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데요?”윤하경은 반사적으로 강현우를 올려다보며 묻더니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사람, 역시나 단 한 푼도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네.’윤하경은 잠시 망설였다. 강현우가 이렇게 조건을 내걸 때면 대개 뒤끝이 있는 법이었다. 왠지 이번에도 그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제 남은 시간은 단 이틀이다. 지금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입술을 꽉 다물고 잠깐 이를 악문 윤하경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말해봐요.”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강현우는 얇은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 올렸다.“뭐 그렇게 긴장해. 내가 사람 잡아먹을 것처럼.”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도, 어느새 슬쩍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올렸다. 그러고는 힘을 살짝 주자, 윤하경의 작고 가벼운 몸이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자세가 너무나도 묘해서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피하며 살짝 앞으로 숙였지만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고정해 버려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그의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그녀를 훑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그 눈동자 속에 서서히 차오르는 욕망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리고 이내, 저음의 짙은 목소리가 윤하경의 귓가를 간지럽히듯 파고들었다.“자꾸 그렇게 움직이면... 나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몰라.”입꼬리를 올린 그의 미소는 부드럽지만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다물고 그 불편한 감각을 억누르며 화제를 돌렸다.“조건부터 말해요. 뭔데요?”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조명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마치 조각처럼 뚜렷했고 한층 더 매혹적으로 느껴졌다.“나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랑 우리 엄마, 도대체 어떤 조건을 주고받은 거야?”그 말에 윤하경은 순간 숨이 턱 막혔고 몸이 딱 굳으며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봤다.‘혹시 뭔가 알아챈 건가?’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등줄기로 차가운 땀이 흘렀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강현우의 시선을
강현우은 긴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윤하경의 속옷 훅을 풀었다.“네 몸 중에 내가 안 본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윤하경은 말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강현우는 피식 웃더니 손끝에 힘을 실어 마지막 남은 얇은 천 조각마저 가볍게 떼어내 버렸고 이내 손을 뻗어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따뜻한 수증기가 순식간에 퍼지며 윤하경의 몸을 감쌌다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었다.“무슨 생각해?”강현우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순간 멍하니 서 있던 윤하경은 가볍게 헛기침하며 얼굴에 스며든 부끄러움을 억눌렀다.‘어차피 이틀 남았다.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핑계를 댔다.“그냥... 요즘 한빛 그룹 쪽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서요.”꽤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그날 강현우와 함께 윤수철을 마지막으로 본 뒤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후로 줄곧 갇혀 있었기에 외부 소식을 알 방법조차 없었다.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또 가엾게 느껴지냐?”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따뜻한 수증기 속, 하얀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았지만 눈빛만은 단단했다.“아니요, 후회 안 해요.”그녀는 원래 비굴하게 살기보단 떳떳하게 무너지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다.처음에는 어머니의 회사를 지키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저, 윤수철과 함께 무너지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망치려 든 이상, 같이 끝장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강현우는 그녀 눈동자에 담긴 묘한 적의를 읽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겨주며 말했다.“물었을 땐 제대로 아프긴 하더라.”잠시 말을 멈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네 아버지, ICU에 며칠째 누워 있다. 가볼래?”“...”윤하경은 예상 못 한 말에 순간 멍해졌다.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었나,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임수연이 외도하고 윤하연과 함께 교도소에 들어간 사건만으로도 윤수철은
하지만 윤하경은 애써 표정을 감췄다.“그럴 리가요.”말은 진심처럼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이 스쳤고 강현우가 알아차릴까 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핸드폰을 산 후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강현우는 곧바로 서재로 들어가고 윤하경은 침실로 향했다. 아마 임신 때문인지 요즘 들어 몸이 자꾸 무겁고 나른했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윤하경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고 잠들기 전 소지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어떻게 됐어? 계약은?][매수자 나왔어. 이틀 안에 계약 가능할 듯.][근데 조건이 하나 있어. 네가 계약서에 사인해야 한대.][? 그냥 너한테 위임하면 안 돼?]소지연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알겠어. 다시 한번 얘기해 볼게.]지난번 실수를 떠올리며 윤하경은 대화를 끝내자마자 메시지를 전부 삭제했다.강현우가 방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노을빛이 방 안에 스며들고 그 빛 아래 잠든 윤하경의 모습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하지만 강현우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고 그 시선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윤하경은 저녁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고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아마 아침까지도 그대로 자고 있었을 것이다.1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고 집사가 웃으며 다가왔다.“하경 씨, 식사 준비 다 됐어요. 대표님께서 깨어나시면 함께 먹겠다고 하셔서요. 지금 부르러 갈게요.”“네.”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집사가 자리를 비우자, 그녀는 문득 입술을 꾹 다물더니 묘한 죄책감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이틀 남았어.’강현우가 아래로 내려왔을 땐, 윤하경이 먼저 밥을 담아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러자 강현우가 눈을 살짝 치켜뜨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유 없이 잘해주는 사람은... 수상한 법이지.”“...”역시나 강현우는 늘 정곡을 찌른다. 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삐죽 내밀고 그의 손에서 밥그릇을 빼앗았다.“그럼 먹지 마세
강현우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윤하경을 본 순간, 눈빛이 스치듯 흔들렸다.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상황을 눈치챈 점원이 조용히 물러나며 커튼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강현우의 시선은 유독 강한 소유욕을 품고 있었고 윤하경은 그 눈빛을 피하듯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예뻐요?”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던 윤하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물론 결혼식 당일, 이 드레스를 입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녀 자신도 마음에 들었다.그 순간, 강현우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윤하경을 벽에 밀치고 입을 맞췄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들이닥친 입맞춤은 여전히 그의 방식대로, 거침없고 일방적이었다. 피하려 해도 소용없었고 윤하경은 잠시 고민한 끝에 오히려 조용히 순응했다.둘 사이에 길고도 깊은 키스가 이어졌고 강현우가 천천히 그녀를 놓아줬을 때 그의 눈가에는 알 수 없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시선에는 그녀가 오늘따라 말을 잘 들은 것에 대한 만족감이 묻어났다.강현우는 윤하경의 살짝 부어오른 입술을 내려다보며 그 위에 맺힌 투명한 흔적을 본 순간,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그러고는 낮게 웃으며 물었다.“오늘따라 왜 이렇게 순하냐?”윤하경은 속으론 불안했지만 겉으론 웃음을 띠며 강현우의 목을 감싸안았다.“현우 씨가 이렇게 잘해주시는데... 제가 눈치 없게 굴 순 없잖아요?”“그 말이 진심이면 좋겠네.”강현우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진심이에요. 백 퍼센트!”윤하경은 웃으며 대답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오래 바라보더니 낮게 웃었다.“그러길 바란다.”그 말은 마치 경고처럼 들렸고 윤하경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철렁 내려앉았다.‘혹시 뭔가 눈치챈 걸까?’그녀는 조용히 강현우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고 싶었지만 헛된 시도였다.강현우 같은 사람은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기에 윤하경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웨딩드레스 피팅을 마친 후, 두 사람은 근처에서 식사를
윤하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강현우는 앞에 있던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왜, 그렇게 놀랄 일이야?”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윤하경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그냥... 바로 이해가 안 돼서요.”그 말인즉슨, 앞으로 며칠 동안 강현우는 어디 가지도 않고 계속 집에 있다는 뜻이었다. 결혼식 날까지 계속 이 집에서 그와 함께 지낸다는 말 아닌가?이 생각이 들자 윤하경은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강현우는 그녀의 눈빛이 자꾸 흔들리는 걸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윤하경 앞까지 다가왔다.그는 원래 키가 크고 기세도 강한 사람이라,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압박감이 컸다. 하물며 이렇게 바로 앞까지 다가와, 눈빛을 거침없이 쏟아붓는다면 마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보기에는... 별로 안 기뻐 보이는데?”강현우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내려왔고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리가요.”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윤하경은 그가 믿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묵직한 분위기는 여전했다.다행히도 그때, 하인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하경 씨.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윤하경은 구세주라도 나타난 듯 바로 식당 쪽으로 향했다.“오늘은 뭐예요?”준비된 식탁에는 여러 가지 반찬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고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윤하경은 일부러 강현우의 표정을 보지 않고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식사를 마친 후, 강현우가 말했다.“올라가서 옷 갈아입어.”“네?”윤하경은 놀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어디 가요?”“가 보면 알아.”그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듯 보여 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서 단정하게 옷을 챙겨 입고 서 있던 그녀는 눈빛이 잠시 흔들리며 혼잣말을 했다.“윤하경, 딱 이틀이야. 강현우와 함께할 마지막 시간. 그래, 마지막이라 생각하자. 조금은 좋은 기억도 남
“자자.”오늘 강현우가 말한 ‘자자’는 진짜 잠을 자자는 뜻이었다. 그가 얼마만큼 제대로 쉬지 못했는지, 윤하경도 짐작 할 수 있었다.강현우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누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경의 귀에 고르고 부드러운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윤하경을 품에 안은 채, 큰 손은 조심스럽고 단단하게 그녀의 아랫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윤하경은 미동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살며시 몸을 돌려 강현우와 마주 보았다.방금 샤워를 마친 그의 몸에선 은은한 향이 풍겼고 윤하경은 그 향이 꽤 마음에 들었다. 강현우는 눈을 꼭 감은 채 자고 있었지만 미간에는 어딘가 고민이 느껴지는 주름이 남아 있었고 마음속에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듯했다.만약 그녀의 계획대로 된다면 앞으로 며칠이 강현우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 될 테니 윤하경은 괜히 마음이 뒤숭숭했다.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몸을 틀려는 순간, 강현우가 갑자기 눈을 떴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생각해?”그의 눈빛은 늘 날카로웠다. 막 눈을 뜬 상황인데도, 마치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윤하경은 괜히 찔린 마음에 고개를 살짝 돌리며 억지웃음을 지었다.“당신 생각하고 있었어요.”그가 의심할까 봐, 그녀는 일부러 그의 품에 얼굴을 비비듯 안겼다. 강현우는 방금 샤워를 마친 탓에 얇은 반팔 홈웨어만 입고 있었고 옷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몸이 전해졌고 생각보다 손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윤하경은 마치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강현우는 코웃음을 치듯 웃었다.“그래? 아까는 전혀 그런 거 같지 않았는데.”입꼬리에 걸린 미소에는 비꼬는 기운이 느껴졌다.윤하경은 단박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아까 시가에서 그녀가 먼저 다가가지 않았던 일을 말하는 거겠지.그녀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적당히 둘러댔다.“현우 씨 어머님 앞에서는 좀 점잖아 보이고 싶었어요.”강현우가 한쪽 눈
두 사람의 뒷모습은 나름 잘 어울려 보였지만 한선아는 그 모습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강현우와 윤하경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한선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차탁 위에 놓인 찻잔들을 손으로 쓸어내렸다.그러자 도자기가 바닥에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이 집사가 깜짝 놀라 달려오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사모님, 혹시 데이신 거 아니세요?”한선아는 가볍게 손을 뿌리치고 의자에 앉아 냉소를 터뜨렸다.“봤지? 내가 그렇게 공들여 키운 아들이라는 애가,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자기 엄마한테 저런 태도를 보이네.”이 집사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한선아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도련님은 지금 잠시 윤하경한테 눈이 먼 거예요. 조금만 지나면 사모님 마음도 이해하실 거예요.”이야기하면서 이 집사는 하인들을 불러 방 안의 어질러진 잔해들을 치우게 했다.한선아는 그 말에 시큰한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래도 윤하경이 제법 눈치는 있더라. 이 집안에 들어오기 쉽지 않다는 걸 안 거겠지.”그러고는 문득 입을 닫고 말끝을 흐렸지만 이 집사는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챘다.이 집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저 어린애일 뿐이잖아요. 아무리 도련님이 지금은 아껴주신다 해도 잠깐이에요.”“사모님께서야 말로 이 집의 안주인이신데 그런 아이가 감히 어찌 따라오겠어요. 상대가 안 되죠.”그 말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한선아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옷 좀 갈아입자. 바람이나 쐬러 나가서 차 한 잔 마셔야겠어.”...차 안.며칠 만에 다시 마주한 강현우는 윤하경이 보기에도 꽤 지쳐 보였다.겉모습은 여전히 완벽한 그였지만 눈가에 남은 피로는 숨기지 못했다.그렇게 정력적이고 항상 빈틈없던 그에게서 이런 모습이 드러나다니... 윤하경은 왠지 마음 한쪽이 찌릿했다. 뭔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강현우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
“좋아, 그럼 이따가 현우한테 전화해서 네가 내 쪽에 있다고 말할게. 그다음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지?”한선아가 의미심장하게 묻자, 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강현우는 우지원의 연락을 기다리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전화를 받은 순간, 그의 목소리엔 피곤함이 그대로 묻어났다.“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얘 좀 봐. 이게 몇 날 며칠인데 한 번을 집에 안 와? 네 엄만 안 보고 싶냐?”한선아는 들으라는 듯 콧소리를 섞어 핀잔을 줬다.“요즘 시간이 없어서요.”강현우는 냉랭하게 받아쳤다.“바쁘긴 뭐가 바빠. 사람 찾느라 정신없는 거겠지.”강현우는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고 막 입을 떼려는 찰나, 한선아의 말이 이어졌다.“그만 찾아도 돼. 네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애, 내 쪽에 있어.”강현우는 이를 악물 듯 어금니를 살짝 깨물었다.“무슨 뜻이에요?”“말 그대로야. 얼른 와. 윤하경, 지금 너 기다리고 있어.”그러고는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현우는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깊은 눈빛으로 무언가를 곱씹듯 응시했다.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고 이내 의자에 걸쳐둔 재킷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집을 나섰다.그가 저택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정원에 도착하자, 마침 한선아가 마당에서 차를 마시며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하경이는 어딨어요?”강현우는 다가오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눈빛은 싸늘했고 감정은 하나도 섞이지 않은 말투였다.“엄마 보자마자 얼굴 한 번 보고 인사도 없이 그게 할 소리니?”한선아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지만 표정만큼은 어딘가 흥이 나 보였다.“이 집사, 윤하경 데려와.”한선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도련님이 아주 성이 났네요.”이 집사가 자리를 뜨자, 한선아는 강현우의 손을 잡아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앉아서 차 한 잔 마셔. 뭐 그렇게 급하게 굴어.”하지만 강현우의 시선은 아예 집 쪽을 향해 고정돼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윤하경은 한선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윤하경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릴 때마다, 그 얼굴은 여전히 나약하고 여려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느껴졌다.한선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윤하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끝내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좋아. 계속해 봐.”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사모님. 만약 저희 사이에 ‘협력’이라는 가능성이 있다면요?”한선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눈빛에 의심을 담아 되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지?”“제가 강씨 가문 며느리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현우랑 결혼하기 싫다는 거야?”한선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윤하경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길게 내려온 속눈썹 아래로 감춰진 그녀의 눈빛 속엔 복잡한 감정이 숨어 있었다.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간단할 수 없다. 그동안 강현우와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분명 감정은 생겼지만 동시에 그는 지나치게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와 결혼하게 된다면 언제 어떤 일로 폭발할지 모를 상황이 반복될 것이 뻔했다.윤하경은 솔직히 겁이 났다. 사랑보다 생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비겁할지 몰라도, 그게 지금의 진심이었다.“맞아요.”윤하경은 다시 고개를 들고 한선아를 똑바로 바라봤고 눈빛은 흔들림 없이 또렷했다.한선아는 그 눈빛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봤다. 정말 속마음과 같은 말을 하는 건지, 거짓을 꺼낸 건 아닌지 끝까지 지켜보았지만 결국엔 그 단단한 눈빛 외엔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하, 진짜 의외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한선아는 몸을 소파에 기대며 냉소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그래서 어떤 방식의 협력인데?”윤하경은 한참을 고민한 듯 침묵하다가, 이내 작게 숨을 고르고 말을 꺼냈다.“제가 원하는 건 단순해요. 사모님도 저를 집으로 들이고 싶지 않으시잖아요. 저도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