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처린은 무심하게 말했지만, 나는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본인이 이전 제국의 레투니카 황태자인 줄은 꿈에도 모를 텐데.
설마, 주인이 바뀐 그 궁에 자신이 직접 가보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모험자로서 가지는 호기심일까.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제국에서 가장 삼엄한 철통 경비가 이루어지는 곳이자, 황태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정적들과 첩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그 황궁을 제 집 안방 드나들듯 말하다니.
나는 황당함과 경악이 섞인 눈으로 아처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입꼬리에는 위험천만하면서도 매혹적인 미소가 짙게 걸려 있었다.
"마리, 뭘 놀라기는. 그냥 해본 말이야. 평범한 사람이 저길 어떻게 들어가겠어?"
"아처린, 농담이었어? 난 또 뭐라고."나름 상식은 갖춰진 것 같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자신을 위해 돈을 구하겠다는 말은 고맙기는 했지만, 그 소리가 너무도 살벌하고 가혹하여 나는 순간 목에 무언가가 콱 걸리는 것만 같았다.숨이 턱 막혀 마른침을 삼키는 나를 보며, 아처린은 느긋하게 붉은 입술을 올려 호선을 그려 보였다."아린, 좀 무서운걸? 도적이라도 되겠다는 건 아니지?""너무 심각하게 들을 것 없어. 내가 검을 휘둘러 직접 마수를 잡아서라도 너를 돌본다는 뜻이니까."그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하지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가슴속에는 여전히 가느다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본래 잔혹한 데다 즉흥적이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내였다.이렇게 서늘한 성정을 지닌 아처린이 앞으로 나를 위해 어떤 거칠고 무서운 일을 벌이게 될지 절로 걱정이 밀려왔다.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이 모든 맹세가 기사가 레이디에게 마음을 다해 지켜준다는 의미였기에,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영광스럽기는 했지만 등골은 그저 서늘하기만 했다. 나는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누르며 조심스레 주스를 마셨다.하지만 이미 내 입에는 더 이상 주스가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차갑게 식어버린 단맛 사이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아, 나는 그의 눈치만 계속해서 살필 수밖에 없었다.***다음 날 정오.지난 밤 아처린이 계속 내 몸을 지분거리며 부벼 댄 탓에 몸이 무거워 늦잠을 자게 되었다. 느지막이 나는, 숙소 식당에서 아처린과 식사를 마친 뒤 다음 여정을 고민하게 되었다. 아처린은 오늘도 나를 위해 포션을 구해왔고, 한층 더 애틋하게 여기며 온종일 곁을 지켰다.누가 봐도 완벽한 연인처럼 구는 그였기에, 내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넘겨주고 손끝으로 볼을 어루만지는 손길 하나하나에 연신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 시각, 대공가의 침실에서는 늦은 아침이 되도록 일어나지 못한 라이신 황태자비와 바아르 황태자가 있었다.말이 황태자지 황궁은 되도록 가지 않으려 아무리 황궁에서 사람을 보내도 하루 이틀 함흥차사만 반복되고 있는데.그 이유는 바로 카이우스 키요르 폰 캔돔 황제가 그 자리에서 제 몫을 해주기 때문이다.고리타르의 의문의 죽음, 아처린 황태자의 실종, 그리고 에스메의 황궁을 버린 충격적인 사건까지.이 모든 제국의 혼란은 캔돔 선대 대공 카이우스가 등장하면서 모두 해결되었다.그래서 카이우스가 황제로 제국을 새롭게 건국을 하게 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나 다름없다.“전하, 이제는 좀······. 황궁은 오늘도 안 가실 건가요?”“대충 컨디션이 안 좋다고 세이바로 경에게 말해 놨어.”컨디션이 안 좋기는 무슨.최고조 절정을 매일 달리고 있어 라이신은 피곤하던 차였다.사실 바아르는 불규칙적인 발작으로 인해 항상 긴장한 채로 대공가에 갇혀 어린 시절부터 살아왔다. 그러나 24세가 지나가고 아버지의 등장으로 인해 드디어 평범한 인생을 되찾게 되었다.그래서 이제 짐승 같은 발작은 핑계거리도 되지 않았다.“전하, 이러다 폐하께 뜨거운 맛을 보실 수도 있어요.”바아르는 여전히 라이신의 가슴을 쓰다듬다 입을 맞추며 지분거리느라 그녀를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그의 시선이 라이신의 나신에 닿자 새하얀 피부에 부풀어 오른 곡선이 은은하게 빛났다. 봉긋 솟은 가슴 끝자락의 분홍빛 돌기는 임신으로 더욱 도드라져, 마치 금지된 열매를 보는 듯한 위험한 유혹을 풍겼다.“아버지는 나에게 져. 나는 너에게 지고. 그나저나 넌 이
생필품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처린을 맞아준 것은 주인장의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상점 주인은 몸을 추스를 치유 포션의 재고가 완전히 떨어졌다며, 여관에서 몇 골목은 더 떨어진 다른 구역의 전문 모험자 상가 쪽으로 가보라고 일렀다.결국 그는 아직도 침대 위에서 몸을 힘겹게 추스르고 있을 마리를 생각하며, 치유 포션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저잣거리를 이리저리 뒤지고 다녀야 했다.5월 초의 아침 햇살은 이른 시각임에도 따스하고 화사하게 온 거리를 내리쬐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의 흔적을 말끔히 씻어낸 따스한 봄바람이 감돌았고, 길가에 흘러나온 풋풋한 흙냄새와 싱그러운 나뭇잎 향기가 공기 중에 감돌았다.거리의 상인들은 하나둘 매대를 정리하며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마리를 혼자 두고 나온 아처린의 마음만큼은 한없이 바쁘고 초조하기만 했다.분주하게 움직이는 모험자들과 상인들 사이를 가로질러 낯선 거리를 걷던 그의 시선이, 문득 변방의 경계선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황궁의 웅장한 성벽에 닿았다.푸른 봄하늘 아래 오만하고 차갑게 솟아오른 뾰족한 지붕들과 석조 성벽은 심장을 이상하게 덜컹거리게 만들었다.‘저곳은······ 낯설지가 않군.’그 거대한 건축물을 바라보는 순간, 관자놀이를 날카로운 송곳으로 지르는 듯한 강렬한 두통이 뇌리를 스쳤다.마치 기억의 둑이 터지려는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고, 눈앞의 시야가 하얗게 아지랑이치며 기절할 것 같은 통증이 덮쳐왔다.아처린은 시끄러운 저잣거리 한가운데에 잠시 멈춰 서서 한 손으로 이마를 강하게 짚은 채 거친 숨을 내쉬어야 했다. 잃어버린 과거의 파편이 찰나 동안 떠올랐다 스러지는, 핏빛 어린 통증이었다.
이른 아침의 차가운 정적이 숙소 안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눈을 떴을 때, 나를 온통 안아주었던 사내의 뜨거운 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멍하니 침대에 앉아 서늘하게 식어버린 옆자리를 몇 번이고 쓸어보았다. 손끝에 닿는 것은 오직 온기를 잃고 뻣뻣하게 식어가는 홑이불의 감촉뿐이었다.설마 하는 마음에 유령에 홀린 사람처럼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객실 안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아린······? 거기 있어?"혹시나 목욕탕이나 창가 구석에 숨어 있을까 싶어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보았지만, 객실 안에는 가느다란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그 어디에도 아처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어제 벗어놓았던 모험자의 옷가지며, 제국 황실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묵직한 보검도 침대 밑에 없었다.여전히 허리가 끊어질 듯 무겁고 아랫배가 뻐근하게 아려왔지만, 나는 다급하게 공기를 갈라 내 고유의 아공간을 열었다.아공간은 나만의 독자적인 마법 영역이었기에 그가 손댈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 차곡차곡 모아둔 귀한 마정석과 각종 여행 물품들은 빠짐없이 그대로 들어차 있었다.‘나를 두고 가버린 건가······?’잠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변을 보던 그 순간, 구석에 있어야 할 아처린의 가죽 주머니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기억을 잃은 그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마정석을 판 돈을 반씩 나눠 가졌던 그 가죽 주머니. 보검이나 고가의 장비까지 챙겨 나갔다니.서늘하고 가혹한 냉기가 가슴 밑바닥을 짓눌러 왔다. 나라는 보잘것없는 여자와 첫 밤을 치르고 나니
첫날밤이 이런 것일 줄이야.시간이 흐를수록 아처린의 손길은 다정하고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치밀했다.처음에 몰아쳤던 낯설고 날카로운 통증은, 서로의 살결이 마찰하며 피어나는 짙은 농밀함으로 바뀌어 갔다.사내와 여인의 본능이 뜨겁게 어우러지는 이 낯선 감각은, 그동안 내가 알던 세상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전율스러웠다. 이래서 남녀의 관계란 함부로 지레짐작할 수 없는 것이라 했던가."마리, 괜찮아?""응······. 아린은 어때?""네가 기대 이상으로 나를 기쁘게 해줘서, 황홀할 지경이야."사실 나는 한 번도 내 얼굴이 빼어나게 예쁘다거나, 내 몸매가 여인으로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살아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아처린은 열기에 젖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연신 아름답다고 속삭였다. 심지어 보잘것없는 내 몸을 보며 제국의 그 어떤 고귀한 여인보다 관능적이라며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기까지 했다.제국의 미모를 대표하며 여성스러움의 극치라 불리던 레이나를 늘 품에 안았을 그였을 텐데, 그의 취향이 기이한 것인지 아니면 기억을 잃으며 몸의 본능마저 바뀐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한때 제국에서 가장 높고 고귀했던 황태자 아처린. 그런 사내와 이 작고 조용한 방에서 기적 같은 육체의 교감을 나누고 있다니.훗날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고 그가 내 곁을 떠나더라도, 오늘 밤 손끝에 새겨진 이 감촉만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창문 너머로 스며든 푸르스름한 달빛이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비추었다.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내의 얼굴을 이토록 마음껏 매만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얄궂은 영광이었다."만약 먼 훗날, 아린이 기억을 찾고 나를 떠나고 싶어지면 언제든 놓아줄게. ··
머릿속은 여전히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했다.과거의 기억도, 자신이 정확히 누구였는지조차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말과 행동이 먼저 저절로 툭툭 흘러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숙련된 본능이 몸에 깊게 베여 있는 것처럼.침상 위에 옷가지를 내려놓고 마침내 나신으로 선 마리를 바라보자, 가슴 깊은 곳에서 아련하게 심장이 욱신거려 왔다.자신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자신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해 본 적도, 타인을 위해 희생 따위를 해본 적도 없는 냉혹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세상 모든 것에 심드렁하고 무덤덤했던 자신이, 이 작고 고운 여자를 보는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살리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마음속에 대체 언제부터 이런 간절함이 들어차 있었던 걸까.모험자의 허름한 옷차림,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하지만 그 속에서 드러나는 마리의 행동은 올곧았고, 눈빛은 그 어떤 제국의 오만한 귀족보다 당당하고 대단했다.갓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이 가녀린 몸집을 하고서도,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홀로 누벼온 노련한 장수의 눈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세상 꼭대기에서 만물을 내려다보는 나이 지긋한 대마법사의 눈을 하기도 했다.이렇게나 곱고 여린 몸을 하고서, 대체 그동안 어떤 가혹한 인생을 살아온 걸까."호기심이 생겼어, 마리라는 여자에게."낮게 속삭이는 묵직한 음성이 은은한 촛불이 넘실거리는 방 안의 정적을 깼다.설령 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 해도, 심지어 훗날 지독하게 배신한다 해도 상관없었다.지금만큼은 이 여자를 탐색하고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칠 듯이 터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