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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질척한 밤과 열린 아침]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9 00:05:25

"나는 아린을 책임지는 방법 따위는 모르는데."

생전 남자의 품에 안겨 밤을 청해본 역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내에게서 풍겨오는 짙고 기분 좋은 향기와 살갗을 타고 직조되듯 전해지는 아늑하고 뜨거운 온기는 감당하기조차 힘들었다.

"머릿속엔 아무 기억도 없는데, 몸이 난리야."

귀엽다고 해야 할지, 너무 노골적이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고, 이런 행위는 서로 깊이 사랑해야만 나누는 게 아닌가 싶었다. 

과연 내가 아처린을 사랑할 수나 있을까. 그가 황태자이자 집안의 원수일지도 모르는 처지였으나, 나를 찌르던 뾰족한 경계심은 이미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상태였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지만 이 사내는 지독하게 근사한 데다 나를 살려주기까지 했고, 생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름답다'는 찬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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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승 황태자의 집착을 받은 사연   #28. [위험한 착각, 달콤한 족쇄]

    "아린, 말을 타고 싶다고?"나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붉은 사과를 바닥에 놓칠 뻔했다.말이라니. 그 지극히 평범한 단어가 그 오만한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머릿속에서 아련히 잊고 있던 소문 하나가 벼락처럼 스쳐 지나갔다.과거 끔찍한 낙마 사고로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평생 은둔해 살아야 했던 여동생, 에스메 황녀의 비극적인 서사가 뇌리를 날카롭게 할퀴었다.그리고 그 불운한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다름 아닌 붉은 머리의 황태자, 아처린 본인이라는 잔혹한 소문까지.물론 작년에 뛰어난 마법력을 지닌 라이신이 에스메의 다리를 깨끗이 고쳐주었다는 사실은 세실리에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전까지 무려 5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린 동생을 참혹한 지옥 속에 살게 한 주범이 바로 아처린이었기에, 순간 등골로 서늘한 소름이 바짝 돋아버렸다.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내는, 자신이 그런 처참하고 비극적인 과거를 지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장난기 가득한 아이처럼 천진하게 말을 타고 싶다 말하고 있었다."그래. 온몸이 근질거려."기억은 깔끔하게 잃었으면서, 몸을 쓰는 야성적인 감각만큼은 제국의 폭군답게 선명하게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떨리는 숨을 은밀히 삼키며, 애써 태연하고 다정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우리, 멀리 이동하려면 말이 필요할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은 먹이도 챙겨야 하고 관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잖아? 편하게 돈을 주고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게 어때?""마차?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사실 나도 네 그 순간이동을 빨리 익혀서 마리와 더 많은 곳을 다녀보고도 싶어."아처린이 제법 합리적인 제안이라는 듯 초록빛 눈동자를 반짝였다.그때 아처린이 짙은 눈썹을 슬쩍 올리며 내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억센 팔에

  • 짐승 황태자의 집착을 받은 사연   #27. [오만한 사내의 사소한 취향]

    내 입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나조차 깜짝 놀라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옆을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아처린의 깊은 초록빛 눈동자가 굶주린 야수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누구야, 전하는?"아처린이 턱 끝을 느릿하게 낮추며 귓가에 닿을 듯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낮고 긁히는 음성이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리자 등골에는 소름이 돋아 버렸다.원래대로라면 대공가의 시녀였으니 과거에 모셨던 고귀한 분이라고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지금 '할 로드'라는 이름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캔돔 대공저의 로드 부부가 운영하던 빵집의 양아들이었다가 기사가 된 이야기부터 현재 도르하르 황국의 황태자라는 화려한 서사까지 구구절절 읊어야 했다.그렇게 되면 캔돔가의 시녀에서 도르하르의 시녀로 연결되는 내 과거까지 끌려 나올 터였다.레투니카 황태자와 황제를 감옥에 집어넣은 장본인이라는 지독하게 숨겨둔 진실까지, 고구마 줄기처럼 얽히고설켜 터져 나올까 봐 덜컥 두려움이 밀려왔다.위험천만한 과거를 들춰내어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에 나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뭐, 다 의미 없는 과거인데 미안, 아린."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자, 아처린은 기가 막힌다는 듯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나지막하게 콧방귀를 뀌었다."무슨 빵집 아들놈한테 전하래? 마리, 농담도 잘하네."그때, 아처린이 내 단단한 손목을 턱 감싸 쥐더니 망설임 없이 그 빵집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닿아오는 그의 체온이 살갗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어?""그 대단하신 '전하'가 만드는 빵 맛이나 좀 보게.""어, 어? 잠시만, 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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