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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오늘 밤 출장 갔다가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다. 소예지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고하슬은 아빠를 일주일 동안 못 본다는 소리에 밥도 먹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이한이 선물을 사주겠다고 달래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소예지는 일하면서 딸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실험실 설립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소예지는 고하슬을 데려다준 다음 곧장 A시 의대로 향했다. 오늘 회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동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뒷모습의 누군가가 문 앞에서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다. 소예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바로 강준석이었다.

그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얘기를 나누면서 긴 손가락으로 습관적으로 금테 안경을 올렸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강준석이 고개를 돌리자 소예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소예지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졌고 강준석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지야, 또 만났구나.”

그녀는 재빨리 감정을 억눌렀다.

“준석 선배.”

강준석이 웃으면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저번에 봤을 땐 네 아빠랑 닮았다는 걸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참 많이 닮았구나. 특히 눈이.”

소예지도 웃어 보였다.

“선배는 여기에 무슨 일로 왔어?”

“국내에 세계 최대 유전자 검사 기지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 온 김에 임용 절차도 밟고.”

소예지가 흥분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서 일하게 된 거야?”

강준석이 안경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어”

“환영해. 선배랑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소예지는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강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 좋게 너의 아빠랑 일했었고 또 너랑 동문도 되었는데 이번에는 동료가 돼서 나도 너무 기뻐.”

그때 옆 복도에서 두 사람이 서류를 안고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안채린이었는데 강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남자한테 첫눈에 반했어?”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를 툭 쳤다.

안채린의 예쁜 얼굴에 수줍음이 감돌았다.

“저 남자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강준석이라고 M국 의학계 천재야.”

안채린의 두 눈에 흠모하는 빛이 가득했다.

“뭐야? 지금 강준석이랑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소예지 아니야?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안채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소예지를 훑어봤다. 최근 회의마다 참석하는 걸 보면 소예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 덕에 겨우 들어온 거라고 추측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중요했다. 소예지의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회의에서 강준석은 실험팀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의학계의 젊은 천재가 자발적으로 귀국하여 이 실험에 참여했다는 건 실로 뜻밖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예지야, 토요일 저녁에 강 박사 환영회를 열기로 했는데 꼭 참석해. 알았지?”

윤혁의 말에 소예지가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가야죠.”

“강 박사 덕분에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

그때 강준석이 선배들과 얘기를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자 윤혁이 웃으며 말했다.

“강 박사님, 그럼 전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가볼게요. 오늘 밤 환영회에서 다시 얘기 나누고 술도 한잔해요.”

“그럽시다.”

강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강준석이 놀란 표정으로 소예지에게 물었다.

“종양이 미세 환경에서 CAR-T 세포 생존 시간을 90일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이건 소예지가 지난 6년 동안 계속 연구해온 과제였다.

“아빠가 제공해주신 몇 가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견해를 대담하게 제시해봤어. 물론 지금은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아.”

소예지의 말에 강준석의 두 눈에 존경심이 가득해졌다.

“너의 분석 보고서를 봤는데 모두 매우 선구적이고 실험 가능성이 높아. 사실 내가 귀국한 이유도 너 때문이야.”

그녀가 깜짝 놀라자 강준석이 서둘러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 내 말은 너의 견해에 관심이 생겼단 말이야.”

소예지가 피식 웃었다.

“선배랑 함께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

저녁, 소예지는 딸에게 줄 풍경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별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자 고하슬은 매우 좋아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고하슬이 기뻐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가 왔나 봐요.”

소예지가 뒤쫓아 나왔을 때 고하슬은 이미 고이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 보고 싶었어?”

“네. 아빠, 선물은요?”

고이한은 다시 차 트렁크로 돌아가 예쁜 인형을 꺼냈다.

“마음에 들어?”

“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에게 향했다.

“네 선물은 내일 줄게.”

그러자 소예지가 무심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어.”

고이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의 선물을 뜯어주려고 가위를 찾았다.

소예지는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이한이 돌아와 고하슬과 놀아줘서 잠시 일할 틈이 생겼다.

저녁 식사 시간 고이한이 고하슬에게 말했다.

“할머니랑 왕할머니가 귀국하셨어. 내일 만나러 갈까?”

소예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출장 갔다더니 어머님이랑 할머니를 모시고 온 거였어?’

고하슬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럼 할머니 집에서 지내도 돼요?”

“내일 주말이니까 아빠가 데려다줄게.”

고이한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설이 다가와 함께 설을 쇠려고 고이한이 시어머니와 할머니를 미리 모셔왔고 설 이후에 국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소예지는 생각했다.

저녁, 소예지는 고하슬을 재운 다음 서재에 가려 했다. 그때 고이한이 안방에서 나오면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달래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지금 갈게. 몇 분 안에 도착할 거야.”

잠시 후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별장에서 몇 분 거리면 심유빈의 집이겠지.’

...

아침 식사 시간, 양희순은 무심코 고이한이 새벽 2시에 들어왔다고 말해버렸다. 말한 후에는 소예지의 표정을 몰래 살폈다.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때 고이한이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양희순은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일을 봤다.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사랑스럽고 예쁜 헤어스타일을 해주고 핑크 패딩을 입혔다. 젤리가 옆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는데 아이와 많이 친해 보였다.

“아빠, 젤리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요?”

고하슬이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고하슬의 패딩 지퍼를 올려주었다.

“할머니 집이 너무 커서 혹시라도 젤리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젤리는 요 며칠 엄마한테 맡기자.”

고하슬은 약간 시무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고이한이 차를 몰고 집을 나섰고 소예지는 그의 차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아주머니, 점심이랑 저녁 다 집에서 안 먹으니까 내 건 하지 않아도 돼요.”

소예지가 뒤돌아 양희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오늘 실험실에서 강준석의 환영회를 열기로 했기에 저녁은 밖에서 먹어야 했다. 점심은 실험실에 갔다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소예지는 의대 실험동에 도착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혁을 만났다. 윤혁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지야, 좋은 소식이 있어. 여러 회사에서 협력 의향서를 보내왔는데 모두 실력 있는 대기업들이야.”

소예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수고가 많네요.”

“수고는 무슨. 아 참. 네 남편도 의약계에 관심이 있어? 의약 쪽에 투자할 의향은 없대?”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가장 먼저 바라지 않았던 게 바로 고이한이 이 실험실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소예지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심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은 과학기술과 석유 쪽 투자를 좋아하거든요.”

“시간 되면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 좀 해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잖아.”

“네. 그렇게 할게요.”

소예지는 일단 알겠다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고이한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오후 5시 30분, 실험팀 전체가 윤혁이 예약한 고급 호텔 안의 식당으로 출발했다.

소예지는 계획서를 쓰느라 늦어진 데다가 교통사고 때문에 길이 막혀 7시가 돼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윤혁의 재촉 전화가 또 걸려오자 소예지가 전화를 받았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어요. 금방 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쪽으로 오자마자 소예지는 걸음을 멈췄다. 심유빈이 중요한 연회라도 참석하려는지 섹시한 샴페인 골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바로 소예지의 남편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심유빈과 고이한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침 일찍 하슬이를 어머님 댁에 데려다준 게 혹시 심유빈이랑 단둘이 주말을 보내기 위해서였어?’

비록 지금 고이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그의 외도 장면을 직접 목격하니 여전히 치가 떨렸다.

소예지가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이미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고 윤혁이 그녀를 맞이했다.

“예지야,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얼른 강 박사님 옆에 앉아. 이따가 술도 한잔 따라드려야지.”

소예지가 강준석의 옆에 앉자 몇몇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안채린도 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윤혁이 말린 바람에 앉지 못했다. 알고 보니 소예지를 앉히려고 일부러 강준석의 옆자리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는 강준석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명 아래 소예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강준석은 더욱 멋있고 젠틀했다. 나란히 앉아 있으니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안채린은 질투 섞인 눈빛으로 소예지를 째려봤지만 앞으로 일하면서 전문 지식으로 소예지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윤혁이 일어나 잔을 들었다.

“실험실을 설립한 건 매우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일단 가장 큰 공을 세운 소예지 씨에게 한잔 올립시다. 소예지 씨가 있었기에 실험실을 설립할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안채린이 속으로 비웃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애가 그런 방안을 세웠다고?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방안을 베낀 거겠지.’

소예지는 웃으면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잔을 들었다. 나이는 젊어도 침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고 겸손하면서 비굴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늘 밤의 남자 주인공에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바로 천재 의학 박사 강준석 씨입니다. 강준석 씨의 합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강준석에게 술을 올렸다. 강준석은 안경을 올리며 남다른 분위기로 잔을 들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라 흥겹게 얘기를 나눴고 앞으로 실험실을 운영해나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9시 30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환영회가 끝이 났다. 강준석은 소예지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렸다.

부드럽게 열린 문 뒤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바로 고이한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고이한이 깊은 눈빛으로 문밖에 있는 소예지와 강준석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이한 씨, 여기서 다 뵙네요.”

강준석은 고이한에게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이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지 씨, 먼저 가세요. 다음에 또 봐요.”

강준석은 소예지에게 폐를 끼칠까 봐 함께 가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소예지는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내렸다.

소예지는 차를 가져왔기에 고이한과 함께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실외 주차장으로 가서 잠금을 해제하고 차에 타고는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빌라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예지는 갑자기 아랫배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생리인 걸 알아채고는 차를 빌라 단지 옆의 백화점 앞에 세워두고 생리대를 사러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온 후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오늘 밤 휴가 낼 수 있을까요? 제 딸이 아파서요.”

소예지가 서둘러 말했다.

“얼른 딸한테 가보세요.”

양희순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양희순이 나가고 소예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샤워했다. 그리고 꿀물을 타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연구 계획서를 쓸 준비를 했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소예지는 피곤한 나머지 미간을 주물렀다. 그때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이한이 들어온 것이었다.

오늘 밤은 고하슬도 집에 없고 양희순도 휴가를 내어 집에 그녀와 고이한 둘뿐이었다.

문득 불편해진 소예지는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방이 2층에 있어 3층에서 내려가는데 고이한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소예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를 건넸다.

“왔어?”

고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심유빈의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소예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이를 닦았다. 책을 잠깐 보다가 잘 생각이었다.

20분 후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고이한이 검은색 잠옷 가운을 걸치고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 뒤로 젖혀져 있었는데 막 샤워를 마친 듯했다.

“무슨 일이야?”

소예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슬이 집에 없으니까 각방 쓸 필요 없지.”

고이한이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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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ga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엥그리멍
양육권 가지려면 직업도 있어야하고 딸하고 유대감도 쌓아야하니 엄청 뒤에나 이혼이 시작하려나요? 당당히 바람피우고 온 시댁 식구들 한테 무시당하면서 남편과 강제 잠자리까지 하는건 아니겠죠? 이제 100화 좀 넘은듯 한데 이거 지금 시작안하는게 나을듯.속만 터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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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하준과 이안이 외국에서 돌아온 것이었다.“예지 이모!”멀리서 달려오던 이안이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반겼고 소예지는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엄마, 오늘 이안이 우리 집에 초대해도 돼요? 나 진짜 이안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고하슬이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애원하듯 물었다.소예지는 아이의 간절한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우리 집에 초대하자.”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윤하준에게 향하자 윤하준도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야 아이가 기쁘다면 더 바랄 게 없죠.”아이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난 얼굴로 먼저 마당으로 뛰어나갔다.그 모습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던 소예지가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윤하준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요즘 잘 지냈어요?”소예지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요.”윤하준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 힘든 일이 있거나 내가 나서야 할 일이 생기면 꼭 말해주세요.”그의 진심 어린 말에 소예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짧은 인사 후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윤하준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하종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너 소예지 만났어? 거긴 상황이 어때?”다급한 목소리로 묻는 하종호의 말에 윤하준은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리가 이런 일에 깊이 관여하는 건 좋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너무 휘둘리지 마. 이건 어디까지나 소예지 씨와 심유빈 씨, 두 사람 사이의 일이야.”“알아. 근데 유빈 씨 어젯밤 내내 울더라. 그 공익 홍보는 정말 어렵게 따낸 자리였거든.”하종호의 목소리엔 한숨이 섞여 있었다.윤하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유빈 씨가 뭔가 잘못했겠지.”그 말에 하종호는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보니까, 넌 앞으로도 쭉 소예지 편 들겠구나?”“응. 솔직히 말할게. 나 진심으로 소예지 씨 좋아해.”하종호는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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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 그러니까 저 여자가 바로 고 대표의 미래 장모라는 거네?”주변에 모여 있던 직원들 사이로 은근한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감히 소예지를 상대로 이런 소란을 피울 수 있었던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갔다.고이한의 이름이 언급되자, 소예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잘됐네요. 그렇다면 고이한한테 직접 오라고 하세요.”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을 뱉었다.그 말에 심미정은 이성을 잃고 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뺨을 후려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재빨리 달려와 심미정의 손목을 단단히 막아섰다.“그만두시죠.”낮고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침 회의 참석차 연구소에 복귀하던 강준석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이끌려 급히 달려온 것이다.소예지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났고 그때 헐레벌떡 뛰어온 안채린이 심미정을 급히 부축했다.“이모,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채린아! 바로 저 여자야. 저 소예지라는 여자가 우리 유빈이 맡았던 홍보대사 자리를 망쳐놨어! 이게 말이 돼?”분노에 떨며 울분을 토하는 심미정에게 강준석은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쳤다.“여긴 실험실입니다. 개인적인 일은 사무실에 가서 하시죠.”“너는 또 뭐야? 설마 얘 애인이라도 돼?”심미정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순간, 안채린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이모의 팔을 끌어당기며 애써 진정시키려 했다.“이모, 여기 사람 많잖아요. 밖에서 이야기해요.”심미정은 억지로 몇 걸음 끌려가면서도 끝내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돌아서 소예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소예지, 잘 들어! 우리 모녀가 널 무서워할 줄 알아? 내 사위는 고이한이야. 두고 보라고!”그녀의 고함에 연구원들 사이로 다시 한 차례 술렁임이 일었다.그러자 강준석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그만 자리로 돌아가세요.”그제야 직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복도는 서서히 조용해졌다.강준석이 조심스레 소예지를 향해 물었다.“괜찮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330화

    새벽녘, 심유빈의 소속사에서 한 통의 공식 성명이 발표되었다.건강상의 이유로 여성의 날 홍보 촬영에 불참하게 되었고 따라서 올해의 공익 캠페인 활동에서 자진 하차한다는 내용이었다.마침 잠에서 깨어 있었던 소예지는 그 성명을 확인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심유빈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소예지와 맞서기엔 감히 그럴 용기를 낼 수 없었다.무엇보다 그녀와 고이한 사이에 있었던 일은 명백한 사실이었다.심지어 고이한조차 그녀에게 전화 한 통 걸어오지 않았다. 딸은 소예지에게 있어 절대 건드려선 안 될 '금기'라는걸 그도 알고 있었고 누구든 그 선을 넘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뻔했다.다음 날 아침, 고하슬을 등교시키던 소예지는 담임 선생님을 따로 불러 조용히 당부했다.“앞으로 수업 중이나 원내에서 하슬이가 심유빈과 마주치지 않게 조금만 신경 써 주세요.”선생님은 고개를 숙이며 연신 사과했다.“죄송합니다, 하슬이 어머님. 새 학기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 부분까지는 미처 신경을 못 썼네요.”소예지는 선생님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그저 또다시 그 아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다시 한번 심유빈의 성명을 확인했을 땐, 여성 연합회 공식 계정에서도 ‘유감’이라는 표명과 함께 그녀의 하차를 공식화한 입장이 나와 있었다.이로써, 심유빈이 이번 캠페인에서 완전히 물러났음이 분명해졌다.어디서 소식을 들은 건지 박시온도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왔다.소예지가 실험실로 향하던 길목이었다.“진짜 속이 다 시원하다니까. 어떻게 딱 그 촬영 시점에만 맞춰서 아프다니?”“아픈 게 아니라 내가 협박한 거야.”소예지는 덤덤하게 진실을 털어놓았다.그 말을 들은 박시온은 펄쩍 뛰었다.“와, 심유빈 미친 거 아니야? 악질도 그런 악질이 없어! 여섯 살짜리 애한테 그런 말을 해? 나중에 하슬이가 커서 그거 기억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모르잖아!”“그래서 더는 봐줄 생각 없어. 만약 다시 접근해 오면 그땐 더 강하게 나갈 거야.”소예지의 목소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329화

    “네!”고하슬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대답했다.“유빈 이모가 다음에 놀이공원 데려가 준대요!”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소예지는 차를 멈추고 천천히 딸을 바라봤다.“하슬아, 앞으로 누가 선물을 주면 꼭 엄마한테 먼저 물어보고 받아야 해. 알겠지?”“그런데 유빈 이모는 남이 아니잖아요?”아이의 눈망울은 맑고 순수했다.“유빈 이모가 그러는데 자기는 아빠의 제일 친한 친구래요. 아빠한테 아주, 아주 중요한 사람이래요.”그 말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녀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소예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감정을 눌러 담으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정말 그렇게 말했어?”고하슬은 사탕 포장을 까면서 고개를 귀엽게 끄덕였다.소예지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이건 분명 고이한이 시킨 짓이야. 내 딸에게까지 접근하라고?’“엄마, 화났어요?”아이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아니야.”소예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엄마는 그냥 생각 좀 하느라 그래. 하지만 하슬아, 앞으로 유빈 이모가 너 혼자 부르면 꼭 엄마한테 먼저 말해야 해. 알겠지?”“네...”아이의 표정엔 이해하지 못한 듯한 순진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집으로 돌아오자, 소예지는 딸의 작은 가방을 정리하다가 낯선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부드러운 벨벳 재질에 금박으로 로고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상자.뚜껑을 열자, 안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백조 모양의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엄마, 예뻐요?”고하슬이 상자를 들여다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유빈 이모가 이건 나만을 위해 만든 거라 했어요. 전 세계에 딱 하나밖에 없대요!”소예지는 말없이 상자를 닫았다.그리고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하슬아, 이건 너무 비싸서 지금은 엄마가 대신 보관할게. 하슬이가 좀 더 크면 그때 걸자. 응?”“네...”고하슬은 아쉬운 듯 입술을 내밀었지만 곧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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