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공, 나는 당신의 아이를 원해요." 첫 만남부터 돌직구였다. 전생, 모든 것을 잃고 죽었던 황녀 지빌라. 이번 생, 가장 위험한 남자를 직접 골랐다. 북부의 냉혈 대공, 프레데리크. 이 위험한 황궁을 빠져나가고, 그를 살리고, 제국의 폐망을 막는 것. 사랑 없는 결혼 정도는 자신 있었다. 그런데 이 부부, 처음부터 어긋났다. 첫날밤을 거부하던 신랑은 끝내 그 밤을 강행하고, 아이를 낳겠다던 신부는 몰래 피임약을 준비한다. 서로를 완벽하게 속이고 있다고 믿었던 정략결혼. 왜, 자꾸만 선을 넘는 걸까. 전생의 남편 용병왕 카이사르 집요하게 따라붙고, 누이를 놓아줄 생각 없는 일황자가 발톱을 드러낸 사이, 거래였어야 할 남편의 손끝이 어느새 너무 뜨거워졌다. 정략결혼은, 말 그대로 거래로 끝냈어야 했다.
View More99화프레데리크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니, 낯설었다. 축제는 짧고, 대공성은 바로 코앞인데… 왜인지 오늘만큼은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그는 말없이 랑베르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가볍게 턱짓했다.“짐은 하튼 백작성에 풀도록.”랑베르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지금… 말씀이십니까? 대공성까지는—”“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낸다.”결정이 내려지자, 곁에 있던 피엘은 잠시 굳은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부임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대공의 성품을 파악하려 애써온 사람이었다.‘대공께서 이렇게까지 표정이 밝았던 적이 있었던가…?’랑베르 또한 거의 감동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성에서 대공이 쉬겠다니 영광이었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사실이 있었다.프레데리크의 시선이 자꾸, 너무 자주, 대공비를 따라갔다. 풍경을 바라보듯 부드럽고, 오랫동안 씌워졌던 어둠이 벗겨진 사람처럼 가벼워 보였다.랑베르는 그 모습을 오래 보지도 못하고 곧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준비해두겠습니다, 각하.”프레데리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행렬은 여전히 움직였고, 축제의 열기와 노을빛이 뒤섞여 퍼지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 속에서도 그는 지빌라의 숨결만 또렷하
98화레오노라는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프레데리크는 지금, 너무도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너무 명확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피엘이 낮게 말했다.“전하께서… 저렇게 누군가에게 맞춰 움직이시는 걸 처음 봅니다.”레오노라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러게요. 아주… 철저하게 맞추셨네요.”살짝 눌린 목소리 속에는 놀람과 인정, 그리고 어쩌지 못하는 작은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광장에 다시 아이들 웃음이 크게 터졌다. 하지만 레오노라의 귓가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맴돌았다.‘정말로… 지빌라 전하를 위해 온 걸까? 아니면…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어진 걸까.’그 깨달음이 겨울 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스쳤다.축제는 무르익어갔다. 인파 속을 가로지르는 동안 누군가 뒤에서 밀치는 바람에 지빌라가 휘청였다.프레데리크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 안정시켰다. 손가락이 감기는 순간 둘 사이의 거리도 자연스레 좁혀졌다.“사람이 많군.”그의 짧은 말이 의외로 진정 효과를 냈다.“…고마워요.”지빌라는 잡힌 손에 신경이 쓰여 시선을 피했다.
97화의식이 끝나자 아이들 무리가 광장을 뛰어다니며 작은 부적을 나눠주기 시작했다.흰 실과 파란 실을 엮어 만든 ‘생명의 매듭’.한 아이가 지빌라 앞에 다가와 매듭을 내밀었다. 작고 단단한 매듭은 손 위에 놓이자마자 따뜻한 숨결을 품은 듯했다.“요람에 걸어두면 복이 온대요!”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퍼졌다.지빌라가 대꾸하기도 전에 프레데리크가 손을 내밀어 대신 받아들였다. 짧은 순간, 그의 손가락이 지빌라의 손등을 스쳤다. 의도치 않은 접촉이었는데, 왜인지 지빌라는 숨을 들이켰다.프레데리크는 부적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대대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거지.”말이 끝나자, 그의 표정에 옅게 금이 갔다. 지빌라는 그 금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득 떠올랐다.북부를 지배해온 오래된 저주, 베라트 가문의 가주는 스물다섯이 되면 죽는다는 전승.프레데리크의 아버지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 마치 사슬이 끊어지듯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대공비의 운명은 더 잔혹했다. 프레데리크가 다섯 살이던 해, 한 잔의 독이 모든 것을 끝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결국 어린 프레데리크는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고, 그를 지켜낸 건 혈육이 아닌 북부 그 자체였다. 레오노라의 아버지, 동부의 클레브 백작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는 황실의 견제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96화레오노라는 피곤이 비친 미소를 억지로 다듬어 올렸다.“아… 네. 잘 지내셨지요?”“그럼요. 어릴 적부터 두 분이 말을 보러 오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서로를 챙기며 다니시던 것이 엊그제 같았지요.”그 말에 레오노라의 입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주인의 시선이 대공비의 마차 옆에 서 있는 흰 말로 옮겨갔다. 잠시 유심히 체형을 살피던 그는 낮게 감탄했다.“서부 말이군요. 씨말 중에서도 최상급 계통입니다. 한때 저도 들여오고 싶었지만… 서부 변경백 쪽이 워낙 귀하게 다루는 말인지라 결국 포기했습니다.”그 순간, 레오노라가 아주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말은… 서부 변경백께서 대공비 전하께 선물로 드린 겁니다.”주인은 눈썹을 의아하게 치켜올렸다. 레오노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덧붙였다.“서부에서는 암말을 상대에게 주는 건… 꽤 특별한 의미가 있지요.”짧은 정적.그리고 주인의 시선이 지빌라에게 아주 잠깐, 스치듯 머물렀다.“아마도… 큰 도움을 드린 모양입니다. 허허.”그 짧은 순간에 스친 인상은 곧 입에서 귀로, 다른 이의 입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vi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