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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작가: 금붕어
박하린은 웃었다.

“이모가 시후 엄마가 되려면 시후 아빠의 아내가 되어야 해. 시후는 시후 아빠가 이모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주시후가 말했다.

“잠시 뒤에 아빠한테 엄마랑 이혼하고 이모랑 결혼하라고 할게요!”

최수빈은 그 말을 듣고 차갑게 웃었다.

주시후는 박하린이 그의 친모라는 걸 몰랐다. 박하린은 당시 출산한 뒤 아이를 주민혁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그러고 보면 박하린은 상당히 교활한 여자였다. 자신의 학업과 커리어를 지키면서 자신이 원하는 남자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난 네가 정말로 병원에 오지 않을 줄 알았어.”

등 뒤에서 남자의 무심하면서도 약간의 조롱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최수빈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주민혁을 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우아하고 고고해 보였다.

예전이었다면 최수빈은 주민혁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최수빈은 주민혁을 발견하고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주민혁이 오랫동안 주예린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지난 생에 주예린이 찬바람 속에서 오도카니 그만을 기다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폐렴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 어린이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민혁은 또 한 번 고열을 앓고 있는 딸을 내버려두고 주시후만 데리고 떠났다. 그가 주예린이 고열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로 딸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딸이 고열을 앓는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혁은 온몸이 젖은 최수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주씨 집안을 떠나더니 꼴이 아주 말이 아니네. 시후 안에 있으니까 들어가 봐도 좋아.”

최수빈은 심호흡을 한 뒤 주민혁을 향해 차갑게 웃었다.

“시후가 내 아들도 아닌데 내가 왜 안으로 들어가서 시후를 봐야 하죠?”

말을 마친 뒤 최수빈은 주민혁의 안색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떴다.

이번 생에 최수빈은 주민혁이 딸에게 관심을 주는 걸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갑자기 달라져서 그들 모녀를 챙기는 날도 오지 않을 것이다.

지난 생에 주예린은 주민혁의 무관심 때문에 죽었다.

그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박하린이 문을 열고 최수빈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았다.

“언니 설마 나 때문에 또 화가 난 거야? 내가 여기 있어서 불쾌한 건가?”

주민혁은 덤덤히 시선을 거두었다.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의사 선생님이 시후 위장이 약하고 유당불내증이라 토하고 설사한 거래. 그리고 진드기 알레르기 때문에 급성 두드러기가 난 거라고 했어. 피검사 해보니까 최근에 알레르기 예방을 위한 약욕을 중단했대.”

박하린은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언니가 집에 안 돌아오면 내가 가서 시후 약욕시켜줄게.”

주민혁은 거절하지 않았다.

...

최수빈이 병실로 돌아왔을 때 주예린이 물었다.

“아빠 오셨어요?”

조금 전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최수빈은 기대 가득한 주예린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주민혁이 주예린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주시후를 돌봐주러 왔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최수빈은 딸의 곁에 앉으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예린이가 아빠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아빠는 지금 일 때문에 바쁘셔서 예린이를 보러올 수가 없어.”

주예린은 시선을 내려뜨리며 작은 손으로 침대 시트를 꼭 쥐었다.

“아빠는 예린이를 안 좋아하는 거죠? 제가 아무리 오빠와 아빠한테 잘 보이려고 해도 오빠랑 아빠는 예린이를 안 좋아해요. 제가 못난 사람이라 그런 거예요?”

최수빈은 주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린아, 너는 아주 훌륭한 아이야.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예린이를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야. 그리고 남들이 다 예린이를 좋아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게 아빠라고 해도 말이야. 다른 사람이 우리 예린이를 싫어한다고 해도 예린이는 예린이야. 굳이 남에게 잘 보일 필요도, 남을 위해 달라지려고 할 필요도 없어.”

그 말은 만 네 살인 아이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 그러나 최수빈은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걸 바라지 않았고 영원히 받을 수 없는 아빠의 사랑을 계속 기대하는 딸의 모습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주예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굉장히 슬펐다.

아빠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모두 아빠가 있지 않은가?

주예린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흐느꼈다.

“하, 하지만 오빠가 저는 주씨 가문 딸이 아니고 사생아라고 했는걸요... 그게 정말인가요?”

최수빈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헛소리니까 믿지 마.”

최수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어린아이인 주시후가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누군가 옆에서 바람을 넣은 게 틀림없었다.

그동안 최수빈은 주씨 가문을 위해 헌신했는데 결국에는 말도 안 되는 오명만 쓰게 되었다.

이로써 그녀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끔찍하고 최악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하루 동안 병원에 입원한 주예린은 열도 내리고 상태도 호전되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걷고 있던 주예린은 마침 복도에서 장난감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는 주시후와 마주쳤다.

주예린은 고개를 들어 장난감을 보았다.

‘하린 이모가 오빠에게 준 선물인 건가?’

너무 멋져 보였다.

주시후는 주예린도 병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주예린, 너 진짜 징글징글하다. 내가 아프니까 그것까지 따라 하는 거야?”

“아니야!”

주시후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아빠가 널 보러 가지 않는 거야.”

주시후는 고개를 숙이고 장난감 비행기를 주예린 쪽으로 조종했다.

장난감이 딸을 향해 돌진하자 최수빈은 아침에 먹을 음식을 든 손으로 주예린을 안아서 다른 곳으로 옮겼고 장난감은 바닥에 내리꽂히게 되었다.

주예린은 겁먹은 얼굴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엄마...”

주민혁은 주예린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예린이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씨 가문에서 가장 사랑받는 것은 주시후였다.

그 때문에 주예린은 늘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주예린은 주씨 가문에서 엄마를 제외하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주시후보다 더 사랑받을 일도 없다는 걸 알고 일찍 철이 들었다.

최수빈은 그제야 자신이 자녀 교육에 실패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예전에 그녀는 주예린이 내향적인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주예린이 늘 그녀의 앞에서 밝은 척을 했기 때문이다.

“예린아, 앞으로 누군가 널 괴롭힌다면 똑같이 돌려줘야 해. 엄마가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고 반격해.”

주시후는 최수빈이 다가오자 조종기를 든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최수빈은 아주 매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수빈은 주시후를 보며 말했다.

“예린이한테 사과해.”

“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예린이가 하필 그곳에 서 있었을 뿐이에요!”

주민혁과 박하린이 없으니 최수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엄마 진짜 싫어. 항상 날 가르치려고 하고 아무것도 못 하게 하잖아.’

그러나 주시후는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주민혁은 최수빈과 주예린을 버렸고 앞으로 박하린이 그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촌스러운 최수빈 따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주시후는 용기를 내어 말대꾸했다.

“예린이가 하린 이모가 저한테 선물로 준 장난감 비행기를 망가뜨리면 어떡할 거예요? 이거 배상할 수 있겠어요?”

최수빈은 시선을 내려뜨려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장난감 비행기를 보았다. 그다지 비싸지도 않은 장난감이었다.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만들 수 있었다.

최수빈은 아이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오늘은 반드시 주예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래. 사과하지 마.”

최수빈은 주예린을 바라보았다.

“예린아, 지금부터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예전에 최수빈은 주예린에게 남을 때리거나 욕하는 건 예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주예린은 최수빈의 말에 조금 흔들렸다. 오늘 주시후를 때리거나 욕한다면 주민혁이 자신을 더 싫어하게 될까?

주예린은 어젯밤 엄마가 해준 남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주예린은 주시후에게 다가갔다.

주시후는 조금 겁이 났다.

생수를 들고 오던 박하린은 그 광경을 전부 보게 되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더니 주시후를 자신의 뒤로 감추면서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왜 시후에게 그렇게 겁을 주는 거예요? 엄마로서 아이를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되죠. 언니, 아이끼리 다툰 것뿐이잖아요. 언니가 이러면 시후 겁먹어요.”

주민혁은 아침을 사 오는 길에 박하린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주시후가 덜덜 떨며 박하린의 뒤에 숨은 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최수빈이 차갑게 웃으면서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병원에 있을 필요 없으니까 예린이 데리고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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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시후는 애초에 그녀를 엄마로 여기지 않았으니 당연히 전화 따위 걸어올 리 없었다.최수빈은 육민성과 함께 성안 체크인 구역으로 들어갔다.서명대에 이름을 적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그 중앙에는 주민혁이 서 있었다.곧고 고고한 기세로 눈에 띄었고 그의 곁에는 박하린이 있었다.주위에는 수행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성안 측에서는 그를 위해 따로 인사를 나갈 정도였다.주민혁의 시선이 스치듯 그녀를 훑고 지나갔지만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딴 곳으로 옮겨졌다.최수빈도 태연히 시선을 거뒀다.그러나 바로 이어진 광경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멈췄다.박하린의 손목에 걸린 보석 팔찌, 여러 가지 보석을 꿰어 만든 그것은 분명 최수빈이 전날 주시후와 함께 정성껏 만든 팔찌였다.그녀가 직접 갈고 다듬은 조각들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렸다.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것이 고스란히 박하린의 손목 위에 있었다.그녀에게 건네는 선물이라니 실소가 나왔다.남편도, 아들도 진심은 한 번도 준 적 없었다.그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고 필요 없으면 밀쳐내는 가정부처럼만 대했을 뿐이었다.최수빈의 감정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하린 씨, 그 팔찌 특이하네요.”누군가 눈치 빠르게 말을 꺼냈다.보석 하나하나는 값이 꽤 나가 보였지만 디자인은 낯설고 투박했다.박하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아들이 오늘 아침, 어버이날 선물로 준 거예요.”“아? 벌써 아들이 있어요? 결혼하셨나요?”사람들이 놀라움에 웅성거렸다.그녀가 결혼했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박하린은 예의 바른 미소만 남기며 말을 아꼈다.“사적인 건 밝히지 않는 게 좋겠네요.”바로 그때, 주시후가 어린이집에서 빌린 전화로 전화를 걸어왔다.“엄마, 어버이날 축하해요.”박하린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주민혁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민혁 오빠, 오빠도 아들한테 한마디 해줘.”그 말에 모든 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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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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