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재헌 씨, 차에서 내려요.”유리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지금 필요한 건 놀라는 것도 상대가 원하는 의미를 붙이는 것도 아니었다. 재헌이 방금 당신 향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BORDERLINE이라는 뜻도 아니고, 그 향 때문에 유리를 떠올렸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전화 너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내렸습니다.]“차에서 조금 떨어져요. 기사님도 같이.”[네.]“그리고 다시 확인한다고 냄새 맡지 마요.”재헌이 잠깐 침묵했다.[이미 맡았는데.]“그러니까 더 맡지 말라고요.”[알겠습니다.]유리는 보안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재헌의 차량 위치가 확인됐고, 가장 가까운 보안 인력과 안전관리 담당자가 동시에 이동했다. 차량은 그대로 보존하고, 누구도 안에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 창문을 열어 환기할 것인지도 현장 채취가 끝난 뒤 결정하기로 했다.“재헌 씨.”[네.]“어지럽거나 머리 아프거나, 눈 따갑거나 그런 건.”[없습니다.]“기사님은.”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재헌이 대답했다.[없다고 합니다.]“그래도 안전관리팀 올 때까지 기다려요.”[유리 씨.]“왜요.”[숨 쉬어도 됩니다.]그제야 유리는 자신이 숨을 얕게 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에 있던 세아도 같은 걸 알아차렸는지 물을 밀어줬다. 유리는 한 모금 마시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나 괜찮아요.”[안 괜찮아 보입니다.]“안 보이잖아요.”[목소리가 보입니다.]이런 상황에서도.그 사람은.이상한 말을 한다.유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아까 말한 거.”[당신 향.]“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재헌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질문이 중요했다. 누군가 이미 KJ-04 must identify the interpreter without being told라는 평가 항목을 만들어 두었다. 그러니 재헌의 말을 그 문장에 맞춰 해석해서는 안 된다.“내 향이라
Now I only need to know whether he recognizes yours.유리는 마지막 문장을 세 번 읽고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번에는 의미가 모호하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KJ-04, 권재헌. 그리고 ‘당신의 향’은 지금 이 사람이 P-11과 비교하고 있는 BORDERLINE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그러나 유리는 곧바로 재헌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먼저 화면을 캡처하고, 접근 세션을 끊지 않은 채 보안팀에 넘겼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계정을 차단했겠지만, 이제는 상대가 들어온 길을 먼저 본다. 보안팀 역시 같은 판단이었다. 외부로 나가는 권한만 막은 격리 환경에서 세션을 살려두고 기기 지문, 인증 토큰, 접속 경로를 동시에 복제했다.“답장하지 마세요.”보안팀장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안 해요. 저 사람은 내가 반응하는 것까지 보고 싶어 하니까.”세아가 옆에서 화면을 바라봤다.“그런데 선배. ‘그가 당신의 향도 알아보는지’라는 게 정확히 뭘 보겠다는 거예요? 권 총괄님이 BORDERLINE을 맡고 선배를 떠올리는지?”“아마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싶겠지.”유리는 마지막 문장을 가리켰다.“중요한 건 실제로 무슨 반응이 나오느냐가 아니야. 저 사람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있어. 재헌 씨가 향을 맡고 나를 떠올리면 모델이 맞았다고 할 거고, 아무 반응이 없으면 노출 조건이 잘못됐다고 하겠지. 예전에 클레어 씨한테 했던 것처럼.”17년 전 헬레나가 만들었다가 스스로 철회했던 관계 반응 모델도 그랬다. 가까워지면 애착, 물러나면 회피, 다시 돌아오면 애착 강화. 어떤 행동을 해도 가설이 틀렸다고 증명할 수 없는 구조. 유리는 그걸 다시 반복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재헌 씨는 테스트 안 해.”세아가 유리를 봤다.“본인이 하겠다고 하면요?”“그래도 먼저 안전성부터 확인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저 사람이 정한 방식으로는 안 해.”유리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재헌 씨가
이정훈이 남긴 메모의 마지막 문장은 단순했다.17년 전 R-01 사건의 공식 조사 책임자를 찾으십시오.유리는 그 문장을 읽은 뒤 곧바로 사람 이름부터 검색하지 않았다. 이제는 순서를 안다. 누가 조사했는지를 찾기 전에 정말 그런 조사가 있었는지, 보고서가 존재하는지, 이정훈이 말한 ‘공식 조사’가 회사 차원의 윤리 조사였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17년 전 메종 르비에 글로벌 윤리·컴플라이언스 기록.”세아가 옆에서 노트북을 열었다.“세린 연구소 건으로요?”“세린, S-17, R-01, Hidden Yield. 전부 따로.”“한 번에 검색 안 하고요?”“응. 지금까지 자료 이름이 바뀔 때마다 놓친 게 너무 많아.”같은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R-01 연구였고, 다른 사람에게는 S-17 윤리 검토였으며, 또 다른 기록에는 H.Y. Protocol로 남아 있었다. 이름 하나만 따라가면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법무팀도 같은 방식으로 검색 범위를 넓혔다.그리고.첫 번째 결과는.예상보다 빨리 나왔다.Maison Levier Global Ethics & Compliance — Case GL-17-041사건명.Undisclosed Olfactory Exposure in Associative Response Research.연상 반응 연구에서의 비고지 후각 자극 노출.유리는 제목을 보는 순간 등을 의자에서 뗐다.“있네.”공식 사건.정말 있었다.조사 개시일은 17년 전 9월 4일. 클레어가 사고를 당하기 전이 아니라, 사고 이후였다. 제보자는 익명 처리돼 있었고 조사 대상 기관은 세린 인지소재 연구소와 외부 공동연구팀. 메종 르비에가 직접 연구를 주도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향료 및 감각 언어 자문 인력이 일부 참여해 내부 윤리 조사까지 함께 진행됐다.그리고.조사 책임자.Mireille Duval.미레유 뒤발.당시 직책.Global Ethics & Compliance Senior Investigator.유리는 처음 보는 이름을 그대로
헬레나의 메일을 읽은 뒤에도 유리는 한동안 화면을 내리지 않았다. 저는 당신과 권재헌 씨를 만나게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처음 만난 날 R-01을 가져간 사람을 봤습니다. 지금까지라면 마지막 한 문장만 붙잡고 곧장 답장을 보냈을지도 몰랐다. 어디서 봤는지, 누구였는지, 왜 이제야 말하는지 당장 캐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일의 첫 문장이 계속 눈에 밟혔다. 면접에서는 당신의 향만 이야기하세요. R-01도, KJ-04도, 저도 당신의 경력이 아닙니다. 그건 맞았다.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기분이 이상할 정도였다. 몇 주 동안 사건은 유리의 일과 연애, 과거와 미래를 모조리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파리 시니어 퍼퓨머 인터뷰조차 어느 순간부터 헬레나를 만나기 위한 통로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유리는 새 메일 창을 열었다. 확인했습니다. 면접 후 법무팀 입회하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딱 그것만 보냈다. 세아가 옆에서 놀란 얼굴로 봤다. “안 물어봐요?” “응.” “누군지 안 궁금해요?” “미치게 궁금해.” “그런데요?” 유리는 노트북을 닫았다. “내일 면접이잖아.” 세아가 잠시 멈췄다. “아.” “헬레나 말이 맞아. R-01도, KJ-04도 내 경력 아니야. 이 사건 때문에 내가 몇 년 동안 만든 향까지 뒷전으로 밀리면 그것도 싫어.” 세아의 표정이 천천히 풀렸다. “그럼 오늘은.” “면접 준비.” “진짜로?” “응.”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를 한꺼번에 정리했다. R-01 폴더도, 세린 아카이브 자료도, 가브리엘 진술도 전부 별도의 보안 드라이브로 넘겼다. 그리고 화면에 남긴 건 오직 하나였다. HAN YURI — SENIOR PERFUMER PORTFOLIO. 오늘은. 자기 향만 본다. ⸻ 그 결심은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삼십칠 분. 유리가 BORDERLINE 발표 자료를 수정하고 있는데 연구실 문이 열렸고, 재헌이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넥타이는 조금 느슨했고
Han Yuri — 5.유리는 화면에 떠 있는 숫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방금 전까지는 자신과 재헌의 이름이 스물두 해 전 같은 프로그램 명단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이상하게도 숫자 하나가 눈에 걸렸다. 놀란 감정이 조금 가라앉자 조향할 때처럼 사소한 불일치가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잠깐만요.”클레어가 화면 너머에서 유리를 바라봤다.“왜요?”“이 기록이 스물두 해 전이라고 했죠?”“네.”“저 지금 서른이에요.”클레어의 표정이 멈췄다.유리는 화면의 숫자 5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스물두 해 전이면 저는 여덟 살이에요. 다섯 살이 아니라.”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가브리엘과 연결된 통화는 아직 끊지 않은 상태였고, 법무팀 직원들이 동시에 각자의 화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충격적인 발견처럼 보였던 참가자 명단에 처음으로 분명한 균열이 생겼다.가브리엘이 먼저 말했다.[원본을 다시 확인하겠습니다.]“아까는 기록이 있다고 확신했잖아요.”[제가 본 건 전산화된 참가자 데이터입니다.]“원본 종이가 아니고?”[네.]유리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또 데이터였다. 누군가가 옮겼고, 정리했고, 시스템을 바꾸면서 필드를 다시 붙인 자료. 이번 사건 내내 사람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갔던 것도 그런 자료들이었다.“그럼 Kwon Jaeheon — 12도 나이라고 확신할 수 없겠네요.”[그건 별도 필드에 생년 정보가 있습니다.]“제 건요?”가브리엘이 잠시 침묵했다.[없습니다.]“그럼 왜 5가 나이로 들어갔죠?”[확인하겠습니다.]유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심장이 조금씩 원래 속도를 찾았다.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자신이 다섯 살 때 재헌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원본 확인 전까지는 아무 의미도 붙이지 않을게요.”클레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맞습니다.”유리는 화면을 보며 덧붙였다.“그리고 가브리엘 씨.”[네.
[그걸 어떻게 찾았어?]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유리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정하지 않았다. R-01이 무엇인지 되묻지도 않았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 짧은 한마디만으로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졌다. 한서연은 R-01이 제네바의 세린 아카이브에 보관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유리는 눈앞의 문서를 다시 내려다봤다. Original Return Certificate. Client: Han Seo-yeon. 열일곱 해 전 발급된 반환 인증서. 그리고 4개월 전 누군가 그 인증서를 제시해 R-01을 출고시켰다.“찾은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유리야.]“엄마가 나한테 폐기했다고 했잖아.”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유리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머니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숨긴 일이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클레어와 헬레나, 열일곱 해 전 연구에 관해서도 어머니는 유리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많은 걸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4개월 전 R-01이 다시 세상에 나왔고, 그 샘플은 한유리에게 전달됐다. 그리고 재헌을 처음 만난 날 그의 주변에서 그와 유사한 조성의 향이 검출됐다.“폐기한 거 아니지?”한참 뒤, 어머니가 대답했다.[원액은 폐기했어.]“그럼 제네바에 있는 건.”[대조 샘플.]유리는 미간을 눌렀다.“처음부터 설명해 줘.”[…….]“엄마.”목소리를 낮췄다.“이번에는 중간에 빼지 말고.”어머니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 대답을 듣고서야 유리는 의자에 제대로 앉았다. 재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통화 내용을 들으려고 가까이 오지도 않았고, 유리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묻지도 않을 것이다.[열일곱 해 전에 클레어 사고가 난 뒤에 내가 헬레나한테 연구를 끝내자고 했어.]“응.”[헬레나도 처음에는 동의했어. 적어도 그때는.]그때는.유리는 그 말을 기억해 뒀다.[우리가 가지고 있던 R-01 원액은 전부 폐기했어. 사용 중이던 희석 샘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