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을 피우는 유남준의 모습에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알았어요. 아침 먹고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요.”“그래. 천천히 먹고 와.”유남준은 계속 고개를 푹 숙인 채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그의 곁으로 지나가던 박민정은 노트북 키보드에 빼곡하게 적힌 점자를 보고서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실명한 뒤로 유남준은 이어폰을 끼고 업무를 봐야만 했다.모든 서류를 음성으로 듣고 처리해야 하니 일반인들보다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박민정이 아침까지 먹고 난 뒤 유남준은 약속한 대로 회사까지 바래다주었다.호산 그룹 꼭 대기층에 이르렀을 때 거의 모든 직원의 시선이 박민정을 향해 있었다.순간 박민정은 자기 얼굴에 뭐라도 묻은 줄만 알았었다.그때 누군가가 박민정에게 물었다.“박 비서님, 혹시 퇴직 절차 밟으시려고 오신 거예요?”말을 건 사람은 바로 비서 청아였다.그 말에 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그게 무슨 말이죠? 퇴직 절차라니 도통 무슨 뜻인지...”청아 역시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이윽고 멀지 않은 곳에서 커피를 타고 있는 추경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경은 씨가 그러던데요. 박 비서님 최 대표님과 한 내기에서 지게 될까 봐 회사에 오지 못하고 있다고.”박민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그냥 늦잠 자서 좀 늦게 온 것뿐이에요.”“네?”청아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 나서야 오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이때 추경은이 다가와서 똑같이 물었다.“새언니, 퇴직하려고 온 거예요?”그런 추경은에게 박민정은 바로 따귀를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출근하러 온 거예요. 어머님께서 편한 대로 출근해도 된다고 한 거 잊었어요?”말하면서 박민정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이제 겨우 11시고 하루에 딱 서너 시간만 출근하면 되는데, 뭐가 잘못된 거죠?”추경은은 할 말이 없었다.단순히 늦잠을 자서 늦게 온 줄 모르고 추경은은 온통 박민정에게 골탕을 먹여 최현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새언니, 실은
호산 그룹 마케팅 5팀의 팀원들은 당분간 모두 박민정을 도와주게 되었다.박민정 밑으로 들어가기 전에 최현아는 마케팅 5팀의 책임자로서 회의도 열었었다.“당분간 같이 일하는 것뿐이니 너무 밭들이지 않아도 돼. 그리고 어디까지나 비서밖에 되지 않으니 너무 기어들어 가지도 마. 알았어?”팀원들은 당연히 최현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지는 말고.”최현아는 웃으면서 말했다.‘어디 감히 내 자리를 넘봐! 자기 주제도 모르고!’“네, 알겠습니다.”팀원들은 당분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에 좋기는 했지만 걱정도 들었다.“근데 언제까지 놀아줘야 하는 겁니까? 책임져야 할 식솔이 한둘이가 아니라 인셉티브가 필요해서 그럽니다. 한 달 임금으로는 턱 없이 부족한 세상이잖아요.”최현아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했다.박민정과 체결한 계약서에 계약 기간이 빠졌다는 것을 말이다.이윽고 최현아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박 비서님, 우리 팀 팀원들이 묻고 있어서 그래요.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팀원들이 허구한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따라다닐 수 없다고 하네요. 다들 마케팅으로 먹고 사는데 실적이 있어야 받는 돈도 많아지는 거잖아요.”팀원들 앞이라 최현아는 팀장다운 모습으로 존댓말까지 써가면서 물었다.박민정은 한창 땅의 주인과 주위의 각종 시설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었다.어느 정도 계획이 생긴 박민정은 바로 ‘계약 기간’을 정해주었다.“보름이요.”‘보름? 겨우 보름?’‘설마 IM 그룹 공급업체랑 아는 사이인가?’“안 됩니다. 보름은 너무 길고 딱 10일만 드립니다.”“10일이요?”‘그건 좀 너무 급한데...’“우리 팀에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데... 그 모든 팀원이 모여서 공급업체 하나 빼앗는데 정신을 몰두해야겠어요? 10일이면 충분하지 않아요?”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러기로 했다.“그래요.”속도만 좀 높이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최현아는 그제야 전화를
“앞으로 계속 그렇게 빈대처럼 지낼 것입니까?”박민정은 팀원들의 출근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반박하던 팀원들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돈은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고 버는 것입니다. 전 지금부터 10일 내로 반드시 마케팅 5팀의 책임자가 될 것입니다. 꼭 그렇게 약속드리겠습니다. 이번 달부터 돈을 벌고 싶으시면 열심히 일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떠한 도움도 필요 없으니 그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만 하면 됩니다. 귀찮게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입니다.”말을 마치고 박민정은 바로 그 사무실에서 나왔다.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팀원’들을 뒤로 한 채로 말이다.‘이게 다야?’‘도움이 필요 없다고?’‘10일 내로 팀장이 된다고? 허풍은...’‘보나 마나 유씨 가문 며느리 신분을 이용하려는 속셈인 것 같네.’마케팅 5팀의 사람들은 각자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박민정은 팀원들을 더 이상 엮지 않고 회사에서 딱 3시간만 일하고 퇴근했다.퇴근하려는 박민정을 보고서 추경은은 마냥 의문이 들었다.“새언니, 벌써 가려고요?”“네. 일찍 가려고요. 오늘 윤우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근데 이제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요?”“그래서요? 윤우한테 직접 저녁 해 주려고요.”박민정은 추경은을 흘겨보면서 말했다.순간 추경은은 말 문이 턱 막혀 버렸다.박민정이 공급업체를 찾으러 갈까 봐 바로 박민정 따라서 최근을 했다.그러나 유남준이 마중하러 왔고 두 사람은 과연 퇴근했던 것이었다.그 뒤로 이틀 동안 박민정은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갔다.음악 작업실에서 곡을 쓰지 않으면 박윤우의 저녁을 직접 챙기고 했었다.10일 밖에 시간이 없는데도 전혀 서두르지 않고 말이다.심지어 주말에는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추경은은 집에서 박민정네 일가족을 지키고 있었는데, 부럽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엄마, 지난번 캠핑한 뒤로 우리 나들이 간 지 오래됐어.”박윤우는 박민정이 말한 대로 물었다.“형도 함께 공원으로
박예찬이 당황해 마지 못할 때 박민정은 이미 만족한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하랑아, 오늘 윤우도 좀 봐줘.”조하랑은 마냥 이상하기만 했다.“급한 일 있다고 하더니 그게 뭔데? 뭐길래 이렇게까지 숨기는 거야?”“그냥 일이야. 주말에 해야 할 일.”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 조하랑에게 아직 말하기 난감했다.비록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조하랑은 더 이상 깊이 묻지 않았다.“너 임신한 몸이야. 그게 뭐든 꼭 조심하고.”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이윽고 박민정은 박윤우에게 말했다.“윤우야, 오늘 하랑 이모랑 형이랑 재밌게 놀고 있어. 말 잘 듣고.”박윤우 역시 의문이 들기는 매한가지였다.‘일 있으면 나 그냥 집에 놔주고 와도 되는데...’‘집에 있으면 하랑 이모 귀찮게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실은 박윤우를 집에 놔두면 추경은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자기와 함께 나오려고 할까 봐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말썽 피워도 형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자기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박윤우는 잘 알고 있다.평소에 박예찬을 괴롭힐 수 있으나 큰 일 앞에서는 반드시 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이때 박예찬도 덧붙였다.“엄마, 얼른 가서 일 봐. 내가 윤우 잘 지키고 있을게.”순간 조하랑은 약간 민망하기도 했다.자기보다 더 어른답고 성숙한 박세찬의 언행에 말이다.하물며 심씨 가문과 유씨 가문에서 보낸 경호원도 모두 근처에 있으니 아이들의 안전 문제는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다.“얼른 가.”조하랑이 말했다.“알았어.”박민정은 그제야 공원에서 나왔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민기에게 뒤따라오라고 했다.정민기가 있는 한 어디로 가든 그리 두렵지 않았다.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시간이 되면 무술도 배우고 경호원도 하라고 했었다.앞으로 언젠가는 그 역할을 발휘하게 될 날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다.정민기가 운전한 차를 타고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개간하지 않은 땅에 이르게 되었다.이곳은
“이건 뭐지?”가정부는 의문이 가득했다.집안에는 가정부 말고도 다른 도우미들도 적지 않다.결벽증이 다소 심한 유남준을 주인으로 모시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먼지 하나 만져낼 수 없게 청소하는 것이 그들의 원칙이다.그러한 환경 속에서 갑자기 하얀 가루가 나타나니 당황하고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가장부는 티슈로 그 하얀 가루를 깨끗이 닦아서 휴지통에 버렸다.한편, 추경은은 물 한 잔을 이미 유남준에게 건네주었다.“남준 오빠, 물 마셔.”물잔을 건네받은 유남준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로 마셨다.꿀꺽꿀꺽 거침없이 물을 들이마시고 있는 유남준을 바라보면서 추경은은 심장이 두근거렸다.거의 다 마시자 추경은은 바로 물잔을 도로 손에 넣었다.“컵 좀 씻고 올게. 물 더 마시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물잔에 증거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추경은은 바로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다.깨끗이 여러 번이나 씻고 또 씻고 나서야 원래 자리에 도로 올려 놓았다.가정부는 암암리의 추경은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았는데, 의문은 점점 더 짙어지게 되었다.전과 같았더라면 추경은은 손에 물을 대자마자 바로 가정부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었다.지금처럼 저렇게 세심하게 잔을 씻을 리가 없단 말이다.추경은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또다시 가정부와 눈이 마주치면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근데 오늘따라 왜 그렇게 깜짝깜짝 놀라는 거죠?”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사람처럼 말이다.추경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오늘 별일 없으면 나가서 좀 쉬세요. 여긴 내가 알아서 하면 돼요.”가정부가 계속 집 안에 있으면 유남준에게 손을 쓸 틈이 없게 되니 말이다.“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사모님께서 오늘 꼭 집에 있으라고 당부하셨어.’같은 여자로서 가정부는 박민정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비록 유남준은 세상 까칠하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명하고 돈도 많으니 많은 여자들이 어떻게든 무엇이라도 얻
옷을 야하게 입고 있는 추경은.지금 추경은은 유난히 낭패한 모습으로 유남준의 다리를 붙잡고 있다.“남준 오빠, 나 좋아하지 않아? 조금이라도.”가정부와 도우미들은 추경은의 말을 모두 똑똑히 듣게 되었다.그리고 가정부는 그제야 추경은이야말로 유남준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에게 손을 댄 적이 없는데, 이번 일로 그 원칙이 무너지고 말았다.한방에 추경은을 멀리 차 버렸으니 말이다.“꺼져!”이윽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던 그들에게 말했다.“의사 불러와.”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남준 역시 자기가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다....두원 별장 안은 그렇게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박민정은 지금 한창 땅 주인과 계약서를 체결하고 있었다.“IM 그룹에서 정말로 계약을 엎을까요?”“IM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회사를 합병하고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빼앗아 갔는지 아세요? 빌딩이나 세우고 랜드마크를 세울 돈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저 호산 그룹에서 온 거예요. 호산 그룹이 진주시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모릅니까?”남자 사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호산 그룹이야 당연히 믿죠. 다만 전에 IM 그룹과 계약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었는데, 땅을 그쪽에게 넘기면 IM 그룹에서 보복이라도 하면 어떡하죠?”“이쪽 바닥은 원래 그래요.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고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사장님 뒤에는 저희 회사가 지지하고 있을 거예요. 하물며 복수한다고 한들 그건 불법이잖아요.”“네! 그럼, 사인할게요.”그렇게 박민정은 IM 그룹의 프로젝트를 빼앗아 왔다.박민정은 꽤 운이 좋았던 편에 속한다.왜냐하면 오늘 이 사장은 IM 그룹과 최종 계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따라서 오늘 IM 그룹에서 하지 못한 서류까지 모두 받아내면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게끔 한발 앞서게 되었다.정민기 역시 박민정의 모습에 속으로
“사모님.”가정 의사였다.‘의사까지 왔단 말이야?’박민정은 슬슬 두려움이 밀려왔다.‘남준 씨가 또다시 기억을 잃은 걸까?’가정 의사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서 박민정은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서 있는 가정부와 도우미들, 소파에 앉아 있는 유남준, 그리고 야한 옷차림으로 처량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추경은이 보였다.그리고 추경은 앞에는 가정부가 모아둔 하얀 가루가 있었다.박민정이 온 것을 보고 추9경은은 울먹이면서 말했다.“새언니, 나랑 남준 오빠 사랑하게 해주세요.”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박민정이다.‘뭐? 뭘 해달라고?’비록 두 사람 사이에 혈연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대사가 영... 그러했다.‘제삼자는 넌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가정부와 도우미들 역시 당황해 마지 못했다.추경은은 박민정을 향해 벌벌 기어가면서 말했다.“새언니, 저 어릴 적부터 남준 오빠 좋아했었어요. 남준 오빠가 너무 좋아요... 좋아서 죽을 것 같다고요! 새언니가 이해하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다고요!”“새언니랑 남준 오빠 사이는 사랑이 아니라 그냥 가족 간의 정이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아이가 있어서 할 수 없어 같이 살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고요.”“새언니만 괜찮다고 하면 앞으로 윤우랑 세찬이한테 정말 잘할게요. 절대 구박도 하지 않고 새엄마 노릇 잘하면서 살게요.”“믿지 못하겠으면 앞으로 평생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절대 아이들의 상속권도 빼앗아 가지 않을게요.”박민정은 추경은이 뭐라고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뒤범벅이 되었다.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박윤우는 분노가 극으로 달했다.“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우리 엄마랑 아빠 엄청 사랑하거든요! 사랑못 받는 쪽은...”박민정은 박윤우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윤우야, 그만하고 먼저 방에 들어가 있어. 어디 아파서 그러는 걸 거야. 이모랑 방에서 놀고 있어.”이윽고 가정부는 바로 박윤우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박윤우가 가자마자 추경은은 엉엉
추경은은 이마에 피가 뚝뚝 떨어지면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싫... 싫어... 가기 싫어...”진심이었다. 만약 이래도 가게 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된다.박민정은 추경은이 이 정도까지 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자기한테 이렇게 독한 사람은 남에게도 더 독하게 굴 것이다.경호원은 다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유 대표님, 추경은 씨께서 많이 다치셨습니다.”“병원으로 데리고 가.”유남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인명피해까지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실은 그동안 추경은을 보내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네.”경호원 여러 명이 바로 다가가서 추경은을 데리고 나갔다.가는 내내 추경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중얼거렸다.“내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두원 별장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멀리 가고 나서야 두원 별장은 다시 조용해졌다.박민정은 자리를 찾아 앉아 유남준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괜찮아요? 병원에 갈래요?”혹시라도 그 약에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이된 것이었다.“아니야. 이미 확인해 보았고 별문제 없어.”박민정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럼, 됐어요. 어디 아프면 바로 말해줘요.”자기를 관심하고 있는 박민정의 말과 태도에 유남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려 바로 품으로 끌어안았다.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고서 다른 사람들은 바로 자리를 내주었다.거실에는 그렇게 박민정과 유남준 단둘이만 남게 되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의 귓가에 약간 불만한 어투로 중얼거렸다.“오늘 왜 나 혼자만 집에 남겨둔 거야?”박민정은 추경은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만히 두고 간 건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하랑이랑 만난다고 했었잖아요. 여자 둘만 만나는데 남준 씨가 따라가면 불편하잖아요.”박민정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하지만 유남준은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오늘 나랑 추경은 사이에 무슨 일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