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Author: 율희
전지훈은 멀지 않은 곳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곧, 고아린은 강도윤의 품에서 조심스레 벗어나 드레스를 정돈했다.

그래서 그녀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강도윤의 눈빛이 전지훈을 보는 순간 한층 싸늘하게 더 식어버린 걸.

전지훈이 성큼 다가오더니 고아린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고는 마치 아무것도 못 본 듯 너스레를 떨었다.

“강... 강 대표님? 여기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목소리에는 방금까지의 오만함이 흔적도 없었다.

강도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릿하게 소매를 정리하며 시선을 고아린 쪽으로 옮겼다.

“고아린 씨, 자신에게 맞지 않는 건 미련 두지 말고 빨리 바꾸는 게 좋습니다.”

그녀는 순간 멍해졌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너무 길게 끌린 드레스 자락이었다.

그제야 고아린은 깨달았다.

이 드레스, 화려하긴 해도 결국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전지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어디서나 환대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전지훈이 누군가에게 무시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 대표님, 제 약혼녀가 좀 철이 없어서 실례를 끼쳤네요.”

그 말에 강도윤은 마침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전 대표님은 회사 일로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약혼녀가 늘 혼자 웨딩드레스를 고를 정도면 말이죠.”

그 말에 전지훈의 안색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지만 그는 여전히 고아린의 손목을 세게 쥐고 있었다.

손끝이 하얗게 변할 만큼 센 힘에 고아린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전지훈의 손을 뿌리치려 애썼지만 움직일수록 더 깊게 파고드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전 대표님.”

강도윤의 목소리는 이번엔 확실히 차가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루는 법은 그보다 훨씬 섬세해야 합니다.”

고아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지? 나를 두둔해 주는 건가? 직원들의 수군거림을 듣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전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결국 그는 억지로 그녀의 손을 놓았다.

고아린은 손목을 감싸 쥐며 살짝 고개를 들자 강도윤의 눈과 마주쳤다.

그 안에는 묘한 감정이 잠겨 있었다.

무겁고, 깊고, 읽히지 않는.

그때 직원이 다가왔다.

“강 대표님, 주문하신 물건이 준비됐습니다.”

그녀는 정중히 안내했고 강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그가 자기 곁을 지나칠 때 소매 끝이 고아린의 손바닥을 살짝 스쳤다.

찰나의 닿음, 그리고 곧 사라지는 온기.

그렇게 강도윤의 뒷모습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곧, 전지훈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강 대표님이랑 언제부터 아는 사이야?”

지금 그의 표정과 얼굴은 너무 낯설었고 7년 동안 함께했지만 도무지 속을 모를 남자 같았다.

넥타이는 비뚤어져 있었고 슈트 자락엔 미세한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영상 속, 공지연의 립스틱 색과 똑같았다.

고아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전지훈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난 네가 걱정돼서 온 거야. 그게 죄야?”

고아린은 살짝 고개를 돌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

“일 많다고 못 온다면서? 갑자기 왜 왔어?”

순간 전지훈의 표정이 굳어버렸지만 금세 미소를 지었다.

“네가 드레스 고른다는데 그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 난 너 놀라게 해주고 싶었지.”

그의 그럴듯한 연기에 고아린은 점점 더 속이 뒤집혔다.

“드레스는 결정했어? 너무 잘 어울리던데.”

그녀는 그런 전지훈의 시선이 불쾌해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조명이 너무 밝아 눈이 시리다는 이유로.

“나 피곤해.”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고아린은 빠르게 드레스를 갈아입고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거울 앞을 지나치는 중, 2층 난간에 서 있는 강도윤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사람처럼.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강도윤은 옅은 미소를 지었고 고아린은 가슴이 또다시 묘하게 저릿해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빨리 걸었다.

가게 밖, 전지훈이 서둘러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 데려다줄게.”

그 말에 고아린은 발걸음을 뚝 멈추고 눈앞의 자동차를 똑바로 바라봤다.

방금 영상 속 그들이 몸을 섞던 바로 그 차.

차 안의 공기, 냄새, 더러움이 다시 코끝에 스쳤다.

‘감히 네가...’

가만히 서 있는 고아린에게 전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왜 그래? 타.”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그럴듯한 그의 ‘가면’을 굳이 벗겨내지 않았다.

“난 내 차로 갈게.”

전지훈의 표정은 그 말에 굳었다가 금세 풀렸다.

“그래? 그럼 저녁엔 집에서 보자. 준비해 둔 깜짝선물이 있어.”

“깜짝선물?”

고아린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틀 동안의 악몽보다 더 큰 ‘선물’이 또 있을까?

지금 전지훈의 미소가 가식적인 것 같았다.

그 웃음이 너무 낯설어서 이젠 가슴이 아니라 위장이 뒤틀릴 정도였으니까.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여는 순간 은은한 장미향이 퍼지더니 전지훈이 장미 한 다발을 들고나왔다.

“아린아, 기분 좀 나아졌어? 이거 네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잖아.”

카푸치노 장미.

7년 전, 그가 처음 건넸던 바로 그 꽃이었다.

그때 전지훈은 고아린을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아린아, 넌 내 인생의 유일한 장미야.”

그 말에 설레었던 그날이 지금은 뺨을 후려치는 조롱처럼 들렸다.

‘유일한 장미? 그럼 그 여자는 뭐였는데? 영상 속, 그 뜨거운 숨결과 속삭임은? 웨딩숍 직원들이 날 불쌍히 여기던 시선은?’

“오늘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꽃으로 샀어.”

전지훈의 말에 고아린은 웃지도 못했고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억지로 참았다.

꽃은 너무 예쁘지만 사실 그녀는 이 꽃을 좋아한 적이 없었고 그 사실은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말했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건 리치핑크 꽃이라고.

하지만 전지훈이 사 오는 건 언제나 카푸치노 장미였다.

첫 번째 실수엔 웃으며 말했었다.

“지훈아, 난 리치핑크를 좋아한다니까?”

“아, 미안. 두 개가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그랬어. 다음엔 꼭 맞춰올게.”

그때 고아린은 필경 전지훈도 남자니까 꽃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고 믿었고 남자 혼자 꽃집에 가서 꽃을 고르는 것도 민망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여섯 번째도 전지훈은 늘 카푸치노 장미를 사 왔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고아린은 더 이상 지적하지 않았고 그냥 체념했다.

결국 전지훈의 사랑이란 게 그 정도였던 거다.

고아린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게 네가 말한 깜짝선물이야?”

전지훈은 미소 지었다.

“응. 요즘 회사 일로 힘들었잖아. 고생했으니까 주는 상이지.”

그녀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뻔뻔하네.’

이제야 보였다.

전지훈의 ‘사랑’은 늘 타이밍이 정확했다.

회사 프로젝트를 끝내거나 큰일을 해낸 날마다 꽃과 달콤한 말로 그녀를 달랬다.

마치 회유하듯 한 손으론 ‘칼’을 쥐고 다른 손으론 꽃을 내밀며.

이윽고 전지훈은 고아린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꽃다발을 그녀 품에 억지로 안겼다.

그리고 자연스레 고아린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시선은 점점 더 밑으로, 더 은밀한 곳으로 향했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녀의 곡선이 떠오르자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매일 똑같은 검은 정장만 입고 다니는 고아린이었기에 전지훈은 그녀가 이렇게 예쁜 줄 잊고 있었다.

공지연과 고아린, 둘 다 예쁘지만 공지연은 한 눈에 봐도 미녀였고 고아린은 마음을 써야만 아름다움이 보였다.

‘정장이 아린이 몸매를 봉인하고 있었네.’

7년 전, 전지훈은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 반했었지만 그 뒤로는...

마음이 점점 더 복잡해진 그는 다정하게 고아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린아, 오늘 드레스를 입은 네 모습은 너무 예뻤어.”

전지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그런 정장은 입지 마. 난 치마를 입은 네가 더 좋아.”

그의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다.

“예쁘게 하고 다녀야지. 그래야 보는 내 기분이 좋아지잖아. 그렇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제30화

    [아린 씨, 지금 베이 빌리지 입구에 있습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고아린은 그 한 줄의 메시지를 10초 넘게 뚫어지게 바라봤다.‘강 대표님? 강 대표님이 왜 베이 빌리지에 오셨지?’무의식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는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쳤다.망설이고 있던 그 순간,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저번에 지민이가 아린 씨 치마를 더럽혔었잖아요? 오늘 마침 근처라 새 치마 한 벌 사 들고 왔습니다.]고아린은 멍해졌다.‘그날 묻은 건 고작 눈물 몇 방울이었는데...’서둘러 답장을 보냈다.[괜찮아요, 치마는 이미 깨끗이 세탁했어요.]곧바로 답장이 왔다.[차도 이미 안으로 들어왔어요. 몇 동인가요?]머릿속이 멍해졌지만 고아린은 강도윤을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손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 그냥 그대로 주소를 입력해 보냈다.그렇게 5분쯤 지나,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고아린이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금테 안경을 쓴 강도윤이 서 있었다.기본 디자인의 흰 셔츠를 허리에 단정히 넣었고 검정색 잔무늬 넥타이는 금속 타이핀과 함께 완벽히 매무새가 잡혀 있었다.그런데 그런 그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분홍색 쇼핑백은 어딘가 조금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고아린은 그중 하나에 새겨진 파다 로고를 알아봤다.그녀를 보자 강도윤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요.”고아린도 예의 바르게 미소지었다.“강 대표님, 너무 격식 차리시는 거 아니에요? 직접 오기까지 하시고.”그녀가 몸을 살짝 비켜 길을 열어주었지만 강도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는 문 앞에 서서 그녀의 조금 부어 있는 눈가를 바라보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을까요?”“물론이죠.”고아린은 잠시 말을 멈추고 덧붙였다.“저 혼자 살고 있어서 남자용 슬리퍼는 없어요. 그냥 들어오세요.”이 말을 들은 강도윤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곧 강도윤이 문턱을 넘자 은은한 설송 향이 실내로

  • 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제29화

    전지훈의 얼굴에 잠시 불편한 기색이 스쳤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억지를 부렸다.“왜 자꾸 그런 사소하고 무의미한 거로 집착하는 거야?”고아린은 새삼스레 그의 궤변 능력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두 장미 다 비슷하잖아. 게다가 내가 너한테 골라준 카푸치노 장미는 더 비싸. 그게 내 진심을 보여주는 거 아냐?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좋아하는 거로 골랐잖아.”“비슷하다...”고아린은 그 네 글자를 되뇌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7년을 사랑했던 남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담담하지만 묵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전지훈, 두 번 분량의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마셨을 때, 고수가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었을 때, 린넨 셔츠를 입었을 때... 아직도 그게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전지훈의 얼굴이 굳었다. 입을 열려 했지만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고아린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비슷한 게 아니야. 넌 그저 내가 비슷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지.”그녀는 전지훈을 밀쳐내며 현관문을 가리켰다.“여기 내 집이야. 나가.”이에 전지훈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고아린! 너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이래서 어떻게 결혼을 해?”“안 해.”고아린은 그렇게 말했다.마치 내일도 비가 올 거라 말하듯,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순간 공기가 얼어붙었고 전지훈은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너 지금 무슨 말 한 건지 알아?”그는 불쑥 다가오며 억지로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고아린, 요즘 너 완전 딴사람 같아. 휴가에 이제는 결혼도 하기 싫다니... 도대체 뭘 원하는 건데? 내가 너한테 해준 게 부족했어?”최면을 걸듯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속삭이듯 말했다.“곰곰이 생각해 봐. 우리가 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누가 더 많이 노력했는지. 난 정말 최선을 다했잖아. 부모님보다도 너한테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어. 물론 실수도 있었지

  • 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제28화

    며칠 전 누군가가 말했다.“고 비서님이 한 남자랑 디저트 가게에서 다정하게 있는 걸 봤어요. 딱 봐도 약혼자 같더라니까요?”전지훈은 처음에는 아무도 자신과 고아린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한 걸 다행이라고 여겼었다.그런데 곧장 그 안도감은 질투로 바뀌었다.‘아린이가 다른 남자랑 디저트 가게를? 아린이는 내 사람이야. 그런데 다른 남자가 아린이를 건드렸다고?’그 말도 안 되는 괴리감이 오늘 그가 이곳까지 찾아온 진짜 이유였다.고아린은 자리에 선 채로 전지훈을 차갑게 노려보았다.7년을 함께한 사이라 전지훈이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이미 뼛속까지 꿰뚫고 있었다.겨우 희미하게 빛이 들기 시작한 요즘이었는데 그가 나타나는 순간, 모든 게 다시 무너졌다.“나 안 돌아갈 거야.”고아린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전지훈은 이마를 찌푸린 채 마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안 돌아가다니? 휴가 낸 지 꽤 됐잖아. 설마... 사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굳이 대꾸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묵인하는 듯했다.전지훈은 숨을 길게 들이마시더니 화를 억누르며 결국 물었다.“고아린, 너 설마 바람피우는 거야?”창밖의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 너머로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전지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그 디저트 가게에서 네 옆에 있던 남자, 누구야?”성큼 한발 다가서는 전지훈의 눈빛에는 의심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날 미행한 거야?”고아린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났고 살짝 떨렸다.“그럼 인정하는 거야?”그는 멈추지 않았다.“갑자기 치마 입고 휴가 내고... 다 그 남자 때문이지? 요즘 너 하는 행동 하나하나 전부 이상했어.”전에는 그냥 스쳐 갔던 행동들이 지금은 다 그녀를 저지른 혐의로 들이댈 수 있는 ‘증거’가 되었다.“요 며칠 동안 도대체 뭘 한 거야? 오늘은 누구랑 집에서 밥을 먹은 건데? 설마... 그 남자? 너희 지금 어느 단계까지 간 거야?”참을성이

  • 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제27화

    ‘그런데 왜 이번에는 강 대표님이었지?’고아린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화장실로 걸어가 찬물을 손에 받아 얼굴에 끼얹고 두 뺨을 톡톡 쳤다.‘분명 어제 먹은 그 양매 케이크 탓이야.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돼. 정말...’...주말 동안 달빛 공방에는 20명 정도 되는 단체 손님이 다녀갔다. 월요일이 되자 손가희는 웬일로 자비를 베풀며 하루 휴업을 선언했고 둘은 약속을 잡아 고아린의 집에서 고기나 구워 먹기로 했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성북시는 벌써 장마철에 들어섰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 무렵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졌고 인근 지하철 운행도 전면 중단되었다. 다행히 식사가 끝날 즈음에는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었고 손가희는 얼른 택시를 잡아 귀가했다.고아린이 식탁을 정리하던 중,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뭐 두고 갔나...”손가희가 뭔가를 깜빡했나 싶어, 그녀는 작은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지훈이 정장을 차려입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한 손에는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카푸치노가 아닌 리치 핑크 장미였다.고아린은 순간적으로 아득해졌다.“뭘 그렇게 놀라?”전지훈은 가볍게 웃으며 꽃다발을 반대 손으로 옮겼고 다른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이에 고아린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자 그의 손길은 허공을 맴돌았다.눈빛이 잠시 어두워지더니 전지훈은 말없이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왜 왔어?”고아린은 문을 닫으며 물었다.전지훈은 대답하지 않은 채 집 안을 훑어보다가 시선이 식탁 위에 멈췄다.아직 정리되지 않은, 두 사람 분량의 식기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그러더니 들고 있던 꽃을 현관 한켠에 툭 던지듯 내려놓으며 어딘가 불쾌해 보이는 어투로 말했다.“내가 오면 안 돼?”고아린은 그를 뚫어지게 보다가 순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예전에는 거의 오지도 않았잖아.”베이 빌리지의 집은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모님이 그녀에게 사준 집이

  • 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제26화

    “언니는 양매 안 좋아해요?”고아린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웃었다.“언니가 양매를 얼마나 좋아하는데.”말끝에 자연스럽게 힘이 풀리며 살짝 그리운 기색까지 묻어났다.“어릴 때, 외할머니댁 옆에 양매나무가 있었거든. 여름마다 열매가 익을 때면 언니가 나무에 올라가서 직접 따기도 했어.”그 말을 들은 강지민은 눈빛을 반짝이며 온 얼굴로 감탄을 표하더니 두 손에 엄지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언니 진짜 멋져요! 다음에 지민이도 나무 올라가서 양매 딸래요!”고아린은 순간 멈칫했다.‘큰일 났다! 잘못된 걸 가르쳐줬잖아!’그녀는 급히 손을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린아이는 나무 올라가면 안 돼. 떨어져서 다칠 수 있거든.”강지민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그런데 지민이네 집에도 양매나무 있어요. 삼촌이 심었대요. 벌써 몇 년 됐는데 저보다 나이 많아요!”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강도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단정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강씨 가문 도련님이 나무를 심는 취미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강도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10년 됐습니다.”‘10년?’고아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10년 전이면... 강 대표님은 겨우 열여덟이나 열아홉이었을 텐데?’아직 생각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옆에서 강지민이 또다시 다가와 말했다.“언니, 양매 열매 열리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따요, 네?”“...”‘내가 그 집에?’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손가락을 꼽으며 날을 세는 강지민의 들뜬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아린은 속으로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 절대 안 돼.’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던 찰나, 마주 앉은 강도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였지만 단호하고 또렷하게 들렸다.“양매가 열릴 무렵, 아린 씨도 꼭 놀러 오시죠.”“...”‘이제 정말 거절할 수가 없겠네.’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 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제25화

    바로 옆에 있던 강지민도 그의 말을 듣고는 숟가락을 멈추고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고아린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두 쌍의 눈망울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운데 고아린은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그만 입에 담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꺼내버렸다.“강 대표님이 조카를 이렇게 아끼시는 거 보니까... 나중에 딸 생기시면 딸바보 될 것 같아서요...”말이 입에서 먼저 나오고 생각은 나중에야 따라왔다.고아린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바로 후회했다.역시나 강도윤의 미간이 살짝 움직이고 의미심장한 미소가 담긴 눈빛이 그녀에게 향했다.고아린은 순식간에 귀까지 뜨거워졌다.‘설마 강씨 가문이 그 고지식하다는 남아선호 집안은 아니겠지? 무려 가훈만 321조항이라는 소문도 있는데...’당황한 나머지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아들... 아들도요...”점점 더 수습이 안 됐고 고아린은 그 자리에서 케이크 접시에 얼굴을 박고 싶을 정도였다.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반응은 강도윤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고 은은한 조명 아래 그의 갈색빛 눈동자가 꿀 사탕처럼 부드럽게 빛났다.“전 제 아내의 의견을 존중합니다.”그가 고아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목소리는 바람결처럼 조용했지만 귓가에 닿는 울림은 묘하게 짙었다.“딸이든 아들이든 전 다 좋아요. 다만...”그가 허리를 살짝 펴며 자세를 고쳐 앉자 손목에 찬 시계에서 은근한 빛이 번뜩였다.“그 사람은 언제나 제 우선순위 1번이에요.”분명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니었는데 고아린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급히 고개를 숙여 냅킨을 정리하고 케이크 한 숟가락을 퍼서 입에 넣었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머리 위로 가볍게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고아린은 놀라서 숟가락을 놓칠 뻔했다.가게 안 음악이 절묘하게 바뀌었다.라는 곡이 흐르기 시작했고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에 묻힌 나른한 남자의 목소리가 따라왔다.“...If I say you’re the one, would you believe me?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