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7화

작가: 금붕어
주민혁의 무심한 목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다.

고개를 돌린 최수빈은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눈빛이었다.

주민혁은 늘 그랬듯이 모든 것을 그녀와 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무턱대고 박하린과 주시후의 편을 들었다.

주민혁은 최수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박하린을 바라보며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아침 먹자.”

그는 심지어 주예린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두 사람과 함께 병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최수빈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말이다.

주민혁의 냉담한 태도에 최수빈의 눈빛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 이런 모욕을 견뎌왔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최수빈이 주민혁의 사랑을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딸을 데리고 떠났다면 지난 생에 주예린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엄마, 저 많이 좋아졌으니까 저희 오늘 퇴원해요.”

시선을 내려뜨린 최수빈은 철이 든 딸의 모습에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누가 괴롭히면 절대 참지 마. 알겠지?”

주예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최수빈은 주예린을 위해 퇴원 절차를 밟은 뒤 엄마를 만나러 갔다.

최수빈의 엄마는 교외에 있는 별장에 살고 있었다. 도심과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공기가 맑고 풍경이 아름다워서 좋았다.

최수빈의 엄마는 최수빈의 아빠와 이혼하고 싶어 했으나 최수빈의 아빠가 줄곧 동의하지 않아 혼자 이곳으로 와서 살고 있었다.

최수빈은 딸을 데리고 엄마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주예린은 외할머니를 보자 신나서 곧장 그녀에게 달려가 안겨서 애교를 부렸다.

이혜정은 웃으며 주예린을 안아 들었다.

“어머, 우리 예린이 키가 또 컸네. 오늘은 뭐 먹고 싶어? 외할머니가 다 해줄게.”

“갈비찜 먹고 싶어요!”

“그래. 외할머니가 갈비찜 해줄게.”

이혜정은 주예린과 잠깐 시간을 보내다가 주예린에게 위층으로 올라가서 TV를 보고 있으라고 한 뒤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수요일이라서 바쁠 텐데 웬일로 온 거야?”

최수빈은 의자에 앉았다.

“요즘 사업은 잘돼가요?”

이혜정은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 매출이 떨어져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 사업 때문에 최진식이 이혜정과 이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부부로 지내서 재산 분할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익 관계도 복잡해서 이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최진식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 여자는 최진식을 위해 아들 한 명, 딸 한 명을 낳았다. 그 때문에 최진식은 줄곧 최수빈을 좋아하지 않았다.

최수빈이 주민혁과 결혼한 뒤 최진식은 주민혁의 인맥을 이용하여 사업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민혁은 최수빈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집안 사정에 관심이 없었고, 그 탓에 최진식은 이혜정에게 자기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아이를 낳았다면서 이혜정을 모욕했다.

이혜정이 대답했다.

“그냥 똑같지, 뭐.”

최수빈은 시선을 내려뜨렸다. 그동안 최수빈은 여윳돈이 생기면 모두 이혜정에게 주었지만 그녀의 사업에는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최수빈은 지난 생에 주민혁에게만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최수빈의 딸이 사망하기 이틀 전 이혜정은 파산했다.

“다음에 돈 보내드릴 테니까 회사 내부 운영 방식을 바꿔보세요. 지금의 방식은 너무 구식이에요. 시대에 뒤처졌다고 볼 수 있죠. 신재생에너지 같은 새로운 산업도 한 번 고민해 보세요. 그리고 회사 내부의 보수적인 경영진도 과감히 바꾸시고요.”

이혜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난 돈이야? 설마 민혁이가...”

“아니에요.”

최수빈은 아주 단호히 말했다.

“저 이혼하려고요.”

주민혁과 결혼한 지 꽤 됐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최씨 가문의 일에 간섭한 적이 없었다. 최씨 가문이 파산하기 직전에도 그랬다.

그러나 박하린이 해외에서 유학하다가 돈을 다 쓰면 몇억씩 흔쾌히 보내줬다.

당시 삼촌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혜정은 아마 수백억대의 채무를 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혜정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다 엄마가 능력이 없는 탓이야. 친정이 너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었다면 주씨 가문에서 그렇게 시달리며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혜정은 고개를 돌리면서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그랬다면 그동안 쭉 참고 살다가 이제야 이혼하려고 했을 리도 없었겠지.”

“다 지난 일이에요.”

처음부터 주민혁과 결혼하려고 고집을 부리면 안 되었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자신이 조강지처가 되면 주민혁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고 착각했다.

...

최수빈은 이혜정에게 딸을 맡긴 뒤 회사로 가서 퇴사 절차를 밟을 예정이었다.

회사 로비에서 최수빈은 주민혁과 마주쳤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주민혁은 급한 일이 있는지 밖으로 빠르게 나가고 있었고, 최수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으로 비켜섰다.

주민혁은 늘 습관적으로 최수빈을 무시했다.

그녀가 인사를 건네도, 존재감을 드러내도 주민혁은 언제나 못 본 척했다.

“민혁 오빠, 여기야!”

문밖에서 박하린이 웃는 얼굴로 주민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 직접 내려왔어? 내가 알아서 올라가면 되는데.”

최수빈은 문득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날에도 주민혁이 한 번도 자신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걸 떠올렸다. 상대가 달라지니 그의 태도도 달라졌다.

최수빈은 덤덤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뭘 하든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최수빈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탔고 5층에 있는 인사팀으로 가서 사직서를 전달했다.

인사팀 직원 장혜윤이 뜻밖이라는 듯이 말했다.

“정말 그만두려고요? 저는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요.”

다들 최수빈이 일개 비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회의실로 마실 것을 가져다주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챙겨야 하니 복잡한 업무는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주민혁은 최수빈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그럼에도 최수빈은 늘 주민혁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그랬던 그녀가 오늘 갑자기 사직서를 내니 장혜윤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최수빈은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아 차가운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네.”

장혜윤은 최수빈의 태도를 보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별 볼 일 없는 비서가 그녀 앞에서 무게를 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주민혁의 여자 친구가 회사로 왔다는 소식에 회사 직원들 모두 깜짝 놀랐다. 다들 주민혁의 여자 친구가 해외에서 금융공학과 항공우주공학 석사 복수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라고 했다.

주민혁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최수빈은 주민혁의 여자 친구가 얼마나 훌륭한 여자인지를 알고 자신은 그녀와 비교도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뒤 자괴감에 일을 그만두려고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 됐어요.”

장혜윤이 최수빈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수빈 씨, 제가 충고 하나 할게요. 앞으로 어디서 일을 하게 되든 넘보지 말아야 할 사람은 넘보지 말아요.”

최수빈은 그 말을 듣고 과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였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주민혁을 그토록 사랑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주제넘게 주민혁을 넘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지난 생은 어쩌면 하늘이 그녀에게 내린 벌일지도 몰랐다.

최수빈은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뒤 덤덤한 눈빛으로 장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충고 고마워요. 하지만 제 커리어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최수빈은 인사팀을 떠난 뒤 로비로 내려갔다. 주민혁과 박하린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예전에는 매일 최수빈을 마주치고 싶었는데 지금은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

최수빈은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주민혁이 갑자기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최수빈, 커피 한 잔 타서 하린이 사무실로 가져다줘.”

박하린이 곧바로 말했다.

“민혁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언니가 탄 커피가 엄청 맛있다고요. 민혁 오빠는 언니가 집안일을 엄청 잘한다고 칭찬했어요. 저는 이런 섬세한 일은 잘 못하거든요. 참, 커피는 핸드드립 커피로 가져다주세요. 인스턴트는 입에 안 맞아서요.”

최수빈은 걸음을 멈추고 박하린을 힐끗 보았다.

“주민혁 씨 사무실에 찻잎이 있거든요. 그거 우려서 드세요.”

이 책을.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812화

    최수빈은 그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그날, 분명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말해 두었기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주민혁은 최수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잠깐 들렀어. 수술이 잘 되길 바라서.”“고마워요.”말투는 차가웠지만 그렇다고 그를 쫓아내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복도에 나란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간호사가 이성민의 병상을 밀고 나와 수술실로 향하자 이혜정이 급히 다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무서워하지 마. 우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이성민은 이혜정과 최수빈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난 괜찮아. 두 사람도 걱정하지 마.”주민혁에게도 잠시 시선이 머물렀지만 이성민은 복잡한 눈빛만 남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수술실 문이 천천히 닫히고 최수빈과 이혜정은 복도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주민혁도 한쪽에 서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최수빈은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일 분, 일 초가 모두 고역처럼 느껴졌다. 이혜정은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최수빈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낮게 말했다.“엄마, 괜찮을 거예요. 삼촌, 꼭 잘 버텨내실 거예요.”그때 수술실의 불이 꺼졌고 의사가 문을 열고 나오자 최수빈과 이혜정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를 바라봤다.마스크를 벗은 의사는 미소를 지었다.“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현재 생체 징후도 안정적이고요. 수술 후 관찰 기간만 잘 넘기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눈가가 붉어지며 기쁨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민혁 역시 길게 숨을 내쉬었다.곧 이성민은 중환자실로 옮겨져 경과 관찰에 들어갔고 최수빈과 이혜정은 줄곧 침대 곁을 지켰다.해 질 무렵, 눈을 뜬 이성민은 두 사람을 보곤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이제... 괜찮아.”“삼촌, 정말 다행이에요!”최수빈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혜정도 눈물을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811화

    죽을 다 먹고 나자 이성민은 기운이 빠진 듯 눈을 감고 잠시 쉬었다.이혜정은 보온통을 정리한 뒤 최수빈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수빈아, 네 삼촌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러신 거야.”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엄마. 삼촌이 저 생각해서 그러신 거라는 거. 민혁 씨와의 관계도 제가 알아서 정리할게요. 삼촌 치료에 영향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그래.”이혜정은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미소 지었다. 그 눈빛에는 안도하는 기색과 믿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네가 그렇게 생각해 주니까 엄마도 마음이 놓인다.”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아, 변호사 쪽은 연락 왔니?”“네. 업계에서 꽤 유명한 이혼 전문 변호사래요. 내일 자료 들고 직접 찾아가서 상담하기로 했어요.”이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엄마한테 말해.”모녀는 복도에 서서 오가는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저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자리 잡았다.그 시각, 복도 끝 비상계단 안쪽에서 주민혁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변호사와 주고받은 대화 기록이 떠 있었다.멀어져 가는 최수빈과 이혜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 아주 잠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잠시 후, 주민혁은 휴대폰을 거두고 낮게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를 떠났다.다음 날, 최수빈은 약속대로 변호사를 만났다.변호사는 그녀가 가져온 자료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수빈 씨,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최진식 씨가 이씨 가문의 재산 분할을 주장하는 건 법적 근거가 부족합니다. 다만 문제는... 아마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소송이 꽤 길어질 가능성이 큽니다.”이미 각오하고 있던 최수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요. 그래도 그 사람 뜻대로는 못 하게 할 거예요. 얼마나 걸리던 끝까지 버틸 생각입니다.”“그 정도 각오라면 충분합니다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810화

    “삼촌의 건강은 또 다른 문제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건강해야 하는 거지 건강을 걸고 감정적으로 버티시면 안 돼요.”이성민은 깊게 한 번 숨을 고른 뒤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건강이 중요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 때문에 네가 그 사람하고 다시 애매하게 얽히는 건 더 못 보겠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최수빈을 바라보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사실 잠들어 있을 때도 어렴풋이 느꼈어. 그 사람이 여러 번 왔다는 걸. 매번 문밖에만 서 있다가 돌아갔지, 안으로 들어온 적은 없고.”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이성민의 등을 짚고 있던 최수빈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그녀는 주민혁이 뒤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생각했었기에 그가 병원까지 와서 외삼촌의 병실 앞에 머물렀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최수빈이 알지 못했던 그 시간들 속에서, 주민혁은 문밖에 서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이성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눈빛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짙게 서려 있었다.“수빈아, 삼촌 말 좀 들어. 그 사람이랑 감정적으로 얽히지 마.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섞이면 안 돼. 내가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된 것도 결국 네가 그 사람과 엮여 있기 때문이잖아. 그건 네가 빚을 진 거나 다름없어. 주민혁이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잘 알아. 만만한 상대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 이 일로 너한테 부담을 주거나 뭔가를 요구한 적은 없었니?”최수빈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손끝을 말아 쥐었다.그러고는 그동안의 시간을 차분히 되짚어 보았다. 주민혁은 때때로 복잡한 감정을 내비치긴 했지만 삼촌의 일을 이유로 그녀를 압박한 적도, 무리한 요구를 한 적도 없었다.사전 검사부터 전문가 협진, 쉽게 구할 수 없는 약품까지...모든 건 그가 조용히 정리해 둔 일이었고 최수빈이 따로 신경 쓸 일은 거의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걱정으로 가득한 이성민의 눈을 마주 보며 낮게 말했다.“삼촌, 그 사람 저한테 부담 준 적 없어요. 이런 일들, 다 그 사람이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809화

    회의실의 형광등은 차가운 빛을 쏟아내며 주민혁의 곧은 실루엣을 유난히 가냘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정장 소매의 단추를 매만지며 잔뜩 굳어 있는 최수빈의 옆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목젖이 크게 한 번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그러다 최수빈이 먼저 시선을 들었는데 맑은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입술을 가볍게 다물더니 곧 그녀가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생각 정리되면 그때 다시 와서 얘기해요. 우리 사이에 해야 할 말들은 분명히 해야지, 지금처럼 애매하게 흘려보낼 일이 아니에요.”미움이든 오해든, 무엇이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말을 마치자 그녀는 주민혁의 반응을 더 이상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주민혁은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손끝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단추 가장자리가 손가락을 파고들어 통증이 느껴질 때쯤에서야 그는 천천히 손을 풀었다. 그리고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최수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눈빛 깊은 곳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다음 날 아침.병실 창으로 스며든 첫 햇살이 하얀 침대 시트를 비췄다.최수빈이 보온통을 들고 병실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 이혜정은 침대 옆에 앉아 누워 있는 이성민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 이성민의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했고 한때 단단하던 몸은 큰 병을 앓아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심지어 숨을 쉬는 것마저 힘에 부쳐 보였다.“삼촌, 삼촌 좋아하시는 계란죽 가져왔어요.”최수빈은 침대 옆 탁자에 보온통을 내려놓고 조심히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따뜻한 김과 함께 은은한 향이 퍼졌다. 그녀는 그릇에 죽을 담아 이성민의 앞에 내밀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곧 천천히 눈을 뜬 이성민은 눈앞에 선 외조카와 누나를 보자 눈가가 붉어지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고생하네... 이 병이 참 사람 잡는다.”이혜정은 그의 손을 꼭 잡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고생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808화

    “외삼촌 보러 왔어요.”최수빈은 그의 눈을 피한 채 권우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권 선생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권우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주민혁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최수빈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별일 아니에요.”강지안은 두 사람의 표정을 훑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정리했다.“가족분들께 수술 전 안내사항 전달하고 올게요.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그녀는 최수빈의 옆을 지나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하지 못한 말들을 눈빛에 담아둔 채 말이다.그렇게 곧 회의실에는 최수빈과 주민혁, 그리고 권우진만 남았다.주민혁은 의자에 기대앉아 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에게 시간을 내주는 모습이었다.그러다 권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는 표정이 한결 진지해져 있었다.“수빈 씨, 민혁 씨가 말 안 한 게 하나 있는데 그래도 이건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최수빈이 심장이 빠르게 뛰어 옷자락을 꽉 쥐고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외삼촌분 병...”권우진이 말을 이어갔다.“세 달 전에 이미 적합한 공여자를 찾았어요. 다만 상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수술이 미뤄졌고요. 그 뒤로 민혁 씨가 직접 지방을 세 번이나 오가면서 여기저기 부탁해서 다시 동의를 받아냈어요. 괜히 걱정할까 봐, 민혁 씨가 수빈 씨한테는 말 안 했던 거예요.”한마디 한마디가 돌처럼 가슴에 떨어졌다. 놀라움, 미안함,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묵직한 감정이 겹겹이 퍼졌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려 주민혁을 봤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는데 시선을 내리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무지 읽히지 않았다.“왜...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한 거예요?”최수빈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내가 얼마나...”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내가 얼마나 민혁 씨를 미워했는데... 왜 민혁 씨는 미움받을 짓을 하면서도 뒤에서는 날 위해 움직였던 거예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807화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시계 초침 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리는 것이 마치 무언가를 위해 카운트다운하는 듯했다.햇빛이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무릎 위까지 스며들었지만 어둠이 깔린 주민혁의 눈빛만큼은 끝내 비추지 못했다.강지안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말로는 그를 돌려세울 수 없다는 걸.최수빈 모녀를 위해 길을 닦아주겠다고 마음먹은 그 날부터 주민혁은 이미 자신의 생사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그의 세계에는 ‘나’가 없었고 오직 ‘그녀들’만 있을 뿐이었다.강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병력 기록을 집어 들며 조용히 말했다.“다음 주에 있을 최수빈 씨 외삼촌분의 수술은 내가 직접 챙길 거야.”주민혁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짧게‘응’하고 답할 뿐이었다.그렇게 강지안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문이 닫히는 순간, 서재 안에서 아주 미세한 한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깃털 하나가 심장 위에 내려앉듯 가벼운 소리였는데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구름이 낮게 깔려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문득 조금 전 주민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사랑은 포물선이고 결혼이 최고점이며 그 이후는 내리막이라는 말 말이다.그렇다면 최수빈과 그는 애초부터 최고점이 존재하지 않는, 시작부터 아래로 향해 결국은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질 포물선이었던 건 아닐까?강지안은 그 답을 알지 못했으나 이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주민혁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최수빈은 아마 영원히 모를 거라는 것, 또 그녀가 그토록 미워하던 남자가 자신의 생을 대가로 그녀의 앞길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다음 날 아침.최수빈이 잠에서 깨어나 집 안을 둘러봤으나 주민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어젯밤 잠들기 전, 그의 왼팔 붕대에 피가 조금 배어 있던 게 생각나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말아 쥐었다.휴대폰 화면에 뜬 ‘주민혁’이라는 이름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녀는 끝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야 전화는 연결되었다.수화기 너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