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우는 자신의 옆에 누워 잠이 든 유남준을 힐끔 쳐다봤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를 대비해 워치폰을 챙겨 연지석에게 연락하려고 했지만 손목에는 워치폰이 없었다.게다가 입고 있던 옷도 모두 바뀌어졌다.그리고 박윤우의 워치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마저 사라져 박윤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그의 곁에 누워있던 유남준이 두 눈을 뜨며 물었다.“아직도 아파?”박윤우는 유남준이 이렇게 쉽게 깰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안 아파요. 고마워요, 아저씨!”아저씨.아저씨라는 말이 유남준에게 찝찝하게 들렸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네 이름이 뭐야?”박윤우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연윤우예요.”연윤우라...연씨라...유남준의 얼굴색이 더 어두워졌다.박윤우는 유남준이 분명 자신과 엄마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기에 자기를 찾으러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모든 정보를 다 조사해 낸 건 아닐 것이다. 아니면 왜 이름까지 물어보겠는가? 더군다나 연지석은 그와 형, 그리고 엄마의 신분 정보를 잘 숨겼었다.유남준이 대답을 하지 않자 박윤우는 또 순수한 얼굴로 물었다.“아저씨, 제 이름 예쁘죠? 아빠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연씨가 흔히 볼 수 없는 멋있는 성씨잖아요, 안 그래요?”‘뭐가 멋있어?’녀석은 컨디션이 좋아지자마자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왜 배가 아픈지 알아?”박윤우가 의아했다.‘뭐지? 내가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아시는 건가?’“말이 너무 많아서 그래. 말 많은 애들이 배가 쉽게 아프거든.”유남준이 그 한마디 남기고는 휴게실을 떠났다.서다희는 방에서 나온 유남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대표님, 깨셨어요?”“응.”유남준이 자리에 앉은 후 서다희는 사람 시켜 아침을 가져오라고 했다.하지만 유남준은 식사하지 않고 서다희에게 물었다.“저 아이가 몇 개월인지 알아냈어?”“45개월이요.”45개월이라...유남준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만약 박
유남준은 박민정인 줄 알고 빠르게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아쉽게도 발신자는 이지원이었다.그는 귀찮은 얼굴을 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이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나 도와줘요.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은 지어낸 거란 말이에요.”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유남준은 갑자기 축하연 때, 뉴스에서 이지원이 표절했다고 보도된 일이 생각났다.“오늘 회사에 내 신곡, ‘세상의 한 줄기 빛’이 표절했다는 고소장이 도착했어요. 그리고 어떤 변호사가 인터넷에서 내가 표절을 일삼아 성공했다는 듯이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데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막막해요.”그 얘기를 들은 유남준은 미간을 구겼다.“알겠어.”전화를 끊은 후 유남준은 법무팀에 연락해 허위 사실 유포자를 처벌하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그는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을 볼 시간도, 관심도 없었다.하지만 인터넷에는 이지원이 출생 이후 어떤 지원을 받고, 외국으로 나간 후 어떤 수단으로 부잣집 남자들을 이용해 성공했으며, 또 표절하고서도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그 내용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유남준이 확인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 내용도 몰랐다.그리고 이지원이 말한 고소장을 보내온 사람이 바로 박민정의 친구인 조하랑인 것도 당연히 몰랐다.조하랑이 직접 작성한 이지원의 일대기가 금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친구를 위해 복수하려면 이 정도쯤은 할 수 있었다.하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아 이지원에 관한 실시간 검색어가 모두 사라졌다.1시간 후.박민정은 회사에 출근하려고 준비하던 중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조하랑을 보석해 달라는 전화였기에 그녀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서둘러 경찰서로 향했다.하지만 경찰서에 도착한 후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한껏 예쁘게 꾸민 채 대기실에 앉아 있는 이지원과 그녀의 친구, 하예솔이었다.이지원도 박민정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기선제압을 했다.“민정 씨, 나 미워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하랑아, 걱정하지 마. 내가 내일 너 데리러 올게.”박민정이 분명 유남준을 찾아갈 걸 알기에 조하랑이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민정아, 굳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마. 여기서 7일 동안 있는 것쯤이야. 두렵지도 않은데, 뭘.”“괜찮아.”박민정이 경찰서를 나선 후 택시를 탔다.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바로 소셜 미디어에 올린 이지원의 글이 보였다.[결백한 자는 해명하지 않아도 결백하다.]‘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네.’박민정은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휴대폰을 꽉 잡았다.그녀는 먼저 회사로 향했다.하지만 비서에게 들은 바로 유남준은 CEO를 한 명 고용한 후 계속 집에서 쉬고 있다고 한다.‘집에서 쉬고 있다고? 처음 듣는 얘기네.’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또 택시를 타고 두원 별장으로 향했다.두원 별장에 도착한 후.경비원은 그녀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녀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큼지막한 별장 밖은 유난히 고요했다. 주변의 경치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박민정이 입구에 들어서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지문을 사용해 문을 열었다. 사실 자신의 지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의아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가자 바닥에 누워 있는 유남준을 발견했다.방금 난 소리는 그가 소파에서 떨어져서 난 소리였다.그리고 집 안에는 옅은 담배 냄새가 남아 있었다.“유 대표님.”박민정은 유남준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괴로운 듯 미간을 구긴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이마에는 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유 대표님...”그녀는 몸을 웅크려 앉아 유남준의 이마에 손을 올렸는데 그의 이마가 뜨겁게 느껴졌다.유남준은 열이 나고 있었다.차가운 그녀의 터치에 유남준은 잠깐의 편안함을 느꼈다.하지만 박민정이 손을 떼려 하자 유남준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 때문에 박민정은 하마터면 그의 몸에 넘어질
박민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유남준이 잠잠해진 후였다.그의 이마를 만져보니 조금 전보다 더 뜨거워진 상태라 박민정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구급상자를 가지러 갔다.구급상자는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약품의 유통기한이 모두 지났다. 다른 비상약도 없어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낸 후 천에 꼭 싸고는 그의 이마에 올렸다.그리고 곧바로 인터넷으로 약을 주문했다.유남준에게 약을 먹일 때 그는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 꿀을 조금 섞은 후에야 그는 겨우 약을 목구멍에 넘겼다. 밖에서는 카리스마 있고 위풍당당한 유남준이 쓴 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을 줄은 누가 알겠는가?박민정은 유남준을 소파로 옮기고 싶었지만 그는 워낙 무거웠고, 또 그녀에게도 힘이 남아돌지 않았으니 그를 그대로 바닥에 뒀다. 그래서 에어컨 온도를 높인 후, 그에게 얇은 담요까지 덮어줬다.한참을 고생했으니 어느덧 그녀도 소파에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노을빛이 얼굴에 비치자 유남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팔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자 소파에 엎드려 잠이 든 박민정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자기 몸에 덮인 담요와 옆에 놓인 젖은 수건, 그리고 약을 멍하니 바라봤다.유남준은 살며시 담요를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그때 머리가 핑 돌았다.‘내가 이렇게 심각하게 아팠었나?’“드디어 깼어요?”인기척에 박민정도 잠에서 깼다.유남준은 벌써 정신을 차렸고, 또 큰 문제가 없어 보이니 박민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오늘 내가 대표님 간호했잖아요. 그걸 봐서라도 하랑이 풀어줘요. 하랑이는 나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하랑이 대신 이지원 씨에게 사과할게요. 죄송해요.”유남준은 막 잠에서 깨었는지라 정신이 없어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아이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라니.”“하랑 씨는 왜?”박민정이 설명했다.“인터넷에서 이지원 씨가
박민정이 흠칫했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소파에 앉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몸이 많이 불편해서 그러는데, 남아서 나 간호해 줘.”“내가 간호해 주면 하랑이를 풀어줄 거예요?”“응.”유남준의 잠긴 목소리는 유난히 감미롭게 들렸다.“알겠어요.”박민정도 어차피 유남준에게 접근하려던 참이었으니 그의 제의에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유남준은 위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어젯밤에 에스토니아로 출국한 후로 지금까지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말이다.“아직 요리하는 거 까먹은 건 아니지? 나 배고파.”“배달 음식을 주문할게요.”박민정이 휴대폰을 꺼내 주문하려던 참에 유남준이 미간을 구긴 채 그녀를 말렸다.“당신이 만든 음식을 먹고 싶은데?”“요리하려면 적어도 한두 시간 걸려요.”박민정이 말했다.“기다릴 수 있어.”유남준은 그윽한 눈망울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에게서 한 시라도 눈을 떼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런 그의 눈빛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그럼 지금 요리 시작할게요.”그녀의 늘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목구멍을 살짝 움직였다.주방은 마치 금방 인테리어를 끝낸 듯이 깨끗했다. 물론 냉장고도 새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내가 떠난 후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야?’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인터넷으로 식자재를 주문했다.유남준은 거실 소파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자의 소리를 들었다. 마치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간 듯했다.몸은 힘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법무팀 책임자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여론을 정리해 유남준에게 보고했다.이지원의 부정적인 여론을 보면서도 유남준은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면서 책임자에게 말했다.“조하랑 풀어줘.”그러고는 휴대폰을 껐다.이지원은 고영란의 생명 은인일 뿐, 그녀의 사생활에 관해서 유남준은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다만 주상 엔터테인먼트는 유앤케이 그룹 산하의 회
유남준은 박민정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라 더 이상 식사를 이어가려는 마음도 없었다.‘왜 예전에는 저렇게 말을 잘하는 걸 몰랐지?’어느덧 어둠이 찾아왔다. 암울한 하늘에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번개가 번쩍였다.휴대폰을 확인하자 시간은 벌써 저녁 8시였다.이때면 박민정은 보통 은정숙에게 연락해 예찬의 상황을 물어보곤 했다.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유남준이 어느샌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온 것이었다.“뭘 보고 있어?”박민정이 바로 휴대폰을 거두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남자의 얼굴색은 방금보다는 밝아졌지만 여전히 예리한 눈빛을 보였다.“식사 끝냈죠? 그럼 나 이만 가봐도 돼요?”“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 연지석에게서 연락이 온 거야?”유남준이 심드렁하게 물었다.‘이상하네, 왜 오늘 말끝마다 지석이 얘기를 꺼내지?’하필 이때, 박민정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힐끔 확인했는데 연지석에게서 걸려 온 전화라 박민정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유남준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5분 줄게. 전화 받고 바로 돌아와.”그 얘기를 듣고 박민정은 곧장 별장 밖으로 나갔다. 주위에 CCTV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민정아, 유남준이 윤우를 데려갔어.”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박민정은 그제야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남준 씨가 왜 윤우를 데려가? 윤우를 언제 발견했는데? 그럼 유남준 씨도 윤우의 신분을 알고 있어? 참. 예찬이는? 예찬이는 지금 어디 있어? 별일이 없는 거야?”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박민정은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유남준이 이렇게 빨리 윤우를 발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이쪽 일을 다 처리하고 바로 돌아갈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침착함을 유지하는 거야. 유남준은 윤우의 정체를 아직 모를 거야. 알았다고 해도 자기 아들이니 윤우를 해치진 않을 거니까 겁먹지 마.”하지만 박민정은
“나 갖고 노는 거 재밌어? 연지석이 그러라고 가르쳤어?”눈가가 빨개진 유남준이 차갑게 물었다.밖에는 큰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잇따라 귀를 찌르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박민정도 더는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하지 않았다.“나는 그저 과거를 잊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요.”유남준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면서 더 가까이 다가갔다.“과거를 잊는 방법이 죽는 척하는 거야? 내 기분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유남준의 다른 한 손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제야 그녀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내가 무서워?”박민정은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유남준 씨, 제발 아이를 돌려줘요. 유남준 씨가 아닌 지석이와 나의 아들이라고요. 제발 부탁이니까 내 아이를 돌려줘요.”박민정에게서 윤우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유남준은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내 기억이 맞다면, 당신은 우리가 이혼한 지 두 달도 안 되지 않았을 때 연지석에게로 가지 않았어? 그때 벌써 그 사람이 좋아졌던 거야?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서 죽은 척한 거였어? 그리고 내 아들은 어디에 있어?”눈시울이 붉어진 유남준은 박민정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주었다.박민정은 이러다가 손목이 부러져도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에게 윤우를 뺏길 고통과 비교한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내가 말했었잖아요.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고.”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박민정이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당신이 내 몸에 두 번째로 손을 댔을 때 난 이미 임신한 상태였어요. 아이를 죽인 건 남준 씨 본인이에요.”비겁하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도 박민정은 유남준이 죄책감 때문에 아이를 빨리 돌려주기를 바랐다.그녀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뭐라고?”그는 제대로 이성의 끈을 놓았다. 박민정을 침대로 밀어버리고는 그녀 위로 올라탔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광기 어린 눈빛의 유남
유남준은 박씨 가문에 의해 사기 결혼을 당한 것 외에도, 박민정이 죽은 척하고 연지석과 외국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낸 사실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다.박민정은 고통에 잠겼다.“그때 일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해요?”“하지만 당신도 이득을 봤잖아, 아니야?”유남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그는 오로지 사기 결혼 때문에 죄책감을 가진 박민정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를 더 답답하게 만든 건 박민정이 죽은 척 사라진 일에 대해, 그리고 연지석과 아이의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박민정은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렇게 한참 동안의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유남준은 홀로 베란다로 가고는 담뱃불을 지폈다.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기침이 끊이질 않았다. 눈시울은 어느샌가 붉어져 당장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유남준도 자신이 왜 이런 방법을 선택해 박민정을 곁에 남겨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분노 때문이었다.박민정을 거의 5년 동안 찾아다녔는데 결국 그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다.그리고 10년 넘게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가 갑자기 사랑이 식었다며 떠나려 했는데 분노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지금까지도 유남준은 박민정이 처음 이혼 얘기를 꺼낸 후 소탈하게 자리를 뜨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그때 유남준은 박민정이 정말 손을 놓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이혼을 결정한 건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 오랜 계획 끝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유남준은 담뱃불을 끄고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밖에 있던 냉기도 덤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가자, 집에 가자.”집이라...박민정은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나에게 집이 있나?’차에 올라탄 후.유남준은 운전하면서도 계속 기침했다.박민정은 그런 기침 소리를 신경 쓰지도 않은 듯 하염없이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만을 바라봤다.사랑하지 않으니 작은 관심마저 베풀려 하지 않은 게 아닐까?유남준이 백미러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