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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오늘 밤 출장 갔다가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다. 소예지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고하슬은 아빠를 일주일 동안 못 본다는 소리에 밥도 먹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이한이 선물을 사주겠다고 달래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소예지는 일하면서 딸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실험실 설립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소예지는 고하슬을 데려다준 다음 곧장 A시 의대로 향했다. 오늘 회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동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뒷모습의 누군가가 문 앞에서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다. 소예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바로 강준석이었다.

그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얘기를 나누면서 긴 손가락으로 습관적으로 금테 안경을 올렸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강준석이 고개를 돌리자 소예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소예지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졌고 강준석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지야, 또 만났구나.”

그녀는 재빨리 감정을 억눌렀다.

“준석 선배.”

강준석이 웃으면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저번에 봤을 땐 네 아빠랑 닮았다는 걸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참 많이 닮았구나. 특히 눈이.”

소예지도 웃어 보였다.

“선배는 여기에 무슨 일로 왔어?”

“국내에 세계 최대 유전자 검사 기지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 온 김에 임용 절차도 밟고.”

소예지가 흥분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서 일하게 된 거야?”

강준석이 안경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어”

“환영해. 선배랑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소예지는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강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 좋게 너의 아빠랑 일했었고 또 너랑 동문도 되었는데 이번에는 동료가 돼서 나도 너무 기뻐.”

그때 옆 복도에서 두 사람이 서류를 안고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안채린이었는데 강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남자한테 첫눈에 반했어?”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를 툭 쳤다.

안채린의 예쁜 얼굴에 수줍음이 감돌았다.

“저 남자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강준석이라고 M국 의학계 천재야.”

안채린의 두 눈에 흠모하는 빛이 가득했다.

“뭐야? 지금 강준석이랑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소예지 아니야?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안채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소예지를 훑어봤다. 최근 회의마다 참석하는 걸 보면 소예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 덕에 겨우 들어온 거라고 추측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중요했다. 소예지의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회의에서 강준석은 실험팀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의학계의 젊은 천재가 자발적으로 귀국하여 이 실험에 참여했다는 건 실로 뜻밖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예지야, 토요일 저녁에 강 박사 환영회를 열기로 했는데 꼭 참석해. 알았지?”

윤혁의 말에 소예지가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가야죠.”

“강 박사 덕분에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

그때 강준석이 선배들과 얘기를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자 윤혁이 웃으며 말했다.

“강 박사님, 그럼 전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가볼게요. 오늘 밤 환영회에서 다시 얘기 나누고 술도 한잔해요.”

“그럽시다.”

강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강준석이 놀란 표정으로 소예지에게 물었다.

“종양이 미세 환경에서 CAR-T 세포 생존 시간을 90일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이건 소예지가 지난 6년 동안 계속 연구해온 과제였다.

“아빠가 제공해주신 몇 가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견해를 대담하게 제시해봤어. 물론 지금은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아.”

소예지의 말에 강준석의 두 눈에 존경심이 가득해졌다.

“너의 분석 보고서를 봤는데 모두 매우 선구적이고 실험 가능성이 높아. 사실 내가 귀국한 이유도 너 때문이야.”

그녀가 깜짝 놀라자 강준석이 서둘러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 내 말은 너의 견해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야.”

소예지가 피식 웃었다.

“선배랑 함께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저녁, 소예지는 딸에게 줄 풍경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별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자 고하슬은 매우 좋아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고하슬이 기뻐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가 왔나 봐요.”

소예지가 뒤쫓아 나왔을 때 고하슬은 이미 고이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 보고 싶었어?”

“네. 아빠, 선물은요?”

고이한은 다시 차 트렁크로 돌아가 예쁜 인형을 꺼냈다.

“마음에 들어?”

“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에게 향했다.

“네 선물은 내일 줄게.”

그러자 소예지가 무심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어.”

고이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의 선물을 뜯어주려고 가위를 찾았다.

소예지는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이한이 돌아와 고하슬과 놀아줘서 잠시 일할 틈이 생겼다.

저녁 식사 시간 고이한이 고하슬에게 말했다.

“할머니랑 왕할머니가 귀국하셨어. 내일 만나러 갈까?”

소예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출장 갔다더니 어머님이랑 할머니를 모시고 온 거였어?’

고하슬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럼 할머니 집에서 지내도 돼요?”

“내일 주말이니까 아빠가 데려다줄게.”

고이한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설이 다가와 함께 설을 쇠려고 고이한이 시어머니와 할머니를 미리 모셔왔고 설 이후에 국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소예지는 생각했다.

저녁, 소예지는 고하슬을 재운 다음 서재에 가려 했다. 그때 고이한이 안방에서 나오면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달래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지금 갈게. 몇 분 안에 도착할 거야.”

잠시 후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별장에서 몇 분 거리면 심유빈의 집이겠지.’

...

아침 식사 시간, 양희순은 무심코 고이한이 새벽 2시에 들어왔다고 말해버렸다. 말한 후에는 소예지의 표정을 몰래 살폈다.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때 고이한이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양희순은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일을 봤다.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사랑스럽고 예쁜 헤어스타일을 해주고 핑크 패딩을 입혔다. 젤리가 옆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는데 아이와 많이 친해 보였다.

“아빠, 젤리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요?”

고하슬이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고하슬의 패딩 지퍼를 올려주었다.

“할머니 집이 너무 커서 혹시라도 젤리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젤리는 요 며칠 엄마한테 맡기자.”

고하슬은 약간 시무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고이한이 차를 몰고 집을 나섰고 소예지는 그의 차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아주머니, 점심이랑 저녁 다 집에서 안 먹으니까 내 건 하지 않아도 돼요.”

소예지가 뒤돌아 양희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오늘 실험실에서 강준석의 환영회를 열기로 했기에 저녁은 밖에서 먹어야 했다. 점심은 실험실에 갔다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소예지는 의대 실험동에 도착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혁을 만났다. 윤혁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지야, 좋은 소식이 있어. 여러 회사에서 협력 의향서를 보내왔는데 모두 실력 있는 대기업들이야.”

소예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수고가 많네요.”

“수고는 무슨. 아 참. 네 남편도 의약계에 관심이 있어? 의약 쪽에 투자할 의향은 없대?”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가장 먼저 바라지 않았던 게 바로 고이한이 이 실험실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소예지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심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은 과학기술과 석유 쪽 투자를 좋아하거든요.”

“시간 되면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 좀 해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잖아.”

“네. 그렇게 할게요.”

소예지는 일단 알겠다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고이한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오후 5시 30분, 실험팀 전체가 윤혁이 예약한 고급 호텔 안의 식당으로 출발했다.

소예지는 계획서를 쓰느라 늦어진 데다가 교통사고 때문에 길이 막혀 7시가 돼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윤혁의 재촉 전화가 또 걸려오자 소예지가 전화를 받았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어요. 금방 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쪽으로 오자마자 소예지는 걸음을 멈췄다. 심유빈이 중요한 연회라도 참석하려는지 섹시한 샴페인 골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바로 소예지의 남편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심유빈과 고이한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침 일찍 하슬이를 어머님 댁에 데려다준 게 혹시 심유빈이랑 단둘이 주말을 보내기 위해서였어?’

비록 지금 고이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그의 외도 장면을 직접 목격하니 여전히 치가 떨렸다.

소예지가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이미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고 윤혁이 그녀를 맞이했다.

“예지야,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얼른 강 박사님 옆에 앉아. 이따가 술도 한잔 따라드려야지.”

소예지가 강준석의 옆에 앉자 몇몇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안채린도 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윤혁이 말린 바람에 앉지 못했다. 알고 보니 소예지를 앉히려고 일부러 강준석의 옆자리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는 강준석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명 아래 소예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강준석은 더욱 멋있고 젠틀했다. 나란히 앉아 있으니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안채린은 질투 섞인 눈빛으로 소예지를 째려봤지만 앞으로 일하면서 전문 지식으로 소예지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윤혁이 일어나 잔을 들었다.

“실험실을 설립한 건 매우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일단 가장 큰 공을 세운 소예지 씨에게 한잔 올립시다. 소예지 씨가 있었기에 실험실을 설립할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안채린이 속으로 비웃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애가 그런 방안을 세웠다고?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방안을 베낀 거겠지.’

소예지는 웃으면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잔을 들었다. 나이는 젊어도 침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고 겸손하면서 비굴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늘 밤의 남자 주인공에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바로 천재 의학 박사 강준석 씨입니다. 강준석 씨의 합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강준석에게 술을 올렸다. 강준석은 안경을 올리며 남다른 분위기로 잔을 들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라 흥겹게 얘기를 나눴고 앞으로 실험실을 운영해나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9시 30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환영회가 끝이 났다. 강준석은 소예지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렸다.

부드럽게 열린 문 뒤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바로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고이한이 깊은 눈빛으로 문밖에 있는 소예지와 강준석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이한 씨, 여기서 다 뵙네요.”

강준석은 고이한에게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이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지 씨, 먼저 가세요. 다음에 또 봐요.”

강준석은 소예지에게 폐를 끼칠까 봐 함께 가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소예지는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내렸다.

소예지는 차를 가져왔기에 고이한과 함께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실외 주차장으로 가서 잠금을 해제하고 차에 타고는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빌라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예지는 갑자기 아랫배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생리인 걸 알아채고는 차를 빌라 단지 옆의 백화점 앞에 세워두고 생리대를 사러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온 후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오늘 밤 휴가 낼 수 있을까요? 제 딸이 아파서요.”

소예지가 서둘러 말했다.

“얼른 딸한테 가보세요.”

양희순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양희순이 나가고 소예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샤워했다. 그리고 꿀물을 타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연구 계획서를 쓸 준비를 했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소예지는 피곤한 나머지 미간을 주물렀다. 그때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이한이 들어온 것이었다.

오늘 밤은 고하슬도 집에 없고 양희순도 휴가를 내어 집에 그녀와 고이한 둘뿐이었다.

문득 불편해진 소예지는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방이 2층에 있어 3층에서 내려가는데 고이한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소예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를 건넸다.

“왔어?”

고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심유빈의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소예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이를 닦았다. 책을 잠깐 보다가 잘 생각이었다.

20분 후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고이한이 검은색 잠옷 가운을 걸치고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 뒤로 젖혀져 있었는데 막 샤워를 마친 듯했다.

“무슨 일이야?”

소예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슬이 집에 없으니까 각방 쓸 필요 없지.”

고이한이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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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예지가 막 복도를 돌았을 때 이서연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채린아, 정말 부럽다. 네가 양 박사님의 제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제 앞길이 창창하겠네.”“교수님이 나한테 거는 기대가 커. 하지만 교수님이 잘 이끌어주시면 내가 훨씬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야.”안채린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이서연이 맞장구치듯 말했다.“이번에 양 박사님이 직접 나서셨으니, 소예지는 더 이상 끼어들 방법이 없을 거야. 보나 마나 바로 탈락이야.”“능력 없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어. 이 바닥에 약자는 필요 없거든.”안채린의 조롱 섞인 말소리가 복도에 울렸다.그들이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소예지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마음이 쓰렸지만 티내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을 정리했다.그때 강준석이 찾아왔는데 그는 벌써 해외 인맥을 총동원해 전 세계의 유전자 은행에서 기증자 샘플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매칭되는 게 나오면 소예지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겠다고 했다.“선배, 고마워.”소예지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다.“고맙긴. 네 실력이 어떤지 우리 다 알아. 이번 일로 기죽을 필요 없어.”강준석은 담담하게 그녀를 위로했다.그러자 소예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끝까지 해볼 거야.”그 사이 윤혁은 그녀의 조기졸업 시험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고 잠시 후 평가용 시험지를 보내왔다.“예지야, 시험을 신청하기 전에 먼저 평가를 봐야 해. 결과가 좋아야 학교에서 정식으로 조기졸업 시험을 신청해 줄 수 있어.”“네, 선배. 최대한 빨리 해서 내일 아침까지 보내 드릴게요.”“급하지 않으니까 꼼꼼히 풀어. 완성도 높게.”그런데 마침 이서연이 윤혁에게 자료를 전해주러 왔다가 프린터에서 뽑히는 신청서를 보고 물었다.“선배, 저건 뭐예요?”“아, 예지가 조기졸업 시험을 신청하려고 해서 평가 서류를 출력해 주려고.”“뭐라고요? 예지는 아직 대학교 2학년인데요?”이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윤혁은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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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 씨가 나한테 한 달 시간을 줬어. 그 안에 맞는 골수 기증자를 찾아내라는 거야. 준석 선배, 선배 인맥 좀 빌려줄 수 있을까?”소예지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강준석의 인맥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강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수락했다.그날 오후, 실험동 회의실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이성열이 직접 와서 새로 연구팀을 이끌게 될 양정화를 소개했다.“제가 이번 프로젝트의 연구팀을 새로 꾸릴 겁니다.”양정화의 차가운 시선이 회의실을 훑었다.순간 소예지는 호흡이 멎는 듯했다.“강준석, 안채린, 도윤재. 우선 이 세 사람은 확정입니다. 나머지는 추후 심사를 거쳐 결정하겠습니다.”안채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 소예지를 흘겨보며 비웃는 시선을 던졌다. 예상대로 소예지는 명단에서 탈락이었다.“이번 연구는 고신 그룹이 전폭적으로 투자하는 사업입니다. 그만큼 철저히 검증된 인력만 필요하니 최소 학부 졸업 이상이어야 자격이 주어집니다.”말을 마친 양정화의 시선은 유독 소예지에게 오래 머물렀다.회의장 안을 둘러보니 학력이 가장 낮은 건 소예지였다. 아직 대학교 2학년을 다니는 중이었으니 양정화의 기준에선 애초에 자격조차 없는 셈이었다.회의가 끝난 뒤 소예지는 직접 이성열을 찾아갔다.“박사님, 저도 이번 연구에 참여할 수 없을까요?”이성열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예지야,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사실 양 박사를 데려온 사람이 이한이야. 게다가 이번 연구는 우리 연구소와 별개로 진행되는 독립 프로젝트라 내 권한 밖이거든.”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나한테 부탁하기보단 네 남편한테 말하는 게 더 빠를 거야. 이한이가 부부 사이의 체면을 봐서라도 너를 끼워줄 수 있지 않겠니?”하지만 소예지는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자신을 프로젝트에서 쫓아내려 한 장본인이 바로 고이한인데 그가 받아줄 리가 있나.“양 박사가 일부러 널 겨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23화

    소예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왜?”“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고이한의 말투는 담담했다.그제야 소예지는 그가 원하는 게 자신을 연구팀에서 빼내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야 그녀가 어머니의 공여 샘플과 접촉하지 못하고 연구 진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소예지는 숨을 들이쉬고 곧장 물었다.“당신이 구하려는 사람이 심유빈 씨 맞지?”고이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끝내 부정하지는 않았다.그러자 소예지의 심장이 칼날에 베인 듯 아팠다.“웃기네.”소예지는 씁쓸하게 웃었다.“내 엄마의 골수를 가지고 실험하는 거 절대 동의 못 해.”고이한은 차갑게 말했다.“한 달 시간을 줄게. 네가 그 안에 다른 적합한 골수 샘플을 찾아오면 어머님의 샘플을 돌려주고, 못 찾으면 이번 연구에 끼어들지 마.”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나가버렸다.소예지는 몸을 휘청거렸고 이내 손으로 벽을 짚고서야 겨우 버텼다.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뼈를 파고드는 고통이 퍼져나갔다.그날 밤, 소예지는 고하슬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 속에서 조용히 잠든 아이를 보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고이한이 심유빈을 위해 자신을 실험에서 밀어내려 한다니, 우습고도 비참했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딸을 유치원에 보내고 곧장 박시온의 사무실로 향했다.박시온은 미리 작성해둔 이혼 합의서를 건네주며 말했다.“정말 이대로 할 거야? 재산분할 하나도 없이? 내가 기사를 봤는데 올해만 해도 고 대표의 재산이 두 배는 불었더라.”소예지는 이혼 합의서에 적힌 조항을 차분히 훑어본 뒤 고개를 들었다.“돈은 중요하지 않아.”“그래. 뭐 더 추가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다시 써줄게.”소예지는 꼼꼼히 확인했지만 딱히 고칠 부분은 없었다. 그러자 박시온이 말했다.“내가 제일 믿는 선배 변호사가 있는데 그 선배한테 맡기는 게 좋겠어. 이혼 소송은 그 선배가 제일 잘해.”“알겠어.”소예지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강력한 변호사였다.박시온은 그 선배의 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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