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69화
북부의 대공비로서 후계자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프레데리크와의 초야는 원래 없던 일이었다.
두 번째 그와 몸을 섞었을 때,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여운 속에서 지빌라는 제 마음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절박하게 놓인 운명을 어떻게 수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레오노라…….’
그녀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무겁게 되뇌었다.
회귀 후 최대의 악수였다. 두 사람을 다시 이어주려던 선택은 철저히 어긋났다.
“…내 오해라고 해야겠지.”
회귀한 지금이라면, 그 죽음조차 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128화“바르켄 가문은,”지빌라가 말했다.“수도와 북부 사이에 오래 머물러 있었죠.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늘 정보를 먼저 접하는 자리에서.”칭찬이 아닌, 정확한 위치 규정이었다.“당장 가문으로 돌아가기보다는,”지빌라는 말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갔다.“이 근방에 머물러 주었으면 합니다.”명령은 아니었지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초대장을 드릴 생각은 없어요.”지빌라도 숨기지 않았다.“대신 이 성에는 늘 차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에스텔은 잠시 침묵했다. 주기적으로 오라는 뜻이었고, 올 때마다 말하라는 의미였다.“전하께서 원하시는 건,”에스텔이 조심스럽게 정리했다.“제가 보고 듣는 것들을, 여과 없이 전하는 일입니까?”지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한 것만요.”그녀는 덧붙였다.“그리고 제가 묻기 전에 먼저.”요청이 아니라, 역할 부여였다.
127화에스텔은 대공비의 말 한마디로 어떤 인물인지 가늠했다. 소문과는 다른 인상이었다. 그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공비의 말에 수긍했다는 몸짓이었다.대공비의 접견이 어려웠던 이유를 에스텔은 몸 상태 때문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마주한 지빌라는 병색보다는 피로가 더 짙었다.‘…합방이라도 한 건가?’여자 특유의 직감이 스쳤다. 하루 이틀이면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꼬박 한 주가 걸렸다.“먼 길이셨을 텐데요.”지빌라의 말에 에스텔은 길어지던 생각을 접었다.“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에스텔은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웃었다. 입꼬리만 움직이는 웃음이었다. 사교적인 미소는 아니었다.“전하께서 보석 세공 공방을 구상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지빌라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공식적으로 공개된 적 없는 계획이었다. 다만 샤를로트의 편지. 수도에서 장인들을 보내겠다는, 봄을 기약한 문장만이 있었을 뿐이었다.“…소문이 빠르군요.”“빠른 게 아니라, 예민한 쪽입니다.”에스텔은 그렇게 말하며 제가 가져온 상자를 시종에게서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상자는 작았지만 봉인은 단단했다.“저희 바르켄 가문은 광산을
126화문득, 하튼 백작성에서의 밤이 떠올랐다. 취기에 이끌려 그의 위에 올라탄 채 매달렸던 그 밤. 그때는 부끄러움도 잊고 저 스스로 그를 원했었는데.그러다 지빌라는 제 몸을 내려다보고는 놀랐다. 방 안 곳곳에 켜둔 작은 등불들이 주홍빛으로 은은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빛을 받은 제 몸이 온통 울긋불긋했다. 가슴도, 배도, 허벅지도. 입술은 감각만으로도 퉁퉁 부어 있는 게 느껴졌다.‘…에르나가 보면.’그 생각만으로도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반면 프레데리크는 처음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만 땀에 살짝 젖은 몸이 오히려 더 육감적으로, 단단하게 느껴졌다.지빌라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그가 낮게 속삭였다.“…딴생각하면, 더한 것도 할 텐데.”지빌라는 그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그 순간, 그가 그녀의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어?”당황할 새도 없이,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뒤에서 그가 다시 밀고 들어오는 순간, 지빌라는 놀라 몸을 바르작거렸다.“이렇게 하면, 더 느낄 수 있어.”그 말에 담긴 뜻을 몸으로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리가 절로 들리고, 짐승처럼 엎드린 자세로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낯설고 당혹스러웠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처음 겪는 감각이, 그녀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끄는 것 같았
125화프레데리크는 그 얼굴을 눈에 담으며,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가 이토록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예뻐.”낮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는 그 얼굴에 이끌리듯 몸을 낮춰,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목덜미를 지나 가슴께에 입술을 묻었다. 지빌라는 저도 모르게 등을 휘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이, 정말 제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혼인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감각들이, 그와 함께한 밤들을 거치며 하나씩 새겨졌고, 이제는 그의 손끝 하나에도 온몸이 먼저 반응했다.“……흐읏.”참으려 했지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입술이 스치는 자리마다 뜨거운 감각이 번져, 이성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지빌라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린 채 앉아,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걸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는 듯 손끝에 힘을 주었다.손톱이 살짝 파고들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감각은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그는 그 반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느리게 입술을 옮겨갔다. 마치 그녀의 몸에 새겨진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하려는 사람처럼.다시 한 번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친 채, 다른 한 손이 가슴을 감싸 쥐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 정점
124화그들은 대공성의 오래된 합방 관례에 따라, 화려함을 배제한 차림이었다.장식 없는 면 소재의 잠옷.몸을 꾸미기 위한 옷이 아니라, 쉬기 위한 옷.가느다란 어깨선과 허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떨어져, 오히려 그녀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지빌라…….”금발은 완전히 풀지 않은 채, 낮게 한 번 묶여 있었다. 빗질만 한 듯한 머리결이 목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귀와 뺨에는 어떤 장신구도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 있는 그대로의 피부. 눈부시게 아름답다던 황녀.푸른 눈동자가 촛불을 받아 깊게 빛났고, 흰 살결에는 겨울의 공기와 긴장 탓인지 옅은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그 붉음은 부끄러움이었고, 동시에 기다림의 흔적처럼 보였다.프레데리크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숨이 미세하게 어긋났다. 그녀 역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그만이 이 밤을 갈망한 게 아니라는 사실.지빌라는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그 침묵은 체념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스스로 다가온 거리, 스스로 허락한 온기.그 침묵이 그를 더 깊이 몰아넣었다.프레데리크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 모습 그대로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은 사람처럼.‘내 사람이라는 게… 이런 의미였군.’합방일에만 열리던 방.
123화에르나는 확인하듯 물었다.“그럼 레오노라는?”지빌라는 잠시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의 기척이 아니라, 그곳에 이어져 있던 시간들을 가늠하듯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늦은 오후의 차와 목욕은 그대로 두되, 준비와 확인은 네가 맡아.”완전한 배제는 아니었다. 지빌라는 단지 통로를 바꾸었다. 같은 결정이, 더 많은 눈과 손을 거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에르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던 어긋남의 정체를 또렷이 붙잡았다. 레오노라를 곁에서 지켜보며 느꼈던, 말로 설명할 수 없던 미세한 불균형.그리고 지금 이렇게 정확히 선을 긋는 대공비의 태도는, 그 감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그녀는 묻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책임이 생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알겠습니다, 전하.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지빌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것으로 충분했다.***프레데리크는 아침부터 정무에 묶여 있었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보고서를 넘기며, 스스로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문장 하나를 읽고도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집중이 잘게 갈라지고 있었다. 이 시간마저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차라리 갑주를 입고, 검을 쥐는 편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