔다. 이 정도의 투자 조건이라면 누구라도 혹할 만했지만 소예지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스치지 않았다.“소예지, 감정은 감정이고 사업은 사업이야.”고이한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이번 제안은 당신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이야. 길어도 석 달 안에 회사는 상장될 거니까.”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덧붙였다.“나랑 직접 얽히기 싫다면 임 이사에게 일임해도 상관없어.”그 순간까지 이를 악문 채 버티고 있던 소예지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당신 같은 사람의 ‘호의’엔 관심 없어.”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고이한의 손이 미세하게 멈췄다.가슴이 한 번 들썩이는 듯했지만 그는 곧 낮게 대답했다.“좋을 대로 해.”문이 열리고, 그가 나서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임재석이 깜짝 놀라 두 걸음 물러섰다.고이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소예지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단번에 감이 왔다.“고 대표님, 이번 투자 건은 정말 저희도...”임재석은 다급히 따라붙었지만 고이한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곧장 자리를 떠났다.그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임재석은 속으로 절망했다.‘끝났구나. 이 10% 지분은 날아갔네.’잠시 후,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소예지가 걸어 나오자, 임재석의 안색이 급히 변했다.“대표님... 설마, 거절하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578화

    소예지가 차에 막 올라탄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여보세요, 임 이사님.”“대표님, 아직 안 가셨죠?”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막 건물 앞에 도착했어요.”“다행이네요. 죄송하지만 잠깐만 다시 올라와 주실 수 있을까요? 투자 건과 관련해서 급히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마침 오후 일정에 여유가 있었고 특별히 서두를 일도 없었다. 소예지는 잠시 망설이다 곧바로 대답했다.“네, 지금 올라갈게요.”“8층 소회의실입니다.”임재석이 덧붙였다.소예지는 다시 대로를 돌아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무심코 2층 난간 쪽을 올려다봤지만 윤하준과 하종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오르며 그녀는 임재석이 자신을 다시 부른 이유를 곱씹었다. 투자 관련 업무는 원래부터 임재석의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호텔 사업 외에도 그녀는 다섯 개의 계열 회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안정적인 투자만으로도 운영 자금이 충분히 여유로운 상태였다.8층에 도착하자 임재석의 비서가 바쁘게 다가왔다.“대표님, 오셨군요. 이쪽입니다.”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향했다.비서가 문을 열어주는 순간, 안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소예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눈빛에는 차가운 기색이 어렸다.‘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임재석은 그녀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대표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그러나 소예지의 시선은 곧장 다른 한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임재석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남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임재석은 잠시 당황한 듯 표정이 굳었지만 곧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일단 앉으시죠.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설명드리겠습니다.”소예지의 냉랭한 기색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이한에게도 분명히 전달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이야기해 보세요.”소예지가 먼저 운을 뗐다.임재석은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대표님도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577화

    만약 편정우의 실험실에 투자한 곳이 정말 그런 회사라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뇌–기계 인터페이스 기술은 단지 의학 분야에만 머무는 연구가 아니었다. 향후 우주항공이나 고위 기술 산업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이 큰 프로젝트였다.“윤하준 씨, 혹시 그 회사가 고 대표랑 연관 있는 건 아니겠죠?”소예지는 빙 돌리지 않고 곧장 물었다. 그녀는 고이한이 운영하는 계열사들의 세부적인 사업 포지션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윤하준은 한참을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내가 아는 한, 노바스페이스와 고 대표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요. 고 대표 쪽은 최근 몇 년간 의료 기술이나 AI 분야에만 집중해 왔고요. 왜요, 혹시 고 대표가 편 교수 쪽에 다시 손을 뻗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고 대표가 운영하는 MD도 뇌과학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어요. 예전에 편 교수에게 직접 접촉한 적도 있었고요.”“그래요?”윤하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그럼, 편 교수님은 그 제안을 긍정적으로 보신 것 같아요?”소예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윤하준의 눈빛이 점점 진지해졌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고이한의 사업 확장은 상당히 거칠고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 만큼 바쁘게 움직였고 정치권 인사들과의 접촉이 잦아 수도권을 오간다는 소문도 있었다.비록 세 사람은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였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의 사업이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서로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었다.“편 교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연구의 독립성과 순수성이에요.”소예지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투자 배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연구 자체가 흔들릴 수 있어요. 고 대표는 교수님이 원하는 투자자가 아니에요.”그 말에는 분명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윤하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잠시 말을 고르던 그는 결국 덧붙였다.“정식 계약 전에 전문가에게 투자사의 배경 조사는 꼭 받아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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