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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오늘 밤 출장 갔다가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다. 소예지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고하슬은 아빠를 일주일 동안 못 본다는 소리에 밥도 먹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이한이 선물을 사주겠다고 달래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소예지는 일하면서 딸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실험실 설립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소예지는 고하슬을 데려다준 다음 곧장 A시 의대로 향했다. 오늘 회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동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뒷모습의 누군가가 문 앞에서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다. 소예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바로 강준석이었다.

그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얘기를 나누면서 긴 손가락으로 습관적으로 금테 안경을 올렸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강준석이 고개를 돌리자 소예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소예지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졌고 강준석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지야, 또 만났구나.”

그녀는 재빨리 감정을 억눌렀다.

“준석 선배.”

강준석이 웃으면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저번에 봤을 땐 네 아빠랑 닮았다는 걸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참 많이 닮았구나. 특히 눈이.”

소예지도 웃어 보였다.

“선배는 여기에 무슨 일로 왔어?”

“국내에 세계 최대 유전자 검사 기지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 온 김에 임용 절차도 밟고.”

소예지가 흥분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서 일하게 된 거야?”

강준석이 안경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어”

“환영해. 선배랑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소예지는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강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 좋게 너의 아빠랑 일했었고 또 너랑 동문도 되었는데 이번에는 동료가 돼서 나도 너무 기뻐.”

그때 옆 복도에서 두 사람이 서류를 안고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안채린이었는데 강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남자한테 첫눈에 반했어?”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를 툭 쳤다.

안채린의 예쁜 얼굴에 수줍음이 감돌았다.

“저 남자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강준석이라고 M국 의학계 천재야.”

안채린의 두 눈에 흠모하는 빛이 가득했다.

“뭐야? 지금 강준석이랑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소예지 아니야?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안채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소예지를 훑어봤다. 최근 회의마다 참석하는 걸 보면 소예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 덕에 겨우 들어온 거라고 추측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중요했다. 소예지의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회의에서 강준석은 실험팀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의학계의 젊은 천재가 자발적으로 귀국하여 이 실험에 참여했다는 건 실로 뜻밖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예지야, 토요일 저녁에 강 박사 환영회를 열기로 했는데 꼭 참석해. 알았지?”

윤혁의 말에 소예지가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가야죠.”

“강 박사 덕분에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

그때 강준석이 선배들과 얘기를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자 윤혁이 웃으며 말했다.

“강 박사님, 그럼 전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가볼게요. 오늘 밤 환영회에서 다시 얘기 나누고 술도 한잔해요.”

“그럽시다.”

강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강준석이 놀란 표정으로 소예지에게 물었다.

“종양이 미세 환경에서 CAR-T 세포 생존 시간을 90일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이건 소예지가 지난 6년 동안 계속 연구해온 과제였다.

“아빠가 제공해주신 몇 가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견해를 대담하게 제시해봤어. 물론 지금은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아.”

소예지의 말에 강준석의 두 눈에 존경심이 가득해졌다.

“너의 분석 보고서를 봤는데 모두 매우 선구적이고 실험 가능성이 높아. 사실 내가 귀국한 이유도 너 때문이야.”

그녀가 깜짝 놀라자 강준석이 서둘러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 내 말은 너의 견해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야.”

소예지가 피식 웃었다.

“선배랑 함께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저녁, 소예지는 딸에게 줄 풍경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별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자 고하슬은 매우 좋아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고하슬이 기뻐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가 왔나 봐요.”

소예지가 뒤쫓아 나왔을 때 고하슬은 이미 고이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 보고 싶었어?”

“네. 아빠, 선물은요?”

고이한은 다시 차 트렁크로 돌아가 예쁜 인형을 꺼냈다.

“마음에 들어?”

“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에게 향했다.

“네 선물은 내일 줄게.”

그러자 소예지가 무심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어.”

고이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의 선물을 뜯어주려고 가위를 찾았다.

소예지는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이한이 돌아와 고하슬과 놀아줘서 잠시 일할 틈이 생겼다.

저녁 식사 시간 고이한이 고하슬에게 말했다.

“할머니랑 왕할머니가 귀국하셨어. 내일 만나러 갈까?”

소예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출장 갔다더니 어머님이랑 할머니를 모시고 온 거였어?’

고하슬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럼 할머니 집에서 지내도 돼요?”

“내일 주말이니까 아빠가 데려다줄게.”

고이한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설이 다가와 함께 설을 쇠려고 고이한이 시어머니와 할머니를 미리 모셔왔고 설 이후에 국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소예지는 생각했다.

저녁, 소예지는 고하슬을 재운 다음 서재에 가려 했다. 그때 고이한이 안방에서 나오면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달래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지금 갈게. 몇 분 안에 도착할 거야.”

잠시 후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별장에서 몇 분 거리면 심유빈의 집이겠지.’

...

아침 식사 시간, 양희순은 무심코 고이한이 새벽 2시에 들어왔다고 말해버렸다. 말한 후에는 소예지의 표정을 몰래 살폈다.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때 고이한이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양희순은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일을 봤다.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사랑스럽고 예쁜 헤어스타일을 해주고 핑크 패딩을 입혔다. 젤리가 옆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는데 아이와 많이 친해 보였다.

“아빠, 젤리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요?”

고하슬이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고하슬의 패딩 지퍼를 올려주었다.

“할머니 집이 너무 커서 혹시라도 젤리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젤리는 요 며칠 엄마한테 맡기자.”

고하슬은 약간 시무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고이한이 차를 몰고 집을 나섰고 소예지는 그의 차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아주머니, 점심이랑 저녁 다 집에서 안 먹으니까 내 건 하지 않아도 돼요.”

소예지가 뒤돌아 양희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오늘 실험실에서 강준석의 환영회를 열기로 했기에 저녁은 밖에서 먹어야 했다. 점심은 실험실에 갔다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소예지는 의대 실험동에 도착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혁을 만났다. 윤혁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지야, 좋은 소식이 있어. 여러 회사에서 협력 의향서를 보내왔는데 모두 실력 있는 대기업들이야.”

소예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수고가 많네요.”

“수고는 무슨. 아 참. 네 남편도 의약계에 관심이 있어? 의약 쪽에 투자할 의향은 없대?”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가장 먼저 바라지 않았던 게 바로 고이한이 이 실험실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소예지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심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은 과학기술과 석유 쪽 투자를 좋아하거든요.”

“시간 되면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 좀 해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잖아.”

“네. 그렇게 할게요.”

소예지는 일단 알겠다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고이한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오후 5시 30분, 실험팀 전체가 윤혁이 예약한 고급 호텔 안의 식당으로 출발했다.

소예지는 계획서를 쓰느라 늦어진 데다가 교통사고 때문에 길이 막혀 7시가 돼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윤혁의 재촉 전화가 또 걸려오자 소예지가 전화를 받았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어요. 금방 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쪽으로 오자마자 소예지는 걸음을 멈췄다. 심유빈이 중요한 연회라도 참석하려는지 섹시한 샴페인 골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바로 소예지의 남편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심유빈과 고이한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침 일찍 하슬이를 어머님 댁에 데려다준 게 혹시 심유빈이랑 단둘이 주말을 보내기 위해서였어?’

비록 지금 고이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그의 외도 장면을 직접 목격하니 여전히 치가 떨렸다.

소예지가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이미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고 윤혁이 그녀를 맞이했다.

“예지야,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얼른 강 박사님 옆에 앉아. 이따가 술도 한잔 따라드려야지.”

소예지가 강준석의 옆에 앉자 몇몇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안채린도 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윤혁이 말린 바람에 앉지 못했다. 알고 보니 소예지를 앉히려고 일부러 강준석의 옆자리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는 강준석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명 아래 소예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강준석은 더욱 멋있고 젠틀했다. 나란히 앉아 있으니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안채린은 질투 섞인 눈빛으로 소예지를 째려봤지만 앞으로 일하면서 전문 지식으로 소예지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윤혁이 일어나 잔을 들었다.

“실험실을 설립한 건 매우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일단 가장 큰 공을 세운 소예지 씨에게 한잔 올립시다. 소예지 씨가 있었기에 실험실을 설립할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안채린이 속으로 비웃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애가 그런 방안을 세웠다고?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방안을 베낀 거겠지.’

소예지는 웃으면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잔을 들었다. 나이는 젊어도 침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고 겸손하면서 비굴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늘 밤의 남자 주인공에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바로 천재 의학 박사 강준석 씨입니다. 강준석 씨의 합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강준석에게 술을 올렸다. 강준석은 안경을 올리며 남다른 분위기로 잔을 들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라 흥겹게 얘기를 나눴고 앞으로 실험실을 운영해나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9시 30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환영회가 끝이 났다. 강준석은 소예지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렸다.

부드럽게 열린 문 뒤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바로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고이한이 깊은 눈빛으로 문밖에 있는 소예지와 강준석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이한 씨, 여기서 다 뵙네요.”

강준석은 고이한에게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이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지 씨, 먼저 가세요. 다음에 또 봐요.”

강준석은 소예지에게 폐를 끼칠까 봐 함께 가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소예지는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내렸다.

소예지는 차를 가져왔기에 고이한과 함께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실외 주차장으로 가서 잠금을 해제하고 차에 타고는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빌라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예지는 갑자기 아랫배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생리인 걸 알아채고는 차를 빌라 단지 옆의 백화점 앞에 세워두고 생리대를 사러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온 후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오늘 밤 휴가 낼 수 있을까요? 제 딸이 아파서요.”

소예지가 서둘러 말했다.

“얼른 딸한테 가보세요.”

양희순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양희순이 나가고 소예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샤워했다. 그리고 꿀물을 타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연구 계획서를 쓸 준비를 했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소예지는 피곤한 나머지 미간을 주물렀다. 그때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이한이 들어온 것이었다.

오늘 밤은 고하슬도 집에 없고 양희순도 휴가를 내어 집에 그녀와 고이한 둘뿐이었다.

문득 불편해진 소예지는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방이 2층에 있어 3층에서 내려가는데 고이한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소예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를 건넸다.

“왔어?”

고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심유빈의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소예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이를 닦았다. 책을 잠깐 보다가 잘 생각이었다.

20분 후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고이한이 검은색 잠옷 가운을 걸치고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 뒤로 젖혀져 있었는데 막 샤워를 마친 듯했다.

“무슨 일이야?”

소예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슬이 집에 없으니까 각방 쓸 필요 없지.”

고이한이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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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유빈의 눈가엔 미묘한 도발이 깃든 미소가 감돌았다.“소예지 씨, 그 목걸이 말이에요. 내가 양보할게요.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내가 관심 없는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돼요.”소예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그녀의 말끝이 슬쩍 심유빈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기울었다. 뜻을 곱씹게 만드는 묘한 말이었다.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고이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호기심과 탐색의 시선으로 소예지를 빤히 응시했고 심유빈 역시 소예지를 천천히 훑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문득 눈앞에 있는 소예지가 반년 전 자신이 알던 사람과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졌다.과거의 소예지는 마음속을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살펴봐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상대가 되어 있었다.그때 강준석과 윤혁이 다가왔다. 윤혁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이한에게 물었다.“고 대표님, 얘기는 잘 끝나셨나요?”고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심유빈을 향해 말했다.“우리 먼저 내려가지.”잠시 후 윤혁 일행은 안내를 받아 귀빈실로 들어갔다. 그 순간 고이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조용한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여보세요.”“이한아, 과학기술원에서 6월에 의학 시상식을 열 예정인데 자네를 시상자로 초청하고 싶다고 하네. 시간 괜찮겠지?”“영광입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좋아, 그럼 만나서 다시 얘기하지.”통화를 마친 고이한은 다시 심유빈에게 다가가 말했다.“지 대표님 쪽에서 연구실 지원을 약속했어.”심유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역시 오빠라면 날 실망시키지 않을 줄 알았어.”“그리고 과학기술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6월에 있을 시상식에 나를 시상자로 초대한다고 해.”심유빈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그럼 나도 따라가도 될까?”그러더니 마치 문득 떠올린 듯 덧붙였다.“내 동생이 주인공이 될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고이한 역시 이번 시상식에서 특효약 개발자가 수상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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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여 점의 경매품은 순식간에 모두 주인을 찾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물품은 심유빈의 차지가 되었다.곧이어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됐다.잔잔한 음악이 부드럽게 흘러나오고 고급 와인의 은은한 향기가 연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참석자들은 여전히 방금 전까지 진행된 경매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소예지가 윤혁에게 물었다.“선배, 곧 9시인데 지 여사님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아마 곧 만날 수 있을 거야.”마침 그때 조명이 바뀌었다. 아늑하던 실내가 은은한 댄스홀 분위기로 변했고 음악도 우아한 춤곡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도윤재는 용기를 내어 안채린에게 춤을 신청했으나 그녀는 춤을 출 줄 모른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민망해진 도윤재를 외면한 채 안채린은 기대를 담은 눈빛으로 강준석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을 초대해 주기를 기다렸다.바로 그 순간 윤혁의 휴대폰 화면이 환히 빛났다. 그는 급히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강준석과 소예지에게 말했다.“지금 나랑 같이 가자.”세 사람은 윤혁을 따라 연회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채린은 질투 어린 눈길로 소예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내내 강준석의 시선은 오직 소예지에게만 향해 있었다.한편, 2층의 호화로운 휴게실 앞에서는 심유빈이 고이한의 넥타이를 부드럽게 고쳐주고 있었다.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이한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이 소예지와 마주쳤다. 화려한 조명 아래 선 소예지와 강준석은 마치 서로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연인 같았다.고이한은 심유빈에게 짧게 말했다.“나 먼저 들어갈게.”“그래.”심유빈이 사랑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고이한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심유빈은 우아한 걸음으로 소예지 일행에게 다가왔다.“강 선생님, 또 뵙네요.”윤혁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고이한은 분명 소예지의 남편인데 방금 본 심유빈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부적절해 보였다. 그러나 소예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소예지 씨, 잠깐 기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5화

    소예지는 조용히 자리를 골라 앉았고 마침 맞은편에 고급스럽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두 미녀가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들은 소예지가 단숨에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여배우들이었다.“공익광고 모델, 원래 이수정 아니었어? 갑자기 피아니스트 심유빈으로 왜 바뀐 거야?”“고신 그룹하고 지온 재단이 원래 협력 관계였잖아. 모델 정도는 저쪽에서 한마디만 하면 바로 바뀌지 뭐.”“부럽다, 그런 운은 아무한테나 오는 게 아니지. 듣기로는 심유빈이 고이한 곁에 있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됐다던데. 고이한이 다른 여자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유빈만 총애한다고 하더라.”“정말이야?”“나도 들은 얘기지만, 원래 임은우 회사가 먼저 경기장 사용 계약을 마쳤대. 그런데 임은우 콘서트 일정이 8월로 미뤄지고 심유빈이 먼저 독주회 장소로 쓰게 됐다고 하더라고.”“임은우 콘서트가 미뤄졌다고?”소예지 역시 그 이야기에 잠시 놀랐다. 임은우는 지난 10년간 최고의 인기를 누려온 스타였다.잠시 후 매니저들이 나타나 여배우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했고 소예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으로 향했다.연회장에 들어서자 화려한 차림의 한 중년 여성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참석자들의 존경 어린 시선만 봐도 그녀가 오늘 행사를 주최한 지온 자선재단의 지유선 대표임을 알 수 있었다.지유선은 10년 넘게 자선활동에 헌신한 인물로 정·재계 인사들이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오늘 밤 모두 이 자리에 참석한 듯 보였다.그때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자선 경매가 진행됩니다. 먼저 지유선 대표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지유선이 무대에 올라 진심 어린 눈빛으로 참석자들에게 감사를 전한 후, 간략히 경매 물품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되었다.사람들은 준비된 자리에 자유롭게 앉기 시작했다. 소예지 일행은 뒷줄에 자리를 잡았고 고이한과 심유빈은 가장 앞줄의 특별석에 앉았다.윤혁이 소예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너도 가서 고 대표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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