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나 오늘 재워줘.”
“뭐?”
지음의 목젖이 크게 반응했다. 마른침을 얼마나 삼켜대는지 알 수 있었다.
막상 말을 꺼낸 서현은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애먼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던 손도 멈추었다.
처음 본 남자한테 재워달라는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고통으로 지난했던 일상을 잠깐만 떠올려보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집에 가기 싫어.”
오늘은 정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연신 침을 삼키던 지음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안 돼. 그리고 너 그러다 진짜 혼나.”
알 수 없는 서운함에 서현은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안 재워 줄 거면 말지. 왜 갑자기 선도 질이야?”
“너 내가 진짜 나쁜 놈이면 어쩌려고 그러냐?”
“집에 가나 여기서 죽나.”
“야! 여자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지음의 날카로운 눈매가 저를 꾸짖듯 노려보고 있었지만 역시나 그의 눈동자에선 온기가 흘러나왔다. 저 사람은 뭐 때문에 저렇게 단순하고 따뜻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화가 났다.
아까만 해도 집에서 본 아버지란 작자의 살기 어린 눈과 쉴 새 없이 폭언을 해대던 모습이 엉겅퀴처럼 신경 마디마디에 걸려있는 나로선,
이 낯선 안온함이 궁금하면서도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짙고 깊은 슬픔은 대체로 분노로 감추는 게 쉽고 빨랐다.
“아, 왜 소리를 질러! 가면 되잖아.”
“너 집 어딘데.”
“내 옷이나 줘.”
“아직 안 말랐어. 그리고 너…좀 기다려.”
지음은 으름장 놓듯 단단한 말투로 말을 마치더니 얼른 테이블을 치웠다. 서현은 그가 모르게 작은 한숨을 흘리곤 고개를 떨궜다.
그래, 내가 이상한 거지…처음 본 사람한테.
테이블을 다 치운 지음은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이 덜거덕거렸다. 한참 동안 뒤적이는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잦아들자, 서현의 축 처진 고개와 어깨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음이 가까이 온 걸 알면서도 서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우습지만 작은 반항 같은 것이었다. 저를 잡아끌어 밖으로 내쫓아도 반항이나 저항할 자격이 전혀 없는 주제에 말이다.
그런데 그때, 서현의 시야로 지음의 머리통과 어깨가 보였다. 털퍼덕 주저앉은 지음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커다란 허벅지 위에 파스, 연고, 대일밴드, 스포츠 테이프 같은 것들을 올려두었다.
이 상황이 그저 의아한 서현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뭐…에요?”
지음이 고개를 들어 저를 보았다. 짙고 곧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그랬냐. 아버지?”
“…….”
“이런 거 오래 두면 다 흉 나. 좀 만질게.”
지음은 조심스럽게 서현의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리곤 자기 무릎 쪽에 서현의 발을 살포시 올렸다.
헐렁한 바지 사이로 뻗어 나온 그녀의 가녀린 다리엔 먼 시간부터 가까운 시일의 기록이 여러 생채기로 남아있었다.
얼핏 보았을 때보다 심각한 서현의 상처를 보자 지음의 목울대가 크게 진동했다.
서현의 발가락이 긴장감과 낯섬에 한껏 움츠러들였다.
“…흉도 오래 둘 시간이 있어야 남는 거 아닌가.”
건조하지만 빽빽한 서러움이 서린 서현의 목소리에 지음은 입매를 강하게 당겨 물었다. 그리고 새하얀 다리 위로 그려진 잔인한 흔적을 연고와 크림으로 부드럽게 덧칠했다.
커다랗고 거친 지음의 손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전해지는 저릿함에 서현이 발을 크게 움찔거리자, 지음의 손이 서현의 발목을 강하게 눌렀다. 한 줌에 잡힌 서현의 발목이 엷게 떨렸다.
“가만히 있어. 다 했어.”
“……으응.”
“너 강운사거리 알아?”
“알지.”
“그럼 무지개 떡집은.”
“알아.”
“무지개 떡집 뒤로 쭉 들어오면 우리 집이야. 지금 여기.”
“…뭐, 가깝네.”
지음이 서현의 발목을 슬며시 놓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또 그러면 무조건 뛰어와. 여기로.”
서현의 눈시울이 단박에 뜨끈해졌다.
‘무조건 뛰어와. 여기로.’
이 말이…서른이 되어서 떠올려도 눈가를 비비게 만들 줄은 몰랐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갈 곳 없이 뛰어다닌 게 몇 년이었다. 뛰어다니든 굴러다니든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이 지옥이라…정처 없는 그 순간이 차라리 개운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아버지의 외도와 폭력으로 엄마는 오래전에 집을 나갔다. 엄마가 집을 나간 건지, 나를 버린 건지 분간이 어려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사라지고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고스란히 받아 내고 나니, 엄마는 나를 버린 게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집을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그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던 그 여자는 집에 와서 밥을 하고 빨래를 했고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마치 다른 엄마들처럼.
썩 다정하진 않았지만, 남들 눈에 엄마처럼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한 뒤부터였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집 나간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견디지 못한 그 여자는, 아버지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엄마가 집 나가고, 처음엔 아빠만 그랬는데 지금은…그…”
서현은 그 여자를 새엄마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 남들한테 이런 얘길 해본 적도 없다. 뭐라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매듭 없는 말에 입술만 달싹이는데 지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워 줄게, 마서현.”
쌀쌀한 아침 바람이 코끝에 맺히며, 가을이 무릇 깊어졌다.사실 서현에게 계절은 흑백사진 같은 것이었다.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것이었던 오래된 흑백사진 같은 것 말이다.그러나 지음은 가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가을은 보석함 같아.’‘보석함?’‘응, 하나씩 꺼내서 보답하는 계절이거든. 저기 저만치 높아진 하늘이 무대고, 나는 거기 서서 빨갛게 익은 내 심장을 꺼내서 던지는 거야. 내 혼신을 받쳐서 발을 내딛고, 내 숨을 다해서 반드시 이겨야 해. 그렇게 증명하고 보답하는 계절.’새파란 하늘을 그렇게나 한참 올려다본 게 언제였을까. 지음을 따라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올려다본 날, 지음은 그렇게 자신의 가을 그리고 보석함에 대한 이야길 해주었다.그때는 그저 근사하게만 들렸는데 그로부터 몇 년 뒤,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야구’를 제대로 알게 되고 나서야 야구 선수에게 ‘가을’이 얼마나 벅차면서도 버거운지, 고대하면서도 고단한지, 환희로우면서도 처절한 것이었는지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아무튼 그렇게 찬란한 그의 가을 하늘을 따라 올려다볼 땐, 내가 주워 든 흑백사진에도 푸른 잉크가 배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한동안 보이지 않던 아버지의 신발이 현관에 보인 순간, 모든 것이 착각일 뿐이었다. 내 흑백사진은 결국 흑백으로 끝날 운명이었다.어둠이 짙게 내린 방 안 구석에 쪼그려 앉은 서현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핸드폰 너머로 번져오는 온전하고 따뜻한 지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
스무살의 나는 그때……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마서현!”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보며 뛰어오는 저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든 나를 한눈에 알아보는 저 남자, 강지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또 뛰어오네, 저 바보 진짜.”서현의 집 앞 골목, 모자를 훌렁 벗어 던지고, 어깨에 메고 있던 짐 가방을 바닥에 휙 버려둔 채 어느덧 한달음에 제 앞으로 달려온 지음은 자신의 커다란 품 안으로 서현의 몸을 가득히 밀어 넣었다.캄캄한 골목 귀퉁이에 놓인 가로등의 파리한 불빛 아래로 두 사람은 한 몸인 듯 엉겨 붙었다. 지음은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서현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서현은 숨이 컥 하고 막혀 와도 금세 피실피실 웃음이 삐져나왔다.숨이 막혀도 좋은 행복이란 것을 오직 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언젠가, 내가 견뎌 온 모든 상처보다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올 줄도 모르고.그렇게 나는 그의 사랑을 온몸으로 마다하지 않았다.“악, 숨 막혀. 켁”“하, 미안해. 너무 좋아서. 보니까 너무 좋아서. 땀 냄새 많이 나지?”여린 서현의 몸을 조심히 떨어트려 놓고는 유니폼 냄새를 맡으며 바보처럼 웃는 지음이었다.“흙냄새나. 얼마나 구른 거야.”
“재워 줄게, 마서현.”저를 보고 씩 웃는 지음의 얼굴이 서서히 뿌옇게 번졌다. 뜨근해진 눈시울이 기어코 눈물을 퐁퐁 쏟아냈다.서현은 눈물을 지우며 뿌연 시야 속에서 지음의 얼굴을 다시 찾았다. 그의 웃는 입매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굽이굽이 인생을 달려왔지만, 그의 웃는 얼굴은 단숨에 사랑 그 비슷한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이런 게…반한 건가?지음의 커다란 손이 서현의 눈가를 투박하게 쓸었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끝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서현은 그런 지음의 손길에 몸이 가늘게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이어져도 좋을 것 같았다.그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서현의 허리가 구부러졌고, 지음의 얼굴이 눈앞에 가까워져 있었다.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엔 제 얼굴이 비쳐 보였다.심장이 미친 듯 뛰어댔다. 그러다 그냥 미쳐버린 걸까.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들기도 전에 서현의 입술이 지음의 입술에 닿았다.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은 다른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듯 짜릿했다.아…마서현. 이 미친 것…! 이거 성추행 아냐…? 신고하면 어떡하지.입술을 가져다 대기 전 했으면 좋았을 그 생각이 이제야 뇌리를 스쳤다. 제 미친 짓에 간담이 서늘해진 서현이 얼른 입술을 회수하고 허리를 세웠다.일은 저질렀는데, 이 좁은 집엔 홧홧한 얼굴과 달아오른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그때, 서현의 손을 감싸는 커다란 지음의 손. 굳은살이 가득하고 거친 그의 손이 느껴졌다. 도망치려던 손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아니, 뿌리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지음은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물었다.“너 원래 처음 본 남자한테 뽀뽀하고 그래?”지음의 목소리가 미세한 떨림과 함께 늘어져 들렸다.“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은데.”단단하려 애쓴 서현의 목소리가 숨소리와 섞여 빠르게 튀어 나갔다.“나는 처음 본 여자랑 뽀뽀해 본 적도 없고…”잠깐 말을 멈춘 지음의 시선
“…나 오늘 재워줘.”“뭐?”지음의 목젖이 크게 반응했다. 마른침을 얼마나 삼켜대는지 알 수 있었다.막상 말을 꺼낸 서현은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애먼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던 손도 멈추었다.처음 본 남자한테 재워달라는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고통으로 지난했던 일상을 잠깐만 떠올려보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집에 가기 싫어.”오늘은 정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연신 침을 삼키던 지음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안 돼. 그리고 너 그러다 진짜 혼나.”알 수 없는 서운함에 서현은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안 재워 줄 거면 말지. 왜 갑자기 선도 질이야?”“너 내가 진짜 나쁜 놈이면 어쩌려고 그러냐?”“집에 가나 여기서 죽나.”“야! 여자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지음의 날카로운 눈매가 저를 꾸짖듯 노려보고 있었지만 역시나 그의 눈동자에선 온기가 흘러나왔다. 저 사람은 뭐 때문에 저렇게 단순하고 따뜻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화가 났다.아까만 해도 집에서 본 아버지란 작자의 살기 어린 눈과 쉴 새 없이 폭언을 해대던 모습이 엉겅퀴처럼 신경 마디마디에 걸려있는 나로선,이 낯선 안온함이 궁금하면서도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그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짙고 깊은 슬픔은 대체로 분노로 감추는 게 쉽고 빨랐다.“아, 왜 소리를 질러! 가면 되잖아.”“너 집 어딘데.”“내 옷이나 줘.”“아직 안 말랐어. 그리고 너…좀 기다려.”지음은 으름장 놓듯 단단한 말투로 말을 마치더니 얼른 테이블을 치웠다. 서현은 그가 모르게 작은 한숨을 흘리곤 고개를 떨궜다.그래, 내가 이상한 거지…처음 본 사람한테.테이블을 다 치운 지음은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이 덜거덕거렸다. 한참 동안 뒤적이는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잦아들자, 서현의 축 처진 고개와 어깨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지음이 가까이 온 걸 알면서도 서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우습지만 작은 반항 같은 것이었
“밥 먹을래?”지음의 물음에 서현이 조심스럽게 다시 그와 눈을 맞췄다.“…아니. 이제 나는…”집에 가보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거지 같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목구멍에 바늘이 박힌 것처럼 뻣뻣해져 말끝이 뭉개졌다.지음은 서현의 하다 만 대답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팔다리를 늘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는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서현은 그런 지음을 빠르게 눈으로 좇았다. 그러다 보니 이 집에 다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야구 선수? 뭐 그런 거야?”야구공, 글러브, 유니폼, 트로피 등 단순한 이 집 속에 유난히 튀는 물건들이었다. 빨래 건조대에 널려 있는 것들도 전부 운동복이었다.아, 그래서 몸이…!서현의 눈이 다시 그의 넓은 어깨로 향하는 순간, 지음이 봉지라면 세 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나 이거 진짜 아무나 안 주는 거다?”“달라고 안 했는데.”“아, 그리고 나 투수야.”“야구 선수가 아니고?”“……라면 주지 말까.”지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둘러 라면 끓이는 데 집중했다.집안은 금방 라면 냄새로 가득해졌다. 나름 상을 차린 지음이 식탁 앞에 앉아 서현을 불렀다.자극적인 냄새에 위장이 반응한 서현은 홀린 듯이 식탁 앞에 가 앉았다. 라면 위로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지음을 흘끗 보곤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잘 먹겠습니다.”“…잘 먹겠습니다.”지음을 따라 인사를 마친 서현은 달란 적 없다던 라면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주렸던 배를 이렇게 마음 편히 불린 게 언제인지. 서현은 불룩해진 제 배에 절로 손이 갔다.지음은 황당한 얼굴로 그런 서현을 빤히 보다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너 솔직히 라면 혼자 몇 개 먹어.”“…1개?”서현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지금껏 이렇게 마음 편하게 밥을 먹어 본 적도 없고, 먹고 싶다고 먹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까.“뻥 치네.”“그럼 2갠가.”“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내 반토막도 안 되는 게 먹어봤자지 했는데.”지음의 얼굴은 배신이라도 당한 양 억울해
10년 전, 그러니까―스무 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그를 만났다.그날도 여느 때처럼 아버지와 그 여자의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뛰쳐나온 날이었다.분명 좀 전까지 시퍼런 하늘에 쨍쨍하게 빛나던 해가 시커먼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었고, 잿빛 하늘의 대찬 빗줄기가 땅을 뚫을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서현은 입술을 잘근 씹어 물고는 그대로 폭포수 같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하지만 빗줄기가 얼마나 세차던지 대문을 나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벌써 머리통이 얼얼했다. 게다가 신발도 신지 못한 발바닥은 이미 깨질 듯이 시려왔다.얼마 못 가 내달리던 온몸은 깊은 물 속에 뛰어든 듯, 가득한 물기로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메마른 가슴은 조금도 젖지 않고 텁텁하기만 했다.우렁찬 빗소리에도 집안에서 나던 굉음이 고막 가까이 진동하는 듯했다.‘그냥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으면.’수없이 되뇌던 말인데 오늘은 좀 더 축축하고 퀴퀴하게 느껴졌다.서현은 아득해진 시야를 닦고 또 닦으며 계속 달렸다.하지만 제아무리 지독한 오기라도, 하늘에서 뿜어대는 세찬 빗줄기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현의 몸은 달리면 달릴수록 심하게 떨려왔고, 발바닥은 얼어붙어 깨질 듯이 아팠다.한여름의 비가 이렇게 서늘할 일인가. 불규칙하게 터지는 숨결마다 차가운 쇠 맛이 목젖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점점 비릿해지더니 숨구멍을 뜨겁게 달구었다.그렇게 서서히 눈앞은 캄캄해져 갔고, 더 이상 팔다리에는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딱 그즈음이었다.‘퍽-!’시린 물기에 단단한 온기가 세게 맞닿았다.“야!”제 몸 안으로 와락 달려든 여린 몸을 한 품에 끌어안은 남자의 가슴팍이 놀란 듯 크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놀란 가슴께에서 여자의 엷은 숨결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숨소리에 여자의 허리를 감싼 남자의 팔에는 본능적으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그 작은 힘에도 바스러질 듯 파르르 떨리는 몸….혹시라도 이 작은 숨소리가 정말 꺼져버릴까, 이 작은 몸이 제힘에 바스러질까 봐 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