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3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오늘 밤 출장 갔다가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다. 소예지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고하슬은 아빠를 일주일 동안 못 본다는 소리에 밥도 먹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이한이 선물을 사주겠다고 달래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소예지는 일하면서 딸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실험실 설립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소예지는 고하슬을 데려다준 다음 곧장 A시 의대로 향했다. 오늘 회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동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뒷모습의 누군가가 문 앞에서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다. 소예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바로 강준석이었다.

그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얘기를 나누면서 긴 손가락으로 습관적으로 금테 안경을 올렸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강준석이 고개를 돌리자 소예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소예지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졌고 강준석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지야, 또 만났구나.”

그녀는 재빨리 감정을 억눌렀다.

“준석 선배.”

강준석이 웃으면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저번에 봤을 땐 네 아빠랑 닮았다는 걸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참 많이 닮았구나. 특히 눈이.”

소예지도 웃어 보였다.

“선배는 여기에 무슨 일로 왔어?”

“국내에 세계 최대 유전자 검사 기지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 온 김에 임용 절차도 밟고.”

소예지가 흥분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서 일하게 된 거야?”

강준석이 안경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어”

“환영해. 선배랑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소예지는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강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 좋게 너의 아빠랑 일했었고 또 너랑 동문도 되었는데 이번에는 동료가 돼서 나도 너무 기뻐.”

그때 옆 복도에서 두 사람이 서류를 안고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안채린이었는데 강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남자한테 첫눈에 반했어?”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를 툭 쳤다.

안채린의 예쁜 얼굴에 수줍음이 감돌았다.

“저 남자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강준석이라고 M국 의학계 천재야.”

안채린의 두 눈에 흠모하는 빛이 가득했다.

“뭐야? 지금 강준석이랑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소예지 아니야?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안채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소예지를 훑어봤다. 최근 회의마다 참석하는 걸 보면 소예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 덕에 겨우 들어온 거라고 추측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중요했다. 소예지의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회의에서 강준석은 실험팀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의학계의 젊은 천재가 자발적으로 귀국하여 이 실험에 참여했다는 건 실로 뜻밖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예지야, 토요일 저녁에 강 박사 환영회를 열기로 했는데 꼭 참석해. 알았지?”

윤혁의 말에 소예지가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가야죠.”

“강 박사 덕분에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

그때 강준석이 선배들과 얘기를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자 윤혁이 웃으며 말했다.

“강 박사님, 그럼 전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가볼게요. 오늘 밤 환영회에서 다시 얘기 나누고 술도 한잔해요.”

“그럽시다.”

강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강준석이 놀란 표정으로 소예지에게 물었다.

“종양이 미세 환경에서 CAR-T 세포 생존 시간을 90일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이건 소예지가 지난 6년 동안 계속 연구해온 과제였다.

“아빠가 제공해주신 몇 가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견해를 대담하게 제시해봤어. 물론 지금은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아.”

소예지의 말에 강준석의 두 눈에 존경심이 가득해졌다.

“너의 분석 보고서를 봤는데 모두 매우 선구적이고 실험 가능성이 높아. 사실 내가 귀국한 이유도 너 때문이야.”

그녀가 깜짝 놀라자 강준석이 서둘러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 내 말은 너의 견해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야.”

소예지가 피식 웃었다.

“선배랑 함께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저녁, 소예지는 딸에게 줄 풍경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별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자 고하슬은 매우 좋아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고하슬이 기뻐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가 왔나 봐요.”

소예지가 뒤쫓아 나왔을 때 고하슬은 이미 고이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 보고 싶었어?”

“네. 아빠, 선물은요?”

고이한은 다시 차 트렁크로 돌아가 예쁜 인형을 꺼냈다.

“마음에 들어?”

“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에게 향했다.

“네 선물은 내일 줄게.”

그러자 소예지가 무심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어.”

고이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의 선물을 뜯어주려고 가위를 찾았다.

소예지는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이한이 돌아와 고하슬과 놀아줘서 잠시 일할 틈이 생겼다.

저녁 식사 시간 고이한이 고하슬에게 말했다.

“할머니랑 왕할머니가 귀국하셨어. 내일 만나러 갈까?”

소예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출장 갔다더니 어머님이랑 할머니를 모시고 온 거였어?’

고하슬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럼 할머니 집에서 지내도 돼요?”

“내일 주말이니까 아빠가 데려다줄게.”

고이한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설이 다가와 함께 설을 쇠려고 고이한이 시어머니와 할머니를 미리 모셔왔고 설 이후에 국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소예지는 생각했다.

저녁, 소예지는 고하슬을 재운 다음 서재에 가려 했다. 그때 고이한이 안방에서 나오면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달래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지금 갈게. 몇 분 안에 도착할 거야.”

잠시 후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별장에서 몇 분 거리면 심유빈의 집이겠지.’

...

아침 식사 시간, 양희순은 무심코 고이한이 새벽 2시에 들어왔다고 말해버렸다. 말한 후에는 소예지의 표정을 몰래 살폈다.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때 고이한이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양희순은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일을 봤다.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사랑스럽고 예쁜 헤어스타일을 해주고 핑크 패딩을 입혔다. 젤리가 옆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는데 아이와 많이 친해 보였다.

“아빠, 젤리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요?”

고하슬이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고하슬의 패딩 지퍼를 올려주었다.

“할머니 집이 너무 커서 혹시라도 젤리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젤리는 요 며칠 엄마한테 맡기자.”

고하슬은 약간 시무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고이한이 차를 몰고 집을 나섰고 소예지는 그의 차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아주머니, 점심이랑 저녁 다 집에서 안 먹으니까 내 건 하지 않아도 돼요.”

소예지가 뒤돌아 양희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오늘 실험실에서 강준석의 환영회를 열기로 했기에 저녁은 밖에서 먹어야 했다. 점심은 실험실에 갔다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소예지는 의대 실험동에 도착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혁을 만났다. 윤혁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지야, 좋은 소식이 있어. 여러 회사에서 협력 의향서를 보내왔는데 모두 실력 있는 대기업들이야.”

소예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수고가 많네요.”

“수고는 무슨. 아 참. 네 남편도 의약계에 관심이 있어? 의약 쪽에 투자할 의향은 없대?”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가장 먼저 바라지 않았던 게 바로 고이한이 이 실험실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소예지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심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은 과학기술과 석유 쪽 투자를 좋아하거든요.”

“시간 되면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 좀 해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잖아.”

“네. 그렇게 할게요.”

소예지는 일단 알겠다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고이한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오후 5시 30분, 실험팀 전체가 윤혁이 예약한 고급 호텔 안의 식당으로 출발했다.

소예지는 계획서를 쓰느라 늦어진 데다가 교통사고 때문에 길이 막혀 7시가 돼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윤혁의 재촉 전화가 또 걸려오자 소예지가 전화를 받았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어요. 금방 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쪽으로 오자마자 소예지는 걸음을 멈췄다. 심유빈이 중요한 연회라도 참석하려는지 섹시한 샴페인 골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바로 소예지의 남편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심유빈과 고이한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침 일찍 하슬이를 어머님 댁에 데려다준 게 혹시 심유빈이랑 단둘이 주말을 보내기 위해서였어?’

비록 지금 고이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그의 외도 장면을 직접 목격하니 여전히 치가 떨렸다.

소예지가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이미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고 윤혁이 그녀를 맞이했다.

“예지야,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얼른 강 박사님 옆에 앉아. 이따가 술도 한잔 따라드려야지.”

소예지가 강준석의 옆에 앉자 몇몇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안채린도 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윤혁이 말린 바람에 앉지 못했다. 알고 보니 소예지를 앉히려고 일부러 강준석의 옆자리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는 강준석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명 아래 소예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강준석은 더욱 멋있고 젠틀했다. 나란히 앉아 있으니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안채린은 질투 섞인 눈빛으로 소예지를 째려봤지만 앞으로 일하면서 전문 지식으로 소예지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윤혁이 일어나 잔을 들었다.

“실험실을 설립한 건 매우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일단 가장 큰 공을 세운 소예지 씨에게 한잔 올립시다. 소예지 씨가 있었기에 실험실을 설립할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안채린이 속으로 비웃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애가 그런 방안을 세웠다고?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방안을 베낀 거겠지.’

소예지는 웃으면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잔을 들었다. 나이는 젊어도 침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고 겸손하면서 비굴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늘 밤의 남자 주인공에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바로 천재 의학 박사 강준석 씨입니다. 강준석 씨의 합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강준석에게 술을 올렸다. 강준석은 안경을 올리며 남다른 분위기로 잔을 들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라 흥겹게 얘기를 나눴고 앞으로 실험실을 운영해나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9시 30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환영회가 끝이 났다. 강준석은 소예지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렸다.

부드럽게 열린 문 뒤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바로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고이한이 깊은 눈빛으로 문밖에 있는 소예지와 강준석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이한 씨, 여기서 다 뵙네요.”

강준석은 고이한에게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이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지 씨, 먼저 가세요. 다음에 또 봐요.”

강준석은 소예지에게 폐를 끼칠까 봐 함께 가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소예지는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내렸다.

소예지는 차를 가져왔기에 고이한과 함께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실외 주차장으로 가서 잠금을 해제하고 차에 타고는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빌라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예지는 갑자기 아랫배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생리인 걸 알아채고는 차를 빌라 단지 옆의 백화점 앞에 세워두고 생리대를 사러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온 후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오늘 밤 휴가 낼 수 있을까요? 제 딸이 아파서요.”

소예지가 서둘러 말했다.

“얼른 딸한테 가보세요.”

양희순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양희순이 나가고 소예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샤워했다. 그리고 꿀물을 타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연구 계획서를 쓸 준비를 했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소예지는 피곤한 나머지 미간을 주물렀다. 그때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이한이 들어온 것이었다.

오늘 밤은 고하슬도 집에 없고 양희순도 휴가를 내어 집에 그녀와 고이한 둘뿐이었다.

문득 불편해진 소예지는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방이 2층에 있어 3층에서 내려가는데 고이한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소예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를 건넸다.

“왔어?”

고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심유빈의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소예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이를 닦았다. 책을 잠깐 보다가 잘 생각이었다.

20분 후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고이한이 검은색 잠옷 가운을 걸치고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 뒤로 젖혀져 있었는데 막 샤워를 마친 듯했다.

“무슨 일이야?”

소예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슬이 집에 없으니까 각방 쓸 필요 없지.”

고이한이 덤덤하게 말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엥그리멍
양육권 가지려면 직업도 있어야하고 딸하고 유대감도 쌓아야하니 엄청 뒤에나 이혼이 시작하려나요? 당당히 바람피우고 온 시댁 식구들 한테 무시당하면서 남편과 강제 잠자리까지 하는건 아니겠죠? 이제 100화 좀 넘은듯 한데 이거 지금 시작안하는게 나을듯.속만 터질듯.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6화

    심유빈은 자신이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화면 속 두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 억눌러두었던 질투와 미련 그리고 원망이 걷잡을 수 없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그러나 이제 자신이 어떤 감정을 품든 저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세계 정상에 서서 수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자신은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기에 이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의지할 가족 하나 남지 않았다.심유빈은 저택을 나와 차에 올라탄 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제9군구 기지.하루 훈련이 막 끝난 뒤라 벽에 걸린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임현욱은 식판을 들고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막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터라 몸에는 아직 먼지와 피로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잠시 후 구온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무심코 TV를 올려다본 구온이 웃으며 말했다.“빨리 뉴스 봐.”임현욱이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마침 뉴스 화면이 바뀌면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고 임현욱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TV 속 소예지는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시상대 위에 서 있었다.“우리나라 과학자가 상 받았대.”“대단하다.”“소예지? 이 이름 되게 익숙한데? 우리 기지에 온 적 있지 않아?”“맞아. 생각났다. 나도 저번에 본 적 있어.”식당 안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임현욱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다 입가에 천천히 미소를 띠었다.소예지가 해냈다.그것도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해냈다.“예지 씨, 진짜 대단하다.”구온이 감탄하듯 말했다.임현욱은 그제야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응. 예지 씨는 충분히 받을 만한 사람이야.”화면에는 고이한의 모습도 비쳤다.임현욱은 TV 속 고이한을 바라보았다.지금 보니 저 사람은 확실히 소예지의 곁에 설 만한 사람이었다.그때 한 대원이 달려와 물었다.“대위님, 소 박사님이랑 친하시지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5화

    1년 후.10월, 스톡홀름.아침 햇살이 호텔 커튼 틈새로 스며들어 바닥을 금빛으로 물들였다.소예지는 통유리창 앞에 서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유 없이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그때 뒤에서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잠이 안 와?”막 잠에서 깬 고이한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가 소예지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소예지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대며 작게 대답했다.“응.”고이한이 그녀의 목덜미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긴장돼?”소예지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조금.”고이한은 그녀의 몸을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아침 햇살 속에서 그의 두 눈은 유난히 밝게 빛났다.“결과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선 이미 당신이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소예지는 고이한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으로 따뜻한 감정이 밀려들었다.지난 1년 동안 수많은 일을 겪었고 그 모든 순간마다 고이한은 늘 그녀의 곁에 있었다.“고마워.”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고이한이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그게 끝이야?”“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내가 당신한테 누군데?”그제야 고이한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아챈 소예지가 피식 웃었다.소예지는 평소 고이한을 ‘여보’라고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처음 결혼했을 때부터 그런 호칭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아무래도 누군가는 그 말을 무척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소예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고마워, 내 남편.”그제야 만족한 듯 고이한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난 당신이 그렇게 부르는 게 좋더라.”고이한은 상이라도 주듯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웃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 가자. 이제 준비해야지.”노벨상 시상식은 콘서트홀에서 열렸다.소예지는 맞춤 제작한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긴 머리는 단정하게 올려 아름다운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이한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소예지를 향해 있었다.소예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4화

    고이한은 소예지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정말... 나랑 다시 결혼해줄 거야?”고이한의 목소리가 떨렸다.소예지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당신이 싫으면 뭐...”“할 거야.”고이한이 갑자기 그녀를 품으로 세게 끌어안았다.“할 거야. 당연히 해야지.”소예지는 그의 품에 기대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마음 정한 거 맞아?”고이한은 그녀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다시 한번 확인했다.“정했어. 당신 돈도 많고 잘생겼고 내 딸 친아빠잖아. 거기다 그쪽으로도 잘하고... 다른 여자 좋은 일 시켜주기 싫어.”소예지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 말에 고이한이 웃음을 터뜨렸다.“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 맞아?”소예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진심이야.”고이한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입가로 가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럼 이제 호칭 바꿔야겠네. 여보.”소예지의 심장이 쿵 뛰었다.창밖의 햇살이 커튼 틈새로 스며들어 두 사람을 비췄다.“귀국하면 바로 혼인신고 하는 거야. 마음 바꾸면 안 돼.”고이한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안 바꿔.”소예지도 확실하게 대답했다.고이한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길고도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다시 되찾은 사람을 향한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당신, 사랑해.”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고백했다.매일 밤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 때마다 고이한은 이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곤 했다. 그럴 때는 소예지도 정신이 없어 제대로 들을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고백이 선명하게 가슴에 닿았다.이틀 뒤 고이한은 소예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렸다.두 사람을 마중 나온 사람은 김경환이었다.“서류는 전부 챙겼지?”고이한이 확인하듯 물었다.“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전부 챙겨왔습니다.”김경환이 웃었다.‘대표님의 행복이 걸린 일인데 내가 발목을 잡을 수는 없지.’오전 10시.혼인신고를 위해 찾은 구청에는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고이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3화

    “이제 괜찮아.”고이한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는 소예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달랬다.“이제 내가 왔어으니까 괜찮아.”소예지는 눈을 감았고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지난밤은 정말 견디기 힘들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고이한이 올 거라는 생각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희망이 되어주었다.복도에서는 구조대원들이 층마다 돌며 투숙객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고이한은 소예지의 손을 꼭 잡고 밖으로 향했다.호텔을 빠져나가기 위해 로비에 들어선 순간 흰 천에 덮인 십여 구의 희생자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소예지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광경에 가슴이 철렁하는 건 고이한도 마찬가지였다.이번 테러는 그나마 소규모에 그쳤다. 만약 더 큰 규모의 공격이었다면 어떤 참변이 벌어졌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바닥 곳곳에는 총탄의 흔적과 핏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고이한은 소예지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께로 끌어당겨 감쌌다.“보지 마.”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품에 기댄 채 밖으로 향했다.호텔을 빠져나오자 수많은 투숙객의 얼굴에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듯한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소예지도 마찬가지였다.두 사람은 밖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고 고이한은 이곳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소예지를 데려갔다. 경호 인원도 늘어나 세 대의 차량이 함께 부촌으로 향했다.차는 곧 조용한 고급 주택가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는 최고급 저택들이 즐비했고 보안 수준 역시 매우 높았다.이곳은 고이한 명의로 된 여러 부동산 중 하나였다. 소예지도 예전에 한동안 이곳에 머문 적이 있었다.정기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 집 안은 지금도 깨끗하고 아늑했다.“먼저 씻고 푹 자.”따뜻한 물줄기가 몸 위로 쏟아지자 소예지는 그제야 다시 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밤 내내 느꼈던 공포와 긴장 그리고 무력감도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하지만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는 여전히 떨쳐낼 수 없는 수많은 장면이 떠올랐다.샤워를 마친 소예지가 잠옷을 입고 밖으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2화

    폭발의 진동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컵과 휴대전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창밖에서는 날카로운 경보음이 쉴 새 없이 울렸고 사람들의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까지 뒤섞여 들려왔다.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고이한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무슨 일이야?”소예지는 몸을 숙여 휴대전화를 주워 들었다.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아무래도... 호텔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아.”말을 마친 소예지는 휴대전화를 든 채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에서는 짙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그 순간 또 한 번 폭발음이 터졌다.쾅!충격에 유리창이 덜덜 떨렸다.“창문에서 떨어져.”고이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말 잘 들어. 방에 있어. 당분간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마. 지금 바로 경호원들 올려보낼게.”소예지의 심장도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알았어. 방에 있을게.”“경호원들한테 바로 연락할게. 더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라고 할 테니까.”고이한은 다급하게 말을 마치고 영상 통화를 끊었다.소예지가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메시지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이번 과정에 함께 참가한 동료가 보낸 것이었다.[소 박사님, 호텔이 테러 공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래층에 아직 테러범들이 있다고 해요. 당분간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메시지를 확인한 직후 고이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소예지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내 말 잘 들어. 무슨 일이 생겨도 겁먹지 마. 내가 바로 갈게.”소예지가 놀라 되물었다.“당신이 온다고?”“응. 지금 바로 공항으로 출발할 거야.”“하지만...”“기다려.”고이한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소예지는 밖에서 울리는 사이렌과 폭발음에 몸이 굳은 채였다. 테러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벌어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바로 그때 창밖에서 총성이 들려왔다.소예지의 심장이 순간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721화

    오랫동안 서류를 작성한 탓에 소예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자리에서 일어나 고이한의 품에 기대자 그는 긴 팔로 소예지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을 무릎 아래로 넣어 가뿐히 안아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고이한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창밖으로 밤은 점점 깊어갔고 방 안에는 따뜻하고 은은한 불빛이 내려앉아 있었다.고이한은 유독 불을 켜두는 걸 좋아했다. 소예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늘 제멋대로였다.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봄이 찾아왔고 만물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모든 것이 유난히 아름다운 계절이었다.어느덧 계절은 5월에 접어들었다.따뜻하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는 동안 주변의 일들도 차츰 제자리를 찾아갔다.주경화의 병세는 매우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었고 이제는 퇴원해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지난주에는 소예지가 딸과 고이한을 데리고 윤하준의 집에 다녀왔는데 주경화가 직접 요리까지 해 세 사람을 대접했다.송세아에게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새로운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칩을 이식한 뒤 신경 신호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지난주 영상 통화에서는 무려 1분 동안 혼자 서 있는 데 성공했고 화면 속 송세아의 상태도 무척 좋아 보였다.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소예지는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M국에서 온 초청장을 바라보았다.M국의 최고 명문 교육기관에서 보내온 초청장으로 한 달간 진행되는 특별 과정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이번 과정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세계 정상급 연구진이었다. 소예지의 연구에도 큰 돌파구가 될 수 있는 기회였기에 고이한 역시 이번만큼은 그녀가 가기를 적극적으로 권했다.비록 두 사람이 한 달 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말이다.소예지는 컴퓨터 앞으로 가 답장을 보내며 이번 일정을 확정했다. 저녁에는 딸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했고 고하슬은 엄마가 공부하러 가는 것을 적극 찬성했다. 그런 엄마가 무척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그렇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