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소설 속 처형당할 운명의 악녀, '세르리아'에 빙의했다. 살기 위해 모든 악행을 중단하고, 제국 최고의 부를 이용해 펑펑 놀고먹는 백수 파업을 선언했을 뿐인데. "콜록!" 마나 코어가 각성하며 몸속 묵은 어혈을 토해낸 것이 화근이었다. 하필이면 내 목을 칠 예정이던 흑막 북부 대공, 카일락 앞에서. "언제부터... 이런 몹쓸 병을 앓고 있었던 거냐." "예? 아니, 공작님 그게 아니라—" "내 목숨을 깎아서라도 널 반드시 살려낼 거다, 세르리아." 저기요, 공작님? 나 진짜 3대 500 칠 수 있을 만큼 멀쩡한데요. 어째서 핏발 선 눈으로 날 안아 들고 감금하려는 건데?! [책빙의 / 시한부착각 / 무심여주 / 건강여주 / 백수지망생 / 흑막남주 / 북부대공 / 후회집착남 / 착각물 / 사이다]
View More"콜록! 쿨럭, 커헉!"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붉은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단순히 침에 섞여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입안을 가득 채운 검붉은 선혈이 울컥울컥 터져 나와, 순백의 고급 비단 드레스 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누가 봐도 당장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부 환자의 처절하고 기괴한 각혈이었다. 입가로 흐르는 비릿하고 미지근한 액체를 실크 손수건으로 벅벅 닦아내며, 나는 속으로 처절하게 쌍욕을 삼켰다. '아, 망했다. 진짜 개망했다. 하필 터져도 여기서 터질 게 뭐람!'내가 이 소설 속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 '세르리아 폰 발렌티'의 몸에 빙의한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원작 소설 <제국의 꽃은 피지 않는다> 속 세르리아는 그야말로 악행의 대명사였다.제국 황실보다 돈이 많다는 발렌티 공작가의 무남독녀 외동딸이라는 신분을 믿고, 하녀의 뺨을 때리는 건 기본에 영지민들의 고혈을 짜내며 온갖 사치를 부리던 진짜 쓰레기.
결국 그녀는 훗날 황실 반역죄에 얽혀, 북부의 지배자이자 흑막인 카일락 슬로언 대공의 손에 목이 잘려 죽는 처참한 배드 엔딩을 맞이하게 되어 있었다. 빙의 사실을 깨달은 첫날, 나는 곧바로 결심했다. '악녀 짓? 미쳤어? 파업이다, 파업!'단두대 이슬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당장 모든 악행을 중단해야 했다. 남주 뺨 때리기? 어림도 없지.
가진 건 썩어나게 많은 돈뿐이니, 사교계 끊고 영지 구석에 처박혀 초호화 백수 생활이나 즐기기로 했다.
맛있는 고급 스테이크를 썰고, 깃털처럼 푹신한 침대에서 12시간씩 자며 쾌적한 백수 라이프를 즐기던 중이었다. 그런데 원작에는 언급조차 없던 황당한 변수가 터졌다.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몸이 극도로 편안해진 탓일까? 원래 세르리아가 무리하게 마법을 익히려다 몸속에 꽁꽁 얽혀 버렸던 '마나 코어'가 갑자기 뻥 뚫리며 스스로 각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협지로 치면 임독양맥이 타통되며 체내의 묵은 불순물인 '어혈'을 토해내는 탈피 현상.즉, 지금 내가 바닥에 쏟아낸 한 바가지의 검붉은 피는 불치병의 증거가 아니라, 내 몸이 기똥차게 건강해지고 있다는 '만수무강의 징조'였다.
"후우……."실제로 숨을 들이쉬어 보니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머리는 맑아졌고, 온몸에 활력이 도는 게 당장 제국 수도를 30바퀴쯤 뛰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겉보기에 이 현상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기괴해 보인다는 것이었다.게다가 하필이면.
"세르리아."등 뒤에서 들려온 서늘하다 못해 뼈를 깎는 듯한 음성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칠흑 같은 흑발에 서릿발처럼 차가운 붉은 적안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카일락 슬로언. 훗날 내 목을 치게 될 북부의 절대자이자, 전장의 사신이라 불리는 흑막 대공이었다.
원작 묘사대로라면 그는 나를 벌레 보듯 경멸해야 맞다. 그가 내 앞에서 입을 열 때마다 나오는 대사는 항상 "천박하군", "역겹다", "눈앞에서 사라져라" 3종 세트였으니까. 나는 서둘러 피 묻은 입가를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원수 같은 여자가 자기 저택 복도 한복판에 피를 토해놨으니, 당장 더럽다며 검을 뽑아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오, 오해하지 마세요, 대공님. 이건 그저 몸속의 독소가 빠지는……."말을 끝까지 맺지 못한 것은, 카일락의 표정을 본 순간이었다.
항상 얼음장처럼 차갑고 덤덤하던 그의 눈동자가, 마치 눈앞에서 제국 전체가 멸망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챙그랑─!요란한 금속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제국 최고의 검사라 불리는 카일락. 그의 허리춤에 차여 있던, 목숨처럼 아끼는 보검이 바닥으로 속절없이 내동댕이쳐졌다.
"대, 대공님……?"뒤따라오던 그의 부관과 기사들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카일락은 기사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쿵-!그가 내 앞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핏기 가신 큰 손이 파르르 떨리며 내 어깨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언제부터였지." "예? 네?" "언제부터, 이런 몹쓸 병을 앓고 있었던 거냐고 묻고 있다!"그의 목소리가 짐승의 앓는 소리처럼 끔찍하게 떨려왔다. 눈가에는 당장이라도 피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
"어, 어라?" "이제야 모든 앞뒤가 맞는군……."카일락이 스스로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허탈한 실소를 터뜨렸다. 그 눈빛에는 깊은 절망과 자책이 가득했다.
"갑자기 사교계를 끊고 파업을 선언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악행을 멈추고 가진 재산을 탕진하듯 쓰기 시작했을 때…… 너는 이미 너의 끝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였어." "아니, 저기요 대공님? 그건 그냥 놀고먹고 싶어서—" "그래서 그동안…… 그 모든 악명을 일부러 뒤집어쓰면서까지 사람들을 밀어냈던 건가? 네가 떠난 뒤에 남은 이들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고?!"아니, 진짜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그건 진짜 원작 세르리아 인성이 쓰레기라 모두가 미워했던 건데요!내가 억울해서 입을 뻥끗거리자, 카일락의 손이 더 세게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얼마나…… 얼마나 혼자 고통을 견뎌왔던 거냐, 세르리아." "대공님, 진짜 오해이십니다! 저 진짜로 멀쩡하거든요? 3대 500은 거뜬히 칠 수 있을 것 같—" "말하지 마라. 기력이 쇠해진다." "아니, 진짜 안 아…… 읍!"카일락이 내 입술을 제 큰 손으로 부드럽게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깃털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하지만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강한 힘으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공중에 둥실 뜬 나는 경악했다.
"대공님! 당장 내리세요! 나 내일 황실 경매장에 나가서 백억 골드 써야 한단 말이에요!" "……마지막 순간까지 소소한 물욕으로 고통을 잊으려 하다니."소소한 물욕? 백억 골드가?!
카일락은 내 말을 완전히 자기 방식대로 재해석하더니, 등 뒤의 부관을 향해 벼락같은 명령을 내렸다.
"전 기사단에 비상령을 선포해라." "예, 예?! 대공님?" "제국 내의 모든 고위 사제, 불치병 전문 의원, 연금술사를 싹 다 긁어모아 대공가로 연행해라. 오지 않겠다면 영지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해." "대, 대공님! 그건 황실과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세르리아를 살릴 수만 있다면 황실이든 신전이든 전부 짓밟아버릴 거다."카일락의 눈동자에 섬뜩할 정도의 광기가 번뜩였다.
"내 심장을 도려내서라도, 널 반드시 살려낼 거다. 세르리아." "……." "아무도 널 내 곁에서 데려가지 못해. 그게 '죽음'이라 할지라도."그는 나를 품에 안은 채 저택의 의무실이 아닌,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가장 깊고 은밀한 대공의 전용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나 진짜 안 아프다고! 지금 체내 마나 돌아가서 악력으로 사과도 즙으로 만들 수 있다고!하지만 내 애타는 외침은 카일락의 넓고 딴딴한 가슴팍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산 것 같다.그것도 힘세고, 돈 많고, 내 말은 하나도 안 듣는 미친 흑막한테.
3,000명의 귀족이 파자마를 입고 대자로 누워 즐긴 전설의 눕방 연회가 끝난 다음 날.대공성의 초대형 황금 마나 침대 위에서, 나는 중력 담요 속에 푹 파묻힌 채 베개에 턱을 괴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목덜미에는 어젯밤 카일락이 사교계 3,000명이 보는 앞에서 짙게 새겨놓은 붉은 키스마크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화끈거렸다."……하아. 연회 내내 침대에 누워서 딸기나 까먹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어젯밤 내 마나를 다 쏟아부었거늘…… 아직도 기운이 쇠한 것이냐, 세르리아?"내 곁에 누워 있던 카일락이 걱정스러운 적안을 번뜩이며 내 목덜미의 붉은 자국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심장 박동과 시원한 흑마력 향기에 정신이 또 몽롱해질 지경이었다."아니요, 그냥…… 매일매일이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거리는 날이었으면 좋겠어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이 낮잠이나 자면 얼마나 평화로워요? 그럼 나한테 일하러 나오라고 귀찮게 굴 사람도 없을 텐데."백수로서의 본능에 충실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게으른 투덜거림이었다.하지만 내 말이 허공에 흩어지기가 무섭게, 카일락의 붉은 눈동자가 거대한 깨달음을 얻은 마왕처럼 번뜩였다."……온 세상이 다 같이 낮잠을 자는 평화라."카일락이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기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우르르르쾅쾅!대공성 침실 문밖 복도에서 수십 명의 발소리와 함께 다급한 총집사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대공 전하! 대공비 마마! 황제 폐하와 원로원 재상단이 황실 옥새를 든 채 긴급 어전회의를 위해 들이닥쳤습니다!""또 황실 놈들인가."카일락의 눈매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그가 흑마검을 뽑아 들고 침대에서 일어서려 하자, 나는 한숨을 쉬며 카일락의 팔을 붙잡았다."칼부터 뽑지 말고요. 또 무슨 일인데요?"침실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선 것은, 20대로 회춘하여 피부가 번쩍거리는 황제 에드워드와, 그 뒤를 따르는 제국의 최고위 각료들이었다. 하지만 각료들의 표정은
제국 황실 3,000년 역사상 가장 엄숙하고 위엄 넘쳐야 할 황궁 대연회장.황금 기둥과 웅장한 샹들리에 아래 펼쳐진 광경은, 역대 선대 황제들이 무덤을 박차고 튀어나와 뒷목을 잡을 만큼 기상천외했다.바닥을 가득 채우던 차가운 대리석은 온데간데없었다. 38.5도의 온돌 보일러가 훈훈하게 깔린 연회장 바닥 위로, 최고급 라텍스 매트리스와 구름 빈백 쿠션 3,000개가 오와 열을 맞추어 정갈하게 깔려 있었다.그리고 그 위에 누워 있는 것은…… 평소라면 목을 뻣뻣하게 굳힌 채 가문과 정파를 따지며 기싸움을 벌였을 제국의 공작, 후작, 백작, 그리고 황족들이었다.모두가 헐렁하고 부드러운 최고급 실크 파자마를 맞춰 입은 채, 베개에 등을 기대거나 엎드려 만두와 과일을 집어 먹고 있었다."어머, 공작부인…… 파자마 허리 고무줄이 이렇게 자비로운 물건인 줄 평생 모르고 살았어요." "오, 하느님…… 척추가 바닥에 착 달라붙는 이 쾌감이란! 매년 코르셋 때문에 갈비뼈에 금이 가던 세월이 억울할 지경입니다!"중앙 황금 옥좌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있던 20대 외모의 황제 에드워드가, 껍질 깐 청포도를 입에 쏙 집어넣으며 감격에 겨워 외쳤다."짐이 선포하노라! 오늘부로 황실의 모든 공식 연회는 '기립 금지'다! 일어서는 자는 황실 불경죄로 다스리겠노라!"와아아아아─! 3,000명의 귀족이 누운 채로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환호성을 질렀다.바로 그때, 황궁 대연회장의 거대한 황금 문이 활짝 열렸다.뿌우우우우─!"신마계 평화의 어머니이자 제국의 수호 성녀, 카일락 대공비 전하 납시오!"의전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대연회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스르르르륵─.연회장 중앙 통로 전체에 깔린 무빙워크 레드카펫 위로, 거대한 '무중력 황금 침대 가마'가 은빛 오로라를 뿜으며 미끄러지듯 진입했다.그 침대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카일락이 직조 장인들을 감금하다시피 하여 완성해 낸 '무중력 오팔 실크 파
황실 보물고에서 득템한 '태초의 보온 깃털 베개'와 '심신 안정 암흑 중력 담요', 그리고 녹지 않는 '만년 빙하 큐브'.이 세기의 꿀잠 3종 세트가 갖춰진 초대형 황금 마나 침대는, 가히 우주 최강의 무릉도원이었다.보온 베개는 내 뒤통수를 38.5도의 완벽한 온도로 감싸 안았고, 중력 담요는 솜이불 10장을 얹은 듯 포근하게 온몸을 짓눌러 주었으며, 협탁 위 크리스털 잔 속에서는 빙하 큐브가 복숭아 에이드를 살얼음 동동 뜬 극상의 온도로 유지하고 있었다."후우…… 이게 인생이지. 침대 밖은 위험해."나는 빨대를 물고 복숭아 에이드를 쪽 빨아당기며, 침대 위에서 완벽한 액체 상태로 녹아내려 있었다.내 곁에 누워 내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손가락에 감았다 풀며 감상하던 카일락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세르리아, 턱이 아프지는 않으냐? 빨대를 무는 것조차 버겁다면 내가 입으로 직접 에이드를 머금어 넘겨줄 수도 있다만.""……아니요, 그건 좀 과해요."남편의 무시무시한 과보호에 질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려던 찰나였다.똑똑똑."대공 전하, 대공비 마마. 황실 의전관과 황태자비 전하, 그리고 사교계 위원회 부인들이 합동으로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총집사의 목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들어선 것은 황태자비 비올레타(여전히 헐렁한 실크 파자마 차림)와, 제국 사교계의 거두 델피나 후작부인, 그리고 황실 의전 총책임자였다.의전관은 벽돌만 한 두께의 금박 서류철을 양손으로 공손히 받쳐 든 채 무릎을 꿇었다."성녀 전하! 황제 폐하의 윤허를 받아, 대공비 전하의 제국 공식 취임 및 신마계 평화 기념 대연회의 기획안을 완성하여 올립니다!""……취임 연회요?"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원래 귀족 세계에서 '공식 대연회'라 하면 백수에게는 지옥의 행군이나 다름없었다.의전관이 침을 꿀꺽 삼키며 비장한 목소리로 연회 식순을 읊기 시작했다."예! 황궁 대연회장에 제국 귀족 3,000명이 집결하여, 대공비 전하
루프탑 스파의 뜨겁고 눅진했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다음 날 오전.수영장만 한 황금 마나 침대 위에서, 나는 갓 구운 바닐라 버터 토스트를 오물거리며 나른하게 하품을 쩍 내뱉었다."하아암…… 온천물에 푹 지지고 잤더니 온몸의 뼈마디가 말랑말랑한 젤리가 된 것 같네."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토스트 위에 천년 설산 딸기잼을 정성스레 발라주던 카일락이, 다정한 손길로 내 입술가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내 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어젯밤 은하수 스파에서 나눈 뜨거운 키스의 열기가 여전히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세르리아, 더 먹고 싶은 과일은 없느냐? 네가 원한다면 남부의 망고 나무를 성 안뜰로 통째로 옮겨 심어주마.""아니에요, 배불러요. 이제 다시 누워서 낮잠이나……."쿠구구구구구궁─────!내가 베개 속으로 머리를 파묻으려던 바로 그 순간, 대공성 안뜰 전체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마치 수백 마리의 마수 군단이 성벽을 들이받는 듯한 굉음. 카일락의 눈매가 단번에 사납게 치켜올라가며, 침실 전체에 서늘한 흑마력의 오러가 촤르륵 깔렸다."어떤 불경한 자가 감히 또 세르리아의 낮잠을 방해하려 드는가."카일락이 마검의 자루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침실 문밖에서 숨을 헐떡이는 총집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대, 대공 전하! 대공비 마마! 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본저 안뜰을 점령하셨습니다!""황제 놈이 기어이 목숨을 내놓기로 작정했군."카일락의 입에서 살벌한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하지만 총집사가 사색이 된 얼굴로 덧붙인 말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아, 아닙니다! 침략이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제국 황실 보물고 1호부터 10호까지의 문을 통째로 뜯어내어, 수레 100대에 보물을 가득 싣고 본저 안뜰에 쏟아부어 놓고 계십니다!"'……뭐? 황실 보물고를 뜯어서 마당에 쏟아부었다고?!'내 눈이 번쩍 뜨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실크 가운을 걸치고 발코니로 쪼르르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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