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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오늘 밤 출장 갔다가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다. 소예지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고하슬은 아빠를 일주일 동안 못 본다는 소리에 밥도 먹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이한이 선물을 사주겠다고 달래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소예지는 일하면서 딸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실험실 설립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소예지는 고하슬을 데려다준 다음 곧장 A시 의대로 향했다. 오늘 회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동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뒷모습의 누군가가 문 앞에서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다. 소예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바로 강준석이었다.

그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얘기를 나누면서 긴 손가락으로 습관적으로 금테 안경을 올렸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강준석이 고개를 돌리자 소예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소예지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졌고 강준석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지야, 또 만났구나.”

그녀는 재빨리 감정을 억눌렀다.

“준석 선배.”

강준석이 웃으면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저번에 봤을 땐 네 아빠랑 닮았다는 걸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참 많이 닮았구나. 특히 눈이.”

소예지도 웃어 보였다.

“선배는 여기에 무슨 일로 왔어?”

“국내에 세계 최대 유전자 검사 기지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 온 김에 임용 절차도 밟고.”

소예지가 흥분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서 일하게 된 거야?”

강준석이 안경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어”

“환영해. 선배랑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소예지는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강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 좋게 너의 아빠랑 일했었고 또 너랑 동문도 되었는데 이번에는 동료가 돼서 나도 너무 기뻐.”

그때 옆 복도에서 두 사람이 서류를 안고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안채린이었는데 강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남자한테 첫눈에 반했어?”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를 툭 쳤다.

안채린의 예쁜 얼굴에 수줍음이 감돌았다.

“저 남자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강준석이라고 M국 의학계 천재야.”

안채린의 두 눈에 흠모하는 빛이 가득했다.

“뭐야? 지금 강준석이랑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소예지 아니야?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안채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소예지를 훑어봤다. 최근 회의마다 참석하는 걸 보면 소예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 덕에 겨우 들어온 거라고 추측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중요했다. 소예지의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회의에서 강준석은 실험팀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의학계의 젊은 천재가 자발적으로 귀국하여 이 실험에 참여했다는 건 실로 뜻밖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예지야, 토요일 저녁에 강 박사 환영회를 열기로 했는데 꼭 참석해. 알았지?”

윤혁의 말에 소예지가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가야죠.”

“강 박사 덕분에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

그때 강준석이 선배들과 얘기를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자 윤혁이 웃으며 말했다.

“강 박사님, 그럼 전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가볼게요. 오늘 밤 환영회에서 다시 얘기 나누고 술도 한잔해요.”

“그럽시다.”

강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강준석이 놀란 표정으로 소예지에게 물었다.

“종양이 미세 환경에서 CAR-T 세포 생존 시간을 90일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이건 소예지가 지난 6년 동안 계속 연구해온 과제였다.

“아빠가 제공해주신 몇 가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견해를 대담하게 제시해봤어. 물론 지금은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아.”

소예지의 말에 강준석의 두 눈에 존경심이 가득해졌다.

“너의 분석 보고서를 봤는데 모두 매우 선구적이고 실험 가능성이 높아. 사실 내가 귀국한 이유도 너 때문이야.”

그녀가 깜짝 놀라자 강준석이 서둘러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 내 말은 너의 견해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야.”

소예지가 피식 웃었다.

“선배랑 함께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저녁, 소예지는 딸에게 줄 풍경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별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자 고하슬은 매우 좋아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고하슬이 기뻐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가 왔나 봐요.”

소예지가 뒤쫓아 나왔을 때 고하슬은 이미 고이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 보고 싶었어?”

“네. 아빠, 선물은요?”

고이한은 다시 차 트렁크로 돌아가 예쁜 인형을 꺼냈다.

“마음에 들어?”

“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에게 향했다.

“네 선물은 내일 줄게.”

그러자 소예지가 무심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어.”

고이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의 선물을 뜯어주려고 가위를 찾았다.

소예지는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이한이 돌아와 고하슬과 놀아줘서 잠시 일할 틈이 생겼다.

저녁 식사 시간 고이한이 고하슬에게 말했다.

“할머니랑 왕할머니가 귀국하셨어. 내일 만나러 갈까?”

소예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출장 갔다더니 어머님이랑 할머니를 모시고 온 거였어?’

고하슬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럼 할머니 집에서 지내도 돼요?”

“내일 주말이니까 아빠가 데려다줄게.”

고이한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설이 다가와 함께 설을 쇠려고 고이한이 시어머니와 할머니를 미리 모셔왔고 설 이후에 국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소예지는 생각했다.

저녁, 소예지는 고하슬을 재운 다음 서재에 가려 했다. 그때 고이한이 안방에서 나오면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달래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지금 갈게. 몇 분 안에 도착할 거야.”

잠시 후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별장에서 몇 분 거리면 심유빈의 집이겠지.’

...

아침 식사 시간, 양희순은 무심코 고이한이 새벽 2시에 들어왔다고 말해버렸다. 말한 후에는 소예지의 표정을 몰래 살폈다.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때 고이한이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양희순은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일을 봤다.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사랑스럽고 예쁜 헤어스타일을 해주고 핑크 패딩을 입혔다. 젤리가 옆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는데 아이와 많이 친해 보였다.

“아빠, 젤리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요?”

고하슬이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고하슬의 패딩 지퍼를 올려주었다.

“할머니 집이 너무 커서 혹시라도 젤리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젤리는 요 며칠 엄마한테 맡기자.”

고하슬은 약간 시무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고이한이 차를 몰고 집을 나섰고 소예지는 그의 차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아주머니, 점심이랑 저녁 다 집에서 안 먹으니까 내 건 하지 않아도 돼요.”

소예지가 뒤돌아 양희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오늘 실험실에서 강준석의 환영회를 열기로 했기에 저녁은 밖에서 먹어야 했다. 점심은 실험실에 갔다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소예지는 의대 실험동에 도착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혁을 만났다. 윤혁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지야, 좋은 소식이 있어. 여러 회사에서 협력 의향서를 보내왔는데 모두 실력 있는 대기업들이야.”

소예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수고가 많네요.”

“수고는 무슨. 아 참. 네 남편도 의약계에 관심이 있어? 의약 쪽에 투자할 의향은 없대?”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가장 먼저 바라지 않았던 게 바로 고이한이 이 실험실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소예지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심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은 과학기술과 석유 쪽 투자를 좋아하거든요.”

“시간 되면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 좀 해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잖아.”

“네. 그렇게 할게요.”

소예지는 일단 알겠다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고이한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오후 5시 30분, 실험팀 전체가 윤혁이 예약한 고급 호텔 안의 식당으로 출발했다.

소예지는 계획서를 쓰느라 늦어진 데다가 교통사고 때문에 길이 막혀 7시가 돼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윤혁의 재촉 전화가 또 걸려오자 소예지가 전화를 받았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어요. 금방 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쪽으로 오자마자 소예지는 걸음을 멈췄다. 심유빈이 중요한 연회라도 참석하려는지 섹시한 샴페인 골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바로 소예지의 남편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심유빈과 고이한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침 일찍 하슬이를 어머님 댁에 데려다준 게 혹시 심유빈이랑 단둘이 주말을 보내기 위해서였어?’

비록 지금 고이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그의 외도 장면을 직접 목격하니 여전히 치가 떨렸다.

소예지가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이미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고 윤혁이 그녀를 맞이했다.

“예지야,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얼른 강 박사님 옆에 앉아. 이따가 술도 한잔 따라드려야지.”

소예지가 강준석의 옆에 앉자 몇몇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안채린도 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윤혁이 말린 바람에 앉지 못했다. 알고 보니 소예지를 앉히려고 일부러 강준석의 옆자리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는 강준석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명 아래 소예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강준석은 더욱 멋있고 젠틀했다. 나란히 앉아 있으니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안채린은 질투 섞인 눈빛으로 소예지를 째려봤지만 앞으로 일하면서 전문 지식으로 소예지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윤혁이 일어나 잔을 들었다.

“실험실을 설립한 건 매우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일단 가장 큰 공을 세운 소예지 씨에게 한잔 올립시다. 소예지 씨가 있었기에 실험실을 설립할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안채린이 속으로 비웃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애가 그런 방안을 세웠다고?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방안을 베낀 거겠지.’

소예지는 웃으면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잔을 들었다. 나이는 젊어도 침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고 겸손하면서 비굴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늘 밤의 남자 주인공에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바로 천재 의학 박사 강준석 씨입니다. 강준석 씨의 합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강준석에게 술을 올렸다. 강준석은 안경을 올리며 남다른 분위기로 잔을 들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라 흥겹게 얘기를 나눴고 앞으로 실험실을 운영해나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9시 30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환영회가 끝이 났다. 강준석은 소예지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렸다.

부드럽게 열린 문 뒤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바로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고이한이 깊은 눈빛으로 문밖에 있는 소예지와 강준석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이한 씨, 여기서 다 뵙네요.”

강준석은 고이한에게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이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지 씨, 먼저 가세요. 다음에 또 봐요.”

강준석은 소예지에게 폐를 끼칠까 봐 함께 가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소예지는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내렸다.

소예지는 차를 가져왔기에 고이한과 함께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실외 주차장으로 가서 잠금을 해제하고 차에 타고는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빌라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예지는 갑자기 아랫배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생리인 걸 알아채고는 차를 빌라 단지 옆의 백화점 앞에 세워두고 생리대를 사러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온 후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오늘 밤 휴가 낼 수 있을까요? 제 딸이 아파서요.”

소예지가 서둘러 말했다.

“얼른 딸한테 가보세요.”

양희순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양희순이 나가고 소예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샤워했다. 그리고 꿀물을 타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연구 계획서를 쓸 준비를 했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소예지는 피곤한 나머지 미간을 주물렀다. 그때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이한이 들어온 것이었다.

오늘 밤은 고하슬도 집에 없고 양희순도 휴가를 내어 집에 그녀와 고이한 둘뿐이었다.

문득 불편해진 소예지는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방이 2층에 있어 3층에서 내려가는데 고이한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소예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를 건넸다.

“왔어?”

고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심유빈의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소예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이를 닦았다. 책을 잠깐 보다가 잘 생각이었다.

20분 후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고이한이 검은색 잠옷 가운을 걸치고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 뒤로 젖혀져 있었는데 막 샤워를 마친 듯했다.

“무슨 일이야?”

소예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슬이 집에 없으니까 각방 쓸 필요 없지.”

고이한이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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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엥그리멍
양육권 가지려면 직업도 있어야하고 딸하고 유대감도 쌓아야하니 엄청 뒤에나 이혼이 시작하려나요? 당당히 바람피우고 온 시댁 식구들 한테 무시당하면서 남편과 강제 잠자리까지 하는건 아니겠죠? 이제 100화 좀 넘은듯 한데 이거 지금 시작안하는게 나을듯.속만 터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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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예지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이서연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자, 커피 사러 간 김에 네 것도 하나 챙겨왔어.”“고마워.”소예지는 커피를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이서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놓인 꽃다발로 옮겨갔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이 꽃, 꽤 예쁘다.”하지만 소예지에게 그 꽃은 더없이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녀는 시선을 돌린 채 무심하게 말했다.“너 키울래? 줄게.”“정말?”이서연의 눈빛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런 꽃은 관리만 잘하면 열흘도 넘게 싱그럽게 피어 있을 수 있었다.“응. 난 돌볼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네가 데려가.”소예지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서연은 기쁜 마음으로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을 나섰고 소예지는 다시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휴대폰이 진동하며 메시지 알림이 떴다.화면에는 윤하준에게서 온 축하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녀는 뜻밖이라는 듯 잠시 눈을 깜빡였다가 마음이 은근히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고마워요.]소예지는 짧고 정중하게 답장을 보냈다. 곧바로 윤하준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앞으론 ‘소 박사님’이라고 불러야겠는걸요?]그의 가벼운 농담에 소예지는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박사’라는 호칭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 말 안에 담긴 진심 어린 축하만큼은 분명히 전해졌다.그때 또 하나의 이메일 알림이 떴고 그녀는 곧장 확인했다.발신자는 편정우였다.[나 목요일에 귀국해. 도착하면 연락하자.]소예지는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들어 자신의 연락처를 메일로 회신했다.[귀국 환영해요. 공항에 도착하시면 제가 바로 마중 나갈게요.]편정우는 평소에도 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었다. 오직 연구에만 몰두하는 성격답게 이미 국제 신경의학계의 권위자로 자리 잡은 인물이었다.그는 소예지의 스승이자, 아버지처럼 따랐던 존재였고 소영욱이 세상을 떠난 뒤, 그녀를 묵묵히 돌봐준 유일한 어른이기도 했다.소예지는 대학 2학년 때 자퇴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어떤 학위보다 깊고 값졌다. 그녀가 지금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569화

    소예지와 이서연이 화장실을 나선 뒤, 남겨진 안채린은 세면대에 등을 기댄 채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었다. 그러다 피식, 비웃듯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 박사라고? 걔가 진짜 박사라니...”곁에 서 있던 서지나가 조심스럽게 위로했다.“선배,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선배도 분명 곧 더 잘나가실 거예요.”하지만 안채린의 마음 깊숙한 곳에 도사린 질투와 부러움은 말로 다 달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소예지가 받은 그 영예는 그녀가 밤잠을 설쳐 가며 그토록 갈망해 왔던 자리였다.그런데 이제 소예지는 그 모든 것을 그것도 학교의 파격적인 결정이라는 방식으로 손에 넣었고 그 사실은 안채린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없이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소예지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양정화가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자, 한 번 더. 소예지를 위해 축배를 듭시다.”“건배!”사람들은 일제히 잔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고 축하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무르익었다. 안채린 역시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얼굴에 드리운 미묘한 표정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양정화가 있는 자리에서 감정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말없이 숟가락을 들었을 뿐, 그 이상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식사가 끝난 뒤, 소예지는 꽃다발을 안은 채 사무실로 돌아왔다. 강준석과 인사를 나누며 작별을 고하던 순간, 그녀는 고개를 숙여 꽃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이 꽃... 혹시 강 선배가 보낸 거예요?”강준석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급하게 오느라 꽃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어. 아마 양 교수님이 미리 준비하신 게 아닐까?”소예지는 눈을 한 번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현장에 함께 있었음에도 양정화가 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강 선배, 운전 조심해서 가세요.”그녀는 미소로 인사를 건넸고, 강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그 뒤, 함께 실험실로 돌아오던 이서연이 조심스럽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568화

    “오늘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양정화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더 단단하고 또렷했다.“교내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의한 결과 소예지 씨에게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동시에 본교 초빙 교수로 정식 임명하기로 했습니다.”그 말이 끝나는 순간, 식당 안은 짧은 침묵에 잠겼다.그리고 이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안채린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얼어붙은 미소 뒤로 쏟아지는 환호와 축하의 소리 속에서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며 낮게 중얼거렸다.“말도 안 돼...”반면, 가장 먼저 소예지를 꼭 끌어안은 사람은 이서연이었다.“소예지, 진짜 대단해! 나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정말로... 넌 해낼 줄 알았어!”뒤이어 동료들이 하나둘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고,강준석 역시 말없이 잔을 들어 소예지와 가볍게 부딪쳤다.“정말 축하해, 소예지.”소예지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어느새 그녀의 주변은 축하와 환호로 가득 찼고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작은 축제처럼 그 중심에는 소예지가 서 있었다.그때 식당 입구에서 꽃다발을 든 직원 한 명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실례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소 박사님’ 계신가요?”누군가 소예지를 가리켰고 직원은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머릿속에 그려 두었던 ‘박사’의 이미지와 달랐던 듯, 젊고 단정한 여성을 마주한 순간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소 박사님, 이 꽃은 어떤 손님께서 주문하신 겁니다.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예지는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양정화와 강준석을 향했고 두 사람 모두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아마... 두 분 중 한 분이겠지.’그렇게 생각하며 소예지는 마음속에 조용히 감사의 뜻을 담아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식사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소예지는 잠시 자리를 비워 화장실로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567화

    소예지는 충격에 휩싸인 채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임명장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놀람과 감격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A시 의과대학.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최고 명문 의과대학의 박사 임명장이었다. 그 무게는 단순히 한 장의 종이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워요.”소예지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혀 그렇지 않아.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양정화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네가 낸 특허 성과 하나하나가 이미 국제적인 수준을 넘어섰어. 특히 이번 신약 임상의 결과는 학교 측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지. 그래서 이사회에서도 네게 박사 학위를 파격적으로 수여하자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된 거야.”소예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임명장 위에 새겨진 학교 로고를 어루만졌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는 생전 아버지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네가 꼭 박사 학위를 따는 걸 보고 싶다.’따뜻하면서도 단단했던 그 목소리가 이토록 늦은 시점에야 비로소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숨을 고르는 것조차 잊은 채,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오늘은 내가 밥 사기로 했어. 점심에 실험실 팀 전부 불러 놨으니까 가서 일 마무리하고 내려와.”양정화는 소예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소예지의 눈가가 붉게 물들더니 이내 감정을 참지 못한 채 그녀를 끌어안았다.“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고마워할 사람은 나보다도...”양정화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이번 건, 나랑 이 교수님이 공동으로 추천한 거였단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참고 미소 지었다.“그럼 다음에 이 교수님 뵙게 되면 꼭 감사 인사드릴게요.”“네 성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 이미 다들 인정하고 있어.”양정화는 흐뭇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네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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