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112화
지빌라는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마치 이곳이 비로소 그녀에게 허락된 작은 영역인 양 숨을 고르듯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펜을 들어, 익숙한 이름을 적었다.
친애하는 나의 친우, 샤를로트에게.
서부를 지나 북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고, 또 그만큼 많은 것을 보게 해주었어.
낯선 땅을 건너는 동안, 내가 알던 세계가 얼마나 좁았는지도 새삼 느꼈지. 무사히 그리고 뜻깊게 도착했다는 소식을 먼저 전하고 싶었어.
북부는 수도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품고 있는 곳이더라. 전통은 깊고, 축제는 신비로웠으며, 이들만의 방식으로 이어져 온 것들이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들어 있었어. 화려하지 않아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함이 분명히 느껴졌지.
다만,
112화지빌라는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마치 이곳이 비로소 그녀에게 허락된 작은 영역인 양 숨을 고르듯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펜을 들어, 익숙한 이름을 적었다.친애하는 나의 친우, 샤를로트에게.서부를 지나 북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고, 또 그만큼 많은 것을 보게 해주었어.낯선 땅을 건너는 동안, 내가 알던 세계가 얼마나 좁았는지도 새삼 느꼈지. 무사히 그리고 뜻깊게 도착했다는 소식을 먼저 전하고 싶었어.북부는 수도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품고 있는 곳이더라. 전통은 깊고, 축제는 신비로웠으며, 이들만의 방식으로 이어져 온 것들이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들어 있었어. 화려하지 않아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함이 분명히 느껴졌지.다만, 이 땅이 가진 보석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아직 가능성이 더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광석과 원석 자체는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데, 그 매력을 온전히 끌어내기에는 손길이 조금 거친 편이더라. 다듬는 법을 알게 된다면, 분명 전혀 다른 빛을 낼 수 있을 텐데 말이야.그래서 말이야,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어차피 필요한 것들을 새로 마련하려 해. 북부의 기후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드레스와, 이 땅의 보석을 살릴 장신구들 말이야. 아무래도 수도의 안목과 기술이 조금은 필요할 것 같아.혹시 가능하다면, 수도에서 이름난 장인 몇을 이곳으로 초청해 줄 수 있을까? 잠시 머물며 작업해도 좋고, 여건이 맞는다면 공방을 차려 오래 머물러도 좋겠지. 사치품을 만든다는 명목이라면 누구에게도 무리가 되지 않을 테니까.이 땅에는 가르칠 사람이 있고, 배
111화사흘.정무 일정, 순찰, 회의—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일들이 정리되고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에 원치 않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그녀의 얼굴.북부로 오던 길에서도 물러서지 않던 시선.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한, 그 조용한 결단.‘연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프레데리크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래도….’처음이었다.정략이 아닌 밤을 앞두고, 이렇게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것은.프레데리크는 무심코 잔을 내려놓았다. 손에 남은 온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릴리아트는 평소보다 한층 조심스러운 얼굴로 대공비의 침실에 들어섰다.“전하.”지빌라는 창가에 서 있다가 돌아섰다.“무슨 일이지?”“관례에 따라… 대공 각하와의 합방일이 정해졌습니다.”지빌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언제?”“사흘 뒤입니다.”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110화응접실에 곱게 단장한 채 앉은 지빌라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릴리아트가 조심스럽게 산책을 권하자, 지빌라는 잠시 침묵하다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눈은 예쁘지만, 추운 건 질색이거든.”완벽한 황녀의 대답이었고, 동시에 완벽하게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이기도 했다.그날 밤.북부 정비에 하루 대부분을 쏟아붓고 돌아온 프레데리크는 저녁 무렵에야 시종장을 불러들였다.“대공비는?”토르벤은 한 박자 늦춰 고개를 숙였다.“도착하신 뒤로… 침실과 응접실 정도에 머무르고 계십니다.”프레데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빌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겉으로는 무심하고 화려하기만 한, 북부와 거리를 두는 얼굴. 그것이 연기라는 걸, 프레데리크는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연기를 깨뜨리지 않기로 했다.“무리하게 끌어내지 마라.”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황녀로 지내온 시간이 길다. 북부에 바로 적응하긴 어려울 거다. 성심성의껏 보필해라.”토르벤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프레데리크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릴리아트에게도 전해라. 대공비의
109화북부의 대공비가 된 황녀, 어느 쪽으로 기울어도 판이 달라질 존재였다. 그들 모두에게 지빌라는 변수였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누누이 되뇌어도 모자라지 않았다.북부 대공 프레데리크를 살리는 것.제국을 폐망하게 두지 않는 것.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이황자를 세우는 것.성실하고 유능한 황녀는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북부에 힘이 되고 싶었다.‘어떻게 해야 할까?’북부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대공의 후계자뿐이었다. 한 나라로 서기에도 부족함 없는 군비와 경제력, 축적된 노동력과 통제 가능한 통치 체계, 풍부한 광물과 금까지, 북부는 독립국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그래서 지빌라는 결심했다.수도식 사치와 수도식 감정으로 행동하는 황녀가 되기로. 북부가 경계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분명히 북부의 힘이 되도록.황실이 기억하는 지빌라는 사치스럽고 변덕스러웠으며, 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는 황녀였다. 감정에 쉽게 휘둘리고, 사랑에 빠지고, 북부의 추위보다 황금빛 장식에 더 익숙한 여자.그 이미지가 유지되는 한 황후도, 일황자도 북부를 당장 위협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 가면을, 지빌라는 벗을 수 없었다.그래서 대공성에 도착한 다음 날, 지빌라는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체계를 살피지도 않았고, 사람을 부르지도 않았다. 대신 방 안에 값비싼 상자들만 풀게 했다.
108화엘제는 늦은 밤 계단의 등불에 기름을 채우고 있었다. 레오노라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제가 하던 일이 있어서요. 불을 꺼트리면 혼이 나서….”“엘제… 혹시 대공비 전하의 전담 하녀가 되어줄래? 내가 시녀장님께 부탁해 볼게.”“정말요? 저야… 너무 좋아요! 하지만… 제가 주제넘게 그럴 수 있을까요?”엘제는 어릴 때부터 대공성에 버려진 아이였다. 키워주는 대가로 허드렛일을 하며 대공성에서 살아가는 하녀들 중 하나였다.“내가 너를 가까이 두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여러 소식도 전해 듣고 싶기도 하고.”“제가 모르는 것은 단 하나도 없어요!”“그래. 종종 내 말벗이 되어주렴.”레오노라는 부드럽게 웃었지만, 그 미소 아래에는 다른 계산이 있었다. 대공성 안에서 자신의 눈과 귀가 되어줄 사람.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을, 어리고 순박한 얼굴을 한 사람이 필요했다. 엘제라면 충분했다.엘제는 어릴 적 보았던 레오노라를 언제나 공주님이라 여겼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문 속에서 그 공주님은, 황녀를 모시는 시녀가 되어 있었다. 엘제는 낙담했다.‘대공 각하는 눈도 없으신가? 이런 아름다운 공주님을 두고 어째서 청혼하지 않으신 거야?’엘제는 순진했고, 단순했다. 
107화대공성 시종장과 시녀장을 중심으로 시종과 시녀, 하인과 하녀, 대공성에서 일하는 이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시종장과 시녀장은 그들을 향해 낮게 경고했다. 황녀이자 대공비를 둘러싼 세간의 소문을 누구도 입에 올리지 말라는 뜻이었다.“허튼소리하는 것이 발각되면… 가만두지 않겠다.”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때 바닥을 스치는 드레스 자락 소리가 가까워지자, 줄지어 선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레오노라 아가씨…….”한때 대공비가 되리라 모두가 믿었던, 동부의 영애 레오노라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한층 검소한 차림으로 그들 앞에 서 있었다.“토르벤, 릴리아트. 오랜만이에요. 모두 잘 지냈나요?”“대공성을 지키는 데 소임을 다했습니다. 영애께서는….”시종장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레오노라는 잠시 시선을 떨구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보시는 대로예요. 황녀 전하께서 시녀로서의 제의를 하셔서…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자애로운 분이시죠. 모시는 일에 보람이 있어요.”“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만….”토르벤이 끝내지 못한 말을 삼키자, 곁의 릴리아트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레오노라님께서 예전에 쓰시던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