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윤하경이 당황하고 있는 것과 달리, 강현석은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길게 이어진 흉터가 있었고 웃을 때마다 그 상처가 더욱 도드라져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하경 씨. 네 이름은 오래전부터 들었어. 다들 경성 최고의 미인이라고 하더군. 다만 집안이 좀 아쉽다 싶었지. 난 그런 거 따지지 않으니까, 우리 한번 즐겨볼까? 걱정하지 마. 나랑만 잘 지내면 돈 문제는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관심 없어요.” 그녀의 빠른 대답에 강현석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가 웃음을 거두자, 방 안의 분위기까지 서늘해졌다. 어디선가 칼을 꺼내 들더니 장난스럽게 나무 테이블에 푹 찔렀다가 빼내기를 반복하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눈치 없는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강현석은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며 다시 웃었다. “한 번 더 말해봐. 관심 있어?” 그의 웃음은 강현우와 달랐다. 겉보기에는 부드러운 듯했지만 속에는 날 선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윤하경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현석 씨, 저는...” “흥.”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씩 다가왔다. “보아하니 아직 날 잘 모르나 본데.” 그는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가까이 다가오자 엄청난 위압감을 자아냈다.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뒤로 감추고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면서도, 얼굴에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다들 현석 씨가 신사적이라고 하던데요. 설마 저 같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시진 않겠죠?” “오?” 강현석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보아하니 너도 날 잘 모르나 보네.” 그는 칼을 들어 윤하경의 어깨끈에 대고 살짝 힘을 줬다. 쓱!그러자 가느다란 끈이 한순간에 두 동강 났고 윤하경은 황급히 손으로 옷을 붙잡았다. 순간 강현석은
강현우는 윤하경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의 시선은 오로지 강현석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가볍게 웃음을 지은 그는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덜렁대서야... 형, 몸 관리 좀 잘하시지 그래?” 그러더니 천천히 손을 흔들며 우지원에게 지시했다. “의사 불러. 형 다치신 것 같은데 괜히 뇌라도 다쳤으면 큰일이잖아.” 윤하경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 강현우의 말은 마치 걱정하는 듯 들리지만 속뜻을 모를 수없는 날카로운 경고였다. “네, 알겠습니다.” 우지원은 즉시 윤하경에게 눈짓을 했고 윤하경도 상황을 눈치챘다. 이 자리에 더 오래 남아 있는 건 더 큰 문제를 불러올 게 뻔했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려 우지원을 따라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강현석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야, 윤하경! 어디 가려고? 날 다치게 해놓고 그냥 가겠다고?”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였지만 강현우가 태연하게 앞으로 나서며 그의 길을 막아섰다. 강현석은 강현우를 노려보며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넌 결국 이 여자를 감싸겠다는 거야?” 강현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했다. “아버지가 지난번에 뭐라고 하셨더라? 밖에서 사고 치지 말고 제발 강씨 가문 망신 좀 시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형?” 강현우의 말투는 여전히 가볍고 여유로웠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고는 날카로웠다. 강현석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하. 그래, 맞아! 우리 셋째 말이 맞지!” 그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다시 한번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래, 좋아.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지.”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는 다시 입을 열며 날카로운 시선을 윤하경에게 돌렸다. “하지만 말이야, 이 여자, 날 다치게 한 건 맞잖아? 그럼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윤하경은 입술
우지원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윤하경 쪽으로 다가왔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은 절대 하경 씨 때문이 아니라 원래 강현석을 손봐줄 생각이었을 거니까요. 오늘 일부러 사람까지 몰고 와서 기세등등하게 등장한 거 보면 아마 애초에 판을 키울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대표님 앞에서 그 수가 통할 리 없죠.”그 말을 듣고서야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조금 풀었다.우지원은 그녀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가더니 준비된 차의 문을 열었다.“얼른 타요. 대표님이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했어요.”윤하경은 차를 타려다 말고 망설이듯 머뭇거렸다.“정말 괜찮을까요? 강현우 씨, 다치진 않겠죠?”우지원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설마요. 대표님이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에요? 여긴 원래 우리 대표님의 구역이에요.”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차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고도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계속 생각에 잠겼다.강현우와 강현석 둘이 싸우면 과연 누가 이길까? 강현석은 누구도 믿지 않는 잔혹한 성격의 인물이고 강현우는 한 번 움켜쥔 것을 절대 놓지 않는 사람이다.싸움이 붙으면 둘 다 쉽게 물러서지 않을 텐데....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회사에 도착고 차에서 내리며 윤하경은 우지원에게 가볍게 인사했다.“고마워요.”우지원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아이고 하경 씨, 그렇게 예의 차리면 대표님이 알면 난리 납니다. 다음부턴 편하게 대해줘요.”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차를 몰고 떠났다. 윤하경은 깊은숨을 내쉬며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책상과 서류들은 엉망이었고 사무실은 마치 도둑이 들었던 것처럼 난장판이었다.사무실에 남아 있는 건 소지연뿐이었고 책상에 앉아 머리를 괴고 있던 소지연은 윤하경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누가 이랬어?”윤하경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소지연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눌렀다.“
윤수철은 애초에 윤하경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그런데도 그녀가 소파에 앉아 자신을 추궁하는 모습에, 속에서부터 열불이 났다.“집에 돌아오면 먼저 어른께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디서 감히 이런 태도로 나를 대하는 거지?”윤수철은 화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 옆에서 임수연은 조용히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달래듯 말했다.“여보, 하경이가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괜히 화내지 말아요.”부드러운 목소리에,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 평소였다면 혹할 만한 모습이었겠지만 윤하경은 이미 수없이 속아온 터라 이제는 그 연기가 지겹기만 했다.연극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진짜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지켜볼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서류 한 장을 임수연 앞으로 내밀었다.“이 차용증,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요?”윤수철은 서류를 힐끗 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뭐야?”임수연의 입술이 살짝 떨렸지만 윤하경은 그녀의 표정을 보자마자 임수연이 이 일을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윤수철을 바라봤다.“여보, 나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모른다고요?”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살다 살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검은 글씨로 선명하게 당신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면 남몰래 남자라도 하나 키우느라 이 돈을 빌린 거예요?”임수연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윤수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입 좀 다물어! 그렇게 무례하게 굴 거면 당장 나가!”“나가도 상관없어요.”윤하경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 전에, 이 돈은 갚고 가세요. 이미 저쪽에서 공사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어요.”그러자 임수연은 깊은 한숨을 쉬며 애처롭게 윤수철을 바라봤다.“여보, 하경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정말 급한 일이 있는 게 아닐까요?”“마침 제 손에 좀
윤하경이 비꼬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급해하시는 걸 보니 제가 제대로 찌른 모양이네요?” 윤수철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고 분노로 얼굴 근육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윤하경은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우아한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아줌마가 끝까지 아니라고 하신다면 뭐... 저야 상관없어요. 나중에 후회만 안 하시면 되겠네요.” 그녀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던졌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임수연은 속으로 불안해졌다.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정말 끝까지 발뺌하실 건가요?” 윤수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윤하경이 이렇게까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걸 보니 그녀가 허튼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불안해진 그는 곧바로 임수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임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피하는 듯한 시선이 그녀의 불안을 드러냈고 윤하경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줌마,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문제 커져도 저한테 원망하지 마세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고 굳이 나서서 해결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문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 임수연의 손이 주먹 쥐듯이 살짝 떨렸다. 마침내 그녀는 참지 못하고 윤수철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보, 먼저 올라가서 좀 쉬어요. 괜히 하경이한테 화내지 말고요.” “꼴 좀 봐. 딸이라는 애가 아버지한테 인사 한마디 없이 와서 윽박지르기나 하고 있잖아!” 윤수철은 그녀의 말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꽉 쥐었다. “약혼도 내팽개치더니 이제는 부모한테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놈을 내가 왜 자식으로 둬야 하는 거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격양되게 기침했다. 임수연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옆에서 부축했다. 그러면서도 슬쩍 눈짓으로
임수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힘껏 내던졌다. “엄마, 뭐 하는 거야?”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윤하연이 이 광경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임수연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곧장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아, 너 지금 가진 돈 얼마나 돼?” “돈?” 윤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으며 머리를 굴렸다. “한... 2억 정도 남아 있을 거야.” “전부 나한테 보내. 급하게 쓸 일이 있어.” 윤하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건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그 돈을 모두 넘기면 한 달 용돈과 아버지가 가끔 주는 돈으로만 생활해야 한다. 단순한 부탁이 아니란 걸 직감한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엄마, 그동안 아빠한테 꽤 많이 받았잖아.” 별다른 감정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그것이 임수연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다. 그녀는 화가 난 듯 다가와 손가락으로 윤하연의 이마를 톡톡 찌르며 쏘아붙였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해? 집안 살림에 돈이 안 드는 줄 알아? 좋은 옷, 좋은 가방, 좋은 차까지 다 해 줬잖아. 그런데 고작 이 돈 가지고 엄마한테 따지는 거야?” 이어 그녀는 한층 더 비꼬듯 말했다. “윤하경 봐. 혼자서 사업도 잘하고 능력 있게 살잖아. 넌 대체 왜 걔보다 나은 게 없어?” 그 말에 윤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차갑게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윤하경을 딸로 삼아.” 임수연은 그제야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닫고 다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야, 엄마가 말을 잘못했어. 그냥 홧김에 나온 말이야.” 그러나 윤하연은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윤하경, 두고 봐. 곧 네가 울 날이 올 테니까.” 그 말에 임수연의 눈이 반짝였다. “왜? 네가 뭔가 방법이 있어?” 하지만 윤하연은 그녀를 흘긋 쳐다보더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됐어. 돈은 이따가 보내 줄게.” 그렇게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윤하경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약한 여자 하나 건드려서 신나셨겠네요.”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방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오늘 회사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의 실수였습니다. 이 일을 수습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좋아요.” 윤하경은 일부러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내일 오후에는 시간이 날 것 같네요. 직접 찾아오세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후, 그녀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나자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강현우의 이름을 빌려서 위세를 부렸는데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까? 오늘 그가 보였던 냉혹한 태도를 떠올리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때 문득, 낮에 강현우가 자신을 위해 강현석을 막아섰던 일이 떠올랐다. “아, 맞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한 대 쳤다. “기사님, 강한 그룹 대표님 댁으로 가 주세요.” 한 시간 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강현우의 저택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집사가 문을 열었고 집사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보며 순간 멈칫했다. 이 집을 스스로 찾아오는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우 씨 계시는가요? 오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감사 인사드리러 왔어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표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윤하경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불쾌한 기색 없이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사실, 낮의 일 이후로 강현우가 조금 무서워졌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서도 '이제 그와 거리를 두는 게 좋을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일을 떠올리면 그럴 수 없었다. 강현석 같은 인간이 자신을 눈여겨봤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했다. 만약 강현우의 보호가 없다면 그 사람이 또 무슨
윤하경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뭘 말해도 강현우한테는 다르게 해석될 게 뻔했다. 정말이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지금 몸이 녹초가 된 것처럼 힘이 빠져 있었고 더 이상 강현우와 실랑이를 벌일 힘도 없었다. 게다가 강현우는 이런 일에 있어서 끝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계속 이렇게 끌려다니다가는 정말 병원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헤븐’에서 현우 씨가 좋아하시는 요리 몇 가지를 포장해 왔어요.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음식인데 내려가서 같이 드실래요?” 강현우가 흥미롭다는 듯 윤하경을 바라봤다. 눈앞의 여자는 분명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또 억지로라도 애교를 부려가며 자신을 달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었다. “용감하네.” 툭 던진 말이었지만 윤하경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늘 낮 ‘헤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강현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오늘 이후로 네가 도망갈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감히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네.” 그의 말에, 윤하경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찡긋했고 발끝을 들어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가볍게 속삭였다. “현우 씨 곁에 있으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떻게 하면 강현우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지 감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강현우는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발끝을 세운 채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때야 강현우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계속 그렇게 잘 버텨봐.”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몸을 돌려 드레스룸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전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내려가 있어.
윤하경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을 안고 조용히 그 어두운 방에서 빠져나왔고 강현우도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임수연을 잠시 바라보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잘 감시해.”윤하경은 방을 나서자마자 바로 옆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세면대에 다가가 물을 틀고 손으로 몇 번씩 물을 떠 얼굴에 끼얹었다. 그런데도 모자라다 느낀 그녀는 결국 얼굴 전체를 물속에 파묻었다.숨이 막히는 그 답답한 느낌이 이상하게도 편안했다.화장실 문 앞에 기대선 강현우는 자신을 괴롭히듯 물속에 얼굴을 처박는 윤하경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다.정말로 질식할 듯한 순간이 오기 전, 윤하경은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세 젖은 머리카락과 뒤섞여 초췌하게만 보였다.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자꾸만 흘러내렸고 아무리 손으로 닦아도 멈추질 않았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우가 성큼 다가와, 젖은 머리 따위 개의치 않고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저... 안 울었어요.”윤하경은 조용히 그의 품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작은 소리로 울먹거렸다.“아까 물 때문에... 불편해서 그런 거니까... 놓아줘.”“응.”강현우는 무심한 듯 대답했지만 그녀를 풀어 주지 않았다. 윤하경은 억지를 부렸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결국 그녀는 그 품 안에서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고 작은 손으로 강현우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왜... 왜 하필 그 사람이야... 왜 우리 엄마를 죽인 사람이... 아빠인 거냐고...”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엄마를 죽였다는 진실. 그건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윤하경은 수많은 일을 겪으며 단단해졌다고 믿었지만 막상 진실을 마주하니 무너져 내리는 건 한순간이었다.강현우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 위를 다독였다.
강현우는 윤하경의 말을 들은 순간, 마치 자기 등에 기대어 괜히 기세부려보는 여우를 보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슬쩍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더니 말랑한 살을 가볍게 꼬집었다.윤하경은 몸이 순간 얼어붙었더니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그러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비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이 남자,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여긴 어쨌든 강현우의 구역이었고 윤하경은 조용히 눈빛으로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제발... 제발 지금은 진짜 아무 짓도 하지 마.’그녀의 눈빛을 읽은 듯, 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손을 거뒀고 윤하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일어나 임수연 앞으로 다가섰다.“그럼, 그날의 일. 전부 말씀해 주세요.”윤하경은 핸드폰을 꺼내 녹음기를 켜더니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제가 묻는다는 건, 이미 손에 증거와 증인이 있다는 뜻이니까요.”그리고 싹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거짓말하면... 그땐 진짜 피곤해지실 거예요.”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미소는 차갑고 서늘했고 임수연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린 듯 심하게 떨렸다.한참이나 입을 떼지 못하던 그녀는, 마침내 말하기 시작했다.“그래. 맞아. 네 엄마한테 손댄 건 나야. 하지만 그 여자는... 원래 죽어야 했어!”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윤하경을 노려보며 외쳤다.“그 여자가 아니었으면... 윤수철이 날 그렇게 버렸겠냐고?”짝!작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린 건, 단단한 뺨을 때리는 소리였다. 윤하경은 너무 세게 손을 내리친 나머지, 손끝까지 얼얼했다.“말, 똑바로 하세요.”윤하경의 목소리는 냉정했고 밝고 단정한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그 자체로도 상대의 숨통을 조이기에 충분했다.뺨을 맞고도 당황한 듯 멍하니 있던 임수연은, 피가 맺힌 입술을 닫고 잠시 침묵했다.“그때... 윤수철한테 버림받고 나서... 진짜 끔찍했어. 생활은 엉망이고 나... 임신까지 했었거든.”“결국 하는 일도 없는 건달이랑 결혼하
임수연의 몸 어딜 봐도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완전히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그녀는 바닥에 풀썩 쓰러진 채, 일어날 힘조차 없는 듯 보였다.하지만 윤하경과 강현우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임수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노려보았다.“윤하경... 너, 반드시 비참하게 죽을 거야!”방금 전 고함을 너무 질렀는지,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지만 그 분노는 오히려 더 진하게 실려 있었다.윤하경은 무심하게 그녀 앞에 다가가 무릎을 굽혔고 눈동자엔 단 한 줌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내가 비참하게 죽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어요.”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잔잔하게 웃었다.“하지만 당신은... 아마 나보다 먼저 죽을지도 모르죠. 지금처럼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으니까요.”강현우 곁에 오래 있다 보니 말투까지 점점 닮아가고 있었고 말끝에 서린 위압이,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강현우는 그런 윤하경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고 입가엔 아주 옅은 미소까지 맴돌았다.임수연도 그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현우가 작정하면 이 방에서 죽어도 세상 누구도 모를 수 있다는걸, 그 사실이 더없이 무서웠다.입술을 꾹 깨물며 이를 갈던 임수연은 결국 겁에 질린 눈빛으로 변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윤하경은 여유롭게 웃었다.“아줌마,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말 안 하셔도 돼요. 아줌마부터 처리하고... 그다음엔 하연이에요. 그 애가... 당신처럼 버틸 수 있을 것 같나요?”윤하경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너무도 날카롭고 잔혹했다.그러자 임수연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고 진심으로 겁에 질린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녀가 끝내 말을 하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 쪽으로 돌아섰다.“강 대표님, 아마... 또 민진혁 씨 손 좀 빌려야 할 것 같아요.”“윤하경... 네가 어떻게 죽는지 꼭 볼 거야... 저주할 거야...”임수연의 외침은 절망에 찬 비명
주변 시선 신경 안 쓰고 한껏 구경하겠다는 듯, 완전히 남 일 보듯이 바라보던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고 자리에 다가갔다.“제가 좀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것 같네요? 먼저 위로 올라가 있을까요?”얼마나 센스 있는 배려인가. 하지만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흘깃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다음 순간, 윤하경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단단한 허벅지 근육에 엉덩이가 아찔하게 찔려 아프기까지 했고 윤하경은 참지 못하고 작게 혀를 찼다.그 모습을 본 모연의 표정이 살짝 굳었고 방금까지 웃으며 말하던 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자 강현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모연 씨가 아까 하신 제안, 나름 흥미롭던데. 근데 내가 뭘 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모연은 애초에 강현우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이곳까지 나온 것이었다. 예전에 한창 주가를 올리다 찍히고 한순간에 사라졌고 지금은 다시 주목받기 위해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그런 의미에서 강현우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윤하경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연은 자신의 외모와 몸매로 승부를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강현우의 시선이 오롯이 윤하경에게만 가 있는 걸 보며 판단을 바꿨고 결국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 대표님이 저한테 관심 가져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만약 저를 써주신다면... 강 대표님이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선 뭐든 드릴 수 있어요.”말 그대로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강현우의 사업 스타일을 생각하면 뭐든 뽑아먹고도 버릴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강현우는 가볍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연락할게.”거절이 아니란 말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기에 모연은 피식 웃으며 잽싸게 일어나 깍듯이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자리가 비자, 윤하경은 무릎에서 내려가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제자리에 그대로 앉히고 움직일 틈도 주지 않았다.윤하경은 주변에 다른
배지훈이 술병을 꾹 쥔 채 투덜댔다.“너희 둘 좀 사람 취급 좀 해주면 안 되냐?”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쳐다보더니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사람 대우받으려면 일단 사람이긴 해야지.”그 말에 배지훈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마음 좀 달래볼까 하고 온 건데 이건 뭐 일부러 내 심기 건드리는 거지?”그러고는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술병을 들어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윤하경은 그 모습이 꽤 상처받은 사람처럼 보여서 잠깐 시선을 돌렸지만 그 순간, 그녀의 고개는 강현우의 손에 의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다른 남자 쳐다보긴 왜 쳐다봐? 내가 훨씬 낫지 않아?”“그건 맞아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대답했고 강현우는 그 말에 흡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반면 배지훈은 이가 부서질 듯 이를 악물며 분을 삭였고 이 상황에서 자기가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그때 무대 위로 비키니 차림의 여자가 올라왔고 윤하경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저 사람, 설마...”분명 몇 년 전까지 꽤 유명했던 가수였다. 한동안 활동이 뜸하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모습을 감췄었다.‘이름이 뭐더라? 모연?’당시에 청순 콘셉트로 인기 끌던 인물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클럽 무대에 서 있다니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온 모양이었다.그런데 모연의 노래가 시작되자, 시끄럽던 공간이 서서히 조용해졌다.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청아했다. 노래가 끝나자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냈고어떤 이들은 현금을 무대에 던지기까지 했다.모연은 그런 관객을 지나쳐 윤하경 쪽을 바라봤지만 윤하경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 강현우에게 조용히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화려한 조명 아래 시야가 흐릿한 공간을 지나가다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말했다.“죄송합니다...”말을 끝내기도 전에 낯익은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그 남자도 윤하경을 알아보고 반가운 듯 웃었다.“윤하경 씨 맞죠?”“하 대표님.”윤하경은 짧게
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를 가볍게 감싼 채 일어나면서 무심하게 말했다.“말을 좀 안 들어. 잘 좀 챙겨줘.”그 말에 임수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뭔가 말하려고 앞으로 다가섰지만 강현우는 이미 윤하경을 데리고 방을 나서고 있었다.문 앞에서 윤하경은 용천수와 마주쳤고 그는 지난번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 보였다.역시 평소에 몸을 많이 써서인지 회복 속도가 일반인과는 달랐다.윤하경은 그를 힐끗 보고 시선을 거둔 채 강현우를 따라 밖으로 나왔지만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며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서 임수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은 갔다.강현우 주변에 평범한 인물은 없었고 특히 용천수는 손이 빠르면서도 잔인한 성향이 있었다.그 소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윤하경은, 허리를 짚은 강현우의 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분명 강현우는 차갑고 냉철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눈빛부터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는데 문제는, 이 사람의 손은 왜 이렇게 항상 바쁘냐는 거였다.윤하경이 뭐라 한마디 하려던 찰나, 강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런 소리 뭐 하러 들어. 괜히 기분만 상해. 오늘 새로 들어온 애 중에 노래 꽤 잘하는 애가 있다던데 같이 가서 들어볼래?”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웠다.딱 봐도 위로해 주려는 의도였고 윤하경도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네.”그래서 결국,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헤븐’ 2층은 개방형으로, 일반 클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홀 중앙엔 높은 무대가 있었고 무대 위에선 가벼운 복장의 여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강현우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은 윤하경은, 그곳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중에서도 눈에 띈 건, 배지훈이었다.그는 모르는 여자와 바짝 붙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강현우가 들어서자 그제야 여자를 밀어내듯 떨어졌다.윤하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배지훈과 진해리
윤하경이 조용히 입을 열자 바닥에 웅크린 채 앉아 있던 임수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윤하경.”그녀가 이름을 부를 때, 두 눈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감격은 아니라 분명히 분노였다.윤하경의 뒤에 서 있던 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옆 소파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았다.길게 뻗은 다리를 느긋하게 꼬고 앉은 그는 마치 주변과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손끝으로 코를 한번 문지르며 흥미롭다는 듯 임수연을 바라봤다.그 시선을 받은 임수연은 눈을 피하지 못했고 꽤 오랜 시간 버티던 기세도 점점 사그라졌다.임수연은 본능적으로 강현우 앞에선 감히 날뛸 수 없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임수연은 이를 꾹 다물었고 야위어서 광대뼈만 도드라진 얼굴이 더 날카롭게 보였다.“네가 여길 왜 와?”소리는 작았지만 말끝엔 독이 잔뜩 묻어 있었다.윤하경은 예전부터 임수연과 윤하연 모녀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항상 그렇게 정면으로, 무식할 만큼 솔직하게 나오는 그 태도 말이다.윤하경은 무릎을 굽혀 앉았고 어둑한 공간 속에서도 눈빛은 또렷했다.“왜요, 지금은 도망도 못 치는 신세인데 제가 오면 안 되는 자리라도 되나요?”임수연은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잘난 척하지 마. 결국 네가 날 잡은 건... 네 힘이 아니라 남자 힘 빌린 거잖아.”“맞아요.”윤하경은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맞아요, 현우 씨 도움 없었으면 못 잡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요...”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날카롭게 웃었다.“그럼 당신이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그 남자는요? 왜 당신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을까요?”윤하경의 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임수연의 급소를 찔렀고 임수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듯 어깨가 움찔했지만 강현우가 눈길 한 번 보내자 그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윤하경은 그걸 놓치지 않고 똑똑히 지켜봤다. 강현우가 며칠간 그녀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었는지 겁먹은 임수연의 눈빛을 보면 말하지 않아
윤하경은 몸이 점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고 마음은 아니라고 외치는데도, 이상하게 강현우 앞에만 서면 그녀의 몸은 늘 말을 듣지 않았다.윤하경의 작은 체구는 그에게 기대 그대로 녹아들 듯 풀어졌고 숨이 막힐 정도로 숨이 가빠질 무렵이 돼서야 강현우는 입술을 떼어냈다.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차 안에 촉촉하고 은밀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좁은 공간에서 그 소리는 유독 자극적으로 들렸다.겨우 정신을 되찾은 윤하경은 강현우를 향해 억눌린 분노가 담긴 눈빛을 던졌다.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발그레해진 입술을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질투했네. 다 티가 나. ”윤하경은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화가 나는 것도 모자라서 저런 말까지 들어야 한다니.그녀는 몸을 돌려 문을 열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허리를 꼭 붙잡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그 순간, 순찰 중인 경비원과 눈이 마주친 윤하경은 황급히 강현우에게 말했다.“놔요, 지금 누가 보고 있잖아요.”“진짜로?”“당연하죠.”강현우는 그녀를 붙잡고 있던 팔을 느슨하게 풀었고 윤하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그런데 그때였다.“임수연 보러 가기 싫은 모양이네.”“뭐라고요?”윤하경은 순간 멈춰 섰다. 방금 전까지 얼굴 가득하던 화가 단번에 사라졌고 그 자리를 반짝이는 기대감이 채웠다.“찾았어요? 진짜로?”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천천히 대답했다.“응.”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끄고 그녀를 힐끔 보며 그렇게 한 마디 던지곤 턱으로 문밖을 가리켰다.“근데 뭐, 네가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더라? 내려.”그 말에 윤하경은 도로 앉더니 입술을 깨물며 강현우를 올려다봤다.“그게요. 전, 보고 싶어요.”강현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뭐라고? 잘 안 들려.”윤하경은 눈을 질끈 감고 그의 귀에 입을 바짝 대더니 또렷이 말했다.“보고 싶다고요.”“야, 귀 터지게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강현우는 그녀를 밀어내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부드러웠다.윤하경은 웃음을 흘렸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