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두 시간이 지나자 민진혁이 책상 앞에서 서류를 넘기던 강현우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사모님이 오셨습니다.”그 순간, 강현우의 손끝이 잠깐 멈췄고 이내 이마에 주름이 잡히더니 고개를 들어 민진혁을 보았다.“분명히 말했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그 말에 코를 슬쩍 만지던 민진혁이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대표님, 이번만 뵙죠. 대표님도 사모님을 보고 싶어 하시잖아요.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강현우의 차가운 시선이 곧장 민진혁을 꿰뚫듯 바라보았다.“언제부터 네가 나한테 일을 가르쳤지?”민진혁은 어금니를 살짝 깨물었다. 강현우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세에 눌려 더 말을 잇지 못했다.강현우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대신 시선이 무릎 쪽으로 내려갔다. 비싼 양모 담요가 다리를 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망가진 다리였다.강현우가 낮게 말했다.“가서 전해. 여기는 윤하경이 올 곳이 아니라고.”“하지만 대표님...”민진혁이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얼음장 같은 눈빛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그러자 민진혁도 하려던 말이 목에 걸려 더는 나오지 않았다.“그... 알겠습니다.”민진혁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삼켰다.‘대표님은 참 고집도 세셔...’하지만 괜히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봐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말이었다.어떻게 말을 돌려서 덜 상처 주게 전할지 고민하며 막 몸을 돌렸는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이어 차분하고도 또렷한 윤하경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현우 씨, 안에 있는 거 알아요.”강현우가 홱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민진혁이 잠깐 얼어붙더니 눈빛으로 물었다.‘열까요?’강현우는 미간을 세게 찌푸린 채 문 쪽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민진혁에게는 눈빛조차 주지 않았다.민진혁은 자기 멋대로 강현우의 뜻을 판단할 수 없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 순간, 방 안은 묘하게 가라앉은 정적에 잠겼다.그때 문밖에서 윤하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윤하경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였다.‘갑자기 왜 얼굴이 붉어졌지?’잠시 후에야 윤하경은 곧 이유를 알았다.백지유가 고개를 떨군 채 머쓱하게 말했다.“민진혁 씨가... 저한테 청혼했어요. 그래서 강현우 대표님이 빨리 회복하시면, 진혁 씨가 늘 대표님 곁을 지키는 자리에서 다른 직무로 옮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러면 저도 더 많이 진혁 씨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요.”“아, 그래서 그랬군요.”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현우 씨가 빨리 회복되면, 진혁 씨가 예전 직무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현우 씨께 말씀드려 볼게요.”“그리고... 가능하면 장기 휴가도 좀 주시면 더 좋고요.”백지유가 웃으며 덧붙였다.“그렇게 되면 좋겠죠.”윤하경도 미소를 보였다.잠깐 기뻐하던 백지유가 다시 머뭇거렸다.“그런데 하경 씨, 제 할아버지가 오셔도 꼭 나으리란 보장은 없잖아요. 혹시 그럴 경우에는...”사실 그게 백지유가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었다.의술에는 자신이 있지만, 병이라는 게 실력만으로 반드시 낫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괜히 덤볐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강현우와 윤하경 원망을 할까 봐 마음이 켕겼다.윤하경은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요즘 강현우 곁의 의사들은 죄다 서양의학 쪽이었다. 그래도 수천 년 내려온 한의학이 아직도 존재하는 이유는 쓸모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전에 강현우의 몸을 낫게 해준 것도 백지유의 할아버지였다.‘이번에도 혹시...’윤하경은 희망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잠시 뒤, 윤하경이 고개를 들어 백지유를 바라봤다.“마음은 잘 알겠어요. 지금 바로 전용기 준비해서 할아버지를 경성으로 모실게요. 결과가 어떻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백지유에게 사심이 조금 섞였다는 걸 알면서도, 이건 윤하경이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그럼에도 이런 때에 이런 말을 꺼냈다는 건, 결국 강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그러자 백지유의 미소가 한층 진지해졌다.“하경 씨, 별말씀을요. 사실은 저희가
백지유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윤하경은 잠시 놀랐다.이틀 넘게 민진혁을 보러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윤하경은 소파에서 일어나 도우미를 불러 물을 내오게 했다.“지유 씨, 민진혁 씨는 어때요?”백지유가 살짝 웃었다.“잘 지내요. 벌써 퇴원했고, 요즘은 강 대표님 댁 쪽에 있어요.”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네요.”백지유는 한동안 윤하경을 바라보다가 말을 고르듯 멈칫했다.민진혁이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요즘 윤하경과 강현우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그래도 백지유는 남의 집 사정에 참견할 일은 아니었고, 오늘은 따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온 참이었다.“하경 씨, 사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민진혁 씨의 말로는... 강 대표님의 다리가 많이 까다로운 상황이라면서요?”역시 예상대로였다.윤하경의 손이 컵을 감싼 채 잠깐 굳었다.하지만 곧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네? 그게 무슨 얘기죠?”백지유가 입술을 한 번 굳게 다물고 말을 이었다.“강 대표님이 예전에 우리 동네로 떠밀려 오셨을 때, 치료해 드린 사람이 제 할아버지예요.”“그건 알아요.”윤하경이 컵을 내려놓았다.“그때 일은...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백지유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이제는 더 고맙다는 말씀을 안 하셔도 돼요. 오히려 제가 얻은 게 더 많거든요. 대표님을 도운 덕분에 외진 시골을 나와 이렇게까지 오게 됐으니까요. 그걸로 이미 충분한 보답을 받았어요.”작은 읍내에서 자랐어도 백지유는 눈치가 빠르고 마음 씀씀이가 넉넉했다.백지유는 마음도 단단했다.그래서 예전에 강현우에 관한 마음을 접었을 때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잠깐 꾸었던 비현실적인 꿈이었고, 눈을 뜨자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여겼다.윤하경이 고개를 기울였다.“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예요?”백지유가 본론을 꺼냈다.“제 할아버지가 한의사세요. 침술도 아주 능하시고요. 혹시 강 대표님
주치의가 상처를 꼼꼼히 살피더니 얼굴이 조금 굳었다.의사가 손끝으로 강현우의 다리 상처를 가볍게 눌렀다.“아픕니까?”강현우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의사가 미간을 좁히더니, 곁에 둔 작은 반사 망치로 무릎 관절을 톡톡 두드렸다.“지금은 느낌이 오나요?”일자처럼 굳어 있던 입매가 아래로 살짝 내려갔을 뿐, 강현우는 아무런 말도 없었고,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뜻이었다.의사가 잠깐 멈춰 서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망치를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했다.“강현우 씨, 마음을 급히 먹지 마세요. 아직 회복기입니다. 치료를 계속하면 나아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강현우는 어금니를 세게 물었고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졌다.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의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강현우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공연히 환자를 자극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는, 의사들의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벌써 몇몇 의사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던 답이었지만, 같은 말을 거듭 들을 때마다 강현우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의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조심스럽게 제안했다.“강현우 씨가 괜찮다면 내일부터 재활을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버틸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방 안의 공기가 잠깐 멈춘 듯 고요해졌다.강현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모두가 이 말이 환자에게 일종의 희망을 건네는 수단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희망이 얼마나 가느다란지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짧은 침묵 끝에 강현우가 또렷이 답했다.“하겠습니다.”의사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재활 계획은 논의해서 곧 전달해 드리겠습니다.”강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뒤에 서 있던 민진혁이 의사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여기까지 모시겠습니다.”의사들이 나가자, 넓은 방에는 강현우 혼자만 남았다.강현우는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오래도록 가만히 있
“처음부터 오빠랑은 아무 상관도 없었고, 오건우는 이미 목숨으로 값을 치렀어.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오늘을 끝으로 더 이상 꺼내지 말자.”윤하경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강현우가 앞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하석호가 윤하경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하경아, 난...”“다른 일이 없으면 쉬고 싶어.”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하석호 얼굴을 보는 순간마다 오건우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윤하경은 그 사실이 몹시 불편했다.하석호가 잠깐 말을 고르다가 어쩔 수 없이 윤하경과 함께 일어섰다.“하경아, 이번 일로 너랑 강현우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보고 널 잘 챙기라고 하셨어. 강현우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너 혼자 아이를 품고 지낸다는 얘기도 들었어.”윤하경은 내려뜨린 손을 꽉 쥐었지만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그러자 하석호가 계속 말했다.“어쨌든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이야. 나는 언제까지나 네 오빠고... 네가 필요한 건 뭐든지 내가 앞장설게. 강현우가 끝내 돌아오지 않거나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되면 그냥 모성으로 와. 너와 아이는 내가 충분히 책임지고 보살펴 줄 수 있어.”윤하경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석호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물러서는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는 단호했고, 은혜를 준 이에게는 두 배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씨 가문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윤하경도 적지 않게 하석호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 하석호가 이런 말을 해 준다는 것이 윤하경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석호는 말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이 말 역시 온통 윤하경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그러자 윤하경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지금은 윤하경 혼자서도 아이와 자신을 지킬 능력이 있었지만, 하석호
며칠 전에도 하석호를 봤는데, 오늘 다시 마주하니 지난번보다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다. 단숨에 많은 일을 겪은 사람처럼 얼굴이 훨씬 더 늙어 있었다. 하씨 집안에 큰일이 터졌을 때조차 오늘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윤하경은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집사는 윤하경에게는 따뜻한 물을, 하석호에게는 차를 내왔다. 둘은 마주 앉았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석호는 말할 듯 말 듯 윤하경을 보며 망설였다.한참 지나 하석호가 앞의 찻잔을 살짝 들이킨 뒤 내려놓고 물었다.“요즘... 잘 지내?”의례적인 안부였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윤하경이 어떻게 지낼지야 다 알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 형제자매처럼 가깝진 않아도 그나마 서로 의지하 사이였는데 불과 한 걸음 남짓 떨어져 앉아 있으면서도 윤하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럭저럭 버티고 있어.”윤하경이 짧게 답했다.하석호는 윤하경의 표정을 한참 들여다보다 다시 잠잠해졌고 긴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오건우가 죽었어. 원래는 강현우를 원망했는데... 이제는 안 하려고.”그 말에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하석호를 보더니 짧게 웃었다.“왜요?”하석호는 잠깐 멈추었다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사실 오늘 온 이유도... 오건우의 일로 너희한테 사과하려고 왔어. 너희의 평온한 삶을 망쳐서... 미안해.”하석호의 목소리도, 자세도 아주 낮았다. 그러니 진심은 충분히 느껴졌는데도 윤하경은 씁쓸하게 웃음이 났다.“사과? 무슨 자격으로? 애초에 잘못한 건 오빠가 아니잖아.”그 말을 듣자 하석호가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로 거칠게 찔러 넣었다.“왜 그랬는지... 오건우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어. 분명 건강 상태가 괜찮았어... 모든 게 좋은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하석호의 목소리에는 뚜렷한 고통이 배어 있었다.윤하경은 하석호를 바라봤다. 오건우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윤하경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잠시 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