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의 물음에 우지원은 잠시 망설였다.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 저더러 문 앞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그 말에 윤하경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헤븐’을 나와 자신의 차에 오르자, 윤하경은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긴장이 풀린 듯 핸드폰을 꺼내보니 수많은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여러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 중, 가장 많은 건 다름 아닌 유 집사였다.[아가씨, 아직 밖이에요?][집에 난리가 났어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니까요.]윤하경은 눈썹을 찌푸리며 시동을 걸었다.집에 도착한 건 거의 정오 무렵이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유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아가씨! 어젯밤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그러다 문득 그녀의 목을 바라본 유 집사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어머, 어디서 주무셨길래 모기한테 그렇게 물리셨어요?”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목을 가렸다.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모기 물린 자국이 아니라, 전날 밤의 흔적이었다.‘샤워할 때 미리 봤더라면 파운데이션이라도 발랐을 텐데.’그녀는 얼버무리듯 말했다.“그보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던 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임수연이 죽은 건 아니겠죠?”‘안돼. 이제 복수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쉽게 끝나버리면 재미없지.’유 집사는 2층을 슬쩍 쳐다보더니 그녀를 조용히 구석으로 이끌었다.“어젯밤에 회장님께서 지하실로 내려가셨어요. 아가씨께서 저더러 그 여자의 상태를 계속 살피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뒤따라갔는데... 문밖에서도 여자의 비명이 들릴 정도였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려 있었다.“어떻게 고문한 건지... 그 소리, 아직도 귀에 맴돌아요.”유 집사는 평생 윤씨 집안에 충직하게 일해온 사람이었다.그녀가 겪어본 가장 큰 일이라 해봤자 임수연의 날 선 말투 정도였기에 어젯밤의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윤하경은 예상치 못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눈앞의 광경에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숨을 헉 들이켰다.과거의 임수연은 비록 절세미인은 아니었지만 윤씨 가문의 재력을 등에 업고 기품 있는 척할 줄은 알았다.하지만 지금의 임수연은 그저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한 마리 죽어가는 개에 불과했다.손과 발은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옷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원래 색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본 윤하경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그건 희열과 만족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혐오감이었다.윤하경이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경호원을 바라봤다.“나가 있어.”싸늘한 목소리가 울리자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임수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났다.그녀의 두 눈은 마치 원귀처럼 이글거렸고 윤하경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이 개년아! 감히 여길 와?”임수연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디를 크게 다친 건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그런 그녀를 향한 윤하경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 눈엔 동정도 연민도 없었다.과거의 윤하경은 길고양이 한 마리만 봐도 마음 아파하던 따뜻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인간을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임수연이 이를 갈며 발버둥 쳤지만 윤하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 눈빛에 오히려 임수연이 움찔했다.“너, 날 비웃으려고 온 거야?”윤하경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맞아요.”“널 죽여버릴 거야!”임수연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기어오르려 했고 그 모습은 마치 다리가 부러진 짐승 같았다.“당신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겠죠?”임수연은 대답 대신 이를 갈며 윤하경을 노려보았다.“다 너 때문이야... 다 네년 때문이라고!”그 악다구니에 윤하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당신 스스로 자초한 일이에요.”그녀는 차분하게 대꾸하며 손에 든 약병을 흔들었다.“살고 싶으면, 나한테 빌어요.”임수연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가 이내 독기 어린 눈빛이 번뜩이며 침을 뱉었다.
어젯밤, 윤수철의 고문에 이미 만신창이가 된 임수연은 윤하경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비명을 질렀다.“윤하경, 넌 제명에 못 죽을 거야!”윤하경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제명에 못 죽을 거라고? 글쎄...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죽을지는 두고 봐야죠.”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 작은 얼굴에 비치는 건 오로지 혐오감뿐이었다.“당신은 평생을 계산하고 꾸며가며 살아왔죠. 근데 결국은 이런 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에서 이렇게 죽어가는 꼴이라니. 비참하네요.”임수연은 몸을 떨며 윤하경을 노려봤다. 독기 어린 눈빛, 그러나 그 속엔 어딘가 흔들림이 있었다.“너... 뭐 알아낸 거야? 어서 말해, 뭘 알아낸 거냐고!”미친 듯이 소리치는 임수연에게 윤하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이윽고 윤하경은 손에 든 약을 경호원들에게 건네며 차갑게 말했다.“숨은 붙어 있게만 해.”“네, 아가씨.”경호원들이 움직이자 윤하경은 미련도 없이 지하실을 나섰다. 그리고 뒤로는 다시, 임수연의 비명이 메아리쳤다.“아가씨! 괜찮으세요?”유 집사가 달려왔다. 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었다.“네. 괜찮아요.”“그런 여자한테 괜히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씨가 걱정돼서...”윤하경은 대충 대답하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대어 담뱃갑을 꺼냈다. 몇 번이나 라이터를 튕긴 끝에야 겨우 불이 붙었다.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천장을 올려다본 그녀의 눈에는 깊은 고요가 드리워졌다.윤하경은 방금까지 임수연을 그 자리에서 끝내버리고 싶었다.“그러면 나도 그 여자랑 다를 게 없어.”그녀는 낮게 속삭였다.“엄마, 나 너무 못된 걸까?”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고 방 안엔 그녀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그날 하루, 윤하경은 한 발짝도 방 밖을 나서지 않았다.한밤중.창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욕실 창 너
윤수철이 그런 식으로 말을 내뱉은 건, 결국 자기 얼굴을 보기 싫어서라는 걸 윤하경은 뻔히 알고 있었다.‘하긴, 외도 현장까지 아버지를 끌고 간 게 나였으니까. 그 앞에서 여자한테 배신당한 꼴을 딸에게 들켜버렸으니, 남성우월주의로 똘똘 뭉친 아버지로선 도저히 견딜 수 없었겠지.’‘그러니 눈앞에서 없애고 싶었을 거야. 안 보이면 마음도 편하겠지.’하지만 윤하경은 절대 이 집을 나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윤수철이 얼굴을 찌푸리면 오히려 좋았다.그동안 자신이 견뎌온, 토할 것 같은 기억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윤수철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윤하경은 신경 쓰지 않았다.“아줌마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그 말에 윤수철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그리고 윤하연은요? 회사에서 바로 자르실 건가요, 아님 또 대충 눈감아줄 건가요?”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그딴 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네 일이나 잘해.”윤하경은 어깨를 으쓱였다.“그런데요, 제가 신경 안 써도 되는 일이었어요?”“제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아줌마한테 홀려서 뭣이 진짜인지 몰랐겠죠.”그녀는 윤수철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수철은 결국 들고 있던 수저를 식탁에 내던지듯 놓고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2층으로 올라갔다.윤하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국 좀 주세요.”곁에 서 있던 유 집사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아가씨, 지금이야말로 기회예요. 이럴 때 조금씩 아버님과 관계를 회복하셔야지, 왜 계속 부딪히시기만 해요.”윤하경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유 집사의 말을 끊었다.“빨리요. 저 지금 배고파요.”물론 그녀도 유 집사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내가 그렇게 순하게 말 잘 듣는 성격이었으면 아버지랑 이렇게까지 틀어지지도 않았겠지.’식사를 마치자마자 윤하경은 회사로 향했다.요즘 윤수철은 회사 일에는 눈길도 주지 못하고 있었기에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그때 그 사건이 그렇게도 추하게 끝나버렸으니 지금 윤하경과 주미나 사이에 남아 있는 건 어색함 뿐이었다.그런 그녀가 느닷없이 연락을 해오자 윤하경은 직감적으로 느꼈다.‘좋은 일일 리 없겠네.’윤하경이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주미나는 그런 말에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결국 그녀는 직접 회사를 찾아왔다.퇴근길, 회사 정문을 나서던 윤하경은 검은색 차량 옆에 서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주미나였다.예전엔 단정하고 세련됐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피곤함에 절은 얼굴,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불과 몇 달 사이에 그녀는 확연히 늙어 있었다.윤하경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미 그녀의 눈에 들고 말았다.“하경아.”주미나가 서둘러 다가왔고 윤하경은 돌아보며 담담하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과거엔 ‘어머님’이라 부르던 아이가 이제는 이름 석 자조차 입 밖에 내지 않자 주미나의 눈가가 붉어졌다.“그동안 잘 지냈니...?”윤하경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잘 지냈어요.”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윤하경이 직설적으로 물었다.“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거예요?”주미나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그냥... 네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오랜만이잖니.”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한 시간만. 너랑 얘기하고 싶어.”윤하경은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저희 사이에, 더 이상 나눌 이야긴 없을 것 같은데요.”냉정한 말투에 주미나의 얼굴엔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하경아... 난 언제나 네가 지호랑 어떻게 되든, 내 딸처럼 생각했어...”진심 어린 말투.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는지 윤하경도 알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생전에 엄마가 가장 아끼던 친구였고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딱히 나쁘게 대한 적도 없었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결국 윤하경은 고개를 들었다.“좋아요. 어디서 이야기하실 건데요?”주미나는 안도한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레스토랑 하나 예약해 놓았어. 우리 차 타고 가자.”그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긴 아쉽잖니.”주미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 미소는 따뜻하지 않았다.입꼬리만 올라가 있을 뿐, 그 안엔 냉기와 뒤틀린 집착이 섞여 있었다.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린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여기 어디예요? 왜 절 이런 데로 데리고 온 거죠?”“누구 좀 보여주려고.”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느꼈다.‘이건,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기어올랐다.윤하경은 조용히 가방 속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눈을 떼지 않고 주미나를 응시했다.“말로 하세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잖아요.”“우리 사이, 약혼 문제 외엔 특별한 감정도 없었잖아요. 제가 아줌마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러세요?”입으론 말을 이어가면서도, 윤하경의 시선은 차창 밖을 바쁘게 훑었다.‘진작에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야 했는데... 내가 멍청했지.’그 순간, 주미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야. 넌 나한텐 잘못한 게 없어.”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점점 서늘하게 식어갔다.“그런데 말이지... 내 아들이 지금 반쯤 죽어가고 있어. 침대에 누워서 눈도 못 뜨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가만히 있어야겠니?”윤하경의 얼굴이 굳어졌다.“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죠?”“아직도 그런 소리가 나와?!”주미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솟구쳤다. 붉어진 눈시울이 더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지금이야.’윤하경은 순간적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와 문 옆에 서 있던 주미나를 힘껏 밀쳐버렸다.“꺄악!”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구는 주미나를 넘어, 윤하경은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굽 높은 힐은 도망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이곳은 주미나가 일부러 고른 장소였다.외진 들판,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황량한 도심 외곽에, 게다가 해까지 뉘엿뉘엿 저물고 있어 주위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뒤에서 주미나가 이를 갈며 고함쳤다.“뭘 멍하니 서 있어! 당장 쫓아가!”대기 중이던 사내들이 비로소 움
작은 오두막 안.윤하경은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내던져졌다.팔은 쓸리고 옷은 너덜너덜해졌으며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었다.‘이 정도 외진 곳이면, 소리친다고 누가 와주겠어.’윤하경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비명은 무기 아닌 소음일 뿐이었다.‘지금은 소리칠 때가 아니야. 도망칠 틈을 봐야 해.’그 순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싸늘한 공기를 베며 다가왔다.문이 벌컥 열리며 주미나가 들어섰다.그녀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아직도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말 좀 해봐. 구지호한테 뭐가 그렇게 원한이 깊어서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야?”주미나의 표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눈빛은 번들거렸고 억눌린 분노는 거의 광기에 가까웠다.“지금 그 애가 어떤 상태인지 알긴 하니?”입엔 여전히 역겨운 수건이 틀어막혀 있어 윤하경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주미나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금 그 애... 병상에 누워 반쯤 죽은 상태야. 의사는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댔어.”윤하경은 눈으로만 대답했다.말하지 않아도 그 눈빛이 말해줬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그 반응에 분노가 치민 주미나는 결국 수건을 잡아당겼다.“말해봐. 왜 그랬어. 왜 구지호한테 그런 짓을 했어?!”입이 너무 오래 막혀있었던 탓에, 윤하경은 입을 조금 움직이고 나서야 겨우 말했다.“몇 번이나 말했죠.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거짓말!”짝!주미나의 손이 윤하경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윤하경의 얼굴이 옆으로 꺾였고 하얀 살결 위로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번졌다.그러나 윤하경은 끝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노려봤고 그 태도에 주미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아직도 거짓말할래? 증인도 있다고!”“증인이요?”윤하경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주미나를 바라보았다.“누가 그런 소릴 했는지 정말 궁금하네요.”“들어와.”주미나는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곧,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누군
“언니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에요!”윤하연은 다급히 외쳤고 목소리엔 분노보단 불안이 실려 있었다.“얘는 지호 오빠랑 약혼했을 때부터 강현우랑 이미 그런 사이였어요. 강현우가 그런 짓을 한 것도, 전부 언니 말 듣고 지호 오빠한테 복수하려던 거라고요!”“복수?”윤하경은 비웃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윤하연을 바라보았다.“그럼 말해봐. 내가 뭘 복수하려고 했는데?”윤하연의 입이 덜컥 멈췄다.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떼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팠다.“그, 그거야 내가 지호 오빠한테 사람 시켜서 언니를 강간하라고...”순간,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윤하연은 입을 틀어막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미나를 바라보았다.“계속 말해보지 그래.”윤하경은 차갑게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지난번에 날 노렸던 게 실패해서, 이번엔 아예 어머님을 이용해 날 무너뜨릴 생각이었던 거야?”“하연아. 너 사람이 할 짓을 해야지. 나한테 누명 씌우기 전에 증거라도 들고 오지 그랬니?”“예를 들면 네 엄마가 바람피웠다는 증거, 나 그거 갖고 있거든. 지호 씨가 저렇게 된 게 내 탓이라면 그에 맞는 증거는 있어?”윤하경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그녀는 지금 도박을 걸고 있었다.주미나가 아직 자신에게 남은 믿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전부를 건 것이다.“어머님.”윤하경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저를 오랫동안 봐오셨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정말 윤하연 말 하나만 믿고 저를 이렇게까지 대하신다면 저도 더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그녀는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대었고 지친 숨결과 조용한 체념이 그 공간에 퍼졌다.윤하연은 그 태도에 질투와 분노가 폭발했다.“뭐야, 지금 연기하는 거야? 네가 한 짓이잖아! 왜 인정 안 해!”화를 주체하지 못한 윤하연은 그대로 발을 들어 하경을 걷어차려 했다.그 순간, 윤하경의 눈이 번쩍하며 살기 띤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윤하연은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