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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율희
고아린의 온몸이 굳어버렸고 발끝에서 시작된 냉기가 순식간에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끝까지 퍼졌다.

마치 몸속의 피와 신경이 한순간에 얼어붙은 느낌에 휘청거렸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고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7년 동안 사랑했던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얼굴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미소와 노골적인 시선이 얹혀 있었다.

전지훈은 마치 그녀를 감상하듯, 아니, 평가하듯 보고 있었다.

그 순간, 고아린의 마음속엔 단 하나의 단어만이 떠올랐다.

실망, 끝도 없어 바닥을 알 수 없는 실망.

‘정장 입지 말라고? 내가 치마를 입으면 기분이 좋아?’

전지훈이 방금 내뱉은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돌았고 그 말은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그의 목소리 하나, 억양 하나하나가 독처럼 흘러들었다.

고아린은 입을 뻥긋거렸지만 가슴 한가운데에 돌덩이가 걸린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소리 없는 절규가 터져 나왔다.

‘내가 그 올드한 정장이 좋아서 입는 줄 알아? 예쁜 옷을 싫어해서 안 입는다고 생각해? 전지훈, 너 정말 잊었어?’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수없이 많은 밤들, 하이힐을 신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날들.

그때 전지훈은 이런 말을 했었다.

“아린아, 넌 정말 대단해. 오늘 너 완전 여왕 같았어. 아무도 너 무시 못 하겠더라.”

그런 말을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가벼운 말투로 상처를 주는 말을 툭툭 던지고 있었다.

전지훈의 말투는 상냥하게 들렸지만 그 속엔 오만과 권태, 그리고 고아린을 장식품으로 여기는 시선이 숨겨져 있었다.

그보다 잔인한 조롱이 또 있을까, 그보다 어이없는 사랑의 파괴가 또 있을까.

고아린은 그 웃음을 보며 속이 뒤집혔고 지금 이 남자가 낯설어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전지훈은 평소 같았으면 그녀의 미묘한 기분 변화를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린아, 널 갖고 싶어.”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말과 숨결에 고아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그녀는 몸을 비틀며 전지훈의 품을 벗어났고 손에 들고 있던 장미를 그대로 그의 품으로 내던졌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불쾌감이 치밀어 오른 전지훈의 표정이 굳었지만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방 와. 난 방에서 기다릴게.”

고아린은 마치 도망치듯 욕실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세면대를 짚은 채 숨을 연신 몰아쉬었다.

솔직히 손이 떨려서 수도꼭지를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였다.

이윽고 차가운 물이 손등을 흘러내리자 그녀는 미친 듯이 손을 문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씻어도 전지훈의 손길과 숨결이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은 너무 창백했고 입술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시야에 뭔가 검은 것이 스쳤다.

자세히 보니 거울 아래쪽, 수납장 문틈 사이로 검은 천 조각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서늘한 예감이 든 고아린은 숨을 죽이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문을 열자 그 안엔 검은 스타킹 한 짝이 구겨진 채 들어 있었고 이미 허벅지 부분이 찢겨 나가 있었다.

그 모양이 무엇을 암시하는지도 너무 노골적이었다.

고아린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건 그녀의 것이 아니었고 지금까지 그런 속옷을 입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 집, 둘만의 신혼집 열쇠를 가진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그녀는 검은 스타킹을 움켜쥐고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지만 이미 피가 머리로 몰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지훈, 네가 기어코 이 집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네.’

“아란아, 앞으로 여긴 네가 유일한 여주인이야.”

3년 전, 그가 무릎을 꿇고 고아린의 손에 열쇠를 쥐여주던 장면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 모든 약속, 그 모든 말들이 지금은 저주처럼 들렸다.

전지훈은 그녀를 배신했을 뿐 아니라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들은 이 집 안의 어디에서 사랑을 나눴을까?

고아린이 직접 고른 양모 카펫 위에서?

아니면 같이 영화나 보자며 웃던 자리에서?

혹은 주방의 대리석 위, 서툰 손으로 미역국을 끓여주던 그곳에서?

둘 다 아니면 고아린이 순진하게 두 사람의 미래를 꿈꾸던 그 침대 위에서?

상상만으로도 속이 요동쳤다.

고아린은 세면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더러워. 이 집 공기마저 모든 게 다 더러워.’

그녀는 손에 든 스타킹을 내던지다가 힘에 몸이 저절로 뒤로 물러났고 등이 문에 부딪혀 큰 소리가 났다.

이윽고 머릿속엔 영상이 겹쳤다.

차 안에서 그와 공지연이 뒤엉켜 있던 장면, 그리고 방금 본 그 스타킹의 색, 모든 조각이 퍼즐처럼 딱 맞춰졌다.

고아린의 눈동자는 점점 텅 비어갔다.

그녀는 거울 앞을 비틀비틀 걸어가며 서랍을 열었고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가위.

가위를 움켜쥔 손이 덜덜 떨렸지만 그녀는 다시 스타킹을 집어 들었다.

얼마 후, 무언가가 찢기는 소리가 공기 속을 가르며 울렸다.

한 번, 또 한 번, 다시 한번.

가위질을 할 때마다 고아린은 울음을 삼켰다.

눈물이 흐려진 시야 속에서 그녀는 마치 이 행동으로 모든 더러움을 지워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무심코 가윗날이 손가락을 스치는 바람에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붉은 피가 타일 위로 떨어졌다.

그제야 고아린은 정신이 돌아왔지만 공허함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린아, 다 했어? 너무 오래 걸리잖아. 나 기다리게 하지 마.”

그 목소리.

가식적인 다정함과 더러운 욕망이 뒤섞인 톤.

그녀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전지훈의 목소리를 들으니 모든 게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말투, 이런 목소리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에게 했을까?’

고아린은 자신이 너무 멍청했고 순진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모든 배신과 고통,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그게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파릇파릇한 청춘 7년을 앗아간 남자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잃어버린 시간, 무너진 마음을 누가 돌려줄 수 있을까?’

고아린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가위를 향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굽혀 그것을 주워들었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고아린은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 문 뒤편에 서 있을 남자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전지훈의 웃음, 그 가식적인 미소가.

그녀는 가위를 문에 가져다 댔다.

문 너머, 바로 그 남자의 심장 높이로.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손끝의 힘이 점점 세졌지만 고아린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찔러보면 전지훈의 심장은 무슨 색일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붉을까? 아니면 이미 거짓과 배신에 썩어버린 검은색일까?’

욕실엔 고아린의 거친 숨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숨 막히는 정적 끝에 문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이윽고 고아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문고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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