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하준 삼촌!”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전시장 안에 울려 퍼졌고 고하슬은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윤하준을 향해 팔을 벌리고 달려갔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시온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소예지를 힐끔 바라봤다.‘윤 대표가 차 보러 온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애초에 따라오지 않았을 텐데...’하지만 소예지의 표정은 어딘가 어리둥절했다. 그녀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윤 대표님, 혹시 소예지랑 같이 차 보러 오신 건가요?”박시온이 예의 바른 미소로 물었고 윤하준은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아뇨. 정비 때문에 들렀다가 신차 모델이 나왔다길래 구경 삼아 들어와 본 거예요. 이렇게 마주칠 줄은 정말 몰랐네요.”‘정말 우연일까?’박시온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소예지를 바라봤다.하지만 소예지는 정말 몰랐다. 다만 며칠 전, 임재석이 그녀의 차량 정리 건을 맡으며 다음 차는 어떤 걸로 생각 중이냐고 물었을 때 무심코 “벤틀리 쪽으로 생각 중이에요”라고 흘리듯 말한 게 전부였다.‘혹시 윤 대표가 그걸 임 이사에게 들은 걸까?’“윤 대표님, 두 분 아시는 사이세요?”그 장면을 보고 있던 판매 매니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고 윤하준은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네. 이분은 친한 친구입니다.”굳이 ‘친한’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그의 말에 매니저의 태도는 즉시 달라졌고 소예지를 대하는 자세가 한결 더 정중해졌다.윤하준은 한참 동안 소예지가 바라보던 차량을 조용히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이 차, 딱 소예지 씨에게 어울려요.”그의 말은 단순한 칭찬 이상이었다. 그녀가 이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멋지고 근사했다. 그의 눈에 비친 소예지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소예지, 윤 대표님께 시승 같이해달라고 해봐. 우리는 하슬이랑 놀고 있을게.”박시온이 장난기 섞인 말투로 등을 떠밀었고 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던 찰나, 윤하준이 먼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려는 순간, 바깥에서 심유빈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이한 오빠, 빨리 와! 다들 오빠 기다리고 있어! 임 이사님도 같이 가서 한잔하시죠!”그 목소리 너머로 임재석의 정중한 거절이 희미하게 따라왔다.“아닙니다. 저는 아직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요.”호텔 문을 나서자 대기 중이던 보안요원이 서둘러 다가와 인사했다.“대표님.”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호텔 옆 VIP 주차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에 올라타 음악을 틀자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와 함께 혼자만의 드라이브에 묘한 여유가 스며들었다.하지만 집으로 향하던 길, 절반쯤 지났을 무렵 갑자기 차가 멈춰 섰다. 경고등이 깜빡였고 조용하던 엔진이 이내 완전히 꺼졌다.소예지는 자신과 5년을 함께한 포르쉐 카이엔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젠 정말 바꿔야 할 때가 됐네.’그녀는 곧바로 견인 업체에 연락해 차를 정비소로 보냈고 임재석에게 내일 차량 처리 관련 부탁을 전했다. 임재석은 세심하게 비서에게 다른 차량을 하나 몰고 가서 소예지가 당분간 사용할 수 있도록 챙겨 주었다.그날 밤.소예지는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인 채 책을 읽고 있는 그때 옆에 둔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윤하준이 보낸 메시지였다.[임 이사한테 들었어요. 차가 고장 났다던데 새 차로 바꿀 생각이 있어요?]소예지는 솔직하게 답장을 보냈다.[네. 토요일에 보러 가려고요.]곧 윤하준의 답장이 도착했다.[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차 쪽은 제가 좀 아니까.]하지만 소예지는 부드럽게 거절했다.[괜찮아요. 이미 친구랑 가기로 했어요.]그녀가 말한 친구는 박시온이었다.[그래요.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해요. 저 시간 많습니다.]그 다정한 말에 소예지는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을 감는 순간, 문득 떠오른 얼굴은 윤하준이 아닌 고이한이였다.딸의 양육권을 빌미로 그녀와 윤하준의 관계를 떠보려 했던 그 남자의 뻔뻔함은 정말이지 도를 넘
“네, 할머니. 얼른 들어가세요.”소예지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차를 돌려 떠났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멀어지기까지 그 짧은 순간에도 고이한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현숙은 고개를 돌려 손자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따뜻하게 인사 한마디도 못 하니? 잘 가라는 말조차 못 해?”고이한은 할머니의 잔소리를 묵묵히 들으며 말없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하고는 집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한들 소예지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관심이나 후회 따위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집으로 돌아온 소예지는 곧장 다음 달 열릴 생물의학 포럼 발표 준비에 돌입했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바쁜 삶이었지만 그런 바쁨조차 그녀에겐 익숙한 일이었다.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가치 있다'고 믿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소예지는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그리고 3일 뒤.점심 식사 후 짧은 휴식 시간, 소예지는 무심코 뉴스를 넘기다 한 화면 앞에서 손가락을 멈췄다.그 소식을 스치듯 읽는 순간, 메시지 알림이 떴다.[방금 뉴스 봤어? 들은 얘긴데 고이한이 이번에 심유빈 아버지 회사에 투자했고 상장까지 도와줬대.]소예지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응, 봤어.]곧 박시온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고이한, 병원 가서 눈 좀 검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안영수 그 인간 하는 짓 얼마나 더럽니. 그런 회사에 투자해서 상장까지 시켜주고 앉았으니 눈이 삐었지.]소예지는 담담하게 답을 보냈다.[그냥 사업가 본성일 뿐이야.]그 순간,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 임 이사님?”“대표님,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실까요? 카이더 그룹의 수석 엔지니어가 오늘 A시에 도착
오후, 소예지는 딸을 데리러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가 교문 근처에 서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놀람과 반가움이 겹친 표정으로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할머니? 여기 웬일이세요?”결혼 후 여섯 해 동안 그녀는 최현숙을 늘 ‘할머니’라 불러왔다.그 긴 시간을 단번에 무시하고 거리를 두는 건, 소예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난 걸 본 최현숙은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 번지며 다정히 말했다.“왔구나, 예지야.”“오래 기다리셨어요?”“아니야, 얼마 안 됐어.”최현숙은 소예지를 찬찬히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얼굴은 괜찮아 보이는데 또 살이 조금 빠졌네.”“근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소예지는 조심스레 물었다.“그냥 집에서 산책 겸 걸어왔어. 하슬이가 보고 싶기도 했고.”소예지는 문득 떠올랐다.최현숙이 이 근처로 이사 온 이후, 아직 한 번도 그녀를 집에 초대한 적 없었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을 짓눌렀다.가볍지 않은 그 감정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입을 열게 했다.“할머니, 오늘 저녁 저희 집에서 식사하고 가세요.”그 말에 최현숙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그래! 나도 네 집에 한번 가보고 싶었어.”그렇게 소예지는 고하슬의 손을 잡고 최현숙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도착하자마자 양희순은 반가운 손님을 위해 분주하게 저녁 준비에 들어갔고 최현숙은 거실 소파에 앉아 집 안을 찬찬히 둘러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참 좋다. 포근하고 아늑하구나. 너랑 하슬이가 지내기에 딱 좋아 보이네.”소예지는 조용히 차를 내어 할머니에게 건넸고 최현숙은 찻잔을 받아서 들며 다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예지야, 너랑 이한이 일은 내가 아직도 네 입으로 직접 듣질 못했구나.”소예지의 얼굴빛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할머니, 그 사람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최현숙의 얼굴에 아쉬움과 미안함이 스쳤지만 더 이상 말은 이어가지 않았다.잠시 후, 그녀는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난 어릴 때부터 돈이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 집에 돈이 많든 적든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아.”안채린은 여유롭게 긴 머리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회의실 쪽으로 향했고 문 너머로 들어오는 소예지의 모습을 발견하자,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말이지 우리 아빠가 이번에 무사히 상장할 수 있었던 건 사실 한 사람 덕분이야.”“누군데?”동료들 사이에서 궁금하다는 듯 반응이 터져 나왔다.안채린은 일부러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소예지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또렷하게 말했다.“그 사람은 바로 고 대표야. 우리 아빠가 상장 준비할 때 고 대표가 큰 도움을 줬거든. 지금은 우리 회사의 주주이기도 하고.”분명 안채린은 어릴 때부터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명문가나 재벌가 출신은 아니었다. 중산층 수준에서 안정적인 삶을 누려왔고 그만하면 누구 부럽지 않은 위치였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아버지 회사가 상장에 성공하면서 몸값이 단숨에 치솟았고 A시에서도 손꼽히는 기업가 가문으로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았다.한편, 그 대화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소예지는 조용히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녀를 발견한 강준석이 고개를 들어 웃으며 인사했다.“왔어.”“응.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고 있어?”소예지는 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물었고 강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지금까진 순조로워. 아, 들었어? 빠르면 한 달 안에 신약이 임상 단계에 들어갈 수 있을 거래. 긴장되지?”“긴장돼. 솔직히 부담도 되고.”소예지가 솔직히 털어놓자 강준석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나저나 들었는데 이 프로젝트 덕분에 이 교수님이 국가 특허 연구 기금도 따냈다며? 거기다 국제 의학 특허상에도 신청해 놨다고 하던데. 만약 수상하면 이르면 10월에 발표 날 거라더라.”그 말이 끝나자 회의실 문 근처에서 자료를 들고 있던 안채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아까까지만 해도 아버지 회사의 상장 소식을 앞세워 소예지에게 은근히 자랑을
소예지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또 무슨 수를 쓰려는 건데?’그녀의 시선은 차갑게 날을 세운 채, 고이한을 겨눴다.“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물론 꼭 서명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그 말투는 지나치게 태연했고 그 차분함이 오히려 비웃음처럼 느껴져 소예지는 짧게 숨을 들이쉬곤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당신이 무슨 꼼수를 부리든 상관없어. 난 그 게임에 끼어들 생각도 흥미도 없어.”고이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당신, 윤 대표 꽤 좋아하잖아. 주 여사님도 당신을 받아들였고. 다만 윤 대표는 몇 년이든 당신을 기다릴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가족들은 다르겠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더 낮고 잔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나는 오히려 당신네 둘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그 말에, 소예지는 더는 참지 못했다.한 걸음 앞으로 다가선 그녀는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철을 그대로 집어 들더니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탁!서류철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소예지는 이를 악문 채 고이한을 노려보았다.“고이한. 경고하는데 어떤 수작으로도 날 위협하려 들지 마. 양육권은 평생 절대 당신에게 넘기지 않아. 그딴 꿈은 꾸지도 마.”마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여비서는 그 소리에 놀라 화들짝 고개만 내밀었다가 이내 조용히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고이한은 그 자리에 멈칫 서 있었다.소예지가 이렇게 격한 감정을 드러낸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말문이 막힌 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그리고 몇 초 후, 낮고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됐어. 이 일은 없던 걸로 하자.”그 말투는 아까까지의 확신도, 냉정함도 없었다.소예지는 더는 듣고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고 곧장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고이한의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들었다.“연애만 하지 말고 연구 프로젝트도 좀 신경 써. 일정 늦추지 말라고.”소예지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문을 힘껏 닫고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