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소예지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아직 잠기운이 남아 흐릿한 시야 너머로 커튼 사이에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고이한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몸 위에는 그의 정장 재킷이 덮여 있었고 고이한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잠들어 있었다.한쪽 팔로 머리를 받친 채 눈을 감고 있는 얼굴 위로 희미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으며 다른 한 손은 혹시라도 그녀가 잠결에 뒤척이다 떨어질까 걱정한 듯 여전히 허리에 느슨하게 얹혀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예지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고이한의 곁에서 그렇게 깊이 잠들 줄은 몰랐다.지난밤 그의 품에 기대어 있다가 잠든 것까지는 어렴풋이 기억났지만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대로 아침까지 푹 자 버릴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소예지는 고이한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자마자 허리에 얹혀 있던 그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를 소파 안쪽으로 끌어당겼다.깜짝 놀란 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바라봤지만 고이한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아무래도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인 모양이었다.소예지는 잠시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다가 다시 그의 손을 바라봤다. 밤새 이런 불편한 자세로 자신을 지켜 주며 잤다면 고이한도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차라리 지금 깨워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 제대로 자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그녀는 허리를 감싼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막 소파에 앉는 순간 고이한이 인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눈을 떴고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일어났어?”잠에서 막 깬 탓에 낮게 잠긴 목소리에는 아직 짙은 잠기운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소예지를 알아보자 흐릿하던 눈빛도 조금씩 맑아지고 표정 역시 한결 부드러워졌다.소예지는 흐트러진 머리
소예지는 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마셨지만 아랫배의 통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결국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쿠션을 끌어안은 채 묵묵히 통증을 참았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이한은 다시 소파에 앉아 긴 팔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소예지가 자신의 가슴에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까지 잡아 주자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 했다.“움직이지 마.”고이한이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옆에 있어 주기로 했잖아.”그러고는 넓은 손바닥을 블라우스 위로 소예지의 아랫배에 가만히 얹었다.소예지의 몸이 순간 굳었다.하지만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묵직하게 당기던 통증을 서서히 누그러뜨리자 소예지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에도 조금씩 힘이 풀렸다.창밖에서는 어느새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공기에는 눅눅한 습기가 배어 있었지만 빗소리로 가득한 밤의 거실은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고이한은 소예지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그의 턱이 머리카락 위에 가볍게 닿았지만 소예지는 눈을 감은 채 더는 밀어내지 않았다.그런데 잠시 후 옷 위에 얹혀 있던 고이한의 손이 블라우스 자락 안으로 들어와 맨살에 직접 닿았다.소예지의 눈이 화들짝 뜨였다.‘이 사람이 정말!’“예전에도 이렇게 해 줬던 것 같은데.”고이한이 몸을 살짝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이렇게 해야 당신이 좀 더 편해지잖아.”말하는 사이 따뜻한 손바닥이 아랫배를 감싸듯 덮었다. 천천히 온기를 전하듯 부드럽게 쓸어 주자 갑작스러운 접촉에 소예지의 온몸이 순간 예민해졌다.맨살에 닿은 그의 손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그러자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결혼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 소예지는 고이한의 손이 웬만한 핫팩보다 크고 따뜻해서 훨씬 낫다며 농담처럼 말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그건 예전이었다.“약속할게.”고이한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가라앉았다.“그냥 따뜻하게 해 주기만 할 거야. 다른 건
소예지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어느새 아홉 시 반이었다.“나 서재에 좀 다녀올게. 시간 되면 젤리 데리고 정원 한 바퀴 돌아 줘.”고이한의 눈에 옅은 웃음기가 번졌다.“알았어. 젤리는 나한테 맡기고 당신은 가서 일 봐.”그때 갑자기 창밖으로 번개가 번쩍였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심상치 않은 날씨였다.소예지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아니다. 밖에 데리고 나가지 마. 비 올 것 같으니까 그냥 집에 있게 해.”괜히 젤리를 데리고 나갔다가 비에 흠뻑 젖을 수도 있었다.고이한이 그녀를 바라봤다.“이렇게 늦었는데 또 일하려고?”“응.”바로 그때 창밖이 새하얗게 번쩍이더니 하늘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소예지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당신은 이제 가.”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한마디를 던진 소예지는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그러나 그 순간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오늘 밤은 천둥번개가 계속 칠 것 같아. 내가 같이 있어 줄게.”고이한의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괜찮아. 당신도 가서 쉬어.”소예지가 손을 빼려 했지만 고이한은 놓아주지 않았다.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무서워?”등을 돌린 채 서 있던 소예지의 몸이 살짝 굳었다.“아니. 그냥 피곤해서 쉬고 싶어.”“알았어.”뜻밖에도 고이한은 순순히 손을 놓았다.정말 그녀의 말을 받아들인 듯했다.소예지는 속으로 안도하며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뒤에서 뻗어 온 두 팔이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붙잡았다.고이한은 소예지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턱을 가볍게 머리 위에 기댔다. 허리를 감싼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애써 조절하고 있는 듯했다.“그럼 쉬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내가 옆에 있을게.”“당신...”소예지가 몸을 돌리려 하자 고이한이 조금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제발 나한테 가라고 하지 마.”낮은 목소리에는 거의 애원에
어둑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소예지의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진 상태였다.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두 손으로 고이한의 셔츠 앞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그제야 이곳이 길가라는 사실까지 깨달은 소예지는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자신을 제멋대로 끌어안고 입을 맞춘 남자가 얄밉기도 해 그대로 가슴을 밀어냈다.“이제 됐어?”소예지가 눈을 내리깔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자 고이한이 낮게 웃었다.“아직 부족한데.”선선한 밤바람을 맞자 소예지의 정신도 조금씩 또렷해졌다.고개를 홱 돌리던 그녀의 얼굴이 순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김경환의 차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그렇다면 조금 전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누군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는 뜻이었다.고이한은 그녀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금세 알아차리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잠시 후 김경환이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길가까지 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그 모습을 본 소예지는 살짝 당황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이한이 직접 운전석에 앉았고 은색 롤스로이스 팬텀이 부드럽게 움직여 소예지 곁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가자 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타. 집에 가자.”소예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집으로 향하는 동안 소예지는 조금 전 일이 떠올라 고이한에게 별로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고이한도 굳이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음악을 틀었다.감미로운 블루스 선율이 차 안을 잔잔하게 채웠고 아늑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실내에는 은은한 가죽 향이 감돌았다.은색 차체는 밤거리를 매끄럽게 달렸다.그런데 고이한은 딱히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늘 밤 고하슬은 할머니 댁에서 자기로 했으니 두 사람 모두 평소처럼 아이의 귀가나 잠자리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드라이브 좀 할까?”고이한이 물었다.소예지는 그를 한번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늦었어. 그냥 집에 가자. 나 좀 피곤해.”“알았어.”
고이한이 조금 난감한 듯 말했다.“그때는 내가 따라가는 바람에 당신이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잖아.”소예지가 못마땅한 듯 받아쳤다.“눈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따라왔어?”고이한의 표정이 순간 단호해졌다. 평소 남들 앞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강한 소유욕이 눈빛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당신이 싫어해도 난 갔을 거야.”어차피 소예지에게 미움받을 일을 한 게 그때 한 번뿐인 것도 아니었다.그렇다고 고이한이 물러선 적도 없었다.다소 뻔뻔하기까지 한 대답에 소예지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혼한 뒤에도 그는 늘 그랬다.자신이 아무리 차갑게 대하고 일부러 거리를 두어도 고이한은 단 한 번도 자신과 고하슬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나름의 방법과 이유를 찾아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났다.아무리 떼어 내려 해도 끝끝내 따라붙는 그림자처럼.“그때 내가 안 갔으면 당신, 윤하준이랑 사귀었을까?”고이한이 갑자기 조금은 심통 난 목소리로 물었다.소예지는 잠시 멈칫했다.그 말을 듣자 D국에서 함께 스키를 탔던 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당시 중간에 윤하준이 합류하면서 두 아이가 함께 어울려 놀았고 자신과 윤하준은 고이한만 남겨 둔 채 따로 다른 곳에 놀러 가기도 했다.그때 일을 떠올리는 사이 고이한에게 붙잡힌 손바닥에 어느새 땀이 배어 나왔다.소예지가 슬쩍 손을 빼내려 했지만 고이한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오히려 손에 힘을 더 주며 집요하게 물었다.“윤하준을 좋아한 적 있어? 그 사람이랑 만나 볼 생각도 했었어?”아무래도 그는 당시 스키장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자기를 혼자 남겨 두고 갔던 일에도 꽤 서운함이 남아 있는 듯했다.생각해 보니 그때 고이한은 소예지가 일부러 윤하준을 스키장으로 불렀다고 오해했다. 화가 난 나머지 이런 말까지 했었다.‘당신, 나랑 윤하준이랑 사이 틀어지게 만들 생각이야?’그때 정말 단단히 화가 났던 모양이었다.그래서 이제 와서
그때 룸의 문이 열리고 고이한이 들어왔다.회의를 마치자마자 곧장 달려온 듯 흐트러짐 없는 정장 차림이었지만 미간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피로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미안해. 늦었어.”고이한은 짧게 사과한 뒤 소예지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 앉았다.뒤이어 김경환이 직원에게 음식을 내달라고 요청하러 나가자 고이한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눈치챈 듯 소예지를 바라봤다.“내 얘기 하고 있었어?”웃으며 던진 말에 스미스 박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맞습니다. 연구실 얘기를 좀 하고 있었습니다. 소 박사가 시간 되면 D국 연구실에 한번 가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고이한이 소예지를 바라봤다.“그럼 설 전에 고하슬 데리고 거기 가서 눈 구경도 하고 아버님이 쓰셨던 연구실도 둘러보면 되겠네요.”소예지가 순간 멈칫했다.“아버지 연구실이 아직도 남아 있어?”이번에는 옆에 있던 스미스 박사가 대신 대답했다.“그럼요.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남기신 연구 노트도 아주 많고요.”순간 소예지의 가슴 한구석이 꽉 조여 왔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연구실의 운영 방향도 달라졌으니 당시 쓰던 공간은 진작 정리됐거나 다른 용도로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니.’소예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고이한을 바라봤다. 정말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고이한은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직 그대로 있어. 보고 싶으면 언제든 갈 수 있어.”소예지의 눈빛에 서서히 기대감이 어렸다.“좋아. 설 전에 D국에 한번 가자. 직접 보고 싶어.”저녁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이 되어서야 스미스 박사는 오늘 자리를 마련한 진짜 이유를 밝혔다.이곳에서 진행하던 실험이 모두 마무리됐고 자신은 M국의 한 연구소에 초청을 받아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현재 함께하고 있는 연구팀 역시 모두 함께 이동할 예정이었다.그러니 오늘 저녁 식사는 사실상 송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