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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가만히 있어

Auteur: 소라닌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8-06 15:19:21

“…나 오늘 재워줘.”

“뭐?”

지음의 목젖이 크게 반응했다. 마른침을 얼마나 삼켜대는지 알 수 있었다.

막상 말을 꺼낸 서현은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애먼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던 손도 멈추었다.

처음 본 남자한테 재워달라는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고통으로 지난했던 일상을 잠깐만 떠올려보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집에 가기 싫어.”

오늘은 정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연신 침을 삼키던 지음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안 돼. 그리고 너 그러다 진짜 혼나.”

알 수 없는 서운함에 서현은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안 재워 줄 거면 말지. 왜 갑자기 선도 질이야?”

“너 내가 진짜 나쁜 놈이면 어쩌려고 그러냐?”

“집에 가나 여기서 죽나.”

“야! 여자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지음의 날카로운 눈매가 저를 꾸짖듯 노려보고 있었지만 역시나 그의 눈동자에선 온기가 흘러나왔다. 저 사람은 뭐 때문에 저렇게 단순하고 따뜻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화가 났다.

아까만 해도 집에서 본 아버지란 작자의 살기 어린 눈과 쉴 새 없이 폭언을 해대던 모습이 엉겅퀴처럼 신경 마디마디에 걸려있는 나로선,

이 낯선 안온함이 궁금하면서도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짙고 깊은 슬픔은 대체로 분노로 감추는 게 쉽고 빨랐다.

“아, 왜 소리를 질러! 가면 되잖아.”

“너 집 어딘데.”

“내 옷이나 줘.”

“아직 안 말랐어. 그리고 너…좀 기다려.”

지음은 으름장 놓듯 단단한 말투로 말을 마치더니 얼른 테이블을 치웠다. 서현은 그가 모르게 작은 한숨을 흘리곤 고개를 떨궜다.

그래, 내가 이상한 거지…처음 본 사람한테.

테이블을 다 치운 지음은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이 덜거덕거렸다. 한참 동안 뒤적이는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잦아들자, 서현의 축 처진 고개와 어깨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음이 가까이 온 걸 알면서도 서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우습지만 작은 반항 같은 것이었다. 저를 잡아끌어 밖으로 내쫓아도 반항이나 저항할 자격이 전혀 없는 주제에 말이다.

그런데 그때, 서현의 시야로 지음의 머리통과 어깨가 보였다. 털퍼덕 주저앉은 지음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커다란 허벅지 위에 파스, 연고, 대일밴드, 스포츠 테이프 같은 것들을 올려두었다.

이 상황이 그저 의아한 서현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뭐…에요?”

지음이 고개를 들어 저를 보았다. 짙고 곧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그랬냐. 아버지?”

“…….”

“이런 거 오래 두면 다 흉 나. 좀 만질게.”

지음은 조심스럽게 서현의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리곤 자기 무릎 쪽에 서현의 발을 살포시 올렸다.

헐렁한 바지 사이로 뻗어 나온 그녀의 가녀린 다리엔 먼 시간부터 가까운 시일의 기록이 여러 생채기로 남아있었다.

얼핏 보았을 때보다 심각한 서현의 상처를 보자 지음의 목울대가 크게 진동했다.

서현의 발가락이 긴장감과 낯섬에 한껏 움츠러들였다.

“…흉도 오래 둘 시간이 있어야 남는 거 아닌가.”

건조하지만 빽빽한 서러움이 서린 서현의 목소리에 지음은 입매를 강하게 당겨 물었다. 그리고 새하얀 다리 위로 그려진 잔인한 흔적을 연고와 크림으로 부드럽게 덧칠했다.

커다랗고 거친 지음의 손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전해지는 저릿함에 서현이 발을 크게 움찔거리자, 지음의 손이 서현의 발목을 강하게 눌렀다. 한 줌에 잡힌 서현의 발목이 엷게 떨렸다.

“가만히 있어. 다 했어.”

“……으응.”

“너 강운사거리 알아?”

“알지.”

“그럼 무지개 떡집은.”

“알아.”

“무지개 떡집 뒤로 쭉 들어오면 우리 집이야. 지금 여기.”

“…뭐, 가깝네.”

지음이 서현의 발목을 슬며시 놓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또 그러면 무조건 뛰어와. 여기로.”

서현의 눈시울이 단박에 뜨끈해졌다.

‘무조건 뛰어와. 여기로.’

이 말이…서른이 되어서 떠올려도 눈가를 비비게 만들 줄은 몰랐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갈 곳 없이 뛰어다닌 게 몇 년이었다. 뛰어다니든 굴러다니든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이 지옥이라…정처 없는 그 순간이 차라리 개운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아버지의 외도와 폭력으로 엄마는 오래전에 집을 나갔다. 엄마가 집을 나간 건지, 나를 버린 건지 분간이 어려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사라지고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고스란히 받아 내고 나니, 엄마는 나를 버린 게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집을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그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던 그 여자는 집에 와서 밥을 하고 빨래를 했고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마치 다른 엄마들처럼.

썩 다정하진 않았지만, 남들 눈에 엄마처럼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한 뒤부터였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집 나간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견디지 못한 그 여자는, 아버지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엄마가 집 나가고, 처음엔 아빠만 그랬는데 지금은…그…”

서현은 그 여자를 새엄마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 남들한테 이런 얘길 해본 적도 없다. 뭐라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매듭 없는 말에 입술만 달싹이는데 지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워 줄게, 마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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