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랑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민정아, 사실 생각해봤는데, 예전에는 사실 네가 사람을 잘못 알고 유남준을 유남우로 생각했잖아. 그래서 그가 널 사랑하지 않는 쓰레기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지.”"이렇게 보면 그는 너와 전혀 모르는 사이나 다름 없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보는게 맞겠지.”"딱 한 가지 나쁜 게 있다면 네 어머니와 동생이 잘못한 걸 네 탓으로 돌린 것 뿐인 것 같은데.”"결국엔 그냥 자존심이 너무 센 짠돌이 정도지, 쓰레기까지는 아닌 것 같아.”여기까지 생각한 조하랑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박민정도 대답했다."응, 알아.”그러나 조하랑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기억상실 외에도 눈이 멀었잖아. 민정아, 그와 함께 있으면 넌 아주 힘들어 질 거야.”장님이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게다가 상류사회에서 태어났으니 험한 일을 하려고 하지도 않겠지.이런 생각을 하자 조하랑은 다시 걱정이 되었다."민정아, 그 얼굴에 눈이 멀어서는 안돼. 그 사람보다는 연지석 씨가 나은 것 같은데.”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입장의 변화에도 박민정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게 모두 조하랑이 자신을 걱정해서라는 것을 알았다."왜 또 지석이 얘기야, 저번에 지석이가 나한테 말했어, 우리는 그저 친구라고. 나도 걔한테는 안 어울리고.”조하랑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할 때, 도우미가 와서 밥을 먹으라고 전했다.그녀는 황급히 전화를 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를 개인적으로 만나 얘기를 해 그가 알아서 물러서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사람이 박민정과 두 아이를 방해하게 둬서는 안됐다.박민정도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돌아섰을 때, 그녀는 유남준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유남준은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얇은 입술을 약간 벌렸다.”밥 먹으러 가자.”"그래요.""일부러 전화하는 걸 들은 건 아니야."유남준이 말하자 박민정이 약간 웃었
”하랑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할아버지는 그저 너라는 사람을 좋게 본거니까. 너와 인우 사이에 아이가 없어도 할아버지는 너를 손자며느리로 인정해."김훈이 말했다.조하랑은 여태껏 이렇게 누군가에게서 인정받은 적이 없었기에 감동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이러고 보니 사실 김씨 집안으로 시집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김인우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고부갈등도 없고, 유일한 할아버지께서는 그녀를 이렇게 잘 대해주시니."할아버지한테는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단다.”내친김에 조하랑은 계속 생각하고 있던 일을 말했다."할아버지, 내일 제 친구를 만나러 가도 될까요?”"물론이지. 하지만 예찬이는 남겨 놓고 가야 한다. 친척들이랑 만나기로 약속했거든. 다들 똑똑한 증손자 얼굴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왔어.”"알겠어요."마침 조하랑도 유남준과 두 사람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이튿날.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정말로 유씨네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고영란은 원래 두 사람이 본가에 온 틈을 타서 박민정을 혼내려 했지만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유남우는 아침을 먹고 윤소현과 고영란에게 일하러 가겠다고 인사했다.이를 본 윤소현이 말했다."오늘 설인데도 일을 해요?”"응, 요즘 회사 프로젝트 몇 개에 문제가 생겼어.”유남우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까만 눈동자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줘요.”고영란의 앞이었기에 윤소현은 잘 보이려 했다."응."유준우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나섰다.고영란이 흐뭇하게 윤소현을 보며 말했다. "소현아, 너도 남우가 회사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알지?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고 있어요.”"며칠 전 어머니께 호산 그룹과의 협업도 고려해 달라고 말씀드렸어요.”윤소현이 말하는 어머니는 바로 정수미였다.그 말을 들은 고영란은 윤소현이 더욱 좋아졌다.현재 유남우는 호산 그룹에서 불안정
조하랑은 차에서 내려 용기를 내어 유남준을 향해 걸어갔다."유남준 씨."유남준이 자리에 서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조하랑은 오는 길에 할 말을 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대뜸 이렇게 말했다."우리 민정이는 착하고 순수해요. 그 애가 최근 몇 달 동안 당신에게 그렇게 잘 대해준 이유는 당신이 기억을 잃고 눈이 멀었기 때문이지, 무슨 개똥같은 사랑 때문이 아니니까 오해마세요.”유남준은 약간 눈썹을 찡그렸다."그래서요?""민정이에게서 떠나세요, 귀찮게 굴지 말고요, 아시겠어요?”조하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용기를 내려 했다.유남준은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만약 제가 싫다고 하면요?”겨우 박민정에게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는데,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조하랑은 그 말에 멍해졌다. 기억을 잃은 후의 유남준은 여전히 상대하기 어려웠다."민정이가 당신이랑 함께 살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 앞이 안 보이잖아요. 자기 몸도 혼자서 돌볼 수 없는데, 어떻게 그 애와 그 애 아이까지 돌볼 수 있겠어요?”"설마 민정이더러 당신을 돌보라고 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 민정이 덕 볼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어요!”"그리고 당신은 기억을 잃어서 당신이 민정에게 한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난 다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은 단지 민정이가 난청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싫어했어요. 근데 지금 당신은 앞이 안보이는데, 왜 그렇게 뻔뻔하게 민정이에게 붙어있죠? 자신이 싫지 않아요?”조하랑은 욕설에 서툴렀기에 겨우 긴 말을 마치고 얼굴이 빨개졌다.과거 유남준이었다면 진작 화를 냈을 텐데, 지금 그는 그저 복잡한 눈을 할 뿐이었다."당신이 걱정하는 그 모든 일은 제가 해결할 겁니다. 전 결코 누구 덕을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어떻게 해결할 거죠? 민정이는 당신이 거액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던데요."조하랑의 말에 유남준은 잠시 멍해졌다. 그는 두 사람이 이렇게 사이가 좋을 줄은 몰랐다. 박민정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해준 모양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한테 잘해주래."유남준이 대답했다.그는 조하랑의 협박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자신과 조하랑 중 누가 박민정에 더 중요한지 확신하지 못했다.박민정은 어제 한 말이 조하랑을 불안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떡국 다 됐으니 먹으러 가요.”박민정은 조하랑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떡국을 먹으며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자신이 새로운 회사를 차렸다고 말했다.오늘 조하랑을 만나고 나서야 계속 가난한 척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이 거짓말도 천천히 풀어야 했다."어떤 회사요?"박민정이 물었다."무역."예전의 호산 그룹은 유남준이 대외무역이라는 노선을 추가한 후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처음 해외 사람들과 사업을 시작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했다.외국인들도, 본국 사람들도, 모두 그가 젊다는 이유로 괴롭혔다.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대놓고 그의 사업을 빼앗기도 하고, 심지어 싸움에 못 이기면 악랄한 수단을 써서 사람을 보내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기도 했다."자신 있어요?”유남준이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그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유남준의 젓가락을 든 손이 잠깐 굳었다."그럼.”뒤늦게 그는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다희도 다시 도와줄 거야.”“그럼 됐어요.”한편, 박윤우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못마땅해 했고 질투가 났다."엄마, 나도 커서 회사 차릴 수 있어.”사실 그는 줄곧 박민정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박민정이 알게 되면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박민정이 대답했다."그래, 앞으로 윤우는 꼭 사장님이 될 거야.”"응응." 박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어린애라 달래기가 쉬웠다.그들이 화기애애하게 떡국을 먹고 있을 때, 불청객이 뛰어들어 갑자기 도우미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여기 도자기를 놓고, 저쪽에 있는 꽃들을 치우고......”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연미복을 입은 노인이
유남준이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박민정이 가로막았다."그냥 바꾸라고 해요. 확실히 새해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는 것도 좋으니까요. 이 집사님, 어머님께 고맙다고 전해주세요.”말을 듣던 이 집사의 주름진 얼굴이 찡그려졌다."네."박윤우는 묵묵히 떡국을 먹고 있었지만 눈에는 한기가 가득했다.그의 외할머니가 막 감옥에 들어갔더니, 이제는 할머니가 또 와서 엄마를 괴롭히고 있다.안돼, 이번엔 엄마가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생각을 정리한 후, 박윤우가 젓가락을 놓았다. "엄마, 나 다 먹었어.”"나 산책 좀 해도 돼?”박민정이 동의했다. "그래, 엄마도 같이 가자.”"엄마, 설날 음식도 준비해야 한다며? 혼자 다녀올게, 금방 올게, 괜찮아."박윤우은 누가 봐도 꾀를 부리는 얼굴이었다."그럼 민기 삼촌이랑 같이 있을래?”박민정은 박윤우가 몰래 혼자 유씨네 저택으로 달려간 사건 이후 그를 혼자 두지 못했다.박윤우가 말했다. "엄마, 설인데 민기 삼촌한테 하루 좀 쉬라고 해.”박민정은 원래 정민기에게 집에 가서 쉬라고 제안했지만, 정민기는 그의 가족은 모두 죽었으니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내가 같이 있어줄게."그때,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박윤우가 거절하려 했지만 유남준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아니. 아니, 그게 아니...”박민정은 두 사람이 함께 나가는 것을 보았다.밖으로 나온 박윤우가 유남준을 향해 말했다."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 거에요? 놔줘요, 난 할 일이 있다고요.”유남준이 손바닥으로 그의 엉덩이를 치자 박윤우가 순간 태도를 바꿨다."흑흑, 아저씨 지금 나 때렸어요? 역시 새아버지가 생기니까 이런 대접을 받는 거겠지? 내 친아빠는... 흑흑...”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입을 막았다.“시끄러워.”이 자식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너무 짜증났을 것이다.박윤우는 그에게 입이 막힌 채 그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소리 없이
일단 박윤우를 돌려보내고 유남준은 고영란에게 전화해서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고 했다.아들의 쓴 소리를 거의 들을 일이 없었던 고영란은 화가 나서 박민정과 유남우의 일을 다시 꺼냈다."남준아, 너 비록 눈이 보이지 않고 기억을 잃었지만, 그래도 유씨 가문의 장손인데, 여자가 부족하겠어? 박민정처럼 도련님이나 탐내는 여자는 우리 유씨 집안에 들어올 자격이 없어.”"만약 두...”‘아이만 아니었다면...’고영란은 ‘아이’라는 두 글자를 말하지 않았다.아직 확실하게 조사하지 못해서 유남준에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누가 뭐라고 했어요?"유남준이 눈을 가늘게 뜨자 고영란이 움찔하며 약간 어설프게 말했다.“내가 박민정과 남우 두 사람이 붙어있는 걸 직접 봤어.”때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속여야 한다.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유남우의 손가락뼈가 약간 하얗게 질렸다."앞으로 그 얘기는 하지 마세요.”말이 끝나자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영란은 끊어진 전화를 보고는 미간을 부자연스럽게 찌푸렸다.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유남준은 여전히 그 여자를 믿고 있었다. 교통사고 후에 귀신에 홀린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안타깝게도 의사는 기억은 당장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만약 유남준이 기억을 회복했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고영란은 믿었다.......전화를 끊고 별장으로 돌아가려는 유남준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오빠."그는 걸음을 멈추었다.김인우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유남우에 의해 구출된 이지원이 다시 유남준 앞에 나타났다.그녀는 옅은 색의 모직 외투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얼굴빛이 창백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수척해 보였다."오빠...”이지원은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가 그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건드리자마자 유남준에 의해 뿌리쳐졌다.“꺼져.”이지원의 손이 허공에 굳어 있었다.유남준은 이 여자를 상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박민정의 신
"그래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줄게요."유남우가 말하자 이지원이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둘째 도련님, 제가 이 일을 성공시키면 다시 연예계에 복귀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로 약속한거 잊지 않으셨죠.”"물론이죠."이지원은 그제서야 자신의 계획을 유남우에게 몰래 알렸다.비록 계획의 내용은 악랄했지만, 이것으로 확실히 박민정을 단념시킬 수 있었기에 유남우는 동의했다.......유남준은 돌아와서 사람을 시켜 별장 밖의 감시카메라를 돌려보게 했는데, 역시 유남우가 차에 타 있었고 이지원과 접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유남준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가능한 한 빨리 이 동생을 해외로 쫓아내야 할 것 같았다.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눈이 보이지 않아 일하는 데 많은 불편함이 있었다.방 안.박민정은 섣달 그믐날의 음식을 모두 준비했다.저녁에는 살짝만 덥히기만 하면 된다.그녀는 박윤우가 혼자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너랑 남준 아저씨 같이 산책하러 나가지 않았어?”박윤우가 하품했다. "생각해보니까 그냥 쉬고 싶어요.”"그래, 윤우야. 가서 쉬어.”박민정은 박윤우가 또 몸이 안 좋은 줄 알고 대뜸 말했다.박윤우는 위층으로 갔고, 박민정은 유남준이 아직 돌아오지 않자 밖으로 나갔다.밖으로 나온 뒤, 그녀는 마침 그 낯익은 뒷모습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이지원을 똑똑히 기억한다.박민정은 손을 꼭 쥐고 그 자리에 섰다.유남준은 부하들의 전화를 끊고 나서야 박민정이 왔다는 걸 알아차리고 돌아섰다.“유남준 씨.”여자가 그의 이름 석자를 불렀다.유남준이 그 자리에 굳었다."민정아?”"밖이 추운데 왜 나왔어?"그는 소리를 따라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그는 유남준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을 보고는 예전처럼 모든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고 바로 털어놨다."이지원이 여긴 뭐하러 왔죠? 당신 아직도 그녀를 기억해요?”"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지 나도 몰라."유남준이 말했다.
박민정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올려다보고는 말했다."모르겠어요, 지금 당장은 그냥 두 아이를 잘 돌보고 싶어요.”그리고 박씨 집안의 물건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뱃속에 있는 두 아이가 태어나면 박윤우에게 수술을 시켜야 했다.유남준의 마음이 가라앉았다."당신이 안 괜찮다면, 우리 그냥..." 박민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말을 끊었다.“괜찮아.”괜찮냐고?어떻게 괜찮을 수 있을까.하지만 괜찮지 않다고 하면 그녀는 또 떠날 것이다.유남준은 이제껏 지금과 같은 약자의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뜨거운 호흡이 박민정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밖이 추우니 내가 방까지 안아줄게."그의 목소리가 약간 허스키했다.박민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혼자 갈 수 있어요.”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그리고 유남준이 느릿느릿 그녀의 뒤를 따랐다.분명히 눈이 내리고 있는데도 박민정은 전혀 춥지 않았다. 오늘 유남준은 줄곧 그녀의 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그가 지금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시각장애인 전용이었다.박민정이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아서 보고 있으면,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왔다.분명히 큰 소파인데 그가 억지로 자기 옆으로 붙어 앉아 있으니 공간이 매우 비좁은 것 같기도 했다."저 좀 밖에 나갔다 올게요.”박민정이 일어나자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같이 가.”“일 안 해요?”"설이라 일 안 해도 돼.”"그래요."옷을 갈아입으러 갔다가 내려온 박민정은, 유남준이 저번에 자기가 사준 밝은 색의 패딩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옷을 입으니 사람도 부드러워 보였다.그녀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골라준 옷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없었다."어때?”"좋아요."그녀가 사실대로 말했다.말을 마친 후, 그녀는 박윤우에게 두 시간 후에 돌아올 것이라는 쪽지를 남겼다.박윤우는 보통 낮잠에 들면 세 시간 정도 잔다.정민기도 요즘 일이 없어서 차로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민기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