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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작가: 금붕어
주민혁의 무심한 목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다.

고개를 돌린 최수빈은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눈빛이었다.

주민혁은 늘 그랬듯이 모든 것을 그녀와 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무턱대고 박하린과 주시후의 편을 들었다.

주민혁은 최수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박하린을 바라보며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아침 먹자.”

그는 심지어 주예린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두 사람과 함께 병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최수빈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말이다.

주민혁의 냉담한 태도에 최수빈의 눈빛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 이런 모욕을 견뎌왔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최수빈이 주민혁의 사랑을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딸을 데리고 떠났다면 지난 생에 주예린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엄마, 저 많이 좋아졌으니까 저희 오늘 퇴원해요.”

시선을 내려뜨린 최수빈은 철이 든 딸의 모습에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누가 괴롭히면 절대 참지 마. 알겠지?”

주예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최수빈은 주예린을 위해 퇴원 절차를 밟은 뒤 엄마를 만나러 갔다.

최수빈의 엄마는 교외에 있는 별장에 살고 있었다. 도심과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공기가 맑고 풍경이 아름다워서 좋았다.

최수빈의 엄마는 최수빈의 아빠와 이혼하고 싶어 했으나 최수빈의 아빠가 줄곧 동의하지 않아 혼자 이곳으로 와서 살고 있었다.

최수빈은 딸을 데리고 엄마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주예린은 외할머니를 보자 신나서 곧장 그녀에게 달려가 안겨서 애교를 부렸다.

이혜정은 웃으며 주예린을 안아 들었다.

“어머, 우리 예린이 키가 또 컸네. 오늘은 뭐 먹고 싶어? 외할머니가 다 해줄게.”

“갈비찜 먹고 싶어요!”

“그래. 외할머니가 갈비찜 해줄게.”

이혜정은 주예린과 잠깐 시간을 보내다가 주예린에게 위층으로 올라가서 TV를 보고 있으라고 한 뒤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수요일이라서 바쁠 텐데 웬일로 온 거야?”

최수빈은 의자에 앉았다.

“요즘 사업은 잘돼가요?”

이혜정은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 매출이 떨어져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 사업 때문에 최진식이 이혜정과 이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부부로 지내서 재산 분할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익 관계도 복잡해서 이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최진식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 여자는 최진식을 위해 아들 한 명, 딸 한 명을 낳았다. 그 때문에 최진식은 줄곧 최수빈을 좋아하지 않았다.

최수빈이 주민혁과 결혼한 뒤 최진식은 주민혁의 인맥을 이용하여 사업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민혁은 최수빈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집안 사정에 관심이 없었고, 그 탓에 최진식은 이혜정에게 자기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아이를 낳았다면서 이혜정을 모욕했다.

이혜정이 대답했다.

“그냥 똑같지, 뭐.”

최수빈은 시선을 내려뜨렸다. 그동안 최수빈은 여윳돈이 생기면 모두 이혜정에게 주었지만 그녀의 사업에는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최수빈은 지난 생에 주민혁에게만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최수빈의 딸이 사망하기 이틀 전 이혜정은 파산했다.

“다음에 돈 보내드릴 테니까 회사 내부 운영 방식을 바꿔보세요. 지금의 방식은 너무 구식이에요. 시대에 뒤처졌다고 볼 수 있죠. 신재생에너지 같은 새로운 산업도 한 번 고민해 보세요. 그리고 회사 내부의 보수적인 경영진도 과감히 바꾸시고요.”

이혜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난 돈이야? 설마 민혁이가...”

“아니에요.”

최수빈은 아주 단호히 말했다.

“저 이혼하려고요.”

주민혁과 결혼한 지 꽤 됐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최씨 가문의 일에 간섭한 적이 없었다. 최씨 가문이 파산하기 직전에도 그랬다.

그러나 박하린이 해외에서 유학하다가 돈을 다 쓰면 몇억씩 흔쾌히 보내줬다.

당시 삼촌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혜정은 아마 수백억대의 채무를 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혜정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다 엄마가 능력이 없는 탓이야. 친정이 너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었다면 주씨 가문에서 그렇게 시달리며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혜정은 고개를 돌리면서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그랬다면 그동안 쭉 참고 살다가 이제야 이혼하려고 했을 리도 없었겠지.”

“다 지난 일이에요.”

처음부터 주민혁과 결혼하려고 고집을 부리면 안 되었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자신이 조강지처가 되면 주민혁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고 착각했다.

...

최수빈은 이혜정에게 딸을 맡긴 뒤 회사로 가서 퇴사 절차를 밟을 예정이었다.

회사 로비에서 최수빈은 주민혁과 마주쳤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주민혁은 급한 일이 있는지 밖으로 빠르게 나가고 있었고, 최수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으로 비켜섰다.

주민혁은 늘 습관적으로 최수빈을 무시했다.

그녀가 인사를 건네도, 존재감을 드러내도 주민혁은 언제나 못 본 척했다.

“민혁 오빠, 여기야!”

문밖에서 박하린이 웃는 얼굴로 주민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 직접 내려왔어? 내가 알아서 올라가면 되는데.”

최수빈은 문득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날에도 주민혁이 한 번도 자신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걸 떠올렸다. 상대가 달라지니 그의 태도도 달라졌다.

최수빈은 덤덤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뭘 하든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최수빈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탔고 5층에 있는 인사팀으로 가서 사직서를 전달했다.

인사팀 직원 장혜윤이 뜻밖이라는 듯이 말했다.

“정말 그만두려고요? 저는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요.”

다들 최수빈이 일개 비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회의실로 마실 것을 가져다주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챙겨야 하니 복잡한 업무는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주민혁은 최수빈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그럼에도 최수빈은 늘 주민혁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그랬던 그녀가 오늘 갑자기 사직서를 내니 장혜윤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최수빈은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아 차가운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네.”

장혜윤은 최수빈의 태도를 보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별 볼 일 없는 비서가 그녀 앞에서 무게를 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주민혁의 여자 친구가 회사로 왔다는 소식에 회사 직원들 모두 깜짝 놀랐다. 다들 주민혁의 여자 친구가 해외에서 금융공학과 항공우주공학 석사 복수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라고 했다.

주민혁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최수빈은 주민혁의 여자 친구가 얼마나 훌륭한 여자인지를 알고 자신은 그녀와 비교도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뒤 자괴감에 일을 그만두려고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 됐어요.”

장혜윤이 최수빈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수빈 씨, 제가 충고 하나 할게요. 앞으로 어디서 일을 하게 되든 넘보지 말아야 할 사람은 넘보지 말아요.”

최수빈은 그 말을 듣고 과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였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주민혁을 그토록 사랑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주제넘게 주민혁을 넘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지난 생은 어쩌면 하늘이 그녀에게 내린 벌일지도 몰랐다.

최수빈은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뒤 덤덤한 눈빛으로 장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충고 고마워요. 하지만 제 커리어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최수빈은 인사팀을 떠난 뒤 로비로 내려갔다. 주민혁과 박하린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예전에는 매일 최수빈을 마주치고 싶었는데 지금은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

최수빈은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주민혁이 갑자기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최수빈, 커피 한 잔 타서 하린이 사무실로 가져다줘.”

박하린이 곧바로 말했다.

“민혁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언니가 탄 커피가 엄청 맛있다고요. 민혁 오빠는 언니가 집안일을 엄청 잘한다고 칭찬했어요. 저는 이런 섬세한 일은 잘 못하거든요. 참, 커피는 핸드드립 커피로 가져다주세요. 인스턴트는 입에 안 맞아서요.”

최수빈은 걸음을 멈추고 박하린을 힐끗 보았다.

“주민혁 씨 사무실에 찻잎이 있거든요. 그거 우려서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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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3화

    주민혁이 떠난 뒤, 최수빈도 곧장 복도를 벗어났다.육민성은 이미 남이준과 협력 논의를 약속해둔 상태였다.“어디 갔었어?”육민성이 그녀가 바깥에서 들어오는 걸 보고 물었다.“좀 바람 쐬고 왔어요.”“그럼 우리 먼저 가자.”육민성이 말했다.“남 대표님은 일에서는 전문성이 높으니 더 깊게 얘기할 수 있을 거야.”발표회장 안에는 귀빈용 접견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성안에서 내놓은 신소재는 활용도가 높아 협력이 성사되면 앞으로 많은 일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그들은 접견실로 향했다.직접 차를 우려내고 있던 남이준은 그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육 대표님, 수빈 씨. 앉으시죠.”자리에 앉자마자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천공연구원이 정부 입찰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남이준은 차를 따라 권하며 말을 꺼냈다.“네.”육민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최수빈을 소개했다.“이번 프로젝트 책임자는 최수빈 씨입니다.”남이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차를 한 모금 마시며 최수빈을 살펴보더니 차분히 잔을 내려놓았다.“육 대표님, 혹시 눈이 가려진 건 아닙니까?”그는 사실 육민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새로운 세대의 선두주자, 업계의 이끄는 인물, 하지만 그가 최수빈의 외모에 끌린 듯 행동하는 건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자신이 아는 최수빈은 집에서 아이만 돌보던 학부 출신의 여인일 뿐이었다.그런 사람이 어떻게 천공연구원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일을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단순히 그녀를 곁에 두고 사적인 자리에 동행시키는 정도라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방금 그녀를 ‘책임자’라고 소개한 건, 무책임하고 경솔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육민성은 시선을 내려 차가 거의 넘칠 듯 찰랑거리는 걸 바라보았다.차가 가득 차면 곧 손님을 내보낸다는 뜻이었다.남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스치듯 최수빈을 바라봤다.“육 대표님은 대단한 분이라고 존경했었는데... 결국 미인계에 무너져 철저히 타락하는군요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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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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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0화

    주시후는 애초에 그녀를 엄마로 여기지 않았으니 당연히 전화 따위 걸어올 리 없었다.최수빈은 육민성과 함께 성안 체크인 구역으로 들어갔다.서명대에 이름을 적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그 중앙에는 주민혁이 서 있었다.곧고 고고한 기세로 눈에 띄었고 그의 곁에는 박하린이 있었다.주위에는 수행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성안 측에서는 그를 위해 따로 인사를 나갈 정도였다.주민혁의 시선이 스치듯 그녀를 훑고 지나갔지만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딴 곳으로 옮겨졌다.최수빈도 태연히 시선을 거뒀다.그러나 바로 이어진 광경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멈췄다.박하린의 손목에 걸린 보석 팔찌, 여러 가지 보석을 꿰어 만든 그것은 분명 최수빈이 전날 주시후와 함께 정성껏 만든 팔찌였다.그녀가 직접 갈고 다듬은 조각들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렸다.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것이 고스란히 박하린의 손목 위에 있었다.그녀에게 건네는 선물이라니 실소가 나왔다.남편도, 아들도 진심은 한 번도 준 적 없었다.그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고 필요 없으면 밀쳐내는 가정부처럼만 대했을 뿐이었다.최수빈의 감정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하린 씨, 그 팔찌 특이하네요.”누군가 눈치 빠르게 말을 꺼냈다.보석 하나하나는 값이 꽤 나가 보였지만 디자인은 낯설고 투박했다.박하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아들이 오늘 아침, 어버이날 선물로 준 거예요.”“아? 벌써 아들이 있어요? 결혼하셨나요?”사람들이 놀라움에 웅성거렸다.그녀가 결혼했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박하린은 예의 바른 미소만 남기며 말을 아꼈다.“사적인 건 밝히지 않는 게 좋겠네요.”바로 그때, 주시후가 어린이집에서 빌린 전화로 전화를 걸어왔다.“엄마, 어버이날 축하해요.”박하린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주민혁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민혁 오빠, 오빠도 아들한테 한마디 해줘.”그 말에 모든 이들의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39화

    결혼 전, 한 번의 뜻밖의 사고로 그와 같은 침대에 누운 적이 있었다.그 일 때문에 지금껏 주민혁은 늘 그녀의 유혹과 계략이라 믿어 왔다.그래서 방금처럼 어색한 장면이 겹치자 최수빈은 그가 또다시 자신을 오해할까 두려웠다.하지만 남자는 무표정했다.그녀를 향해 곧바로 눈길을 주지도 어떤 오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그는 그저 옷방으로 가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갈 뿐이었다.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돌아왔는지, 왜 굳이 집에서 자려 하는지조차 설명할 의향도 없어 보였다.최수빈 역시 궁금해하지 않았다.그가 샤워하러 들어가자, 곧장 손님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다음 날 아침.아직 잠이 제대로 들지 못한 듯했는데 눈을 떠보니 날이 벌써 훤히 밝아 있었다.장수미가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사모님, 아침 드세요.”최수빈은 이 집에서 굳이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았다.세수를 마친 뒤에는 주예린을 깨우러 갔다.그러고 난 뒤, 계단을 내려오다 마침 주민혁과 마주쳤다.그는 서재에서 막 나온 듯 보였고 꼴을 보아하니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했다.주예린이 아빠를 보자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빠, 안녕하세요.”주민혁은 스치듯 한 시선으로 최수빈을 바라봤다.“같이 아침 먹어. 내가 직접 애 어린이집 데려다줄게.”웬일로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주예린의 눈빛이 반짝이며 은근한 기대를 내비쳤지만 끝내 입을 열진 않았다.“괜찮아요.”최수빈은 담담히 말했다.“제가 직접 데려다줄 거예요.”그녀는 주예린의 손을 잡고 도자기 꽃병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주민혁도 더는 막지 않았다.잠시 뒤, 주시후가 내려왔다.최수빈과 주예린이 이미 떠난 걸 보고 식탁에도 자기가 원하는 아침이 없자 입일 삐죽 내밀었다.“분명히 오늘 아침 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안 해줬잖아? 너무해...”주민혁은 고개를 들어 차갑게 쏘아붙였다.“너 누구한테 그런 거 배웠어?”주시후는 입술을 깨물었다.손에 쥔 젓가락까지 부들부들 힘이 들어갔다.예전에 주민혁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38화

    그러나 그 뒤로 그 공예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었다.문 여는 소리가 나자, 주시후가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보았다.“같이 해요. 이 보석들은 아빠랑 외국에서 골라온 거예요. 다 만들면 올해 어버이날에 엄마한테 선물할 거예요.”“아빠도 이게 엄마한테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최수빈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박하린에게 줄 선물이었구나.’그녀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이 시점부터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촘촘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그러니 결국 이 공예품이 자취를 감춘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전생의 자신이 너무도 둔했을 뿐이었다.“치워. 잘 시간이야.”주시후도 피곤했는지 하품을 했다.“오늘 밤은 같이 자요. 나랑 같이 안 잔 지 너무 오래됐잖아요.”솔직히 그는 최수빈이 그리웠다.그러나 최수빈은 담담했다.“먼저 자.”그러자 아이가 침대에 오르며 말했다.“꼭 와야 해요.”최수빈은 대꾸하지 않고 방 불을 껐다....주시후의 방을 나서보니 휴대폰에 메시지가 여러 통 와 있었다.송미연이었다.[오늘 옆 도시 매장에서 새 가방이 들어왔다길래 잠깐 들렀는데 거기서 박하린이랑 주민혁을 봤어.][두 사람 아주 알콩달콩하더라. 주민혁은 정말 그 여자한테 진심인 것 같아. 늘 곁에서 챙겨주고.]최수빈은 메시지를 읽으며 입꼬리를 씩 비틀었다.‘출장이라더니 결국 데이트였나.’그녀는 담담히 중얼거렸다.[맘대로 하라 그래.]...그날 한재준에게 다녀온 뒤, 최수빈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와 멈출 수 없었다.노트북을 품에 안고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마지막 입력을 마치고 노트북을 덮은 그녀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짐을 정리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끝내고 난 뒤, 그녀는 타월을 두르고 머리를 닦으며 걸어 나왔다.안방 대신 곧장 손님방으로 향했다.그곳은 이제 사실상 박하린과 주민혁의 안방이었기 때문이다.머리를 말리려다 보니 드라이기가 안방 화장대 위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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