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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청천
수술이 끝났을 때는 저녁이었다.

수술대에 누운 채로 실려 나온 안유주는 퇴원을 요구했지만 의사가 반드시 입원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기에 퇴원할 수가 없었다.

안유주는 병실 앞에 선 채 오랫동안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조롱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침 그녀의 옆 병실에서 환한 조명 아래 핑크색 환자복을 입은 권지율이 병상 위에 누운 남자의 몸 위에 엎드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드러운 검은 머릿결 때문에 권지율의 작은 얼굴이 더욱 하얘 보였고 살짝 붉은 눈시울은 그녀를 더 가련해 보이게 했다.

권지율은 울먹이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작은아빠. 전부 제 잘못이에요. 그날 제가 열기구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제가 무서워하지만 않았어도... 절 지키려다가 작은아빠가 다치는 일은 없었겠죠. 미안해요.”

최민찬은 부드럽게 권지율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율아, 네 탓이 아니니까 울지 마. 별거 아니라서 금방 나을 거야.”

그렇다. 권지율의 탓이 아니었다.

결혼 7주년 기념일에 이미 세상을 뜬 여자를 그리워한 최민찬은 기분이 좋지 않아 함께 열기구를 타러 가자는 권지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날 안유주는 직접 음식들을 차리고 새로 산 옷을 입고 기대에 가득 차서 잠도 자지 않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최민찬을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남편인 최민찬은 그들의 결혼기념일에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딸을 구하겠다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안유주?”

최민찬의 낮으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에 안유주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평온한 얼굴로 최민찬을 바라보았다.

최민찬의 차가운 얼굴 위로 약간의 허점이 보였다. 그는 안유주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꽤 놀란 듯했다.

“여긴 어쩐 일로 왔어?”

권지율은 일어나 앉은 뒤 눈물을 닦았다. 안유주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았음에도 그녀는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여전히 최민찬의 곁에 앉아 있었다.

최민찬의 시선이 안유주의 창백한 얼굴에 닿았다. 최민찬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으나 오히려 권지율을 두둔했다.

“지율이 탓하지 마. 지율이 잘못 아니야.”

안유주는 순간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때 안유주도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최민찬은 그녀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그녀를 걱정하기보다는 다급히 권지율의 편을 들었다.

권지율을 바라볼 때는 따스함이 가득하던 눈빛이 안유주를 바라볼 때는 낯섦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누구를 소중히 여기는지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안유주는 그제야 그들이 지금껏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그저 표면적인 것이었을 뿐, 최민찬이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안유주는 안색이 창백한 채 덤덤히 미소를 지었다.

“권지율, 내가 민찬 씨 양보해줄까? 어때? 결정은 네가 해.”

권지율의 눈빛이 반짝였다.

최민찬은 얼굴을 찡그리며 경고하듯 말했다.

“안유주.”

안유주는 고개를 돌려 최민찬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민찬 씨, 그날 무슨 날이었는지 기억해?”

최민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조금 켕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최민찬은 그날이 무슨 날인지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권효영의 기일이기도 했기에 최민찬은 마음이 심란하여 안유주의 심정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죽어도 잊지 못할 사람인가 봐. 우리 결혼기념일에도 그 여자를 위해 애도하려는 걸 보면 말이야. 차라리 그 여자를 위해 평생 수절하지 그래?”

안유주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최민찬의 곁에 있는 권지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면 그 여자의 딸이랑 결혼하든지. 굳이 나랑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이어갈 필요는 없잖아.”

최민찬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항상 침착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최민찬은 권효영과 권지율의 일에 있어서는 자신의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아마 최민찬 본인조차도 지금 자신의 안색이 얼마나 어두운지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안유주, 지율이는 애야. 너 애한테 질투심을 느끼는 거야?”

최민찬은 상처가 벌어져 아파서 헛숨을 들이켰다.

“작은아빠!”

권지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안유주의 뺨을 힘껏 때렸다.

“당신이 뭔데 작은아빠를 화나게 해요?”

이제 막 수술을 마친 안유주는 기력이 없는 탓에 권지율에게 뺨을 맞은 뒤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문틀에 허리를 심하게 부딪쳤다.

극심한 고통에 안유주는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면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겨우겨우 소리를 참았다. 지금의 안유주는 권지율에게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

안유주는 힘없이 웃었다.

“민찬 씨도 알고 있었던 거야? 권지율이 아직 애라는 거?”

최민찬은 안유주의 말을 무시하고 걱정되는 얼굴로 권지율의 손을 잡고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너 손 다쳤잖아. 힘 많이 쓰면 아플 거야.”

권지율은 얌전히 말했다.

“알겠어요, 작은아빠.”

그들의 대화를 들은 안유주는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민찬 씨, 민찬 씨는 권지율이 조금만 상처 입어도 엄청 마음 아파하고, 매일 밤 연인을 달래듯 권지율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해 주고, 권지율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속옷을 골라주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속옷 사이즈까지 똑똑히 알고 있지? 민찬 씨 진짜 권지율을 애로 생각하는 거 맞아? 두 사람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통날까 봐 무서워서 날 이용해 진실을 숨기려는 건 아니고?”

최민찬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안유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안유주, 날 미행한 거야?”

안유주는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미행? 수고스럽게 미행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민찬 씨가 권지율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말이야.”

권지율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사람들이 다 작은엄마처럼 역겨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에요. 작은아빠가 작은엄마한테 관심을 안 주니까 서운해서 난리 치는 거잖아요!”

최민찬은 눈썹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권지율을 제지했다.

“지율아, 그런 말 하면 못써.”

최민찬은 고개를 돌려 비난하는 눈빛으로 안유주를 바라보았다.

착하고 말 잘 듣던 권지율이 악담을 퍼부은 건 오롯이 안유주의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돌아가.”

최민찬은 반박은 용납 못 한다는 듯이 단호히 말했다.

“지율이 다쳤어. 네가 여기 있으면 지율이가 더 자극받을 거야.”

최민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유주의 창백한 얼굴과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을 보지 못했다.

안유주는 최민찬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최민찬이 평온하게 굴수록 오히려 그녀가 더 미친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안유주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졌다. 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

그녀는 최민찬을 지긋이 바라본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안유주는 의사의 강요로 하루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다. 너무 피곤했던 그녀는 전화를 꺼두고 다음 날 오후까지 쭉 잠을 잤다.

다시 전화를 켰을 때, 최민찬에게서는 연락 한 통 없었다.

안유주는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여훈은 안유주의 연락을 받았을 때 한창 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음식을 채 삼키기도 전에 말했다.

“유주야, 무슨 일로 나한테 연락한 거야?”

로펌에서 일하는 전여훈은 오늘 너무 바빴던 탓에 이제야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전여훈과 안유주는 죽이 척척 맞는 동료였다. 그런데 안유주는 최민찬과 결혼한 뒤로 전여훈을 내버려두고 매일 바쁘게 지냈다.

안유주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이혼합의서 좀 작성해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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