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미의 질문에 윤소현은 순간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다.한수민 역시 윤소현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다.사실 그대로 말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하지만 윤소현은 붉어진 눈시울로 한수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어떻게 저를 그렇게 모함할 수 있어요?”“제 엄마는 제 친엄마이고 저를 지금까지 키워주신 분이에요. 저를 낳아주신 분이 누구든 저에게는 지금 이 엄마가 전부예요.”그 말에 정수미는 가슴이 따뜻해졌고 한수민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어릴 적부터 옆에서 챙겨주지 못하고 있어 주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말한다면 한수민은 그 어떠한 발언권도 없는 게 사실이다.하지만 한수민은 매년 자기 능력대로 윤소현을 만나러 갔었고 최선을 다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줬었다.몇 해 전 윤석후와 결혼을 했을 때도 전남편 집안에서 받은 폐백을 들고서 윤씨 가문으로 들어갔었다.다름이 아니라 바로 어릴 적부터 옆에 있어 주지 못했던 윤소현에게 보상하고 싶어서였다.“소현아, 사람 그러면 못 써. 내가 널 낳아준 엄마인데, 어떻게 엄마 앞에서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박민정에게 했었던 그 말들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는 한수민이다.하지만 윤소현은 그 어떠한 표정변 화도 없었다.“아주머니, 제발 거짓말 좀 그만하세요.”“우리 아빠한테 다른 아주머니가 생겨서 아주머니께서 지금 충격을 받으시고 이러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잘못을 한 사람은 우리 아빠이지 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저 좀 그만 괴롭히시면 안 돼요?”윤소현은 몹시나 억울한 모습으로 애원했다.“너! 너...”화가 치밀어 오른 한수민은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하얀색 환자복을 입은 한수민, 어느새 새빨간 피가 그녀의 하얀 바지를 물들어 버렸다.간병인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사모님, 괜찮으세요? 얼른 병원으로 돌아가요.”윤소현 역시 그 모습을 보고서 살짝 두려웠다.하지만 정수미는 그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뿌린 대로 거둔다더니.”한수민은 간병인의 옷을 꼭 잡고서
박민정을 보게 된 순간 정수미는 그녀가 홀로 칼을 들고서 자기한테 했었던 말들이 떠 올랐다.만약 윤소현만 아니었다면 정수미는 박민정이라는 사람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너 역시 구경하려고 온 거야?”정수미는 말하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구경 온 사람들은 회사 직원들이 아니라 회사 앞을 지나가고 있던 행인들이었다.“당연히 아니죠.”박민정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서 무엇인가 찾는 듯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덧붙였다.“아까 저기서 듣자 하니 증거가 필요하다면서요? 한수민 여사님이 윤소현 씨 생모라는 것에 관한 증거 말이에요.”윤소현은 순간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하지만 박민정은 그녀를 무시해 버리고 핸드폰에서 친자확인 보고서를 찾아 정수미에게 건네주었다.정수미는 지금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지만, 일단은 건네받았다.보고서에는 한수민과 윤소현이 모녀 관계가 확실하면서 적혀 있었다.윤소현 역시 다가와 들여다보았는데 믿어지지 않았다.“엄마, 이거 가짜일 거예요.”“제가 어떻게 저 사람 딸일 수 있단 말이에요.”할리우드 배우도 울고 갈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윤소현이다.옆에서 지켜보던 간병인은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윤소현 씨, 지난번에 사모님 뵈러 왔을 때, 직접 말하시는 거 제가 다 들었어요. 사모님이 윤소현 씨 친엄마라면서 돈을 요구하셨잖아요.”간병인은 원래 남의 집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자기 생모를 외면하고 오히려 짓밟고 있는 윤소현의 행동에 그럴 수 없었다.간병인까지 나서자 윤소현은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간병인 따위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서로 짜고 치면서 나 엿 먹이려고 하는 거 아니야? 너희들 다 명예 훼손죄로 감방에 처넣을 수도 있어.”그 말을 듣고서 간병인은 흠칫 놀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옆에 서 있던 정수미는 딸이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고서 어느 정도 답이 생겼다.어릴 적부터 윤소현을 직접 챙겨온 정수미는 그녀의 성격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멀리 서서 지켜보던 박민정은 한수민의 말을 듣고서 그 어떠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그때 간병인이 박민정을 불러세웠다.“민정 씨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낼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박민정이 아니었다면 한수민이 강제로 회사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것이라며 생각하고 있는 간병인이다.고마움을 표시하고 나서 간병인은 한수민의 옷깃을 당기며 그녀 역시 박민정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했으면 했다.한수민은 고개를 들어 박민정은 바라보았는데, 따뜻한 말이 아니라 심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나 이 꼴 된 거 보려고 온 거야? 직접 보니 어때? 마음에 들어?”박민정은 유난히 덤덤한 모습으로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네, 그러려고 온 거 맞는데, 이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네요.”한수민은 바로 발버둥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때리려고 했다.하지만 얼마 걷지도 못해 뒤로 넘어가려고 했고 간병인이 옆에서 간신히 잡았다.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한수민을 의사는 간신히 그녀를 염라대왕 손에서 빼앗아 왔다.“암세포 확산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보호자 분께서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의사가 말했다.그 말을 듣게 된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덤덤했던 눈빛은 마침내 흔들리기 시작했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나요?”의사는 박민정의 그 질문을 듣고 한수민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러한 질문을 한 줄 알았다.하지만 박민정은 지금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아직 얼마나 더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말이다.“한 석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석 달... 그건 너무 빨리 죽는 건데...’한수민이 한 짓에 비하면 석 달 살고 죽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 행복한 일이다.의사가 떠나고 나서 한수민은 다시 병실로 옮겨졌지만 깨어나지 않았다.아주 긴 시간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고 깨어날 수 없는 꿈까지 꾸었다.꿈에 박형식이 찾아와서 그녀가 한 짓에 대해
“엄마, 왜 이러시는 거예요?”윤소현은 마냥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윤소현, 나한테 거짓말하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덤덤한 모습으로 윤소현을 바라보며 정수미가 물었다.이 자료들을 보기 전까지 정수미는 자기가 직접 키운 딸을 믿으려고 했었다.하지만 지금 자랑으로 키운 딸이 실은 양털을 쓴 승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엄숙한 정수미의 모습을 보고서 윤소현은 부랴부랴 자료들을 훑어보았는데,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엄마, 이건 다...”‘가짜예요.’미처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사실대로 말해. 더 이상 나한테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그 말을 듣고서 윤소현은 거짓말을 삼켜버릴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풀썩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엄마, 죄송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바로 인정하는 윤소현을 보고서 정수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수민이 네 친엄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야?”윤소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저도 올해 들어서야 알게 된 거예요.”“엄마가 한수민 싫어하시는 거 제가 뻔히 알고 있는데, 엄마 화내실까 봐 그래서 숨긴 거예요.”윤소현은 또 거짓말을 했다.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이미 한수민이 자기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수미는 한수민을 싫어하고 있긴 했지만 윤소현이 한수민 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둘이 함께 자기를 속였다는 사실에 불쾌하고 언짢았다.정수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윤소현은 점점 더 불안하기만 했다.“엄마, 미안해요. 제발 저 용서 해주세요. 엄마가 싫어하실까 봐, 화내실까 봐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요.”“사실이 뭐든 전 시종일관 똑같아요. 저한테 엄마는 엄마뿐이고 다른 사람은 그냥 남이예요.”윤소현은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는 듯했다.양모인 정수미 역시 자기만의 욕심이 있다.윤소현의 말을 듣고서
사람의 정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모든 정력을 한수민에게 쏟아붓고 있어 박민정은 잠시 추경은을 상대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오고 나서 그녀는 박윤우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즐기고 나서 박윤우를 학교로 바래다주고 박민정은 회사로 가려고 했다.그때 추경은이 또 앞으로 막아섰다.“새언니, 남준 오빠 허락했어요?”“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다짜고짜 던진 추경은의 질문이 생뚱맞기만 했다.“유앤케이 그룹으로 가서 일하는 거 말이에요. 남준 오빠 따라서 유앤케이 그룹으로 가서 일하라고 이모가 그랬잖아요.”추경은은 멈칫거리다가 수줍어하며 덧붙였다.“그리고 저 역시 새언니랑 남준 오빠 비서로 일해도 된다고 약속했었잖아요.”박민정은 그제야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아니라 경은 씨 이모한테 물어보세요. 남준 씨랑 연락하지 않은 지 꽤 돼서 허락했는지 모르겠어요.”박민정이 말했다.추경은은 그 말을 듣고서 속으로 또다시 박민정을 욕했다.‘유앤케이 그룹이 직장인들에게 얼마나 꿈과 같은 존재인데, 하나도 조급해하지 않다니! 그러니까 평생 주부로 밖에 살지 못하는 거야.’“따로 볼 일 없으시면 저 그만 작곡하러 갈게요.”“네.”박민정이 떠나고 나서 추경은은 바로 고영란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앤케이 그룹으로 출근하는 것에 대해 유남준이 허락했는지 않았는지.“남준이 지금 아파. 회사로 출근한다고 한들 나중에 다시 얘기해야 할 것 같아.”고영란이 말했다.실은 어제 이미 유남준에게 물어보았으나 그가 거절해 버렸다.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다시 유남준을 설득할 생각이다.“알았어요.”“근데 그건 왜 물어?”고영란은 의문이 들었다.“그게... 새언니가 대신 좀 물어봐달라고 해서요. 집에만 있으니 답답해서 회사로 가고 싶나 봐요.”추경은이 대답했다.고영란은 그 말을 듣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럼, 그냥 오늘 회사로 출근하라고 해.’유남우도 말했듯이 유앤케이 그룹을 혼자 관리하는 건 너무
오피스룩으로 차려입은 홍주영은 빈틈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사모님, 추경은 씨, 안으로 안내해 드릴게요.”“네.”홍주영이 앞에서 안내라고 박민정과 추경은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안으로 들어간 추경은은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다른 사람에게 대하듯이 홍주영에게도 아첨을 떨었다.“우리 둘째 오빠 비서님이신 거죠? 너무 예쁘세요.”홍주영은 그 말을 듣고서 그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처음 만난 그때처럼 인사치레를 했다.“고맙습니다.”인싸나 다름이 없는 추경은은 홍주영의 퉁명스러움에 결코 얼굴이 빨개지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홍주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으니 말이다.“평소에 보통 어떤 업무들을 책임지고 계세요? 우리 둘째 오빠 스케줄을 책임지시나요? 앞으로 모르는 부분 있으면 물어봐도 될까요?”홍주영은 원래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으나 그 말을 듣고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추경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추경은 씨, 제가 무슨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마세요. 추경은 씨가 알아야 할 분야가 아니에요. 그리고 앞으로 추경은 씨는 사모님의 비서로 일할 것이니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직속 상사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세요.”순간 추경은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홍주영은 더 이상 그녀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박민정은 유남우의 전담 비서인 홍주영을 본 적이 있다.오늘 다시 만나보니 업무 능력이 뛰어날뿐더러 뻔뻔한 추경은이 한 마디도 못 하게 바로 입을 막아버리는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추경은은 박민정 곁으로 다시 돌아왔고 앞에 사람이 있든 없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새언니, 저 홍 비서님 말이에요, 사람이 도도 한 것이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아요.”소리를 최대한으로 낮추기는 했지만, 다들 밀폐된 공간 안에 있어 너무 잘 들렸다.보청기를 쓴 박민정도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니 홍주영은 더 말할 것도 없다.‘눈에 뵈는 게 없는 사
대표이사실 안에서.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부드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너 안 올 줄 알았어.”“세 시간만 일하고 많이 배울 수 있는데 오지 않을 리가 없죠.”박민정은 사실대로 말했다.“얼른 앉아.”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뜻 다가갔다.직접 물 한 잔을 건네며 다시 입을 열었다.“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 예전처럼.”박민정은 다소 수줍어하면서 물 잔을 건네받았다.“고마워요.”이윽고 목을 좀 축이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앞으로 제가 뭘 책임져 야하는지 좀 설명해 줄 수 있어요?”“그럼.”두 사람은 그렇게 대표이사실 안에서 얘기를 한참 동안 주고받았다.홍주영도 자리를 떠나 홀로 남겨진 추경은은 기다리는 게 점점 지루해졌다.할 일도 없고 하여 추경은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서다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다희 오빠, 저 지금 새언니 따라서 회사로 왔는데, 여기 정말 너무 좋은 것 같아요.][남준 오빠랑 같이 지금 당장 돌아왔으면 좋겠어요.]한편, 해운 별장.서다희는 밀린 업무를 요즘 거의 이곳에서 완수하고 있다.그의 핸드폰이 자꾸 울리자, 유남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약혼녀야?”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경은 씨한테서 온 메시지예요.”“무슨 일인데?”왠지 모르게 이곳으로 오고 나서 유남준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만 같았고 박민정과 관련되는 소식이라면 그게 뭐든 궁금했다.서다희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바로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경은 씨 말로는 사모님과 함께 호산 그룹으로 출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모님 지금 둘째 도련님 비서로 일하고 계신답니다.”서다희는 유남준에게 사실을 알릴 용기가 없었다.전에 박민정이 유남우를 유남준으로 착각하고 좋아한 것에 대해서 말이다.지금 추경은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게 된 뒤, 두 사람 사이의 옛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그럼, 우리 사장님 너무 안쓰러운데...’“가지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가다니. 간이 배 밖으
서다희는 유남준이 내뱉고 있는 차가운 말들을 들으면서 흘러 넘겨 버렸다.말로만 할 뿐이지 행동으로 절대 옮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서다희는 추경은에게 옆에서 박민정을 잘 보살펴 주라면서 어떠한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면 바로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했다.[네.]추경은은 전과 달리 딱 한 글자만 답장했다.자기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둔 박민정이다.유남우 곁을 따라다니면서 중요한 회의의 기록 같은 것을 정리하면 된다.대표이사실에서 나오자마자 박민정은 누군가와 기쁘게 채팅을 나누고 있는 추경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기울이자 ‘다희 오빠’ 네 글자가 보였다.박민정은 그제야 두 사람이 커플 레스토랑에 가기로 한 일이 떠 올랐다.과연 옆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추경은이 박민정에게 말했다.“새언니, 저 오늘 집에 안 들어가요. 친구랑 밤새워 놀 거예요.”‘안 들어와? 친구랑 밤새워 놀아?’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방면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그래요. 안전에 조심하고요.”“걱정하지 마세요.”추경은은 말을 마치고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메이크업을 수정하기 시작했다.솔직히 말해서 그 어떤 여자든 자기 남자 친구 또는 약혼자가 다른 여자랑 단둘이 커플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가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추경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서다희가 마냥 이상하기만 했다.하지만 서다희의 약혼녀를 모르고 있으니 박민정은 간섭할 수 없었다.생각을 접어버리고 박민정은 고개를 숙인 채 유남우가 준 회사 회의 기록부를 펼쳐보았다.“어머, 또 졌어!”“바보들 아니야?”한쪽에서 게임을 하는 추경은의 시끄러운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업무에 집중하고 싶어도 그럴 수없어 박민정은 추경은에게 나가달라고 했다.“경은 씨, 나가서 게임을 하면 안 될까요?”임신하기 전에도 시끄러운 걸 싫어했었는데, 임신한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 옆에 있는 여자가 욕을 하면서 큰 소리로 게임을 하고 있으니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