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혼할게요.” 결혼한 지 3년 되는 유지민은 오늘에서야 이혼을 결심했다.
View More유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정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빨리 이혼을 진행하려는 압박일 뿐 그와 깊은 대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누가 이혼 증서를 받고 전 남편과 뜬금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겠냐고!’ ‘보통 이런 순간엔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며 새출발을 축하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항상 말한 대로 잘 지키는 그녀였지만 오늘 같은 기분 좋은 날에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댔다. “그런 말은 한 적 있긴 한데 지금 당장 얘기하자고 한 건 아니잖아? 나중에 시간이 나면 얘기하자.” 강유진은 손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저번에 네가 이혼 서류로 날 속이고 서명하게 하고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잖아. 그때 일 덕분에 이제 네 말은 믿기가 어려워. 연락처도 바꿔놓고 오늘 떠나고 또 연락이 안 되면 그때 난 어디서 너를 찾아 약속을 지켜?” 변호사답게 억양이 굳고 강한 말투였기에 유지민은 왠지 모르게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포착하고 계속해서 부드럽게 접근하는 전략을 펼쳤다. “네가 이혼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원했던 건 아니지만 결국 네 뜻대로 했어. 시간을 좀 끌었지만 결국 너에게 맞춰준 거야. 난 이렇게 네 의견을 존중했고 네가 전에 나를 속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 그냥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 하고 싶은건데 그 기회도 안 줄 거야?” 이혼 증서를 받은 후 유지민의 마음은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수했던 차가운 태도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한편 강유진이 그녀 앞에서 이런 자세로 자기를 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괜히 연약해지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알았어. 연락처 줄게. 근데 전처럼 메시지 보내며 귀찮게 하지 마. 말도 예의 바르게 해야 해. 만나는 일은 나중에 보자.” 강유진은 그녀가 반응하기 전에 재빠르게 연락처를 추가하고는 그제
불과 10분 만에 유지민은 수집한 정보와 대조해 모든 서류를 찾아냈다. 서류를 꼼꼼히 확인한 후 서류봉투를 들고나와 보니 강유진이 문 앞에 축 늘어진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또 뭐 하는 거야?’ ‘설마 아픈 척해서 이혼을 미루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녀는 경계심이 가득한 어조로 의심하며 물었다. “몸이 안 좋아?” 그 말에는 걱정보다도 의심이 가득했다. 강유진이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문을 짚고 일어서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 가자.” 그가 문을 열고 나서자 유지민은 그제야 경계를 풀고 그 뒤를 따라나섰다. 구청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유지민은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을 계산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그의 손을 붙잡고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강유진은 결혼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그녀는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잔뜩 초조해하며 그를 재촉했었다. 그때 그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고 결혼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은 사라졌었다. 하지만 이제 3년이 지난 오늘. 그들이 같은 건물을 다시 찾아온 이유는 이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구청 대기실에는 이혼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이혼이라는 게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지민이 말한 대로 그들의 결혼이 실수라면 여기서 끝내면 되는 거다. 실수를 여기서 멈춰야 그는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는 결혼이라는 울타리로 그녀를 붙잡고 싶지 않았다. 이혼하면 이제 다른 신분으로 그녀의 곁에 다시 서면 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녀에게 자신의 진심을 증명해야 할 차례였다. 자신이 그녀에게 기회를 줬던 것처럼 그녀도 자신에게 다시 기회를 줄지 안 줄지는 몰라도 더 이상 헷갈리지 않았다.
유지민은 그를 믿지 않았다. 이건 강유진에게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믿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자신이 그녀의 신뢰를 천천히 깨뜨렸기 때문이며 그는 자책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마음속으로 여러 차례 예감했던 것이었기에 아직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진짜라는 걸 증명할게. 지민아, 다시 기회를 줘.” 차는 지하 주차장에 멈췄다. 유지민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며 짜증이 섞인 어투로 말했다. “이혼 증명서만 주면 너가 어떻게 증명하든 신경 안 써.” 말을 끝내고 그녀는 그의 반응도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대화의 주제가 결국 이혼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강유진은 그녀가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임을 확실히 알았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팔에는 선명한 핏줄이 보였다. 하지만 그 아픔을 풀 길은 없었고 그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올라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방으로 들어갔고 신발을 갈아 신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신발장 안에서 토끼 모양의 슬리퍼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가 예전 집에서 자주 신고 다녔던 그 슬리퍼와 똑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떠날 때 그 신발을 분명 쓰레기통에 버렸었다. ‘왜 같은 신발이 여기 있을까?’ 의문을 품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방 안의 구조를 보고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커튼부터 컵, 옷장, 거실의 결혼사진까지. 방 크기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복사해 놓은 듯 예전 집 그대로였다. 시간을 넘나드는 듯한 이 광경을 보고 유지민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집을 이렇게 꾸몄어? 똑같은 물건들은 다 어디서 산 거야?” 강유진은 같이 방 안을 둘러보며 추억에 잠긴 듯 아련하게 말했다. “난 네가 나랑 함께 새 삶을 시작할
정확히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 강유진은 차를 멈추고 무겁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맘에 안 드는 게 아니야. 네가 이혼을 원한다면 난 빈손으로 나가도 괜찮아. 협박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의 많아서 이대로 끝내기 좀 억울할 뿐이야.”강유진의 입에서 ‘억울하다'는 말을 들은 유지민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억울한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이혼당해서 억울한 거야? 아니면 내가 먼저 이혼을 말해서 억울한 거야?”“둘 다 아니야. 지민아.”그녀의 의아한 표정을 보며 강유진은 잠시 씁쓸하게 웃고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알 수 없는 한숨을 섞어 답했다.“네가 나를 오해한 게 억울했어. 네가 아무 기회도 안 준 게 억울했고 우리가 이렇게 끝나게 된 게 억울했어.”이번엔 유지민이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윤연서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나? 이혼한 후에는 바로 고백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곳에서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말투도 이렇게 애매하게?’ 그 침묵은 강유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었다.“지민아, 그 영상 보고 나서 네가 왜 떠났는지 알았어. 내가 윤연서를 아직도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지?”“그렇지 않아?”유지민의 반문에 강유진의 가슴은 더욱 아려왔다. 그는 그 아픈 감정을 누르며 차분하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사실 이런 얘기는 미리 해야 했는데 미루다 보니까 오해만 생기고 너를 그렇게 오랫동안 아프게 만들었어. 다 내 잘못이야. 정말 미안해. 지민아.”그 사과는 유지민이 듣기에는 너무 흐지부지하게 느껴졌다. 말이 연결되지 않은 듯 이상하게 끝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더 이상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속에는 이 모든 걸 빨리 끝내고 완전히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 그의 늦은 사죄를 들을 인내심이 없었다.“넌 확실히 나한테 미안해해야 해. 내게
엄 변호사를 통해 유지민이 경북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유진은 바로 그녀에게 만나자고 연락했지만 또 한 번의 단호한 거절만이 돌아왔다. 그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그를 찾아올 때까지 그저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그동안 그는 이혼 합의서와 재산 분할 합의서를 수도 없이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예전 저택의 구조를 떠올리며 가구와 장식품을 하나하나 다시 사들였다. 유지민이 혹시나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원래의 배치와 분위기를 되돌리려고 애쓰며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서 9월 말이 되었을 때 드디어 엄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유지민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만남의 장소는 구청 앞이었다. 강유진의 한껏 부풀었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래도 그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물론 빈손으로. 유지민은 두 손이 텅 빈 그를 보고 한눈에 알아챘다.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던 건 그저 그가 둘러댄 거짓말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에 크게 화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은근한 짜증이 배어 있었다. “이혼에 동의한다면서 이렇게 빈손으로 온 게 네 성의야?” 한 달여 만에 만나서 이혼 얘기부터 나오자 강유진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유지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미련이나 슬픔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에게도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 생길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눈빛엔 생기가 돌았고 건강해 보였다. 오히려 이혼 전보다 한층 밝아 보였다. ‘그동안 힘들었던 건 나 혼자뿐이었나.’ 강유진은 가슴속에 바위라도 얹힌 듯 숨이 막혀왔다. “지민아,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좋아. 이혼 서류를 먼저 끝내면 그때는 무슨 얘기든 다 들어줄게.” 그녀는 한마디로 강유진의 미약한 희망마저 완전히 없애 버렸다. 그는 주먹을 움켜쥔 채 쉰
유지민이 떠난 지 일곱째 날. 강유진은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뒤에는 깊은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그는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비록 이혼 숙려 기간은 끝났지만 아직 절차는 마무리되지 않았다. 이혼 증서를 발급받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모든 과정에서 유지민은 반드시 돌아와야 했다. 이 점을 깨달은 강유진을 오랫동안 침울해 있던 기운을 떨쳐내고 다시 일어섰다. 그는 휴가를 끝내고 법률사무소로 돌아온 후 바로 엄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동안 엄 변호사는 그에게 여러 차례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고 그의 야위고 피곤한 모습을 마주하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강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엄 변호사님, 그 사람에게 전해 주세요. 제가 이혼을 동의한다고요. 이혼 서류를 처리하러 돌아오라고 하세요.” 엄 변호사는 깜짝 놀라 입에 있던 차를 거의 뿜을 뻔했다. “이렇게 쉽게 동의하시겠다고요? 좀 더 붙잡을 생각은 없으세요? 그래도 3년이나 함께한 부부인데!” “그 사람은 계속 저와 대화하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 주는 수밖에 없죠. 법정까지 갈 수는 없잖아요.” 엄 변호사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유지민 씨에게 바로 연락드릴게요. 유진 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강유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오랜 긴장 상태에 있던 몸을 살짝 풀어주고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후속 절차에 대해 계획을 세웠다. 사실 강유진은 이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단지 유지민을 한 번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경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는 직접 설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0년간 자신을 사랑해 온 그녀였다. 아무리 오해가 있었더라도 그걸 풀면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엄 변호사가 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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