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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친구의 현실적인 말에 소예지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 양육권을 다툰다면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난 원래 화해를 권하거나 헤어지는 걸 권하는 사람이 아니야. 고이한 정도면 여자들이 꼬이는 게 당연한 거니까 마음을 편히 가져. 자꾸 화내지 말고. 아니면 아들 하나 더 낳아주는 건 어때?”

박시온은 소예지에게 가까이 다가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소예지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

“그 사람이 없으면 난 더 잘 살 수 있어.”

그때 소예지의 휴대폰이 울리자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윤혁 선배.”

“예지야, 지금 시간 있어? 회의 있으니까 실험동으로 와.”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소예지가 대답했다.

이번 회의는 이성열이 직접 주도한 회의였고 국내 의학 연구원들을 소집하여 실험실 설립을 제안했다. 의학계 거장인 명성에 걸맞게 모두 그의 부름에 응했다.

소예지가 회의실에 도착하자 윤혁이 손짓하며 그녀를 불러 옆자리에 앉혔다. 그때 소예지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네 명 보였는데 모두 A시 의대 동기들이었다.

그녀는 2학년 1학기에 자퇴했다. 그때 임신하여 딸을 낳았다. 남들은 그녀가 앞뒤 가리지 않고 가정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소예지가 회의실에 나타난 순간 몇몇 동기들은 놀랍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회의가 끝난 후 소예지는 딸을 데리러 가기 위해 서둘렀다. 그녀의 동기인 이서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예지야, 오랜만이야. 거의 6년 만이지?”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이 회의는 어쩌다가 참석하게 됐어?”

옆에 있던 키가 큰 여자가 물었다.

“이 박사님이 날 초대하셨어.”

소예지가 답했다. 소예지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안채린이라고 같은 반 친구였는데 아주 예쁘고 똑똑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미안한데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그때 뒤에서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가 무슨 자격으로 이 실험에 참여해?”

“그러게 말이야.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도 참여하면 우리가 그동안 죽어라 노력한 게 뭐가 돼?”

이서연이 말했다.

“쟤 아빠가 누군지나 보고 말해. 왜 쓸데없이 참견들이야.”

오후, 소예지는 젤리와 함께 고하슬을 데리러 갔다. 아니나 다를까 딸의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 보였다. 집에 돌아온 후 젤리와 고하슬은 정원의 잔디밭에서 뛰어놀았고 소예지는 책을 읽었다. 강아지 짖는 소리와 딸의 웃음소리를 듣던 소예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6시, 고이한이 들어왔다. 손에 정장을 들고 있었고 회색 조끼가 그의 탄탄한 허리 라인을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곧게 뻗은 양복바지 아래로 최고의 남자 모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긴 다리가 드러났다.

거실에서 고하슬과 함께 TV를 보던 소예지는 고이한이 들어온 걸 보고는 고개를 들어 힐끗 쳐다봤다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TV에서 나오는 유치한 만화가 고이한보다 더 재미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아빠.”

고하슬이 앳된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달려갔다.

고이한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너무도 귀여워 볼에 뽀뽀했다.

“오늘 말 잘 들었어?”

“네. 밥도 제일 잘 먹어서 선생님이 칭찬까지 해주셨어요.”

고하슬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고이한이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아빠가 샤워하고 내려와서 같이 놀아줄게.”

“알았어요.”

고하슬은 다시 달려가 만화를 봤다.

코가 예민한 소예지는 공기 중에 떠도는 옅은 향수 냄새를 맡은 순간 기분이 확 불쾌해졌다.

어젯밤 잠자리를 거절했더니 오늘 심유빈을 찾아 해결한 게 분명했다.

9시, 소예지는 3층 서재에서 보고서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방 문을 열었다. 고하슬인 줄 알고 고개를 들었는데 뜻밖에도 고이한이었다.

소예지는 재빨리 보고서 페이지를 닫고 뉴스를 보는 척했다.

고이한은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천천히 물었다.

“언제까지 화를 낼 건데?”

소예지는 흠칫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나 화 안 났는데.”

“그런데 태도가 왜 그래?”

그의 시선에 공격적인 기운이 담겨 있었다.

“내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소예지가 되묻자 고이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는 심유빈을 불러내 그와 삼자대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양육권을 가져올 확신이 들기 전에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알았어.”

소예지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때 고이한이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몸을 밀착시켜 압박해왔다. 당장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듯한 분위기였다.

“대충 넘어가려 하지 마.”

그의 목소리에 강력한 기세와 압박감이 묻어났다.

손목이 점점 아파온 소예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놔.”

고이한이 칠흑같이 어두운 눈빛으로 경고했다.

“아내로서 해야 할 본분을 다해.”

그러고는 손을 놓고 나가버렸다.

공기 중에 여전히 그의 분노가 남아 있는 듯했다. 소예지는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자기는 남편 자격도 없으면서 나더러 아내의 본분을 다하라고? 웃겨서, 원.’

그 후 며칠 동안 소예지는 아침에는 고하슬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데리러 갔으며 점심에는 짬을 내어 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고이한은 그날 밤 거절당한 후 다시는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고이한은 오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 누구에게도 결코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곤 없었다.

오늘 소예지가 집을 나섰을 때 추돌 사고 때문에 유치원 앞이 10분 넘게 길이 막혔다. 차를 주차하자마자 재빠르게 유치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하슬의 교실 문 앞에 도착해보니 고하슬이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심유빈이 허리에 묶인 리본을 매만져주고 있었다.

“엄마 또 늦었지? 그런데 괜찮아. 이모가 헤이즐넛 초콜릿을 가져왔어... 봐봐.”

그 순간 소예지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심유빈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녀와 딸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고 웃으며 다가갔다.

“하슬아, 엄마 왔어.”

“엄마, 왜 이제 왔어요.”

아니나 다를까 고하슬이 뾰로통 해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해. 엄마가 내일은 제일 먼저 데리러 올게, 응?”

그러고는 고하슬을 안고 나가려 했다.

“유빈 이모, 초콜릿 주세요.”

고하슬은 심유빈의 초콜릿을 잊지 않았다.

5살도 채 안 된 여자아이에게 초콜릿은 강력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심유빈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초콜릿을 건네자 소예지가 고하슬에게 말했다.

“하슬아, 잠깐 저쪽 가서 놀고 있을래?”

고하슬은 가방을 내려놓고 놀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딸이 가자마자 소예지의 표정이 확 차가워지더니 망설임 없이 경고했다.

“심유빈 씨,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나랑 하슬이 사이를 이간질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심유빈이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하슬이를 만나러 오는 것에 대해 이한 오빠도 뭐라 하지 않는데 왜 예지 씨가 나서서 이러는 건데요?”

소예지는 몸을 돌려 주먹을 꽉 쥐고 심유빈을 노려보았다.

“내 딸한테 접근하는 모습이 내 눈에 한 번만 더 띄었다간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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