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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손유신
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발이 흩날렸다.

가파른 절벽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절벽 아래 역시 두터운 눈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눈은 한 소년의 옷자락마저 흠뻑 적셔 놓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의 소리를 들은 듯, 소년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가 눈부시도록 선명한 붉은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왕야, 시신입니다.”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무에 걸린 채 아무런 생기 없이 늘어진 여인을 바라보며 그가 낮게 말했다.

“위에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밭 위로 또 다른 흰옷 차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고, 새까만 머리카락은 높이 묶여 있었다. 거센 풍설조차 그의 몸에서 풍기는 위험한 기운을 가리지 못했다.

“신경 쓰지 말거라. 계속 길을 재촉한다.”

“왕야, 상처를 입으셨으니 우선 여기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놈들이 금방 따라오진 못할 겁니다. 지금은 눈보라도 너무 심하고요. 제가 근처를 둘러보며 몸을 누일 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눈이 조금 잦아들면 그때 허무지를 계속 찾아보시지요.”

청묵이 공손히 말한 뒤 몸을 돌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반면, 초군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짓누르는 통증 탓에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억지로 버티며 근처의 고목에 몸을 기댔다.

“윽, 아파….”

그 순간 귀에 들려온 미세한 소리에 초군혁은 즉시 경계심을 높였다.

그는 재빨리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설마 저 시체가 살아난 건가?

나무 위에는 여전히 소녀의 시신이 조용히 걸려 있었다. 새하얀 눈밭 위에 번진 붉은 흔적은 마치 설원에 피어난 매화꽃처럼 선명하고도 눈부셨다.

초군혁은 자신이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잠시 뒤, 나무 위의 ‘시신’이 갑자기 몸을 뒤집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정확히 그의 앞에 착지했다.

상대는 마치 그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곧장 자신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옷은 이미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고, 드러난 피부 곳곳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정말 넘어왔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연구실에서 저장 공간을 연구하고 있었다.

막 완성한 칩을 자신의 뇌에 이식한 후 눈을 떴는데, 어느새 이런 빙천설지 한가운데에 와 있었던 것이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머릿속은 아직도 욱신거렸고, 낯선 기억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소운금. 승상부의 적장녀.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소명월은 승상부의 적차녀였다.

삼 년 전, 대황자는 토벌에 나섰다가 뜻밖의 사고로 다리를 다쳤다.

궁 밖에는 그가 평생 불구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원래 그와 혼약이 되어 있던 소명월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함께 꽃구경을 나갔던 틈을 타 몰래 경성을 떠나 버렸다.

그 뒤로 행방은 묘연했다.

실종되기 전 소명월이 자신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소운금이 그녀를 잃어버렸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적어도 초현진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가 불구로 지내던 지난 두 해 동안, 소운금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직접 약을 시험해 가면서까지 그를 돌보았다.

반년 전.

마침내 초현진은 다시 두 발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원래부터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던 황제는 곧바로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고생 끝에 낙이 찾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소명월이 돌아왔다.

모든 것은 그녀가 돌아온 뒤부터 시작되었다.

끊임없는 계략과 모함. 가족과 벗들의 배신과 비난.

결국 원래의 소운금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초현진이 소명월을 맞아들이겠다던 결정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마지막 계기였다.

기억을 정리한 소운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독의의 성수라 불리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이런 무능하고 나약한 고대 귀족 아가씨의 몸으로 들어오게 될 줄이야.

참으로 비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좋았다.

이미 다시 태어난 이상. 이 몸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원한은 이제 자신이 갚아 주면 될 일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눈에 보이는 상처부터 대충 처치하기 시작했다.

겉옷은 이미 완전히 찢겨 있었기에 아예 벗어 던졌다.

“예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 말라고 했거늘, 공자께서는 아직도 충분하지 않으신가요?”

한쪽에 있던 초군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마침내 시선을 돌렸다.

몸을 돌려 떠나려던 순간, 뒤에서 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독(蠱毒: 여러 독충을 한 그릇에 넣어 서로 잡아먹게 한 뒤 살아남은 독으로 사람을 해치는 주술적 독)이라는 건 오래 끌수록 위험합니다. 가볍게는 사람을 죽을 만큼 괴롭게 만들고, 심하면 무공까지 모조리 잃게 되지요.”

“고독을 아느냐?”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초군혁이 다소 격앙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운금은 담담하게 말했다.

“대가를 치를 생각이 있다면야, 뭐.”

“무엇을 원하느냐?”

초군혁은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마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제 몸 상태는 이미 보셨겠죠. 이런 눈보라 속에서는 간단히 상처를 싸매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약도 있고 붕대도 있다.”

초군혁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품속의 약과 붕대를 전부 꺼내 소운금에게 던졌다.

그녀는 그것들을 받아 들고 능숙하게 상처를 하나씩 감쌌다.

초군혁이 다시 물었다.

“또?”

“좀 춥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았다.

초군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린 그는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던졌다.

“요구가 있다면 한꺼번에 말하거라.”

이 죽일 놈의 여자. 만약 고독을 풀지 못한다면 이곳이 곧 그녀의 무덤이 될 것이다.

초군혁은 그녀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줄 알았건만, 그의 옷을 걸친 소운금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좋아요. 그럼 시작하죠.”

이게 끝이라고?

초군혁은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가 앓고 있는 고독은 궁중 태의들조차 풀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이 풀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고작 이 정도만을 대가로 요구했다.

설마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건가?

정체를 알았다면 진작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소운금은 어느새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입 벌리세요.”

“뭐라고?”

초군혁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소운금은 이미 손가락을 베어 피를 한 방울 짜낸 뒤, 그대로 손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초군혁은 즉시 그녀의 손을 쳐냈다.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뭘 하는 것이냐?”

소운금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고독을 풀어 드리는 거잖아요. 당신이 걸린 건 혈고(血蠱: 사람의 피를 매개로 퍼지며 체내를 잠식해 서서히 생기를 갉아먹는 고독의 한 종류)예요. 처녀의 피만 먹이면 혈고는 곧바로 몸 밖으로 빠져나와요. 이렇게 간단한 방법도 모르셨나요?”

그녀의 말에 초군혁은 말문을 잃었다.

혈고.

초군혁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무려 일 년 동안이나 그를 괴롭혀 온 독이었지만 황성 안에서는 누구도 풀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이런 설산까지 찾아와 은거한 신의(神醫)를 찾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도중에 자객들의 습격을 받을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고작 자신의 피를 조금 마시면 혈고를 풀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그런 기괴한 해독법이 있단 말인가?

초군혁은 무심코 입술에 남아 있던 핏방울을 혀끝으로 훑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순간 농락당했다는 기분이 치밀어 오르자 초군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눈빛에 어린 살기 또한 점점 짙어졌다.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곧이어 그는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해 냈다.

검게 물든 피였다.

자세히 보니 그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는 듯했다.

동시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줄곧 은은하게 몸을 괴롭히던 통증이 기적처럼 사라진 것이다.

온몸이 전례 없이 가벼워졌고 잃어버렸던 힘도 전부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설마... 정말 혈고가 풀린 건가?

초군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들어 보니 소운금은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옷은 잘 입을게요. 덕분에 따뜻했어요. 그럼 이만.”

눈밭을 밟으며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은 쓸쓸하고도 외로워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한 걸음씩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다 갑자기 휘청하더니 그대로 눈밭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초군혁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앞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둘째 아가씨다! 둘째 아가씨께서 살아 계신다!”

“어서 태자 전하께 알려라! 소운금 아가씨께서 살아 계신다!”

“정말 기적이야!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살아남다니…”

“다들 조용히 해!”

“우선 사람부터 모셔 가거라! 서둘러!”

혜성처럼 나타났던 사람들은 재빠르게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에는 다시 하얀 그림자 하나만 남게 되었다.

초군혁은 눈밭 위에 남은 핏자국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충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저 여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왕야, 앞쪽에 동굴이 있습니다. 들어가서 잠시 쉬시지요.”

청묵이 드디어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왕야의 옷이 사라져 있었다.

“절벽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해 오거라.”

“예.”

초군혁이 담담하게 말하자 청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직 은거한 신의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허무지는….”

“고독은 이미 풀렸다. 더 찾을 필요 없다.”

뭐라고?

풀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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