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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Author: 경옥
그때 심서준의 담담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누가 먼저 일을 꾸몄든,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 따른 벌은 받아야 합니다.”

심씨 노부인도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싸늘한 시선으로 이수옥을 내려다보며 꾸짖었다.

“네 오숙부의 처소에 관한 일에 네가 왜 끼어들었느냐? 네가 나설 자리가 맞다고 생각하느냐?”

노부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넓은 전당에 울려 퍼졌다.

“정녕 네가 이 일을 부추겼다면 반년 동안 월례금을 받지 못하게 하겠다. 공금에서 지급되는 비용도 모두 절반으로 줄이고, 두 달 동안 근신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거라.”

노부인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물었다.

“내 처분에 할 말이 있느냐?”

이수옥은 조금도 변명하지 않았다. 곧바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선선히 처분을 받아들였다.

“노부인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심씨 노부인은 다시 백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록 네 며느리가 먼저 낸 생각이라고는 하나, 너는 그 아이의 시어머니이지 않으냐.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고 아랫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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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945화

    계연수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아버지만 곁에 살아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고된 일을 겪더라도 진정한 시련이라 여겨지지 않았다.그녀는 소매 속에서 오므라든 손끝에 천천히 힘을 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해 아버지께 큰일이 생겼습니다.”계연수는 더 자세한 사정을 밝히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정혜 방장은 그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역시 맞군요. 신금이 지나치게 차가우면 병화로 사주의 한기를 덥혀 주지 않는 한, 고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형국이 됩니다. 다만 부인의 병화는 시간에 있어 그 자리가 멀고, 사주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기에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해 큰 고비를 겪으신 것이지요.”정혜 방장의 잔잔한 목소리가 고요한 전각 안에 낮게 울렸다.“허나 그 고비를 넘긴 뒤로 병화가 비로소 단단히 뿌리를 내렸습니다. 지금의 부인께서는 더없이 귀한 운명을 지니셨습니다.”계연수는 정혜 방장이 이토록 정확히 과거를 짚어 낼 줄은 미처 몰랐다.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후가 조급한 기색으로 물었다.“그렇다면 뱃속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정혜 방장은 계연수가 대략 몇 월 며칠 무렵에 아이를 가졌는지 몇 가지를 물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헤아리던 그의 미간이 이내 서서히 좁아졌다.“두 아이 가운데 하나는 부인의 사주에 있는 병화의 기운을 빌려 왔고, 다른 하나는 신금의 기운을 빌려 왔습니다. 불은 양이요, 쇠는 음이지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한층 무거워진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헌데 먼저 세상에 나올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한차례 큰 고비를 겪을 겁니다. 명에 칠살이 들어 성정이 강렬하고, 살아가며 숱한 시련과 좌절을 겪을 것입니다. 그 모든 풍파를 견뎌 끝내 살아남는다면, 더없이 존귀한 명격을 이루겠지요.”“뒤에 태어날 아이는 천덕과 월덕을 함께 타고났습니다. 평생 큰 굴곡 없이 순탄할 것이며, 타고난 복도 오래도록 이어질 겁니다

  • 주문춘귀   제944화

    계연수의 말을 들은 백씨는 순간 멍하니 굳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 집안사람끼리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남들이 본다면 분명 웃음거리로 삼을 터였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지금, 그중 가장 우스운 꼴이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백씨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굳은 얼굴로 서 있던 그녀는 먼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쓸쓸하게 멀어지는 옷자락 뒤로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잠시 무거운 정적만이 남았다.심씨 노부인도 더는 백씨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계연수를 곁에 붙들어 두고 의원을 불러 맥을 짚게 했다.의원은 한동안 손끝으로 맥을 세심하게 살핀 뒤, 태기가 안정되어 있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아뢰었다. 그제야 심씨 노부인의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곧바로 곁에 있던 어멈을 시켜 보약과 보양품을 모조리 가져오게 했다.잠시 후 계연수의 앞에는 크고 작은 상자가 가득 쌓였다. 상자 뚜껑이 열릴 때마다 말린 약재 특유의 쌉싸래한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계연수는 산처럼 쌓인 상자들을 바라보며 이걸 대체 언제 다 먹나 싶었다. 아무리 자신에게는 너무 많다며 사양해도 심씨 노부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계연수는 더 거절하기를 포기하고, 그 많은 보양품을 전부 처소로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흘렀다.계연수는 그동안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찾아오는 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았다. 처소 안에서 조용히 몸을 돌보며 모처럼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이날만큼은 황후가 입궁하라는 전갈을 보내온 탓에 거절할 수 없었다.계연수는 단정히 몸을 꾸린 뒤 다시 궁으로 향했다.황후 역시 계연수가 회임했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 그녀를 부른 까닭은 용하다는 고승을 궁으로 초청했으니, 계연수의 맥을 짚고 사주도 살펴보게 하려는 것이었다.계연수는 본래 이런 일을 그리 믿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후만큼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깊이 신뢰하는 눈치였다.곤녕궁에 들어선 계연수는 곧 황후가

  • 주문춘귀   제943화

    심 수보가 돌아와 분가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힌다면, 심씨 노부인도 그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여길 뿐 끝까지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제 아들이 이미 굳게 결심한 일을 무슨 수로 꺾겠는가.그리고 백씨가 지금 장원으로 떠나는 것도 시기상 좋지 않았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심씨 노부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는 서늘한 눈으로 백씨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네가 갑자기 이러는 건 또 무슨 뜻이냐? 네가 그런 여인을 서준이 방에 들이려 해 놓고, 마치 서준이가 너한테 몹쓸 짓이라도 한 것처럼 구는구나. 이제 와 그런 얼굴로 집안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게냐?”백씨는 뜻밖의 질책에 순간 멍하니 굳었다.솔직히 처음 장원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는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고 할 수 없었다.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집안 식구인데, 심서준은 이번 일을 너무 가혹하게 처리했다.자신이 한 일이라고 해 봐야 그리 큰 해를 끼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심서준은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몰아붙였다.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었다면 속이 편할 리 없었다.그렇다고 백씨가 장원으로 가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곳에서 한동안 세상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요 며칠 양가에서 서신이 날아올 때마다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는 듯했다. 이제는 이 집에 남아 그 모든 일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비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그러나 심씨 노부인의 차가운 말을 듣자 백씨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어머님께서 또 저를 오해하시는군요. 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후작과 동서를 볼 면목이 없을 뿐이에요.”계연수는 곁에 조용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뿐, 굳이 끼어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사실 백씨가 장원으로 떠나든 남든 계연수에게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심서준은 이미 분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설령 백씨가 떠

  • 주문춘귀   제942화

    이튿날 아침 일찍, 심씨 노부인은 또다시 사람을 보내 계연수를 불렀다.그때 계연수는 아직 아침 죽을 먹는 중이었다. 아침이면 여전히 속이 메슥거려 식욕이 좀처럼 돌지 않았고, 그 탓에 먹는 속도도 몹시 더뎠다. 작은 숟가락으로 묽은 죽을 조금씩 떠먹다 보니 죽 한 그릇을 비우는 데도 반 시진 가까이 걸리곤 했다.용춘은 식탁 곁에 서서 계연수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다가 나직이 물었다.“이 아침부터 노부인께서 부인을 왜 찾으시는 걸까요?”계연수는 물로 천천히 입안을 헹군 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자신도 까닭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씨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그곳에 도착해 보니 뜻밖에도 백씨가 먼저 와 있었다.계연수가 백씨를 보지 못한 지는 고작 이틀뿐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에 백씨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안색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입가에 늘 어려 있던 웃음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화려한 옷차림마저 빛을 잃은 듯했으며,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다.계연수는 먼저 심씨 노부인에게 문안을 올린 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 안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끝에, 백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뜻밖에도 계연수에게 지난 일을 사과하는 말이었다.계연수는 백씨의 창백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담담하게 답했다.“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저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마세요.”물론 백씨는 그것이 예의상 건네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면 자신의 아버지에게까지 손을 댔을 리 없지 않은가.하지만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이제 와 따지고 들 기력도 없었다. 백씨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지난 이틀 동안 백씨 가문에서는 동원할 수 있는 연줄을 모조리 찾아다녔다. 그러나 심서준이 맡아 처리하는 사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모두가 난색을 보이며 슬그머니 발을 뺐다. 공연히 끼어들었다가 화를 자초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 주문춘귀   제941화

    백씨는 늘 화려하고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하고 다녔다. 허리는 꼿꼿했고, 몸가짐에는 명문가 규수 특유의 오만함이 배어 있었다. 빼어난 용모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말하거나 행동할 때도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반면,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없었다.심태숙은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며 아버지와 적모의 환심을 사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백씨처럼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밴 당당함은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뼛속 깊은 곳에는 떨쳐 내지 못한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래서 처음 본 순간부터 백씨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부부로 살아온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었다. 백씨도 전에는 부군을 살뜰히 내조하던 현숙한 부인이었다. 요 며칠 어리석은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래도 심태숙은 차마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다.지난밤, 그는 백씨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방에 들였던 소실들은 모두 장원으로 보내고, 나 소실까지 내보내기로 했다. 앞으로는 백씨와 조용히 의지하며 살아갈 생각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하며 남들과 다투지 않고, 자식들이 훌륭히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주들이나 정성껏 돌보다가 그렇게 평온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그는 우선 백씨에게 몇 달 동안 장원에 머물다 돌아오라고 했다. 손에 쥐고 있던 권한과 재물도 모두 내놓으라고 했고, 백씨 역시 순순히 따르겠다고 약속했다.심태숙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 보면 부군인 자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도 있는 듯했다. 이제라도 백씨가 마음을 돌려 다시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는 백씨와 나눈 이야기를 심서준에게 모두 전한 뒤,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네가 한 말이 모두 나를 위해서였다는 건 안다. 헌데 네 넷째 형수가 나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나는 끝내 그 사람을 버릴 수가 없구나. 그 사람도 내게 약속했다. 앞으로는

  • 주문춘귀   제940화

    그날 있었던 일은 오후에 심서준이 돌아온 뒤 계연수가 직접 물어보았다.심서준의 표정은 시종 냉담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말하듯 담담하게 대답했다.“지난번에 너무 쉽게 용서해 주었더니, 내가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에는 제대로 아프게 해 줄 생각이다. 그 고통이 뼛속까지 스며들도록.”계연수는 그가 말한 ‘지난번 일’이 무엇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이번 일이 사실로 밝혀지면, 영국공부에는 어떤 처벌이 내려지나요?”심서준은 바깥옷을 갈아입은 뒤 계연수의 곁에 앉았다. 그의 옷자락을 따라 바깥의 서늘한 공기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가벼우면 작위가 강등될 것이고.”잠시 뒤 이어진 무심한 목소리에 계연수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무거우면 작위를 박탈당하고 곤장 삼십 대까지 맞게 될 것이다.”과연 무거운 처벌이었다. 명씨가 다급하게 자신을 찾아와 매달린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말을 마친 심서준은 피로가 밀려드는지 손을 들어 미간을 천천히 문질렀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하려 했다.계연수도 배웅하려고 따라 일어났으나, 심서준이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다시 앉혔다. 그러고는 계연수의 손을 잡아 부드러운 손바닥을 살짝 주무르며 말했다.“배웅하지 않아도 된다. 금방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을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계연수도 그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따라나서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심서준이 앞뜰의 서재에 도착하자, 곧 시종이 부친에게서 온 서신을 가져왔다.그는 봉함을 뜯어 서신을 빠르게 훑었다. 고작 두어 줄만 읽어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예상한 대로 분가를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심씨 가문을 주시하는 눈이 많다는 것은 심서준도 잘 알고 있었다. 율법과 도리에 맞게 분가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이면에 형제간의 불화나 집안싸움이 있으리라 멋대로 짐작할 터였다.부친이 걱정하는 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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