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유롭고 담담한 모습으로 콧등 위에 안경을 걸친 채 렌즈 너머로 그녀를 응시했다.마치 이곳이 자기 집인 양 말이다.그 눈빛이 최수빈을 불편하게 만들었다.주예린은 거실 테이블 옆에서 숙제를 하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일어나며 말했다.“엄마...”지난번에는 엄마가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아빠가 ‘엄마 몸이 안 좋아서’라며 보양탕을 들고 왔다.원래는 국만 두고 가는 줄 알았는데 아빠가 그냥 자리에 앉아버렸다.주예린으로서는 쫓아낼 수도 없었다.최수빈은 신발을 갈아 신고 현관에서 거실로 걸어왔다.그리고 주예린을 보며 말했다.“숙제 다 했으면, 방에 들어가서 자.”주예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숙제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엄마와 아빠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자신에겐 들으면 안 되는 것임을 잘 알았다.주예린이 방에 들어간 뒤에야, 최수빈은 소파에 앉은 남자를 향해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주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미안해. 원래 오기 전에 연락했어야 했는데 전화했더니 네가 받질 않더군.”최수빈은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정말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있었다.가슴이 답답해지며 분노가 들끓었지만 어디로도 터져 나오지 못하는 듯했다.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우리 이미 이혼했어요. 내가 전화를 받든 안 받든 민혁 씨가 여기에 올 이유는 없다고요.”“국 다 먹으면 바로 나갈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할머니께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거든.”주민혁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렸다.“앞으로는 민혁 씨가 알아서 처리해요.”어떻게 이런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앉아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어제 천공 사람들을 빼내는 짓을 하고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앉아 있는 그였다.주민혁은 태연했다.“할머니께서 너 건강 챙기라고 보내신 거야. 주기적으로 검진도 할 거야.”“앞으로는 직접 신혼집에서 챙겨가.”이런 상황 자체가 최수빈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그녀는
송미연은 분노로 인해 가슴이 꽉 막히는 듯 답답했다.주민혁은 확실히 수법이 냉혹했다.그의 보복과 압박은 언제나 정밀하고 날카로워 상대의 급소를 정통으로 찔렀다.그때, 박하린이 구두 굽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걸어 나왔다.그녀는 육민성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을 붙잡지 못한 대가죠. 해를 끼치는 존재를 들여온 대가이기도 하고요. 육 대표님, 아직도 모르시겠어요?”‘해를 끼치는 존재’라는 말을 할 때, 그녀의 시선은 의도적으로 최수빈의 얼굴을 스쳤다.송미연은 팔짱을 낀 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감히 쫓아 나와 비아냥대다니...’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최수빈 앞을 막아서고 싸늘한 눈빛으로 박하린을 노려보았다.“남자 등에 업고 기어오른 년이 잘난 척은 다 하네. 네가 뭔데? 가진 것도 하나 없는 게. 남자 힘 아니었으면 누가 너 같은 걸 쳐다나 봤을까? 신세계 그룹이 아니었으면 천공 기술자들이 네 뒤 따라갔겠어? 맨날 스스로를 포장하면서 대단한 척하더니, 네가 연구계에서 뭘 해냈어? 성과가 있어? 이름이 있어?”송미연의 말은 차갑고 단호했다. 그녀 역시 상대의 치부를 정통으로 찔렀다.박하린이 해외에서 일정 성과를 거두고 귀국한 것은 사실이고 국내 항공기 개발에도 참여해 젊은 세대 중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긴 했다.하지만 육민성과 신세계 그룹에 비교하면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박하린의 표정이 굳었다.송미연은 비록 최수빈만큼의 위치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명문가 출신의 진짜 재벌가 딸이었다.박하린은 심호흡을 한 뒤,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배운 것 하나 없는 사람도 닭의 털을 깃발 삼아 휘두르던데, 남 일 신경 끄고 자기 회사 문제나 잘 챙기시죠.”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송미연 같은 금수저 아가씨가 뭘 알겠는가.천공에 투자해 고작 지분 갖고 있는 주제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다.업계 전체에서 최수빈은 여전히 ‘가장 뻔뻔한 사람’이라 불렸다.명예만 독차지할 뿐, 정작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박하
그들은 보았다. 식당 가장 안쪽 자리에 박하린과 주민혁, 그리고 천공 기술팀 소속 직원 두세 명이 함께 앉아 있었다.‘천공 기술팀 사람들이 왜 저 둘을 만나고 있는 거지?’뻔한 일이었다.주민혁이 박하린을 도와 사람을 빼내고 있는 것이다.넥스트 테크는 이제 막 문을 연 상태라 인재가 필요했다.박하린이 막대한 200억을 배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주민혁이 천공 사람들을 빼가려 드는 것이다.“우리가 박하린을 함정에 빠뜨려, 애지중지하는 여자가 200억을 물어내게 한 것에 대한 보복인가?”송미연이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은 그녀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다.육민성은 눈을 가늘게 뜨며 ‘꽤 흥미롭군’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송미연은 이를 갈며 말했다.“손목이 부러졌으면서도 삽질을 하네. 머리까지 깨져야 정신을 차릴 건가.”정말 역겨운 짓만 골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그대로 그쪽 테이블로 걸어갔다.박하린은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는 송미연을 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주민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다만 그 기술팀 직원 몇 명은 송미연을 보고 굳어 버렸다.송미연은 차갑게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나가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가요. 사직서는 지금 당장 내가 결재해 줄 테니까.”그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박하린과 주민혁을 향했다.“주 대표님, 박하린 씨, 최소한의 직업윤리도 없는 겁니까?”천공 기술팀 직원들은 난처해졌다.여기서 마주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원래는 원만하게 정리하려 했지만 이렇게 맞닥뜨린 이상 감출 길이 없다.그 뒤로 최수빈과 육민성이 다가왔다.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볼 뿐, 속내는 드러나지 않았다.천공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박하린은 두 팔을 끼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저희는 그저 식사 자리를 가진 것뿐인데 그게 어째서 직업윤리가 없다는 거죠?”‘뻔뻔하기 그지없군.’송미연은 그녀와 입씨름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역겨웠다.하여 곧장 기술팀 직
박하린은 결코 주민혁이 자신을 무능하다고 여기게 두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평생 남자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왔고 지금도 스스로 해결할 힘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민혁 오빠가 힘들면 도움을 청하라고 했어요.”박하린은 눈빛을 곧게 세우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 200억은 금방 메워 넣을 수 있을 거예요.”최수빈은 511연구원 프로젝트를 마친 뒤 잠시 시간을 내어 천공으로 향했다.예전만큼 바쁘지는 않았지만 남은 업무를 정리하는 건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다.데이터를 정리하고 있던 때, 육민성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박하린이 그 일억을 다 메웠대. 대신 이유강은 소환돼서 곧 구속될 거라던데.”“당연하죠.”최수빈은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민항기 재료에까지 부실을 저질렀으니 자업자득이에요.”육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네가 사전에 꼼꼼히 조사해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우리도 휘말렸을 거야.”최수빈은 손에 쥔 서류를 정리하며 담담히 답했다.“그럴 리 없어요. 우리가 협상하는 건 무조건 박하린이 가로챘으니까 피해는 애초에 우리 몫이 될 수 없었죠.”그때 마침 탕비실에서 나오던 송미연이 이야기를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주민혁은 참 호탕하네. 200억을 그냥 박하린한테 쥐여줬다면서?”최수빈은 놀랍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수천억도 단숨에 투자했던 사람이니 200억쯤은 대수로울 게 없었다.하지만 육민성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건 박하린이 직접 마련한 돈이래. 남자한테 기대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해결했대.”송미연은 들은 순간 역겨운 듯 목을 움찔하며 커피를 삼킬 뻔했다.“참, 능청은 기가 막히네. 의지할 땐 한없이 약한 척, 또 필요할 땐 강한 척... 그러니까 주민혁 같은 바보가 박하린이 더 불쌍하게 느껴지는 거겠지.”송미연의 말투는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오히려 최수빈은 그 직설에 웃음을 터뜨렸다.“확실히 보는 눈은 있네.”송미연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내 눈을
“수빈아, 곧 대회 본선이 시작된다지?”한재준이 가볍게 물으며 덧붙였다.“준비는 잘 돼 가고 있니? 필요하다면 내가 네 계획안을 함께 검토해 줄 수도 있어.”뜻밖의 제안에 최수빈은 잠시 놀랐다.“대회까지는 거의 준비가 끝났어요. 곧 노던아이 팀을 데리고 와서 선생님께 설명해 드리고 회의를 하고 싶어요. 그때 꼭 조언 부탁드릴게요.”이번 대회에서 세계 결승까지 진출하고 우승까지 한다면 곧장 본부 항공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설령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릴 기회였다.“좋아.”한재준의 눈빛에는 뚜렷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한재준은 젊은 세대가 이끌어 갈 미래를 누구보다 믿고 있었다. 국제 무대에서의 경쟁과 교류야말로 외국의 장단점을 제대로 파악할 기회이기도 했다.“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한재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게를 실었다.“연구라는 길은 멀고도 험해.”잠시 뜸을 들이던 한재준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무엇보다... 우리 업계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최고 설계자의 연봉이라 해도 기껏해야 억 단위 수준이지. 국가는 연구비를 지원하지만 늘 빠듯한 상황이야. 시간과 돈, 그리고 끝없는 노력을 쏟아야 하는 길이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더 큰 시련이고.”최수빈을 한참을 바라보던 한재준은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네가 지금처럼 연구를 이어가고 또 민성과 함께 회사도 키워간다면 특허 하나만으로도 큰 이익을 거둘 수 있어.”뜻밖의 말에 최수빈은 잠시 멍해졌다.선생님의 눈빛 속에서 오래 묵은 연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예전보다 더 깊어진 주름과 희끗한 머리칼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연구 현장을 지키고 있는 모습, 한재준이 괜히 돈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라는 걸 최수빈은 깨달았다.한때 자신이 연구를 접고 결혼을 선택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손가락질했다.“돈 때문에 재벌 가문으로 들어갔네.”“연구로는 먹고살기 힘드니까 결국 현실을 택한 거야.”그런 소문들이 여기저기 퍼져
최수빈은 지금 온전히 511연구원의 프로젝트와 논문에 집중해야 했다.게다가 곧 국제 우주 정착 설계 대회의 2차전이 시작될 예정이었다.지난번은 지역 예선이었고 이번에는 화국의 본선이었다. 여기서 통과하면 아시아 준결승이나 결승까지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최근 최수빈은 노던아이 팀과도 긴밀히 연락하며 본선을 준비하고 있었다.다음 날, 최수빈은 511연구원에 들어가 연구진과 함께 프로젝트를 논의했다.한창 연구가 이어지던 정오 무렵, 원금영의 전화가 걸려 왔다.“수빈아, 의사 말로는 네가 조금 저혈당에다 빈혈 기운이 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민혁이한테 보양식 챙기라고 했어. 오늘부터 저택에서 매일 탕을 끓여서 집에 보내게 할 테니 저녁에 집에 가면 꼭 챙겨 마셔야 한다.”최수빈은 전화를 붙들고 잠시 머리가 지끈거렸다.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원금영은 손녀가 일 때문에 본가에 못 올 때마다 가정부를 시켜 음식을 챙겨 보내고는 했다.문제는 이제 이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집에 다시 들어가는 건 어딘가 불편한 일이었다.그렇다고 굳이 거절하면 또 한참 잔소리를 들어야 할 터였다.최수빈은 간단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마음속으로 보양 음식은 그냥 주민혁이 알아서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래, 그래.”원금영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수빈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나 지금 병원에서 민혁이랑 같이 있는데... 혹시 통화할래? 네 남편이랑 얘기 좀 하지 그래?”원금영은 예전처럼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예전에는 최수빈도 억지로 맞춰주며 호응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할머니, 저 지금 너무 바빠서요.”“그래? 알았다.”할머니는 더는 최수빈을 붙잡지 않고 몇 마디 몸조심하라는 당부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병원.전화를 마친 원금영은 병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을 정리하고 있는 주민혁을 돌아봤다.“어젯밤에 본가에 갔다 왔다지? 입원 중에 뭐 하러 거기에 갔어?”“갈아입을 옷 몇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