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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오늘 밤 출장 갔다가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다. 소예지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고하슬은 아빠를 일주일 동안 못 본다는 소리에 밥도 먹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이한이 선물을 사주겠다고 달래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소예지는 일하면서 딸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실험실 설립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소예지는 고하슬을 데려다준 다음 곧장 A시 의대로 향했다. 오늘 회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동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뒷모습의 누군가가 문 앞에서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다. 소예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바로 강준석이었다.

그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얘기를 나누면서 긴 손가락으로 습관적으로 금테 안경을 올렸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강준석이 고개를 돌리자 소예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소예지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졌고 강준석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지야, 또 만났구나.”

그녀는 재빨리 감정을 억눌렀다.

“준석 선배.”

강준석이 웃으면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저번에 봤을 땐 네 아빠랑 닮았다는 걸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참 많이 닮았구나. 특히 눈이.”

소예지도 웃어 보였다.

“선배는 여기에 무슨 일로 왔어?”

“국내에 세계 최대 유전자 검사 기지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 온 김에 임용 절차도 밟고.”

소예지가 흥분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서 일하게 된 거야?”

강준석이 안경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어”

“환영해. 선배랑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소예지는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강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 좋게 너의 아빠랑 일했었고 또 너랑 동문도 되었는데 이번에는 동료가 돼서 나도 너무 기뻐.”

그때 옆 복도에서 두 사람이 서류를 안고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안채린이었는데 강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남자한테 첫눈에 반했어?”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를 툭 쳤다.

안채린의 예쁜 얼굴에 수줍음이 감돌았다.

“저 남자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강준석이라고 M국 의학계 천재야.”

안채린의 두 눈에 흠모하는 빛이 가득했다.

“뭐야? 지금 강준석이랑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소예지 아니야?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안채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소예지를 훑어봤다. 최근 회의마다 참석하는 걸 보면 소예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 덕에 겨우 들어온 거라고 추측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중요했다. 소예지의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회의에서 강준석은 실험팀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의학계의 젊은 천재가 자발적으로 귀국하여 이 실험에 참여했다는 건 실로 뜻밖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예지야, 토요일 저녁에 강 박사 환영회를 열기로 했는데 꼭 참석해. 알았지?”

윤혁의 말에 소예지가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가야죠.”

“강 박사 덕분에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

그때 강준석이 선배들과 얘기를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자 윤혁이 웃으며 말했다.

“강 박사님, 그럼 전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가볼게요. 오늘 밤 환영회에서 다시 얘기 나누고 술도 한잔해요.”

“그럽시다.”

강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강준석이 놀란 표정으로 소예지에게 물었다.

“종양이 미세 환경에서 CAR-T 세포 생존 시간을 90일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이건 소예지가 지난 6년 동안 계속 연구해온 과제였다.

“아빠가 제공해주신 몇 가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견해를 대담하게 제시해봤어. 물론 지금은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아.”

소예지의 말에 강준석의 두 눈에 존경심이 가득해졌다.

“너의 분석 보고서를 봤는데 모두 매우 선구적이고 실험 가능성이 높아. 사실 내가 귀국한 이유도 너 때문이야.”

그녀가 깜짝 놀라자 강준석이 서둘러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 내 말은 너의 견해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야.”

소예지가 피식 웃었다.

“선배랑 함께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저녁, 소예지는 딸에게 줄 풍경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별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자 고하슬은 매우 좋아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고하슬이 기뻐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가 왔나 봐요.”

소예지가 뒤쫓아 나왔을 때 고하슬은 이미 고이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 보고 싶었어?”

“네. 아빠, 선물은요?”

고이한은 다시 차 트렁크로 돌아가 예쁜 인형을 꺼냈다.

“마음에 들어?”

“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에게 향했다.

“네 선물은 내일 줄게.”

그러자 소예지가 무심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어.”

고이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의 선물을 뜯어주려고 가위를 찾았다.

소예지는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이한이 돌아와 고하슬과 놀아줘서 잠시 일할 틈이 생겼다.

저녁 식사 시간 고이한이 고하슬에게 말했다.

“할머니랑 왕할머니가 귀국하셨어. 내일 만나러 갈까?”

소예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출장 갔다더니 어머님이랑 할머니를 모시고 온 거였어?’

고하슬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럼 할머니 집에서 지내도 돼요?”

“내일 주말이니까 아빠가 데려다줄게.”

고이한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설이 다가와 함께 설을 쇠려고 고이한이 시어머니와 할머니를 미리 모셔왔고 설 이후에 국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소예지는 생각했다.

저녁, 소예지는 고하슬을 재운 다음 서재에 가려 했다. 그때 고이한이 안방에서 나오면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달래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지금 갈게. 몇 분 안에 도착할 거야.”

잠시 후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별장에서 몇 분 거리면 심유빈의 집이겠지.’

...

아침 식사 시간, 양희순은 무심코 고이한이 새벽 2시에 들어왔다고 말해버렸다. 말한 후에는 소예지의 표정을 몰래 살폈다.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때 고이한이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양희순은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일을 봤다.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사랑스럽고 예쁜 헤어스타일을 해주고 핑크 패딩을 입혔다. 젤리가 옆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는데 아이와 많이 친해 보였다.

“아빠, 젤리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요?”

고하슬이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고하슬의 패딩 지퍼를 올려주었다.

“할머니 집이 너무 커서 혹시라도 젤리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젤리는 요 며칠 엄마한테 맡기자.”

고하슬은 약간 시무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고이한이 차를 몰고 집을 나섰고 소예지는 그의 차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아주머니, 점심이랑 저녁 다 집에서 안 먹으니까 내 건 하지 않아도 돼요.”

소예지가 뒤돌아 양희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오늘 실험실에서 강준석의 환영회를 열기로 했기에 저녁은 밖에서 먹어야 했다. 점심은 실험실에 갔다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소예지는 의대 실험동에 도착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혁을 만났다. 윤혁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지야, 좋은 소식이 있어. 여러 회사에서 협력 의향서를 보내왔는데 모두 실력 있는 대기업들이야.”

소예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수고가 많네요.”

“수고는 무슨. 아 참. 네 남편도 의약계에 관심이 있어? 의약 쪽에 투자할 의향은 없대?”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가장 먼저 바라지 않았던 게 바로 고이한이 이 실험실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소예지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심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은 과학기술과 석유 쪽 투자를 좋아하거든요.”

“시간 되면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 좀 해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잖아.”

“네. 그렇게 할게요.”

소예지는 일단 알겠다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고이한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오후 5시 30분, 실험팀 전체가 윤혁이 예약한 고급 호텔 안의 식당으로 출발했다.

소예지는 계획서를 쓰느라 늦어진 데다가 교통사고 때문에 길이 막혀 7시가 돼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윤혁의 재촉 전화가 또 걸려오자 소예지가 전화를 받았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어요. 금방 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쪽으로 오자마자 소예지는 걸음을 멈췄다. 심유빈이 중요한 연회라도 참석하려는지 섹시한 샴페인 골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바로 소예지의 남편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심유빈과 고이한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침 일찍 하슬이를 어머님 댁에 데려다준 게 혹시 심유빈이랑 단둘이 주말을 보내기 위해서였어?’

비록 지금 고이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그의 외도 장면을 직접 목격하니 여전히 치가 떨렸다.

소예지가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이미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고 윤혁이 그녀를 맞이했다.

“예지야,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얼른 강 박사님 옆에 앉아. 이따가 술도 한잔 따라드려야지.”

소예지가 강준석의 옆에 앉자 몇몇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안채린도 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윤혁이 말린 바람에 앉지 못했다. 알고 보니 소예지를 앉히려고 일부러 강준석의 옆자리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는 강준석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명 아래 소예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강준석은 더욱 멋있고 젠틀했다. 나란히 앉아 있으니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안채린은 질투 섞인 눈빛으로 소예지를 째려봤지만 앞으로 일하면서 전문 지식으로 소예지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윤혁이 일어나 잔을 들었다.

“실험실을 설립한 건 매우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일단 가장 큰 공을 세운 소예지 씨에게 한잔 올립시다. 소예지 씨가 있었기에 실험실을 설립할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안채린이 속으로 비웃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애가 그런 방안을 세웠다고?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방안을 베낀 거겠지.’

소예지는 웃으면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잔을 들었다. 나이는 젊어도 침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고 겸손하면서 비굴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늘 밤의 남자 주인공에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바로 천재 의학 박사 강준석 씨입니다. 강준석 씨의 합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강준석에게 술을 올렸다. 강준석은 안경을 올리며 남다른 분위기로 잔을 들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라 흥겹게 얘기를 나눴고 앞으로 실험실을 운영해나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9시 30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환영회가 끝이 났다. 강준석은 소예지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렸다.

부드럽게 열린 문 뒤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바로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고이한이 깊은 눈빛으로 문밖에 있는 소예지와 강준석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이한 씨, 여기서 다 뵙네요.”

강준석은 고이한에게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이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지 씨, 먼저 가세요. 다음에 또 봐요.”

강준석은 소예지에게 폐를 끼칠까 봐 함께 가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소예지는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내렸다.

소예지는 차를 가져왔기에 고이한과 함께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실외 주차장으로 가서 잠금을 해제하고 차에 타고는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빌라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예지는 갑자기 아랫배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생리인 걸 알아채고는 차를 빌라 단지 옆의 백화점 앞에 세워두고 생리대를 사러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온 후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오늘 밤 휴가 낼 수 있을까요? 제 딸이 아파서요.”

소예지가 서둘러 말했다.

“얼른 딸한테 가보세요.”

양희순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양희순이 나가고 소예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샤워했다. 그리고 꿀물을 타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연구 계획서를 쓸 준비를 했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소예지는 피곤한 나머지 미간을 주물렀다. 그때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이한이 들어온 것이었다.

오늘 밤은 고하슬도 집에 없고 양희순도 휴가를 내어 집에 그녀와 고이한 둘뿐이었다.

문득 불편해진 소예지는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방이 2층에 있어 3층에서 내려가는데 고이한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소예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를 건넸다.

“왔어?”

고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심유빈의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소예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이를 닦았다. 책을 잠깐 보다가 잘 생각이었다.

20분 후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고이한이 검은색 잠옷 가운을 걸치고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 뒤로 젖혀져 있었는데 막 샤워를 마친 듯했다.

“무슨 일이야?”

소예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슬이 집에 없으니까 각방 쓸 필요 없지.”

고이한이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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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엥그리멍
양육권 가지려면 직업도 있어야하고 딸하고 유대감도 쌓아야하니 엄청 뒤에나 이혼이 시작하려나요? 당당히 바람피우고 온 시댁 식구들 한테 무시당하면서 남편과 강제 잠자리까지 하는건 아니겠죠? 이제 100화 좀 넘은듯 한데 이거 지금 시작안하는게 나을듯.속만 터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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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이한은 그녀가 건넨 재킷을 받아 팔에 걸친 뒤, 아이패드를 들었다.“가자. 강 박사 좀 보러.”두 사람이 차례로 휴게실을 나서자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김경환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이한이 건넨 아이패드를 받아 들었다.강준석은 이미 깨어 있었다. 서류를 살펴보는 그의 안색은 전날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예지야, 대표님이랑 먼저 가서 일 봐. 여긴 이제 내가 알아서 하면 돼.”소예지가 잠시 망설였다. 옆에 있던 이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 예지야, 실험실로 돌아가. 내가 여기 남아서 지켜볼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고이한도 소예지를 바라봤다.“실험실까지 데려다줄게.”결국 소예지도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강 선배. 그럼 먼저 갈게.”그녀는 이서연을 향해 다시 한번 당부했다.“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병원을 나온 뒤, 고이한은 직접 운전해 소예지를 실험실까지 데려다주었다.실험실에 도착한 소예지는 흰 가운으로 갈아입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이한은 곧바로 실험실 책임자의 사무실로 향했다.이번 안채린 사건 이후 내부 관리 체계를 다시 점검하고 직원들의 업무 상태와 근무 환경을 확인해야 했다.같은 시각, D국의 낡은 아파트 안.심유빈은 조용히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보름이 넘었다.그녀는 어머니의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었다.예전에 어머니를 위해 사준 집이었고 지금 그녀가 그나마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하지만 과거 그녀가 누렸던 삶과 비교하면 삼십 평 남짓한 이 집은 지나치게 좁고 답답했다.어머니는 여전히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 돌아왔다.사람들을 만나고 각종 모임에 시간을 쓰느라 딸에게 제대로 된 세 끼 식사조차 챙겨줄 여유가 없었다.심유빈 역시 오랫동안 요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고 직접 손을 움직여야 했다.열여덟 살 이전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치욕스러웠던 시절, 그때 억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33화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든 오후의 햇살이 바닥 위에 옅은 무늬를 드리우고 있었다.고이한은 소파 한쪽에 등을 기댄 채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화면 위로는 실시간 환율 그래프가 붉고 푸른 선을 그리며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그 미세한 변화를 그의 깊은 눈동자가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이따금 화면을 스치며 몇 개의 수치를 확인하고 표시를 남겼다.하지만 오래 집중하지는 못했다.그의 시선은 어느새 몇 번이고 맞은편 소파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여자에게로 향했다.소예지는 어젯밤 제대로 잠들지 못한 데다 몸살기까지 겹쳐 평소보다 훨씬 깊이 잠들어 있었다.가지런한 속눈썹이 조용히 눈가를 덮고 있었다.평소의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잠든 얼굴에는 한없이 느슨한 기색만 남아 있었다.고이한의 눈빛이 서서히 깊어졌다.그는 애써 시선을 거두고 다시 태블릿 화면으로 돌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예지가 잠결에 자세를 바꾸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이 눈가에 걸리자 그의 시선은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몇 초 동안 그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고이한은 결국 태블릿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무심코 뻗은 손끝은 머리카락보다 먼저 소예지의 뺨에 닿았다.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전해지는 순간, 고이한의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조용한 휴게실 안에서는 그 작은 움직임마저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그 순간 소예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고이한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그녀의 미간이 다시 스르르 풀리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손끝이 그녀의 귓바퀴를 스치듯 지나갔다.고이한은 천천히 손을 거두려 했지만 어느새 손끝은 그녀의 귓불에서 뺨으로 옮겨가 있었다.그의 손길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는지 잠든 소예지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정장 재킷 자락을 끌어당겨 얼굴 반쪽을 따뜻한 옷감 안에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32화

    “상처가 조금 깊은 것뿐이야.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야.”강준석이 고개를 들어 고이한을 바라보았다.“고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 주 제품 발표회에는 지장 없을 겁니다.”그 말에 소예지가 고이한을 돌아보았다.‘설마 고이한이 강 선배에게 무리해서라도 발표회에 참석하라고 한 건 아니겠지?’그녀의 표정에 의심이 스치는 걸 본 고이한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억울하다는 듯 강준석을 바라보았다.“상처가 생각보다 심한데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어.”강준석이 순간 당황했다. 방금 자신의 말 때문에 소예지가 오해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예지야, 오해하지 마. 대표님이 나한테 강요하신 게 아니야. 내가 스스로 가고 싶은 거야. 절대 대표님 탓하지 마.”그제야 소예지도 자신이 조금 과하게 반응했다는 걸 깨달았다.강준석이라면 이 프로젝트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공들여온 일이었고 몸 상태만 허락한다면 어떻게든 발표회에 참석하려 할 사람이었다.그런 선택은 누가 시킨다고 해서 바뀔 게 아니었다.고이한의 눈빛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강 박사를 내가 말려줄까?”소예지가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강 선배가 직접 결정하게 해.”옆에서 지켜보던 이서연은 내심 놀란 눈치였다. 소예지가 고이한을 대하는 분위기가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그리고 처음으로 고이한이 이렇게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강준석도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대표님이 나한테 강요하신 게 아니야. 내가 직접 이 발표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야. 걱정하지 마. 나 정말 괜찮아.”소예지가 조금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좋아. 하지만 약속해 줘.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절대 억지로 버티지 마.”“그래. 약속할게.”강준석이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발표회 날에는 현장 근처에 의사를 대기시켜 둘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대응할 수 있게.”고이한이 말한 뒤, 시선을 소예지에게 옮겼다.“당신도 너무 걱정하지 마.”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경찰관 두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31화

    소예지는 고이한의 솔직한 고백에 잠시 말을 잃었다.그가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직접 인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몇 초간 그를 바라보다 소예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거야. 다시는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면 돼. 안채린 일은 법에 맡기자.”이제 와서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는 건 의미가 없었다.안채린과 그녀 사이의 갈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쌓여 있었다.이번 일이 고이한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안채린은 결국 자신의 분노를 다른 누군가에게 돌렸을 것이다.오래 쌓인 상처와 분노가 작은 자극 하나에도 터져 나올 만큼 이미 위태로운 상태였다.“그래.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일단 밥부터 먹자.”고이한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젓가락을 들어 소예지의 접시에 반찬을 놓아주었다.소예지가 잠시 멈칫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오늘 밤은 간병인 배치해 둘게. 열 시쯤 이문혁이 집까지 데려다줄 거야. 가서 쉬어.”하루 종일 쌓인 긴장 때문인지 소예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고이한의 시선이 그 위에 잠시 머물렀다.소예지는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소예지는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디저트만은 깨끗하게 비웠다.고이한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먹는 모습에 속으로는 마음이 놓였다.저녁 여덟 시가 지나자 강준석은 몇 번이나 소예지에게 돌아가 쉬라고 권했다. 결국 아홉 시가 되어서야 소예지는 먼저 병원을 나섰다.집에 돌아와 딸을 품에 안는 순간, 뒤늦게 밀려온 두려움에 숨이 잠시 막혔다.‘만약 강 선배가 그 포크를 대신 막아주지 않았다면 안채린이 찌르려 했던 곳은 바로 내 심장이었을 거야.’소예지는 고하슬을 품에 안은 채 한동안 놓지 않았다. 어린 고하슬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는 듯 엄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딸에게서 나는 익숙한 향을 깊게 들이마시자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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