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소예지는 고이한에게 가지 않고 무대 옆에 있는 강준석에게로 향했다.고이한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소예지를 따라갔다.강준석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던 고이한은 긴 손가락으로 안경을 살짝 밀어 올렸다.표정은 여느 때처럼 차분했지만 못마땅한 기색까지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잠시 실례하겠습니다.”옆에 있던 손님에게 양해를 구한 고이한은 천천히 소예지 쪽으로 걸어갔다.소예지가 강준석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쁘네.”소예지가 돌아보니 고이한이었다.“고마워.”고개를 들어 바라보다가 고이한이 쓰고 있는 안경에 시선이 머물렀다.예전에 자신이 선물했던 안경이었다.“예지야, 고 대표님이랑 가서 좀 쉬고 있어. 곧 시작할 거야.”강준석의 말에 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준비로 바쁠 텐데 더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자리를 찾으려고 주변을 둘러보자 고이한이 먼저 말했다.“당신 자리는 이쪽이야.”고이한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내가 안내해 줄게.”고이한을 따라간 곳은 맨 앞줄 중앙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소예지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놓여 있었다.소예지가 자리에 앉자 고이한도 자연스럽게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무심코 옆을 보니 그 자리의 명패에는 고이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소예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테이블 위의 물병을 집으려는데 고이한이 먼저 손을 뻗어 뚜껑을 열고 건넸다. 소예지는 괜히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고마워.”“별말을.”고이한은 부드러운 눈으로 소예지를 바라봤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준석의 발표가 시작됐다.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참석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대로 향했다.이번에 선보인 여섯 가지 제품은 이미 시장에 빠르게 자리 잡아 세계 각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3년 전 소예지가 고신 그룹 주주들 앞에서 내놓았던 민간사업 3개년 계획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소예지가 그렸던 청사진을 강준석이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냈다고 생각하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 풍경이 한눈에 펼쳐졌다.강준석의 상처는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었다.편안한 홈웨어 차림의 강준석은 여느 때처럼 느긋해 보였고 눈빛에는 특유의 온화함이 여전히 묻어났다.지난 3년이라는 시간이 그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든 듯했다.“편하게 앉아. 마실 건 뭐 줄까? 차, 커피, 아니면 주스?”“됐어. 내가 할게.”더는 강준석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던 소예지는 직접 따뜻한 물 두 잔을 가져와 한 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그러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상태를 살폈다.“어때? 아직 아파?”“많이 좋아졌어. 이제 좀 가려운 정도야. 상처가 아물고 있다는 뜻이겠지.”강준석이 잔을 들며 웃었다.“걱정 마. 의사도 회복이 아주 빠르다고 했어.”그 말을 듣고서야 소예지도 마음을 놓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변호사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강준석이 말했다.“안채린 판결, 빠르면 다음 달에 나온대.”소예지는 잔을 쥔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강준석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소예지를 바라봤다.“예지야, 이제 그 일은 그만 마음에 담아둬. 안채린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거니까, 우리도 더 이상 마음 쓰지 말자.”“응.”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소예지는 집 안을 둘러봤다.“정말 예쁘다. 전망도 좋고.”“그렇지? 처음 여기로 정한 것도 전망이 탁 트여 있어서였어.”강준석이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일하다 힘들 때 이렇게 멀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좀 편해지더라고.”“그럼 이제 이 집에 같이 살 사람만 있으면 되겠네?”농담처럼 던진 말에 강준석도 웃었다.“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제 익숙해.”소예지는 더 묻지 않았다.인연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붙잡는다고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놓는다고 쉽게 끊어지는 것도 아니니 누구에게 강요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구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강준석은 소예지가 잡은 연구 방향에 확신을 실
너무 충동적이었다.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눈을 감은 소예지의 눈가에 투명한 안약이 맺힌 걸 보는 순간 그 다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었고 어떻게든 닿고 싶었다.후회는 늘 한발 늦게 찾아왔다.먼저 소예지의 마음부터 살폈어야 했다. 아직도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거부감이 남아 있는 건 아닌지 확인했어야 했다.이혼 전, 소예지의 눈에는 혐오가 담겨 있었다. 이혼 후에는 원망이 남았고 1년쯤 지나자 그마저도 사라졌다.그 뒤로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눈빛뿐이었다. 고이한에게는 미움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차라리 미워해 줬으면 싶을 만큼 자신이 소예지의 삶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 같았다.그러다 그날 밤 오해를 풀고 난 뒤부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소예지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도 생겼고 함께 밥을 먹는 것도 더는 피하지 않았다. 생일도 함께 보내줬고 아주 조금씩 자신에게 기대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그 관계를 여기까지 되돌리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고이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그 모든 걸 입맞춤 한 번으로 망쳐버린 건 아닐까.’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고이한은 손끝으로 그곳을 꾹 누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안약 효과 괜찮아?]짧게 메시지를 보냈다.소예지는 고하슬을 재운 뒤였다. 아이는 엎드린 채 그림책을 뒤적이고 있었고 소예지는 씻을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그때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고이한이었다.소예지는 눈을 몇 번 깜빡여봤다. 확실히 전보다 훨씬 편해져 있었다.[효과 좋아. 고마워.]간단히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고이한은 짧은 답장을 몇 번이고 되읽었다.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에 화가 났거나 방금 일을 불쾌하게 여기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한 반응이었다.어쩌면 자신이 한 행동을 아주 싫어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하게
고요한 서재 안에서 소예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고이한이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도 느껴졌다.가까이서 닿는 숨결은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고이한이 몸을 숙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에는 아직 안약이 남아 있어 억지로 뜨지 않았다.그때 눈가에 남아 있던 안약이 눈꼬리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꼭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아 괜히 민망해졌다.따뜻한 손끝이 눈가를 조심스럽게 훑으며 흘러내린 안약을 닦아냈다. 소예지의 몸이 저도 모르게 살짝 굳었다.“휴지 좀 가져다줘.”직접 닦으려고 말했지만 고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소예지가 더는 못 참고 눈을 뜨려던 찰나, 아주 부드러운 무언가가 눈가에 살며시 닿았다.손가락과는 전혀 다른 감촉이었다.너무나 가볍고 짧게 스쳐 지나갔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깃털이 스치듯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따뜻한 숨결이 가까이서 와닿았다.소예지는 숨을 멈췄다. 온 신경이 방금 무언가 닿았던 눈가로 쏠렸다.“고이한, 지금 뭐 하는 거야?”묻는 동시에 눈을 떴다.안약에 젖어 촉촉해진 눈은 마치 눈물을 머금은 듯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는 예상치 못한 모습이 있었다.몸을 숙인 고이한이 코앞에서 소예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이한 역시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고 고이한의 호흡은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서재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고 가까이서 들려오는 숨소리만 희미하게 이어졌다.“눈 감아. 아직 약이 덜 스며들었어.”고이한이 낮게 말했다. 평소보다 조금 잠긴 목소리였다.“나 내려갈게.”그 말을 남긴 고이한은 더 머물지 않고 서둘러 서재를 나갔다.소예지는 여전히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방금 눈가에 닿았던 부드러운 감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분명 입맞춤이었다.소예지는 미간을
“너 여기서도 일 잘하고 인정받고 있잖아. 이렇게 고향으로 내려가면 너무 아깝지 않아? 나중에 다시 일하고 싶어도 쉽지 않을 텐데.”옆에 있던 동료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나라고 모르겠어? 그런데 요즘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왜 여자는 가정이랑 일 중에서 늘 하나를 포기해야 할까. 결국 가장 크게 손해 보는 건 여자 경력이잖아.”“내 말이. 왜 여자만 가정이랑 아이 때문에 일을 포기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남자가 회사 그만두고 애 보면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 남편이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좋지. 나도 지금 하는 일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거든.”“여자로 살면서 가정이랑 일 둘 다 놓치지 않는 게... 정말 쉽지 않다.”소예지는 구석에 선 채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돌이켜보면 요즘 고이한이 정말 많은 일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특히 고하슬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그랬다.하지만 실험에 매달려 지내느라 그동안 고이한이 얼마나 많은 몫을 감당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아빠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기며 별생각 없이 넘겼던 것 같았다.우연히 들은 두 사람의 대화가 그런 소예지의 생각을 바꿔놓았다.고이한이 해온 일은 단순히 아빠로서 해야 할 몫을 다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소예지를 배려하고 기꺼이 짐을 나눠 지려는 마음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됐다.‘고이한이 곁에서 하슬이를 챙겨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마음 놓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을까.’어쩌면 아이와 일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탕비실로 다시 들어갔을 때는 두 동료 모두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소예지는 커피를 받아 들고 연구실로 돌아갔다.밤 9시가 넘어 집에 들어서자 양희순이 미리 끓여둔 전복죽이 준비되어 있었다. 고이한도 아직 돌아가지 않고 고하슬을 돌보고 있었다.양희순은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흐뭇해했다.오늘 저녁도 두 사람 몫까지 넉넉하게 준비해 둔 터였다.나중에 별장으로 옮기면 이렇게 세 식구의
소예지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요즘은 연구실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다른 걸 챙길 여유가 없었다.“나...”입을 뗐지만 딱히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고이한이 오히려 먼저 봐주듯 말했다.“됐어. 내 머리 보기 싫다고만 안 하면 굳이 치료 안 해도 상관없어.”남들 시선 따윈 아무래도 좋지만 소예지의 생각만큼은 신경 쓰인다는 뜻이었다.소예지가 찻잔을 들며 피식 웃었다.“건강에 문제만 없다면 굳이 치료할 필요가 없기는 해.”고이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여기서 더 욕심내면 안 된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다시 젓가락을 들며 그가 말을 이었다.“별장은 기본 공사 거의 끝났어. 가구랑 소품 배치 쪽 설계안도 디자이너가 몇 개 보내왔고. 오늘 저녁에 시간 나면 같이 골라보자.”소예지가 잠깐 생각하다 답했다.“일단 나한테 보내줘. 짬 날 때 먼저 볼게.”“응. 하슬이 방은 하슬이한테도 물어볼 거야.”“좋아.”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딸도 자기 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끼어 있다는 기분을 느꼈으면 했다.두 사람은 한동안 인테리어 얘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쳤다.고이한은 소예지를 연구실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돌아오자마자 강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변호사가 안채린의 사건을 정리해 줬다는 내용이었다.“안채린 쪽은 결론 났어. 살인미수로 갈 거고 사안이 사안이라 대략 6년 정도 나올 거라고 변호사가 그러더라.”소예지는 통유리창 앞에 선 채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예상 밖의 결과는 아니었다. 안채린이 벌인 일이었고 그 대가도 결국 안채린 몫이었다.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개운치가 않았다.“응, 알겠어.”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아직 좀 안타깝긴 해.”강준석이 말끝을 흐리다 이내 목소리를 다잡았다.“그렇다고 봐줄 순 없는 거지. 동정받을 자격도 없고.”받아 마땅한 벌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안채린 자신의 선택이었다.“강 선배, 나 때문에 이번 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