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니 윤수철은 정원에 앉아 있었다.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인상을 썼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 지호랑 좀 더 놀다 오지.”윤하경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참지 못하고 윤수철에게 빈정거렸다.“아빠, 요즘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윤수철은 차를 마시려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노려보았다.“너는 내가 잘되는 꼴은 못 보냐?”윤하경은 비웃듯 웃었다.“아니요. 아빠가 딸 팔아서 잘 먹고 잘살려고 그렇게 애쓰시는 걸 보니 회사가 곧 망하기라도 할 것 같아서요.”그녀의 독설은 여전했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수철은 분노에 차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윤하경에게 집어 던졌다.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 행동이 그저 부끄러움에 발끈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태연하게 허리를 굽혀 찻잔을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윤수철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이 다기 세트, 한 세트에 수백만은 할 텐데, 하나라도 깨지면 값어치가 떨어지잖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를 흔들며 요염하게 걸어갔다.윤수철은 이를 악물고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윤하경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잠깐만!”윤하경은 돌아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수철: “앉아 봐. 할 얘기가 있어.”사실 윤하경은 윤수철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실망할 대로 실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뭔가 꾹 참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졌다.그래서 그녀는 곧바로 윤수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에게 온순한 미소를 지었다.방금 그가 물건을 집어 던진 것에 대해서는 전혀 화난 기색이 없었다.“아빠, 무슨 일인데요?”윤수철은 잠시 말없이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그녀에게도 한 잔 따라주었다.윤하경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가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그리고 그 일이 결코 작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윤수철이 찻잔을
여기까지 말한 윤하경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앞에 놓인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윤수철은 항상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 앞에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려 했다.그러니 힘들게 자신에게 부탁하는 만큼 부탁을 들어줄지는 둘째 치고 먼저 이득부터 챙겨야 했다.예상대로 그녀의 말을 들은 윤수철의 얼굴에 희망이 어렸다.“다만 뭐?”윤수철은 다급하게 물었다.그의 초조한 모습은 대기업 회장의 침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그러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년 만에 한빛이 이 지경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탄탄하게 다져놓은 기반이 아니었다면 한빛은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그녀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우스웠다.어머니처럼 똑똑하고 밝은 분이 왜 윤수철과 같은 배은망덕한 남자에게 빠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지난 일은 묻어두기로 하고 윤하경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 윤수철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윤수철은 순간 넋이 나간 듯 멍해졌다. 마치 죽은 아내 신수아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빠도 알다시피 성남에 있는 별장은 엄마가 저한테 남겨주신 유일한 유산이에요. 이제 곧 시집가는데, 그 별장은 제가 유일하게 가져가고 싶은 혼수네요.”이럴 때 조건을 걸지 않으면 바보였다.윤수철은 멍해졌고 기대에 차 있던 눈빛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왜 또 그 얘기를 꺼내!? 이미 말했잖아! 그 일은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그러자 윤하경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더 이상 얘기할 필요 없겠네요?”그녀는 태연하게 일어섰다.“그럼 없었던 일로 해요. 저는 바빠서 이만 올라가 볼게요.”그녀의 말에 윤수철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너 요즘 왜 이렇게 계산적이 된 거야! 넌 윤씨 성이 아니야?”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사실 그녀는 이 성씨조차 지긋지긋했다.윤수철을 상대하기도 싫어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2층에 올라간 뒤, 그녀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윤하연의 병원 진료 기록을 입수했다.진료 기록
“지호 오빠, 오늘은 오빠에게 선물을 주려고 왔어.”윤하연은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꺼내 구지호에게 내밀었다.“열어 봐.”구지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자를 잠시 쳐다보다가 결국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보았다.하지만 안에 든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잘생긴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다.“이게 무슨 뜻이야?”구지호는 상자 안에서 검사 결과지를 꺼내 윤하연 앞에 흔들었다.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윤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지호 오빠, 나 임신했어. 우리 아기야. 여길 봐. 벌써...”“그만해!”구지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얼마를 원하는데?”윤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뭐, 뭐라고?”구지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인 후 나른한 자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액수를 말해. 그리고 애는 지워.”이런 반응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윤하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구지호는 비웃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하연아, 너는 순진한 여자가 아니잖아. 네가 먼저 내 침대로 기어 들어왔으면서, 이제 와서 아이 가지고 나를 협박하려는 거야? 내가 아직 참을성이 있을 때, 액수를 말해.”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윤하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그는 다른 사람에게 협박당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윤하연은 그에게 단지 욕구를 해소하는 도구에 불과했다.“지호 오빠, 이건 우리 아기잖아...”윤하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구지호가 조금이라도 기뻐할 줄 알았다.그런데 그는 너무나 매정했다.구지호는 코웃음을 쳤다. “아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하경이뿐이야. 그런데 네가 감히 아기로 날 협박한다고. 내 아이를 가질 자격이 있는 건 하경이뿐이라고.”구지호의 매력적인 눈에는 말보다 더 날카로운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는 건들거리며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차갑게 웃었다.“설마 아이 하나 가졌다고 구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윤하경은 선글라스 뒤에서 눈썹을
약혼식이 다가올수록 집안 분위기는 미묘하게 흘러갔다.하지만 윤하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도 그녀대로 바빴으니까.어느 날 출근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거실에서 서성거리는 윤수철이 보였다.그는 요즘 한가한지 집에 있는 날이 많았다.지난번 대화가 불편했던 터라 윤하경은 못 본 척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윤수철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하경아, 잠깐만.”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는데 마치 딸이 아닌 낯선 사람을 부르는 것 같았다.윤하경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윤수철은 그녀 앞으로 다가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오늘은 출근하지 말고 지호한테 전화해서 점심 약속 잡아. 걔랑 밥 좀 먹어야겠다.”보아하니 구씨 가문에서 윤수철을 점점 더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윤하경: “오늘은 일이 있어서 죄송해요. 지호에게는 직접 연락하세요.”윤수철은 화가 나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그녀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말했다. “지난번 네가 말한 건 들어줄 수도 있어. 구씨 가문에서 투자만 확정되면 남성에 있는 별장 바로 네 앞으로 해줄게.”누굴 바보로 아나?윤하경은 그를 돌아보며 어이가 없었다.“제가 바보로 보여요? 별장 명의가 제 앞으로 넘어오기 전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윤하경은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조롱했다“아빠는 제게 신용도가 제로거든요.”그녀의 말은 매정했다. 윤수철은 그녀의 독설에 익숙했지만 그래도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하지만 지금 윤하경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이 일은 오직 그녀만 해낼 수 있었다.그는 잠시 망설이다 윤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연이 2층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고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피곤해 보였다.하지만 애써 웃으며 윤수철에게 공손하게 물었다.“아빠, 무슨 일이세요?”“신분증을 가지고 하경이랑 함께 부동산 등기소에 가서 그 집 명의 이전을 해.”윤하연의
임수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팔짱을 낀 채 서 있던 윤하경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임수연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윤수철이 갑자기 집 이야기를 꺼낸 건 분명 윤하경이 이간질했기 때문일 것이다.그 집은 자신이 애교를 부려 겨우 얻어낸 건데 이렇게 윤하경에게 그냥 넘겨줄 수는 없었다.한참 마음을 다스린 후, 그녀는 윤하경을 욕하려는 충동을 가라앉히며 윤수철에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여보, 갑자기 왜 집 얘기예요? 그 집은 하연에게 선물로 주기로 했잖아요?”윤수철은 그녀의 물음에 답변 대신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가져오라면 가져올 거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윤수철은 임수연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부드럽게 유지하던 그녀의 표정은 거의 무너질 뻔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여보, 그 일은...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낀 손가락을 살짝 오므렸다.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집이 이미 그들 모녀의 손에 들어갔으니 다시 내놓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임수연이 뭐라고 변명할지 가만히 지켜봤다.하지만 윤수철은 그녀처럼 참지 못하고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너희들 이제 하나씩 내 말을 무시하기 시작한 거야?”요즘 정말 힘든 일이 많았는지 예전의 우아하고 점잖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초조함만 남은 윤수철이었다. 임수연은 무언가 말하려다 주춤하며 주변을 살폈다.윤하경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쯧, 아줌마, 할 말 있으면 어서 해 보세요. 무슨 핑계를 댈지 궁금하네요.”임수연은 속으로는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다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니면 저라는 외부인이 있어서 말하기 불편한가요?”그녀의 말은 정말 마음을 찔렀다.윤수철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해.”
낯 뜨거워진 윤수철도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임수연을 매섭게 바라보았다.“그래, 그동안 내가 당신에게 맡긴 돈과 펀드는 당신이 나에게 준 돈보다 훨씬 많아. 고작 십억 때문에 집을 담보로 잡았다고?”윤하경은 비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임수연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쥐어짜 내는 꼴이 정말 우스꽝스러웠다.예전에 엄마는 이 집을 위해 헌신적이었고 직장에서든 생활에서든 윤수철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줬다. 엄마가 있을 때 한빛은 이렇게 한심한 상황에 처한 적이 없었다.고작 십억도 없다니.딱 봐도 그동안 윤수철이 얼마나 한빛을 말아먹었는지 알 만했다.그런데도 윤수철은 여전히 엄마보다 임수연에게 더 마음을 주고 있었다. 그녀가 엄마 발끝에도 못 미치는데 말이다.역시 남자는 다 똑같은 짐승이었다.임수연은 마침내 변명거리를 찾아냈고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동안 나에게 준 돈만 생각하지 집안 살림에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생각해 봤어요? 집안 행사, 가정부 월급, 생활비, 옷값까지 다 돈이에요. 이런 건 당신 같은 남자는 생각도 못 하겠죠.”임수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윤수철을 원망스럽게 쏘아봤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매력적인 눈빛이었다.“당신이 날 의심한다면 우리 장부 정리하고 이혼해요. 어떤 사모님이 나처럼 살아요? 남편한테 이런 의심이나 받고.”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윤수철이 뭐라 하기도 전에 눈물을 훔치며 쿵쿵 위층으로 올라갔다.윤수철은 당황해서 허둥지둥 따라 올라갔다.순식간에 아래층에는 윤하경과 윤하연 두 사람만 남았다. 윤수철과 임수연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윤하연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노려보며 말했다.“이제 속이 시원해?”윤하경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너희 모녀의 연기는 정말 대단해.”윤하경은 차갑게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하연아, 너 기억해. 이 일은 아직 안 끝났어. 내 거, 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찾아올 거야.”윤하연이 웃었다.“네 거?”이제 윤하경 혼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차는 앞차와 충돌했다.‘아우, 재수 없어.’차를 세우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 순간, 동공이 움찔하며 줄어들었다.‘이 차,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그때, 훤칠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차갑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를 보고 숨을 들이키며 몸을 움츠렸다.‘이런 젠장, 사고가 나도 하필 강현우를 만나다니?’다행히 강현우는 그저 길가에 서서 뒤돌아 그녀를 흘끗 볼 뿐이었다. 시력이 좋은 그는 차 안의 윤하경을 단번에 알아보았다.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모르는 사람처럼 시선을 돌렸다.강현우의 비서는 윤하경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는 강현우와 윤하경의 관계를 몰랐기에 강현우에게 차인 그녀가 일부러 이 만남을 만든 거라고 생각했다.오랫동안 강현우 곁에서 일했던 그는 이런 식으로 강현우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수없이 봐왔다.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윤하경에게 말했다.“윤하경 씨,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어색하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저기, 많이 망가졌어요? 제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바로 보험사에 전화할게요.”사실 그녀도 마음이 아팠다. 새 차를 얼마 타지도 못했는데 사고가 났으니 말이다.비서는 미소를 지으며 강현우를 흘끗 보고 윤하경에게 말했다.“이 차는 대표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차라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대표님과 직접 이야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윤하경은 가슴이 철렁해서 강현우를 쳐다봤다.사실 그녀는 강현우가 좀 무서웠다. 그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예전에 그를 유혹하려다 실패했던 기억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프로젝트가 끝나면 강현우와 끝내려고 했는데 하필 운전하다 마주치다니.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다가갔다.“강 대표님.”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요?”강현우는 대답 없이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길고 고른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중요한
강현우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흘끗 보고는 차 뒤쪽으로 돌아가 두 차의 상태를 확인했다.윤하경의 차가 들이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차는 별문제가 없었고 페인트만 조금 벗겨졌을 뿐이었다.반대로 강현우의 차는 손상이 심했다. 그는 두어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여기는 택시 잡기가 어려워. 네 차는 문제가 크지 않으니 차 키 줘. 나는 비서와 함께 먼저 회사에 갈 테니 넌 여기서 처리를 기다려.”윤하경: “...”“저도 일이 있거든요!”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강현우는 냉소를 터뜨렸다.“그러니까 다음부터 내 주의를 끌고 싶다면 네가 치러야 할 대가부터 생각해 봐. 네 책임이니까 네 일은 나랑 상관없어.”윤하경: “...”그녀는 자신이 고의로 그의 차를 들이받은 게 아니라고 설명하려다가 무력감을 느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또 어디 있겠는가.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강현우와 말싸움하기 싫어 차 열쇠를 건넸다.“차 쓰고 나면 제 회사로 보내주세요.”강현우는 대꾸 없이 키를 받아 들고 윤하경을 스쳐 지나가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그녀의 차를 몰고 비서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윤하경은 발을 동동 구르며 혼자 땡볕 아래 서서 보험회사 직원이 와서 강현우의 차를 끌고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택시를 잡아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윤수철이 전화를 걸어 집으로 오라고 했다.그녀는 무시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윤수철이 이 시간에 자신을 집으로 부르는 이유는 구씨 가문에 가서 잘 말해서 빨리 투자를 받게 하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왜 그녀가 그래야 한단 말인가?그러나 식탁 의자에 잠시 앉아 있던 윤하경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쨌든 한빛은 엄마가 심혈을 기울인 곳이었으니 이대로 무너지면 엄마가 그렇게 고생해서 일궈낸 사업이 끝장나는 거였다.하지만 오직 그녀만 알고 있었다. 그녀와 구지호는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약혼식은 그저 두 집안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나는 시작일 뿐이었다.머리가 너무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