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과거 신지아의 어머니는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빌미로 그들을 협박해 헤어지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 모두가 이나은을 억울하게 강요당해 외국으로 쫓겨난 비련의 주인공으로만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진실은 달랐다. 이별을 수용한 것도, 신지아의 어머니가 건넨 막대한 보상금을 챙겨 제 발로 출국한 것 역시 그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하고 있었다.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던 그 가혹한 강요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그리고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이 신지아에게 퍼부었던 그 모진 보복들은 다 무엇이 된단 말인가.변도영의 마디 굵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왔고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시뻘겋게 충혈되었다.이와 대조적으로 이나은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널 사랑하니까. 너랑 헤어지기 싫었으니까.”“헤어지기 싫었다면서 왜 동의한 건데?”“내겐 기회가 필요했어. 어떻게든 너와 대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거든. 사람들이 나를 신데렐라 보듯 동정하고 가벼이 여기는 그 눈빛이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어. 도영아, 넌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나왔잖아. 고귀한 신분 덕에 누구도 감히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 그러니 사람들의 그 은밀하고 교묘한 악의를 네가 어떻게 알겠어? 낮은 곳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온 사람에게 ‘더 높은 곳'이 어떤 의미인지, 너 같은 사람이 알 리가 없잖아. 난 너와 당당하게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 어머니께도 내 신분을 인정받고 우리 사이를 허락받고 싶었다고.”하지만 이런 속내를 변도영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변씨 가문이 제안한 유학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들이 앞장서서 마련해 준 유학이라면,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다 한들 그녀는 영원히 변 씨 가문의 아래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신지아가 개입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신지아의 어머니는 이 비밀을 지켜주기로 약속했고 그녀는 이 일을 역이용해 대중의 동정심을 사기로 했다. 사람들의 연민을 얻어낸다면 변씨 가문조차 그
변하늘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지금 마주한 진실은 방금 전 알게 된 사실 못지않게 그녀에게 깊은 타격이 된 듯했다.그녀의 반응을 본 신지아는 변하늘이 상황을 파악했음을 눈치챘다.사실 신지아는 이 일을 굳이 변하늘에게 밝힐 생각이 없었다. 변하늘이 이나은을 얼마나 아끼고 믿든 그건 그녀의 몫이었고, 자신은 그저 이나은과 끝장을 볼 생각이었기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방금 전, 이나은을 위해 할머니 앞에서 간절히 사정하던 변하늘의 모습을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 기회에 그녀가 미련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더 번거로운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 뻔했다.“설령 고의가 아니었다 해도 하늘 씨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실을 은폐하고 그 자리에 내버려 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에요. 하늘 씨한테조차 서슴없이 해를 입히는 여자인데 나한테는 오죽하겠어요? 이제 내 뜻이 어떤지 확실히 알았겠죠? 하늘 씨든 변씨 가문 그 누가 대신 사정하러 온다 해도 내 결심은 결코 변하지 않아요.”신지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뒤 돌아섰다.이번에 변하늘은 차마 붙잡지 못했다. 그저 망연자실하게 서서 가슴속 밑바닥부터 무언가가 서서히 갉아 먹히며 썩어들어가는 듯한 불길한 기분을 느낄 뿐이었다....날씨는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찌푸려 있었다.도로 위를 폭주하듯 내달리는 차 한 대가 행인들의 비명 어린 시선을 받으며 이나은이 묵고 있는 별장 단지로 미친 듯이 돌입했다.변도영은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타이어 타는 냄새와 함께 귀를 찢는 마찰음이 울려 퍼져 주변의 이목이 쏠렸지만 변도영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대문으로 향하더니 망설임 없이 비밀번호를 눌렀다.이곳은 자신이 이나은을 위해 직접 구해준 거처로 드나든 적은 거의 없었으나 비밀번호만큼은 뼈에 사무치게 잘 알고 있었다.바로 이나은의 생일이었다.몇 년 동안 그의 별장과 서재 등 사적인 공간의 도
어젯밤 내내 깊은 생각에 잠겼던 변하늘은 신지아가 생각보다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적어도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절대 그 억울함을 견디지 못했을 터였다.하지만 정작 변씨 가문에서 신지아를 가장 모질게 괴롭힌 장본인은 바로 자신이었다.변하늘이 한창 멋쩍어하고 있을 때, 신지아가 먼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변하늘은 얼른 어깨를 곧게 펴고 입을 열려 했으나, 신지아가 한발 앞서 말을 꺼냈다.“몇 달 전에 하늘 씨가 약 기운에 취해서 밤늦게 나한테 전화했던 거 기억하죠?”그 말에 변하늘은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수치심에 화를 버럭 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그걸로 날 협박하겠다는 건가요?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그때 일 다 지아 씨 짓인 거 내가...”변하늘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신지아는 서류 봉투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직접 보세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보고 나서 하죠.”반신반의하며 서류를 받아 든 변하늘은 한 장씩 내용을 확인해 나가다 그만 온몸이 굳어버렸다.안에는 CCTV 각도로 찍힌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는데, 야구모자를 눌러쓴 한 여자가 책장에 꽂힌 책 사이에 아주 얇은 포장 비닐을 밀어 넣고 있었다.사진이 어찌나 선명한지 변하늘은 그녀의 손에 들린 포장지의 문양까지 볼 수 있었고 그 인물이 이나은이라는 사실도 단박에 알아챘다.변도영이 제집처럼 드나드는 탓에 월세방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 신지아는 일찍이 방에 CCTV를 설치해 두었었다.다만 이나은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하지만 당시에는 일로 바빠 미처 CCTV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고 한참 뒤에 짐을 정리하다가 이 약 봉투를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CCTV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나중에 포장 봉투에 묻은 약 분말을 가져가 성분 분석을 의뢰해 봤는데, 최음 성분이 검출됐어요. 공교롭게도 이나은이 내 방에 이걸 둔 시점이 하늘 씨가 약에 취했던 바로 다음 날이더라고요.”신지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변하늘은 할머니를 뵈러 마당에 들어섰다가 문 앞에 서 있는 변도영을 발견했다.하지만 그녀가 말을 붙이기가 무섭게 변도영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싸늘하게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그의 표정에는 분노인지, 혹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평소 같지 않은 분위기에 겁을 먹은 변하늘은 뒤쫓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는 박수미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조금 전 밖에서 들린 목소리를 이미 들은 듯,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신지아 씨, 나 할머니랑 할 얘기 있으니까 잠깐 나가 있어요.”나름대로 부드럽게 말하려 노력한 것이었지만 오랜 습관 때문인지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고 명령하는 것처럼 들렸다.어조 역시 몹시 어색했다.신지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박수미가 선수를 쳤다.“그럴 것 없다. 지아는 남이 아니니, 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그냥 하거라.”“할머니.”변하늘은 박수미의 품에 파고들며 애교를 부렸다.“전 할머니 친손녀잖아요. 할머니랑 둘이서만 비밀 얘기하고 싶단 말이에요.”말을 하면서도 변하늘은 신지아를 힐끔거렸다. 신지아가 눈치껏 자리를 비워주기를 바랐던 것이다.솔직히 신지아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웠다.하지만 신지아는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제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변하늘은 슬슬 조바심이 났다.박수미는 미소를 지으며 변하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비밀 얘기라는 게, 할머니한테 지아 잘 구슬려서 네 나은 언니 좀 봐달라고 사정해 달라는 거야?”속내를 들킨 변하늘은 무안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박수미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나보고 지아에게 사정해 달라는 건 네 생각에 결정한 거냐, 아니면 네 부모도 동의한 일이냐?”박수미의 표정이 몹시 엄격해졌다.변하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대답이 없어도 박수미는 대강 눈치를 채고 말
박수미는 신지아의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말했다.“사실 네 엄마가 도영이와의 결혼을 서두른 건, 네 아빠 신영호가 재혼해서 네가 구박받을까 걱정된 탓도 있지만 네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지길 바라셨기 때문이야.”엄마라는 단어가 나오자 신지아의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엄마가 일찍이 혼약을 정한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저 엄마가 변씨 가문에 베푼 은혜가 있으니, 설령 변도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 집안 어른들이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자신을 홀대하지는 않을 거란 마음으로 맺어준 줄 알았다.그런데 엄마가 진작 자신이 변도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그러니까 만약 그때 그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비극은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신지아의 복잡한 눈빛에서 생각을 읽어낸 듯 박수미가 말을 이었다.“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아니었어도 도영이와 이나은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을 거야. 이나은은 집안도 그렇고 도영이와는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어. 네가 아니었어도 서로 다른 가치관 때문에 조만간 갈라섰을 테지. 사실 그들이 헤어질 때 나랑 네 엄마가 이나은에게 보상금을 줬었어.”“보상금을요?”신지아가 멍하니 되물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안의 대화를 전해 들은 변도영 역시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이나은에게 보상금에 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이나은은 애초에 도영이와 갈 길이 다른 아이였어. 미애 역시 그 아이를 변씨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지. 그래서 나랑 네 엄마가 그 아이를 따로 만나 거래를 제안했단다. 해외 대학 입학을 주선해주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돈을 줄 테니, 도영이와 헤어지고 변씨 가문에 발을 들이는 걸 포기하라고 말이야.”“그래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나요?”신지아가 묻자 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아인 자존심이 무척 강한 아이였어.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본인
“망할 녀석, 다 그놈이 자초한 화근이야.”박수미가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화제는 자연스럽게 변도영에게로 흘러갔다.다른 사람 앞이었다면 신지아는 의도적으로 이 주제를 피했겠지만 상대는 변도영의 할머니인 데다 눈에 띄게 정말 격분한 상태였다.박수미의 호흡이 가빠지자 신지아는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오히려 변도영을 두둔했다.“그때 그 사람도 최선을 다했어요. 고생도 많이 했고요.”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우미도 한마디 거들었다.“듣기로는 도련님이 신지아 씨를 찾으려다 실수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셨다더라고요.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웠고 구조대마저 철수한 상황이었는데, 다들 돌아가자고 말려도 도련님은 신지아 씨를 찾아야 한다며 끝까지 고집을 피우셨대요. 도련님은 정말로 신지아 씨에게 큰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나셨던 거예요.”도우미의 마지막 말은 신지아를 향해 있었다.이 일에 대해서 신지아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나중에 변도영이 절벽에서 떨어진 이유를 물었을 때 그가 입을 굳게 다물었기에, 그저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게 창피해서 말을 아끼는 줄로만 알았다.그런데 이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그놈이 저지른 난장판이니 당연히 본인이 해결해야지.”박수미가 차갑게 덧붙였다.“그렇게 행동한 건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는 증거일 뿐, 그놈이 쓰레기였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어.”마침 방 안으로 들어서려던 변도영의 발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박수미는 한담을 나누듯 말을 이어갔다.“지아야, 사실 할머니는 네가 왜 그런 녀석을 좋아했는지 늘 궁금했단다. 사실 네 엄마가 조건을 내걸기 훨씬 전부터 난 네 마음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중에 네 엄마가 그놈이랑 결혼시켜 달라는 조건을 냈을 때도 망설임 없이 허락했던 거야. 참, 네 엄마도 네가 도영이를 좋아한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단다.”박수미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꽤나 비밀스러운 어조였다.신지아는 놀라움에 작게 탄성을 질렀다.“네?”이미 변도영과의 일은 아득한 과거가 된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신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