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훈은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당당하게 뱉은 말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다.결국 유지훈은 몰래 박예찬을 데리고 으슥한 길로 가서 유남우가 사는 곳 옆문으로 들어갔다.이곳까지 온 유지훈은 심장이 쫄깃쫄깃해졌다.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있었다.“봤지? 이게 바로 삼촌의 집이야.”박예찬은 동쪽에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그 방은 아주 기둥이 금색 테로 되어있을 정도로 인테리어가 화려했다. 박예찬은 갑자기 배를 그러안고 말했다.“아이고, 배가 아프네. 안 되겠어. 나 화장실 좀 갈게.”말을 마친 박예찬은 유지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동쪽으로 달려갔다.유지훈은 조급해졌다.“그쪽으로 가면 안 돼. 거긴 삼촌이 있는 곳이야!”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한 여자 고용인이 나왔다.그녀는 유지훈을 보더니 바로 꾸짖었다.“유지훈 도련님,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유 대표님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으니 얼른 가세요. 그렇지 않으면 유 대표님께 연락할 거예요.”유지훈은 이미 박예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이 정말 유남준을 불러올까 봐 걱정된 유지훈은 얼른 꽁무니를 뺐다.그러면서 고용인에게 메롱 하고 도망갔다.“기다려. 감히 날 교육하려고 들다니, 나중에 내가 크면 널 해고할 거야!”여자 고용인은 그저 피식 웃었다.이제 4, 5살밖에 안 되는 유지훈이 다 크면 그녀는 진작 퇴직했을 것이다.고용인은 돌아가서 계속 집안일을 했다. 이미 누군가가 유남준의 침실에 잠입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유남준이 사는 곳은 어두운 색조의 인테리어였는데 유남준 본인처럼 차갑고 딱딱했다.박예찬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뒤적였다. 이곳에서 유남준이나 유남준 대역의 약점을 찾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나가려고 할 때, 아래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박예찬은 얼른 책상 뒤에 숨었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박예찬은 한 남자가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는 것을 쳐다보았다.박예찬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돌아
“이모, 왜 노크 안해?”박예찬은 삐진 얼굴로 얘기했다.“아, 미안해. 까먹었어.”조하랑이 앞으로 다가왔다.“예찬아, 나랑 했던 약속 기억나?”박예찬은 한숨을 내쉬었다.“당연하지. 이모 아들인 척 하고 전남친한데 복수하는 거잖아. 복수는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필요하면 이모 남편까지 찾아줄 수 있어.”조하랑은 눈을 크게 뜨고 얘기했다.“정말?”박예찬은 조하랑이 정말 믿을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 가슴을 두드리면서 얘기했다.“당연하지. 그 사람은 당연히 이모 전 남자 친구보다 훨씬 나은 사람일 거야.”“돈은 얼마나 드는데?”조하랑이 진지하게 물었다.강연우보다 잘생긴 사람이라면 섭외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어린 박예찬이 이렇게 많은 일을 알고 있다니, 조하랑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그건 상관할 필요 없어. 잘 거야. 잘자.”박예찬은 침대에 누워 이불로 머리를 덮었다.조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모의 희망은 다 너한테 걸려있어. 다음 주면 결혼한댔으니까.”그녀는 중얼거리면서 떠났다.조하랑이 떠난 후, 박예찬은 약간 난감해했다. 조하랑의 말을 들었을 때, 강연우는 아주 잘생긴 사람이라고 한다. 얼마나 잘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조하랑의 안목을 보면 외모가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따로 시간을 빼서 사람을 찾아봐야겠어.’...신림현.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은정숙의 몸 상태도 점점 나빠졌다. 박민정이 할 수 있는 건 그런 은정숙의 곁을 지키는 것뿐이다.은정숙은 박민정이 걱정되어 갑자기 얘기했다.“민정아, 서산의 물만두가 먹고 싶네.”“네, 지금 당장 배달시킬게요.”박민정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은정숙은 그런 그녀를 말리면서 얘기했다.“배달을 시키면 다 식잖아. 가서 사 와주면 안돼?”은정숙은 박민정에게 부탁하는 일이 드물었다.박민정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금 당장 갈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남준 씨한테 얘기해요.”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얘기했다.“응, 알았어.”박민정을 보낸 후 은정숙의
은정숙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즉시 주방에서 걸어 나갔다.쿵!나가면서 팔이 찬장에 부딪혀 큰 소리가 났고 위에 가득 진열되어 있던 양념통들이 거의 전부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그중 하나는 유남준의 손등 위로 떨어져 매끈하고 새하얀 손에 퍼런 멍이 들었다. 유남준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요 며칠 그는 집안의 물건 위치를 전부 머릿속에 기억했으나 가끔 물품 위치가 변하기도 했다.그리하여 집밖에 나가기 전까지 그는 또 의자와 테이블 등 몇 군데에 부딪히고 말았다.서다희한테 전화를 걸어 당장 운전하여 오라고 했다.그를 기다리는 동안 유남준은 정상인과 눈먼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게 되었다.만약 눈이 보였다면 그는 진작에 차를 몰고 박민정을 찾아갔겠지만 지금은 서다희가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사는 곳이 여기랑 가까워 5, 6분 정도 되자 서다희가 도착했다.서다희는 멀리서부터 유남준이 눈이 덮인 길목에 서있는 걸 보았다. 박민정한테 쫓겨난 줄로 알고 우산을 가질 새도 없이 급히 유남준한테로 뛰어갔다.“대표님, 왜 이러고 계세요?”유남준은 전화로 다른 얘기는 없고 빨리 오라고만 했다.“차 몰고 서산에 있는 한 만둣집으로 가.”“네.”신림현 서산에는 만둣집이 하나밖에 없는데 장사가 너무 잘 되다 보니 줄을 한참을 서야 살 수 있었다.만둣집에 도착한 후 박민정은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손님한테 마련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긴 코트를 입은 사람이 그녀 앞에 섰다.“민정아.”고개를 드니 연지석의 연예인 뺨치는 준수한 외모가 눈 안에 들어왔다.“지석아, 너 왜 여기 있어?”“네가 아주머니더러 나한테 전화해서 여기 만두가 맛있다고 얘기하라 한 게 아니었어?”연지석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목구멍이 턱 막혔다.은정숙이 만두가 먹고 싶어 그녀를 심부름 보낸 게 아니라 연지석과 이어주려고 그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그러나 또 연지석이 난감해할까 봐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는 말을 차마 꺼내
만둣집 앞.박민정은 연지석이 그의 얼굴로 가져간 손을 급히 거둬들이며 말했다.“그건 다 어려서 철없을때 얘기지.”고작 몇 살밖에 안 됐을 때인데 남녀유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그리고 그때 연지석은 그녀보다도 더 키가 작은 똥똥이였다. 자연스레 그를 동생으로 생각해 은정숙이 맛있는 것을 할 때마다 그한테 갖다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훌쩍 커서 한참은 올려다봐야 하는 키에 재탄생한 것과 다름없는 준수한 외모,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온몸에서 서늘하고 도도한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한테 누가 감히 찬 손을 얼굴에 갖다 대며 장난을 치겠는가.그녀의 정중하고도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연지석의 깊은 눈동자에 낙담과 쓸쓸함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내 앞에서 넌 철 들 필요 없는데.”어릴 적 겨울날에 그가 추위에 덜덜 떨고 있을 때, 그녀가 남몰래 옷과 이불과 먹을 것을 그한테 가져다주기도 하고 개구쟁이 장난을 치며 웃게 만들었던 기억이 그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거나 아사, 동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때 박민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우린 철 드는 걸 배워야 해. 너무 천진하고 철 없으면 남한테 미움받을 수도 있어.”예전에 성숙하지 못하고 철이 없었던 탓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시집을 가서 괜한 미움을 받게 되었다.연지석은 갑자기 너무 후회스러웠다. 신림현을 떠날 때 그녀를 데리고 같이 가거나, 그녀가 결혼 전에 다시 찾아왔더라면...조금 더 일찍 만나 유남준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찾아 데리고 떠났더라면 그녀가 지금처럼 조심스러워하고 전전긍긍하지 않았을 텐데.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가까이 다가서며 불현듯 마음속에 늘 감춰뒀던 그 한마디를 꺼냈다.“민정아, 우리...”앞으로 같이 있자...뒤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익숙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여보!”소리를 따라가 보니 유남준과 서다희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서다희는 잡아먹을 듯한
박민정은 더 세게 유남준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입 좀 다물어요. 말 안 해도 당신 벙어리라 생각 안 하니까.”하지만 유남준은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얘기했다.“연지석 씨, 미안한데 저녁에 저랑 제 와이프가 부부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해서, 집에 식사 초대는 못 하겠네요.”부부가... 해야 할 일?연지석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유남준이 일부러 화를 돋구려고 하는 얘기인지는 알겠지만 그도 불끈불끈 솟아나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조금 떨어져 서있던 서다희는 처음에 눈도 안 보이는 유남준이 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속으로 안도하였다.주변에 줄을 서있던 사람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듯이 이쪽을 힐끔거렸다.초반에는 박민정과 연지석이 커플인 줄 알았는데, 이제야 그게 아니고 유남준이 남편이라는 걸 알게 됐다.차례가 되어 만두를 살 때까지 주변의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박민정은 약속했던 대로 연지석한테 만두 1인분을 사주고는 말했다.“난 먼저 돌아갈게.”“그래, 다음에 봐.”연지석은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서다희는 자신의 차에 타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그녀가 몰고 온 차에 함께 탔다.갓 사 온 만두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차내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박민정은 서둘러 운전하지 않고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유남준의 손부터 거칠게 뿌리쳤다.“뭐예요, 대체?”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손이 내쳐진 채로 유남준은 말없이 앉아있었다.그 모습을 보니 박민정은 더 괘씸하고 화가 났다.“갑자기 왜 찾아왔어요? 부부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건 또 뭐예요? 누가 당신이랑 그런 일 한댔어요?”유남준은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지만 뭔가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말해 봐요, 어서! 아까는 말하지 말래도 잘만 하더니만!”박민정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그때 강력한 힘이 그녀를 품
짙은 어둠이 깔렸다.박민정은 은정숙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등 뒤로부터 한 손이 뻗어와 그녀를 감싸안았다.“민정아.”유남준이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한 손으로 그녀를 꼭 끌어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뭐 하는 거예요, 남준 씨?!”아무리 기억을 상실했다 해도 남몰래 방에 들어오는 개 버릇은 어디 가지 않나 보다.유남준도 원래 임신한 여자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임신초기라 더 조심해야 할 때였다.하지만 오늘 그녀가 연지석을 따로 만난 것과 서다희가 해준 말을 생각만 하면...그의 얇은 입술이 그녀 귓불에 닿았다. 귓속을 파고드는 뜨거운 입김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감히 하기만 해봐요!”박민정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큰 소리가 나왔다. 이윽고 그녀는 옆방에서 자고 있는 은정숙이 듣게 될까 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유남준은 옷도 입고 오지 않았다.방안에는 조명을 켜지 않았지만 달빛이 눈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방안을 비추었다. 그 빛을 빌어 유남준의 탄탄하고도 건장한 상체를 볼 수 있었다.“당장... 꺼져요, 여기서.”박민정은 너무 놀라서 목소리마저 미세하게 떨렸다.그러자 유남준이 윗몸을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하고 싶을 땐 조용히 나한테 말해. 다른 남자 찾지 말고.”“나가요, 어서!”박민정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폭 덮어쓰고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렸다.그가 방에서 나가기 전, 그녀는 그의 허리에 있는 자신이 꼬집어서 남긴 시퍼런 멍을 발견했다.전에 박민정은 유남준이 기억을 잃은 데다가 시력까지 잃었으니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대로 그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는 기억을 잃기 전보다 더 다루기 힘들었다.기억을 상실하기 전의 그는 항상 오만불손한 자세로 높은 위치에서 남에게 은덕을 베푸는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지금의 그는 아무리 내쳐도 들러붙는 뻔뻔한 거머리와도 같았다.유남준이 다시 돌아
훈계하듯이 유남준을 한바탕 혼내고 나서야 박민정은 집을 나섰다.유남준은 그녀가 꾸짖어도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다만 그 유별나게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애꿎게 바라볼 뿐이었다.그의 눈이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흠칫하며 당황했다....병실 안.윤우는 형으로부터 저들의 쓰레기 아빠가 지금 엄마랑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 전 교통사고로 눈도 멀었고, 현재는 다른 사람이 그의 신분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그 사람은 그리 당해도 싸.”윤우가 분에 겨운 말투로 말하자 그와 전화를 하고 있는 예찬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맞아. 이런 게 인과응보라는 거지.”“그런데 우리 손으로 그렇게 만들지 못한 것이 좀 아쉽네.”윤우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나 예찬한테 얘기했다.“형, 오늘 지석 삼촌이랑 엄마가 함께 나를 보러 온다고 했어. 내가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은데 형 생각은 어때?”연지석이 박민정을 어떻게 대하는지 해외에서 그들 두 형제는 똑똑히 봐왔다.연지석은 그 쓰레기 아빠와는 달랐다. 갑자기 무슨 전 여자친구가 튀어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박민정과 소꿉친구이기까지도 하니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윤우는 은정숙도 연지석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그러나 전화기 저편의 박예찬은 말없이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가 그러길 원할까?”“엄마도 지석 삼촌 좋아할 거야. 그냥 부끄러워서 얘기 안 하는 것뿐이지. 걱정 마, 내가 오늘 두 사람 관계를 명확히 하게 해주려니까.”윤우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알았어.”전화를 끊고 나서 윤우는 침대에서 지루한 시간을 버텨내며 연지석과 박민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점심 때가 되어 그들이 앞뒤로 병실을 걸어 들어오자 윤우는 득달같이 애교를 부렸다.“엄마, 윤우도 엄마랑 같이 집에 있으면 안 돼? 여기서 혼자 너무 외로워. 엄마도 보고 싶고, 형이랑 할머니도 보고 싶어..
하얀 눈을 밟으며 걸어가는 세 사람의 모습은 단란한 한 가족처럼 보였다.연지석한테 손을 잡힌 박민정은 손바닥에서 땀이 삐질삐질 났다.드디어 레스토랑에 도착해 밥 먹을 때가 되어서야 연지석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윤우는 두 사람한테 단둘이 지낼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웨이터에게 화장실로 데려가달라고 했다.윤우가 떠나자마자 박민정은 즉시 사과를 건넸다.“정말 미안해. 윤우가 한 번도 아빠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결혼도 안 했는데 남한테 아빠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 나쁠 수가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연지석은 개의치 않았다.“난 윤우가 저러는 게 좋은데.”박민정은 그제야 안심했다. 윤우의 얘기가 일단락되자 연지석은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너랑 유남준이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말이 튀어나오고 나서 그는 금방 후회했다. 그는 이런 걸 물을 자격이 없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말을 깊게 생각 안 하고, 전에 이혼하기 위해 법정에서 바람났다고 하며 유남준을 위협했던 일과 고영란이 자기를 협박했다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누구랑 바람 나?”연지석은 요점을 꼬집어 물었다.박민정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귀까지 빨개졌다.“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어. 유남준은 너랑 인 줄로 알 거야.”너무 긴장하여 저도 몰래 테이블에 놓인 손끝을 살짝 그러쥐었다. 연지석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눈가엔 감출 수 없는 빛이 반짝였다.“그거 잘됐네. 마침 그 핑계로 오늘 윤우 아빠 노릇 톡톡히 할 수 있겠어.”화제를 더 이어나가기 부끄러운 박민정은 벌떡 일어섰다.“윤우가 왜 아직도 안 돌아오지? 내가 한 번 가서 찾아봐야겠다.”윤우는 계속 문어귀에 숨어 있었다. 둘의 대화가 끝나가는 걸 보자 그는 화장실에 갔다 오는 척하며 걸어왔다.“아빠, 엄마. 나 돌아왔어.”아이가 있으니 분위기가 다시금 훈훈해졌다.식사를 마치자 윤우는 또 게임 센터에 가자고 졸랐다.게임 센터에는 젊은 커플들도 꽤 많고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