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공, 나는 당신의 아이를 원해요." 첫 만남부터 돌직구였다. 전생, 모든 것을 잃고 죽었던 황녀 지빌라. 이번 생, 가장 위험한 남자를 직접 골랐다. 북부의 냉혈 대공, 프레데리크. 이 위험한 황궁을 빠져나가고, 그를 살리고, 제국의 폐망을 막는 것. 사랑 없는 결혼 정도는 자신 있었다. 그런데 이 부부, 처음부터 어긋났다. 첫날밤을 거부하던 신랑은 끝내 그 밤을 강행하고, 아이를 낳겠다던 신부는 몰래 피임약을 준비한다. 서로를 완벽하게 속이고 있다고 믿었던 정략결혼. 왜, 자꾸만 선을 넘는 걸까. 전생의 남편 용병왕 카이사르 집요하게 따라붙고, 누이를 놓아줄 생각 없는 일황자가 발톱을 드러낸 사이, 거래였어야 할 남편의 손끝이 어느새 너무 뜨거워졌다. 정략결혼은, 말 그대로 거래로 끝냈어야 했다.
View More1화
“대공, 난 당신의 아이를 원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프레데리크는 미간을 구겼다. 느른한 암사자처럼 앉은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이’라는 단어가 전제하는 것들이 한 박자 늦게 살갗에 와닿았다. 침대와, 맨살과, 뒤엉킨 밤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문장. 목덜미 아래로 열이 훅 치솟았다. 미혼의 황녀가 초면의 사내에게, 그것도 이렇게 태연히 던질 말은 결코 아니었다.
황녀의 정원엔 사치스러운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그 속을 가장 부지런한 꿀벌이 바삐 파고들며 꿀을 빨았다.
오직 여왕벌 하나를 배불리기 위해.
황녀는 마치 여왕벌이라도 된 듯, 황금빛으로 치장된 옷자락을 햇빛 아래 퍼뜨리고 있었다. 그 찬란함이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프레데리크가 입은 검은 제복의 칼라는 목덜미까지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끝 단추 하나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팽히 당겨졌다. 봄볕 탓인지, 이 자리 자체가 주는 압박 탓인지는 그 자신도 분간할 수 없었다.
봄날의 온화함은 자취를 감추고, 숨 막히는 열기만이 정원을 짓눌렀다. 마치 그 열기가 모두 그를 향해 쏟아지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르고 그가 무겁게 입술을 떼어냈다.
“황녀…….”
“지빌라라고 불러요.”
프레데리크의 눈빛은 어두웠다. 웬만한 자는 그 안광 하나에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는 그것을 숨기지 않은 채, 황녀를 정면으로 내리꽂았다. 초면에 이름을 허락하는 여자. 그 허락이 사교계에서 어떤 거리를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그는 무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뜻대로, 아니, 그녀가 허락한 것보다 한 발 더 깊이 이름을 한 자씩 불러주었다.
“지빌라 나타리에 폰 바뎀베르크힐.”
“나쁘지 않잖아요, 대공. 황족과 당신의 혈통. 서로 나쁠 게 없죠.”
황족의 두 번째 이름까지 입에 올린 무례함은 정작 그의 쪽이었다. 그런데도 황녀의 말이 더 거슬렸다. 그녀가 웃지 않았더라면, 제안인지 협박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황녀의 뜻이 내 후계자 생산에 있다라… 처음 알았군.’
황녀를 둘러싼 소문은 차고 넘쳤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지만, 설마 그 험한 것이 제 앞에 이렇게 놓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베라트 가문 가신들까지 사활을 걸었다죠.”
황녀는 그의 발목을 잡은 이유를 정확히 짚었다. 프레데리크는 눈에 띄지 않게 혀를 찼다. 성인식 이후, 그는 이 수도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무려 5년 만이었다.
황녀는 그의 눈빛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도발하듯 시선을 되돌려주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프레데리크는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꽃에 매달려 있던 꿀벌 하나가 급히 날아올랐다. 달뜬 날개 소리만 정원에 남았다.
“대공…… 아니, 프레데리크, 이제 고집은 그만 부려요.”
누군가 입에 담은 그의 이름. 그렇게 낯설게 들린 건 참 오랜만이었다. 헛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지만, 그는 고개를 들고 황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열기를 씻어내듯 바람이 스쳤다.
두 사람 모두, 식지 않은 차를 그대로 두고 있었다.
프레데리크는 문득 차가 식어가는 속도가, 알현실의 공기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황녀가 열다섯이 되던 해부터 친히 제왕학을 가르쳤고, 재혼한 황후에게서 두 아들을 얻은 뒤에도 끝내 첫 딸을 후계로 세우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 그는 그 모든 사정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가신들의 입을 거쳐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날, 귀족의회 앞에 선 황후의 모습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황제가 병환으로 쓰러진 뒤 대리청정을 맡은 지 어느덧 3년,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말하듯, 흔들림이 없었다.
“북부에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곧 제국의 손실입니다.”
매서운 음성이었다. 그녀는 프레데리크가 대공비를 맞지 않으면 타 왕국에까지 신붓감을 구하겠다고 공언했고, 회의장 끝자리에 앉아 있던 베라트 가신들의 얼굴빛이 일제히 굳는 걸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대를 위해 법으로 주선한 자리에 매일같이 나가든지, 황녀와 혼인하든지. 두 가지 선택지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는 점, 유감이에요.”
가신들까지 그 말에 동조하며 노골적인 찬성을 드러내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 안이 썼다. 거부할 수 있는 위치였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결국 뜻을 꺾은 채 수도에 머물렀던 건, 황실의 압박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결정의 이면엔 단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레오노라 클레브.
결혼이란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레오노라였다. 누구보다 오랜 세월 그의 곁을 지켜온 사람.
제국 초대 건국 가문 출신. 유년 시절부터 함께 자란 유일한 벗이자, 그를 가장 잘 아는 이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결혼 상대이기도 했다.
프레데리크는 알고 있었다. 베라트 가문의 남자들은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 그를 그녀가 기다려선 안 됐다.
만약 레오노라가 그가 이 자리에 나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부디 마음을 접어주기를. 죽음이 예정된 그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 필요한 건 황녀의 입에서 나올 단 한마디였다. ‘이 결혼은 원치 않습니다.’ 그 말만 들으면 되었다. 그 한마디면, 그는 이 지긋지긋한 무대에서 물러날 명분을 얻었다.
아직 성인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녀. 황후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이 자리에 나왔기를 바랐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열을 식혔다. 프레데리크는 마침내, 제가 가진 패를 내려놓을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좋습니다. 황태녀의 자리에 오르도록 당신을 받들겠습니다.”
“기껏 기대했더니, 고작 그 말인가요?”
지빌라는 코웃음을 흘리듯 미간을 좁혔다. 안타깝지만, 황위에 대한 야욕 따위는 그녀에게 없었다.
황제의 훈육 아래에서도 그녀는 황궁을 누비며 도망 다니기 일쑤였고, 제국 귀족 중에 이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성인이 된 뒤로는 황실 연회며 귀족 연회를 돌며, 의도한 듯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런 황녀가 황태녀의 자리에 오른다 한들, 귀족 의회를 설득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무모했다.
“그토록 중립을 지켜오시던 분이, 결혼 문제 앞에서 이리 쉽게 무너지시네요. 다시 묻죠. 이건 황후에 대한 반발인가요? 아니면 저를 향한 모욕인가요?”
프레데리크는 그제야 황녀가 이 결혼에 생각보다 단단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낭패가…….’
그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제 이 선택이 허수일 뿐이라는 걸. 다만 궁지에 몰려 던진 패였고, 그 패마저 그녀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전장에서도 이토록 몰린 적은 없었다.
144화“……잔인하네.”프레데리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아주 친절한 거죠.”그녀는 다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엔 정말로, 재우려는 사람처럼.“이 이상은 안 돼요, 상처도 다 아물지 않았고, 내일도 얌전히 있으면— 읏! 당신 정말!”프레데리크는 상기된 얼굴을 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키스했다. 그러자 아래가 지르르 울렸다. 직접 관계를 맺지 않았는데도 내벽이 움찔거렸다.잠옷 안으로 손이 파고들었다.“안 돼요. 더는…….”“나만 좋은 순 없잖아.”지빌라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말이 안 됐다.“여기서 끝내요.”“금방이야.”그가 다정하게 입술을 겹쳤다. 지빌라는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몸에 난 상처가 걱정이 됐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사이,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음부를 문질렀다.그의 혀가 지빌라의 입안 여린 점막을 핥았다. 입안에는 비릿한 맛이 맴돌았고, 타액이 엉겨 혀끝이 부딪혔다.손가락이 밀고 들어왔다.“하아…….”그의
143화지빌라의 말이 끝나자, 프레데리크의 숨이 분명히 달라졌다. 잠깐의 정적 끝에 그가 고개를 들어, 지빌라의 입술을 찾았다.처음엔 조심스러웠다.확인하듯, 묻듯.그러다 점점 깊어졌다. 숨이 섞이고, 그녀의 손에 쥔 힘이 느껴질 만큼.프레데리크가 무심코 몸을 일으키려 한 순간, 지빌라는 그의 입술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이마를 맞댄 채, 낮게 말했다.“더 기대하는 거예요?”그의 숨이 멎었다.“그럼, 오늘 밤은—”그녀는 다시 한 번, 분명히 선을 그었다.“내가 허락한 것만 해요.”프레데리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그제야 온몸에 퍼지는 얼굴이었다.지빌라는 이불을 걷어내며 그의 아래로 천천히 몸을 옮겼다.“……지빌라?”당황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풀어냈다.이미 잔뜩 부풀어 있는 것이 드러나자, 지빌라는 잠시 손을 멈췄다. 생각보다 크고, 단단했다. 매번 그를 받아들일 때마다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눈으로 마주하는 압도감이었다.문득 낯선 기억이 스쳤다. 이런 걸 배운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손이, 그리고 다음에 무얼 해야 할지가 이상하게
142화호흡은 한결 고르게 돌아와 있었다.신관은 그의 맥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손을 떼었다.“독은 이미 제거되었습니다.”차분한 목소리였다.“이제 안정을 취하면 됩니다. 오늘 밤만 넘기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프레데리크는 그 말을 들으며 옅게 눈을 떴다. 신관의 손이 닿기 전부터, 가슴 한쪽의 열기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치료실에 감돌던 긴장이 조금 풀렸다. 랑베르는 작게 숨을 내쉬었고, 피엘은 굳게 다문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각하를 지키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오늘 일은―저희의 불찰입니다.”“저희에게 벌하여 주십시오.”프레데리크는 눈을 감은 채,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움직였다.“괜한 일로… 다들 놀라게 했군. 그 정도면 됐다.”그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 치료실에 모인 사람들, 시녀와 기사들, 그리고 그 끝에 서 있는 지빌라에게로.에르나는 한 발짝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브 매듭은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흐트러진 차림 그대로였다. 손끝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프레데리크가 다정하게 말했다.&ldqu
141화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칼날에는 분명히, 짙은 색의 독이 발려 있었다. 그 뒤의 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죄수는 즉시 제압되었고, 대공은 경호 기사들의 손에 의해 지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독은 이미 혈관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전하!”에르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잠든 대공비를 깨우는 무례를 감수한 음성이었다.지빌라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프레데리크가 없는 밤이었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데, 평소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겨우 잠에 들었고, 아직 꿈과 현실의 경계에 발이 걸려 있었다.“무슨 일이…….”잠긴 목소리였다.에르나는 침대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촛불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은 지나치게 굳어 있었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소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대공 각하께서…… 다치셨습니다.”순간, 지빌라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어들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치다. 각하. 그 사이를 잇는 연결이 보이지 않았다.“……어디서?”에르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지하 감옥에서요. 독에 당하셨다고…….”그제야 숨이 멎는 느낌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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