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순간 들킨 듯한 기분에 살짝 당황했지만 금세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혹시라도 제대로 검진을 못 받아서 치료 시기를 놓칠까 봐 그런 거죠.” 사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챙긴 이유는 반반이었다. 정말로 배경빈이 크게 다친 건 아닌지 걱정된 것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언제 또 전화를 걸어 자신을 불러낼지 몰라서였다. 그리고 문제는, 그가 부르면 자신이 거절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배경빈은 배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강현우와 엮이는 것도 버거운데 이제 배씨 가문까지 엮이면 골치가 아플 게 분명했다. 괜한 오해를 살 필요도, 불필요한 관계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다행히 검사가 끝난 뒤 확인해 보니 배경빈의 부상은 입술에 난 작은 상처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다행이네요.” 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배경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계를 흘끗 보며 말했다. “점심시간이 딱 됐네요. 같이 식사할까요?” 윤하경은 순간 거절하려 했지만 그가 덧붙였다. “어제 말한 디자인 세부 사항도 아직 다 정리 못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니 마냥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결국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식당에 도착해 마주 앉았을 때, 윤하경은 문득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조용하고 성실한 디자이너 같았지만 지금 보면 어쩐지 그런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주문을 마친 뒤, 윤하경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속 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언제죠?” 배경빈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걸 내가 말해 버리면 재미없죠.”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하죠. 만약 이 식사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억해 내면 제가 밥을 살게요. 하지만 끝까지 기억 못 하면 윤
그의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고 위압적이었다. 아침에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더니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밥을 먹겠다고 했기에 윤하경은 도저히 강현우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배경빈과 배지훈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굳이 거절하기도 애매했고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죠.” 배지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배경빈을 노려보며 자리에 앉았다. 배경빈은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았고 두 형제 사이에 흐르는 싸늘한 기류가 뚜렷했다. 그리고 문제는 좌석이었다. 이미 자리는 거의 다 찼고 남은 공간은 윤하경 옆자리뿐이어서 강현우는 별다른 말 없이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앉았고 앉자마자 익숙한 우디향이 퍼졌다. 아침에 그와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진 탓일까. 그리고 지금 옆에서는 배 형제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식탁 분위기는 어색하고도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강현우가 담배를 꺼내 들었다. 불을 붙인 후,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윤하경이랑 꽤 친한 사이인가 본데?”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 했지만 배경빈이 먼저 대답했다. “친해.”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표정도 한없이 진지했다. 강현우는 연기를 뿜어내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그래?” 그는 살짝 웃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배경빈은 잠시 생각하더니 태연하게 답했다. “음... 한 10년쯤 됐을까?” “...”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굳었고 무의식적으로 강현우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그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방금까지도 무심한 듯 보였던 그의 시선이 깊어졌다. 윤하경도 아침에 그녀가 강현우에게 했던 말과 지금 배경빈의 말이 완전히 상반된다는 것을 알았다.자신이 분명 ‘일하면서 알게 된 사이’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10년 지기라니. 강현우가 불쾌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저기, 사실은...” 강현우의 눈빛이 너무 날카롭고 차가웠기 때문에
“저기, 음식이 나왔네요. 얼른 드세요.” 윤하경은 어색하게 웃으며 강현우에게 고기 한 점을 집어 주었다. 그를 달래 보려는 작은 시도였지만 강현우는 담배를 피우며 연기만 내뿜을 뿐, 손을 뻗어 음식을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담배 연기 너머에서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경이는 참 배려심이 깊네.” 그의 말투는 여유로웠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길은 점점 대담해졌고 그녀의 뜨거워진 귓가를 유심히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경빈이에게도 한 점 집어 줘.” 잠시 침묵이 흘렀고 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경빈 씨는 알아서 잘 먹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손을 내리고 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살며시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히듯 손가락 끝을 스쳤고 그 의미는 명확했다. ‘제발 이쯤에서 멈춰 줘.’강현우는 그녀의 작은 저항이 재미있다는 듯 하얀 치아를 드러나며 피식 웃었다.만약 지금 그의 손이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저 무해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지훈은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겠다.” 그러고는 배경빈을 향해 말했다. “너도 같이 가자.” 배경빈은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었다. “형이나 먼저 가. 난 배고파서 밥 좀 더 먹을래.” 그러자 배지훈은 더 이상 듣고 있을 필요도 없다는 듯, 강제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됐고 나 도와줄 일 있어. 빨리 나와.” 윤하경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도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이제 됐죠?’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야? 아쉬워하는 거야?” “아니요.” 윤하경은 즉각 고개를 저었다. “저랑 경빈 씨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
윤하경은 강현우와 내일 아침 뉴스의 헤드라인에 오르기 싫었다.[몰락한 재벌 딸이 강씨 가문 후계자와 레스토랑에서 하룻밤!]이런 기사가 나올 걸 상상만 해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윤하경은 원래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강현우 앞에서는 늘 반박할 틈도 없이 휘둘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약점을 손쉽게 쥐고 있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서 하고 싶어?“ 강현우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가벼운 어조로 물었고 냉정하고 절제된 그답지 않은 분위기였다. 윤하경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디든 좋아요. 여기만 아니면 돼요. 제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고 몇몇은 소곤거리며 손가락질까지 하고 있었다. 평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이상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강현우의 얼굴은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누군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내일 아침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할 게 뻔했다. 강현우는 미묘한 흥미가 깃든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거둬들였고 윤하경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할 틈도 없이, 강현우가 몇 걸음 걸어가더니 뒤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뭐해? 안 따라오고.” 그가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압박하며 말했다. “내가 안아다 옮겨줘야 해?“ 그의 크고 날렵한 체격이 주는 위압감에 윤하경은 순간 몸을 굳혔다. “어디로 가는데요?“ 강현우는 뒤돌아서서 테이블 위의 담배를 눌러 끄고 다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여기만 아니면 된다며.” 그가 낮게 속삭였다. “아니면... 여기서 해볼까?“ “아니! 절대 안 돼요!“ 윤하경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그녀는 순순히 그의 팔을 붙잡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시죠, 현우 씨.” 주변의 시선이 점점 더 느껴졌
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질문이 많네.”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먼저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윤하경은 문 앞에 멈춰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별장 입구 위로 커다랗게 걸린 두 글자 ‘헤븐’, 이곳이 어떤 곳인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경성 상류층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 겉으로는 고급 개인 클럽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말하기 어려운 ‘회색 산업’ 이 운영되는 곳이었다. 여기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세상의 평범한 도덕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향락을 즐길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가격 또한 천문학적이었다. 하룻밤에 2억 원은 기본이었고 때때로 몇백억의 거래도 이루어진다고 했다. 게다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헤븐’에 입장하려면 특별한 초대장 또는 멤버십이 필요했다. 이곳에서 노는 사람들은 경성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최상류층 인사들이었다. 더군다나 소문에 따르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법조차 넘볼 수 없다고 했다. 즉, 여기에 들어온 순간, 세상의 법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강현우가 왜 자신을 여기에 데려온 걸까? 불안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를 때,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하경 씨, 대표님께서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리 강현우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해도, 설마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지는 않겠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내부 인테리어는 절제된 고급스러움이 가득했다. 화려한 치장이 없는 대신, 곳곳에 놓인 가구와 장식품들이 모두 최고급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윤하경은 내부를 감상할 틈도 없이, 곧장 한 여성이 다가왔다. 연한 베이비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부드러운
강현우는 전면 유리창 앞에 여유롭게 서 있었고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하자, 윤하경이 보낸 메시지였다. [이걸 왜 입어야 하죠?]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답장을 입력했다. [입지 않아도 돼.]윤하경은 이 메시지를 보고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다시 진동이 울렸다. [대신, 문 앞에 있는 사람이 도와줄 거야.]이 짧은 문장에서 그녀는 어떤 선택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강현우가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의 말을 거스르면 어떤 결과가 기다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헤븐’의 직원들이 그의 말을 이렇게까지 따르는 걸 보면 그는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이곳과 깊은 관계 가 있는 사람이라 어쩌면 이곳의 주인일 수도 있다. ‘도망칠까?’그 생각이 스쳤지만 그녀는 곧바로 포기했다. 강현우는 본래 잔혹한 성격이었고 변덕스럽기까지 했다. 그가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녀 따위는 손쉽게 짓밟힐 뿐이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천천히 상자 속의 옷을 꺼냈다. 얇디얇은 검은 레이스. 몸의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려주는 천. 이건 옷이라기보다는, 유혹을 위한 도구에 가까웠다. 몸의 곡선을 더욱 강조하는 실루엣에 어깨부터 허리까지 아슬아슬하게 드러나는 디자인까지.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니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하지만 더 당황스러운 건, 이 정도가 이곳에서는 ‘평범한’ 수준이라는 사실이었다. 조금 전 복도를 지나오며 본 광경들을 떠올리자, 그녀는 절로 몸을 움츠렸다. 거기 있던 여자들은 더 노골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녀보다 훨씬 더 대담한 옷을 입고 심지어는 중요 부위조차 제대로 가리지 않은 모습도 보였다. 윤하경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억누르며 마지막으로 거울 속 자신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드디어 문을 열고 나오자, 아까 그녀를 안내했던 여성 직원이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강현우,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윤하경은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귀를 찢을 듯한 음악 소리에 그녀의 외침은 완전히 묻혀버렸다. 마치 이곳에선 그녀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듯이 말이다.그녀가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 어느새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혼자 왔어?” 윤하경은 단숨에 고개를 돌려, 그를 단호하게 노려보았다. “꺼져.” 남자는 마스크 뒤에서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여기 온 이유가 뻔한데 왜 그런 척이야?” 그 말에 윤하경은 등골이 오싹해졌고 이 파티가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대꾸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오히려 그런 반응을 흥미로워하며 더 다가왔다. “겁낼 거 없어.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까.” 그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하경은 긴장 속에서 침을 삼켰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에는 기묘한 향이 감돌았다. 강렬한 향수 냄새 같기도 했지만 그 속에 묘하게 나른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성분이 섞여 있는 듯했다. “여기가... 대체 뭐 하는 곳이야?” 그녀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남자는 비웃으며 대꾸했다. “어이쿠, 순진한 척하네? 몰랐어?” 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파티의 이름은 '욕망'이야.” 그 말에 윤하경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이제는 굳이 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한 걸음 더 물러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지 마.” 그러자 남자는 그녀를 흥미를 잃은 듯이 바라보다가 비웃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흥. 재미없네.” 그는 윤하경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한편 강현우는 모니터 속에서 윤하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은 태연해 보였지만 눈동자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려
“강현우가 네가 여기 온 걸 알면 널 가만두겠냐?” 이석훈의 눈빛이 흥분으로 번쩍였다. 설마 이곳에서 윤하경을 보게 될 줄이야. 지난번 윤하경을 봤을 때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강현우의 여자였고 그래서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윤하경이 이곳에 온 걸 본 순간, 그는 심장이 터질 듯한 쾌감을 느꼈다. 특히나 지금 그녀의 차림을 보니 그의 몸은 저절로 반응하고 있었다. 이석훈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침대에서는 나도 강현우 못지않아.” 그의 더러운 말에 윤하경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혐오감이 치솟았고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꺼져.” 그녀는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숨고 싶었지만 이석훈은 윤하경을 놔둘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는 비웃으며 그녀를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이석훈의 역겨운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뭘 그렇게 착한 척해?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몰라? 아니면 너한테는 강현우만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윤하경은 온몸이 굳어졌다. 이석훈은 그녀가 반응이 없는 걸 보고 그녀가 받아들이고 있다고 착각하며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여기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아. 침대에서 네가 얼마나 요란하게 소리쳐도,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줄 테니까. 물론, 나한테 잘해줘야겠지?”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고 뜨겁고 축축한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 그 순간,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 “꺼져!”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이석훈을 밀어냈다. “이 미친...!” 예상치 못한 힘에 중심을 잃은 이석훈이 뒤로 휘청거리며 벽에 부딪혔다. 그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고 화가 난 이석훈은 윤하경의 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이년이!” 그녀는 질식할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체격 차이 때문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