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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작가: 이야기보따리
고이한이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부드러운 조명 아래 느슨하게 걸친 목욕가운 사이로 그의 날렵한 쇄골과 탄탄한 가슴 근육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의 몸에서는 특유의 건강한 생기가 느껴졌다.

“가서 씻어.”

소예지는 시선조차 들지 않은 채 무심히 대꾸했다.

“먼저 자. 난 좀 이따 나갈 거야.”

“이 밤에 어딜 간다고?”

고이한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친구네 집.”

소예지는 짧게 답했다. 그때 박시온의 메시지가 마침 도착했다. 소예지는 바로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서서 고씨 가문의 저택을 벗어났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빠르게 걸어가 박시온의 차에 올라탔다.

“고 대표 집에 있는 거야?”

박시온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있어.”

소예지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집에 있는데 널 내 집에서 자게 그냥 둬?”

박시온이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직도 내가 그 사람하고 같은 침대에서 잔다고 생각하는 거야?”

소예지가 반문하자 박시온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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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예지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못 한 채 휴대폰을 움켜쥐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고이한의 집과 연결된 문을 열고 곧장 2층 침실로 달려갔다.너무 급하게 뛰어온 탓에 문을 들어서자마자 단단한 품에 그대로 부딪쳤다.상대도 놀랐는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싸 넘어지지 않게 붙잡았다.소예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고이한이었다.그는 짙은 회색 정장을 갖춰 입고 머리까지 말끔하게 손질한 상태였다. 안색이 조금 창백한 것만 빼면 어느새 평소의 냉철한 사업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고이한은 품 안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소예지를 내려다봤다. 다급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을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웃음기가 스쳤다.아무리 모진 말로 자신을 밀어내도 행동까지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다급하게 달려온 것만 봐도 소예지가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소예지가 그의 품에서 한 걸음 물러나자 고이한도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며 소매 단추를 정리했다. 말끔하게 갖춰 입은 차림을 보니 외출할 준비를 마친 게 분명했다.“당신 아직 아프잖아. 어디 가?”소예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회사에 급한 회의가 있어. 잠깐 다녀와야 해.”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뒤 덧붙였다.“당신한테 전화한 것도 나간다고 말하려고 한 거야.”소예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괜히 헛기침을 한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아... 난 또...”“내가 많이 아파서 당신한테 살려 달라고 전화한 줄 알았어?”고이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아직 열도 다 내리지 않은 주제에 여유롭게 자신을 놀리는 모습이 얄미울 정도였다.고이한은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 자연스럽게 콧등에 걸쳤다.안경을 쓰자 충혈된 눈과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자연스럽게 가려졌다. 그 덕분인지 평소의 냉철하고 빈틈없는 사업가다운 분위기가 한층 짙어졌다.소예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상태로 운전할 수 있어?”“할 수 있어. 이제 미열 정도야.”고이한은 손목시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55화

    소예지는 어쩔 수 없이 고이한을 부축해 침실로 데려갔다.고이한은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천천히 옆으로 누웠다. 누운 뒤에도 얼굴은 소예지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가지 않으면 안 돼?”고이한이 힘없는 목소리로 부탁했다.소예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안 갈게. 자.”그제야 고이한은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며칠 동안 쌓인 피로에 고열까지 겹쳤으니 몸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호흡은 묵직하면서도 고르게 변했다.하지만 미간은 여전히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잠든 뒤에도 무언가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좀처럼 표정이 편안해지지 않았다.소예지는 창가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아 턱을 괸 채 한동안 침대에 누운 고이한을 바라봤다.마음이 복잡했다.창밖에는 여전히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소예지의 마음도 창밖에 흩날리는 빗줄기처럼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럼에도 최현숙의 마지막 유언과 방재근의 아내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오히려 소예지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사람의 감정은 때로 순간적인 집착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고이한이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에도 과거의 정이 어느 정도 섞여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아니면 절대 안 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의 마음도 달라질 수 있었다.그때 침대에 누운 고이한이 희미하게 잠꼬대를 했다.좋지 않은 꿈이라도 꾸는지 이마에는 어느새 잔땀이 맺혀 있었다.소예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그의 이마와 얼굴에 맺힌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줬다.그 순간 고이한의 손이 갑자기 뻗어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소예지는 멈칫하며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고이한이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은 것뿐이었다.소예지는 손을 빼지 않았다.괜히 깨우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한동안 곁에 앉아 있다가 고이한이 다시 깊이 잠들어 저도 모르게 손을 놓고 나서야 소예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54화

    소예지는 몇 초 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다.차마 고이한이 정말 울고 있는지 곧바로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울고 있다고 해도 최현숙을 떠나보낸 슬픔 때문일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고이한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인 슬픔을 제대로 쏟아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이유가 무엇이든 소예지의 마음은 순간 복잡하게 뒤엉켰다.“이러지 마.”소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고이한은 눈을 감고 있었다. 짙은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선명했고 눈가도 아직 젖어 있었다.소예지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눈가를 살며시 닦아 주었다.“너무 힘들어하지 마.”그 순간 고이한이 깊고 검은 눈을 떴다.그 눈에는 원망 어린 빛이 짙게 어려 있었다.소예지는 그가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전혀 다른 이유로 생각하고 있었다.고이한은 다시 팔을 뻗어 그녀를 꽉 끌어안고 얼굴을 목덜미에 깊이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거칠게 닿았고 잠긴 목소리에는 짙은 콧소리까지 섞여 있었다.“내 옆에 있어 줘. 가지 마...”거의 고집에 가까운 부탁이었다.소예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슬이는 아침에 수경 씨가 데리고 어머니 댁에 갔어.”당장은 자신이 이곳에 남아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고이한은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했다.딸이 곁에 없으니 적어도 지금만큼은 소예지가 온전히 자신의 곁에 있어 줄 수 있었다.“뭐라도 좀 먹고 푹 자.”지금 고이한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잠을 푹 자고 열을 내리는 일이었다.고이한은 말없이 소예지의 손을 잡더니 입가로 가져갔다.아픈 자신 때문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그 마음을 대신하듯 손등에만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손등에 닿은 입술의 온기와 진지한 고이한의 표정에 소예지의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복잡한 감정이 가슴 깊숙이 번져 갔다.잠시 후 고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는 여전히 소예지의 손을 놓지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53화

    소예지는 붙잡힌 손을 빼낸 뒤 고이한을 똑바로 바라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진심이야.”고이한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고 눈에는 순간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다.몸은 고열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마음은 반대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심장이 뛸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통증이 번지는 듯했다.“일단 열부터 내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소예지는 드라이어 선을 정리해 욕실에 가져다 놓았다.잠시 뒤 돌아왔을 때도 고이한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굳어 있는 모습에서는 잔뜩 마음이 상한 기색이 느껴졌다.“왜?”고이한이 고개를 들었다.그는 어떻게든 이유를 알아내려는 듯 다시 물었다.“당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소예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뜨렸다.“그만하자. 지금은 이 얘기 하지 말고 열 내리고 몸 괜찮아지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응?”“몸?”고이한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큰 체격으로 성큼 다가서자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그는 입가에 자조적인 쓴웃음을 띠었다.“당신은 내가 지금 내 몸 같은 걸 신경 쓸 것 같아?”소예지는 어젯밤 자신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결국 사과했다.“미안해. 어젯밤에는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어.”고이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아. 임현욱도 윤하준도 강준석도 다 당신한테 잘해 주잖아. 내가 계속 붙잡지 않았으면 당신은 어쩌면... 더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소예지는 멈칫했다.고이한이 먼저 그 사람들을 입에 올릴 줄은 몰랐기에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고이한은 눈을 내리깔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인정해. 지난 삼 년 동안 다른 남자들이 당신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어. 내가 당신 인연을 망쳤다고 원망하는 거라면 마음껏 미워해.”소예지의 미간이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대체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52화

    만약 자신이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면 지금 소예지의 곁에 있는 남자는 임현욱이나 윤하준 혹은 강준석 중 한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세 사람 모두 훌륭했다. 소예지를 존중했고 그녀를 향한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소예지가 누구를 선택하든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유독 자신만 그녀를 옭아매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지난 삼 년 동안 이혼한 전처를 되찾기 위해 수없이 애쓰고 방법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고이한은 부정하지 않았다.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다시 그녀의 곁에 설 수 있었을까.어떻게 다시 그녀를 사랑할 기회라도 얻을 수 있었을까.따뜻한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져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고이한은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한동안 그대로 물을 맞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이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까지 조금은 씻어 내려 주길 바라는 듯했다.소예지가 양희순에게 국수를 부탁한 뒤 고이한의 2층 거실까지 가져오는 데는 십오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그런데도 고이한은 아직 욕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소예지는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욕실 안에서는 계속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상하리만큼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설마 안에서 쓰러진 건 아니겠지?’불안해진 소예지는 곧바로 그를 불렀다.“고이한.”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더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소예지는 거의 망설이지 않고 욕실 문을 밀어 열었다.철컥.욕실 안은 뿌연 수증기로 가득했다.고이한은 유리 칸막이 안에서 한 손으로 타일 벽을 짚은 채 샤워기 아래에 가만히 서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제야 고이한이 반응했다. 살짝 눈을 좁힌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온 소예지를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왜 들어왔어?”그 순간 소예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물안개 너머로 보이는 고이한의 탄탄한 몸은 조금 전까지 걱정했던 것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뒤늦게 정신을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51화

    소예지의 마음에 죄책감이 밀려왔다.아무래도 고이한은 어젯밤부터 이미 고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밤새 열에 시달렸다는 뜻이었다.“당신 열나. 병원 가자. 아니면 내가 김 비서한테 전화해서 데려다 달라고 할게.”고이한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더니 다음 순간 소예지를 끌어당겨 뜨거운 품 안에 가뒀다.거칠게 숨을 내쉬던 고이한이 고집을 부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아무 데도 안 가.”갑작스럽게 그의 품에 갇힌 소예지는 걱정과 초조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빠져나오려 해도 고이한은 좀처럼 팔을 풀어 주지 않았다.소예지는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일단 놔봐. 지금은 병원에 가야 해.”하지만 고이한은 놓기는커녕 오히려 팔에 더 힘을 주며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깊이 묻었다.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 가운데 고열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가... 당신이 내 옆에만 있으면 됐어. 어디도 안 갈 거야...”소예지는 더 이상 강하게 밀어낼 수가 없었다.어젯밤 하필 그런 말을 꺼낸 것도 미안했고 그때 이미 열이 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결국 소예지의 마음이 약해졌다.“알았어. 병원은 안 가도 돼. 대신 내가 해열제 가져올게. 응?”이대로 계속 열이 오르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마침 집에 상비약이 있다는 것도 떠올랐다.고이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제야 팔을 풀어 줬다.소예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결문을 통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열제를 챙겨 다시 돌아왔다. 미지근한 물도 한 잔 받아 약과 함께 내밀었다.“일단 약부터 먹어.”고이한은 약과 물을 받아 순순히 삼켰지만 시선만큼은 줄곧 소예지에게 머물러 있었다.마치 약을 다 먹는 순간 그녀가 다시 떠나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콜록!”결국 물이 잘못 넘어가 고이한이 기침을 터뜨렸다. 약을 먹으면서도 온통 소예지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탓이었다.소예지는 얼른 휴지를 뽑아 그에게 건넸다.한동안 기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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