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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청천
전여훈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는 안유주의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언제 주면 되는데?”

안유주가 대답했다.

“내일까지는 받고 싶어요.”

전여훈은 잠깐 멈칫했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최민찬 씨가 사인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떡할 거야?”

안유주의 눈빛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 방법이 있어요.”

전화를 끊은 뒤 안유주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거슬리는 걸 절대 참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그동안 이혼 소송을 그렇게 많이 진행했는데 본인조차 이혼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안유주는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딸을 집안 어른들에게 맡긴 지 꽤 된 터라 그녀는 딸을 데리러 가야 했다.

가을이라 그런지 바람이 쌀쌀한 편이었다. 안유주는 코트를 여민 뒤 곧장 본가로 향했다.

벨을 누르자 장서희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안유주를 본 순간 장서희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사모님.”

안유주는 얼굴도 초췌했고 목소리에도 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장서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아진이는요? 저 아진이 데리러 온 거예요.”

장서희가 주방을 바라보자 안유주도 그곳을 바라보았다.

작고 귀여운 최아진이 주방 안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박혜윤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나가 계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할게요.”

최아진은 화가 난 얼굴로 박혜윤을 바라보며 작은 손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할머니, 방해하지 말아요. 제가 직접 준비할 거예요!”

충격적인 일들을 연달아 겪었던 안유주는 그 광경을 본 순간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최아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최아진마저 없었더라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안유주가 도와주러 가려고 했는데 최아진의 앳된 목소리가 안에서 다시금 들려왔다.

“아빠랑 지율 언니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으니까 제가 직접 음식을 해서 지율 언니에게 가져다줄 거예요! 그래야 지율 언니가 빨리 낫죠!”

그 순간, 안유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도 그대로 굳어버렸다.

박혜윤은 자연스럽게 말했다.

“사모님께서도 병원에 계신다고 들었어요. 어디가 아픈지는 잘 모르겠어요.”

최아진은 코웃음을 치면서 코를 찡긋거렸다.

“엄마가 다쳤을 리가 없어요. 엄마는 지율 언니가 다쳐서 아빠가 언니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아빠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일부러 연기하는 거예요! 정말 짜증 나 죽겠어요. 언니 말이 맞아요. 엄마는 따라쟁이예요!”

박혜윤은 안색이 확 바뀌며 다급히 최아진을 말렸다.

“아가씨,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최아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요? 엄마가 언니를 따라 한 건 사실이잖아요!”

기분 나쁜 일을 떠올린 듯 최아진은 손가락을 꼽으면서 투덜댔다.

“엄마는 사탕도 못 먹게 하고, 치킨이랑 햄버거도 못 먹게 하고 정말 짜증 나요.”

최아진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뭔가 고민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동경하듯 말했다.

“앞으로 지율 언니랑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최아진은 미소 띤 얼굴로 박혜윤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할머니, 드라마 보면 할아버지들이 젊은 언니들이랑 결혼하잖아요. 지율 언니한테 우리 아빠랑 결혼하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저도 매일 지율 언니랑 같이 놀 수 있잖아요! 그리고 엄마한테는 우리를 위해 돈을 벌라고 하는 거예요. 어차피 엄마는 지금 일도 안 하고 아빠 돈만 쓰잖아요!”

딸의 말이 가시가 되어 안유주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렀다.

안유주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던 희망의 불꽃이 다시금 꺼져버렸다.

박혜윤은 인기척을 듣고 몸을 돌렸다가 안유주가 뒤에 서 있는 걸 보고 난감한 표정을 해 보였다.

설마 조금 전 대화를 안유주가 전부 들은 걸까?

박혜윤이 마음을 다잡은 뒤 웃는 얼굴로 입을 열려고 하는데 최아진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엄마, 언제 왔어요? 마침 잘 왔어요. 저 지율 언니 먹을 음식 준비하고 있는데 좀 도와줘요.”

안유주는 최아진에게 다가가서 쭈그려 앉은 뒤 아이를 품에 안았다.

비록 딸이 상처가 되는 말을 했음에도 안유주는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진아, 만약 아빠랑 엄마랑 헤어지면 누구랑 살고 싶어?”

최아진은 잠깐 당황하면서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안유주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박혜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 아빠랑 지율 언니 결혼할 수 있게 됐어요!”

안유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꽉 쥔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최아진은 안유주를 밀면서 말했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비켜요. 언니한테 먹을 거 만들어 줄 거니까 엄마는 방해하지 말아요.”

안유주는 기운이 빠진 것처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박혜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안유주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으나 안유주는 덤덤한 표정으로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안유주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최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

박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 사모님께서 상처받으신 것 같아요.”

최아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돌아올 테니까요.”

안유주는 그곳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간 뒤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유주는 한 번 결정한 일은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었다.

그 집 곳곳에 권지율이 지냈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안유주는 안방으로 걸어가서 옷장을 연 뒤에야 뒤늦게 권지율의 옷들이 옷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민찬은 권지율이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뻔히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

안유주는 자조하듯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앞으로 더 이상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다.

짐을 정리하던 와중에 안유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안유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리려다가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이내 남자의 낮고도 허스키하며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유주, 내려와.”

불현듯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른 안유주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으며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네.”

전화를 끊은 뒤 안유주는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오늘은 10월 5일이었다.

전화를 쥔 안유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최민찬의 일로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안유주는 잠시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안유주는 과감히 자리에서 일어난 뒤 캐리어를 챙겨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 앞에 검은색 차 한 대가 멈춰 있었고, 안유주가 내려오는 모습을 본 남자는 창문을 천천히 내렸다.

남자는 좌석에 몸을 기댄 채 긴 다리는 자연스럽게 꼬고 있었고 손등으로는 턱을 받치고 있었다.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빛을 받아 언뜻언뜻 보였는데 그 모습이 사뭇 위협적이었다.

안유주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쥔 뒤 천천히 남자에게로 걸어가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강 대표님.”

시선을 든 강은규는 조금 의외라는 눈빛을 해 보였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안유주는 그를 보았을 때 지금처럼 착잡해하는 게 아니라 기뻐해야 마땅했다.

“차에 타. 약속 지키러 왔어.”

안유주는 고맙다고 말한 뒤 오른쪽에서부터 차에 탔고 그 뒤로 쭉 강은규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강은규는 그녀의 태도가 불만스러웠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7년 전 안씨 가문은 네가 채원이를 대신해 최씨 가문에 시집간다면 네가 채원이를 해쳤던 건 그냥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약속했었지. 이제 안씨 가문이 약속을 지킬 차례야. 사인해. 내가 최대한 빨리 해외로 보내줄게.”

안유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안채원을 해친 적이 없었다.

이미 수차례 해명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강은규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은근히 살벌하게 말했다.

“왜? 싫어? 최민찬을 사랑하게 된 거야?”

안유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은규를 쳐다보지 않았다. 안유주는 한참 뒤 서서히 입을 열었다.

“한 달만 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우선 최민찬과의 일을 해결해야 했다.

강은규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펴졌다. 그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가 갑자기 물었다.

“최민찬이 잘해주지 않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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