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민들레
“안타깝게도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습니다. 산모는 수술이 잘 끝났지만 아이는 지킬 수 없었습니다.”

“산모의 가족은 어디 있습니까?”

“가족은 없었습니다. 동의서도 산모 본인이 직접 서명했습니다.”

마취에서 막 깨어난 신지아는 아직 죽음 문턱을 오간 공포에 휩싸여 있었지만 의사와 간호사가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심코 손을 아랫배로 가져갔다.

의사의 말대로 아이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지 부풀어 오르던 작은 배는 다시 평평했다.

더 이상 두근거리던 작은 생명을 만질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울며 무너져야 맞는 건데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너무 많이 울어버려서일지도 몰랐다.

신지아가 눈을 뜬 걸 확인한 의사는 현재 상태를 물었고 돌아가기 전 몇 마디 위로를 남겼다.

“몸 잘 추스르세요. 아이는 언제든 다시 가질 수 있으니까요.”

신지아는 고개만 끄덕였지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은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이번 아이는 ‘훔친 아이’였다.

마치 이 결혼 자체가 훔친 것과 다름없듯이.

그녀는 결국 연성시 변씨 가문의 자랑, 변도영과 결혼에 이르렀지만 그는 그녀를 음흉하고 계산적인 여자라며 증오했다.

신혼 첫날 밤조차 대놓고 클럽으로 나가 신지아를 조롱거리로 만들었고 연성시 전체가 그녀를 비웃었다.

결혼한 지 5년, 변도영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졌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심하게 모욕할 때면 간혹 체면을 지켜주곤 했다.

그래도 그는 분명히 선을 그어 말했다.

“나는 너와 육체적인 사랑만 나눌 뿐, 마음은 주지 않을 거야. 내 아이를 낳는 건 절대 허락하지 않아.”

그래서 언제나 철저히 대비했고 가끔 준비가 없을 때면 끝내고 나서도 피임약을 먹였다.

신지아는 이 집안의 며느리이자 사모님으로서의 역할만 지키며 변도영의 규칙에 따라 살아왔다.

그러다 석 달 전, 술에 잔뜩 취해 돌아온 변도영이 억지로 그녀를 안았다.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그날 이후 약을 챙겨 먹으려 했지만 약통은 이미 비어 있었다.

약을 사러 갈 틈도 없이 바쁘게 흘러가 버렸고 결국 신지아는 그 일을 잊어버렸다.

단 한 번이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적처럼 아이가 찾아왔다.

그녀는 두려워 3개월 가까이 숨겼다가 드디어 오늘 변도영에게 고백하려 했었다.

아이만 있으면 둘의 관계도 조금은 달라질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백하러 가는 길, 차 사고가 일어났다.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고 변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수술 직전, 희미한 의식 속에서 의사가 자신의 휴대폰으로 변도영에게 전화를 거는 걸 보았다.

하지만 사고 소식까지 전했지만 받지 않았고 귀찮았는지 결국 전화를 꺼버렸다.

신지아는 그가 무뚝뚝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정할 줄은 몰랐다.

천장을 가득 채운 병원의 새하얀 벽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깨달았다.

5년 동안의 결혼은 한낱 허무한 꿈이었다는 걸.

신지아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바쁜 병원에서 그녀를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링거대를 질질 끌며 한 걸음 한 걸음 화장실로 향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환자복이 단추 없는 형태라는 점이었다.

평소라면 몇 분도 안 걸릴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꼬박 30분이 걸렸다.

간신히 나와 복도로 돌아서던 순간, 옆쪽 의사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도영아, 그냥 다리에 조금 상처 난 거야. 난 괜찮다니까, 네가 너무 호들갑인 거지.”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 나무라기보다 오히려 애교에 가까웠다.

청순하고 무해한 얼굴, 단정한 아름다움. 여자이면서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이번에는 확실히 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변도영의 첫사랑, 이나은이었다.

그제야 신지아는 알게 됐다.

그때 변도영이 정말 자신을 못 본 건지, 아니면 보고도 모른 척한 건지.

그러나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지난 5년 동안, 그의 냉정함은 늘 이나은 때문이었다.

오늘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이런 날은 찾아왔을 것이다.

“누나, 그래도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죠.”

“아까 오면서 전화까지 했잖아요.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급해서 저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니까요.”

옆에 있던 젊은 의사가 농담하는 듯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흰 가운을 입은 그는 하민재, 변도영의 절친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오래 전부터 변도영과 이나은의 관계를 지켜본 사람이었다.

이나은은 얼굴이 붉어진 채,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 얼굴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뛰어난 이목구비, 다부진 체격, 얇은 천 너머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

그의 품에 기대는 것만으로도 세상 끝까지 안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교통사고였으니 검사는 필요해.”

변도영은 담담히 말했다.

“아니, 그냥 나은 누나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 다칠 땐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적 없잖아요.”

하민재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가 말한 ‘다른 사람’이란 당연히 신지아였다.

이 병원에 신지아가 혼자 오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민재가 변도영에게 그 소식을 전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늘 시큰둥했다.

방금 신지아가 죽다 살아나 아이까지 잃었다는 소식도 이미 들었지만 변도영은 위로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았다.

사실 신지아는 이런 처지에 놓여도 싸다는 생각만 할 뿐.

처음부터 변도영을 얻은 방법도 순수하지 않았기에 이번 임신 역시 변도영을 붙잡으려는 술책일 거라 여겼다.

‘결국 아이까지 잃은 건 하늘이 내린 벌이지.’

“나은 누나, VIP 병실로 옮기죠. 이틀 정도 더 지켜보면 안심할 수 있을 거예요.”

하민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이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은 무슨, 누나 일은 곧 일이고 형 일은 곧 제 일인걸요.”

하민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고 그 말에 이나은은 미소 지었다.

무심코 시선을 문 쪽으로 돌린 순간, 거기에 신지아가 서 있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이나은은 바로 시선을 거두고 변도영을 향해 살짝 웃었다.

“도영아, 아까 지아가 전화하지 않았어? 급한 일 같던데 한번 받아보는 게 어때?”

신지아의 이름이 나오자 변도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하민재가 먼저 끼어들었다.

“형, 무시해. 괜히 전화로 귀찮게 하는 건 늘 있는 일이잖아. 형도 진절머리 나는 거 아니야? 형은 그냥 누나랑 여기서 푹 쉬어. 어차피 언젠가 누나한테 사모님 자리를 내줄 텐데.”

“민재야, 그런 말 하지 마.”

이나은이 살짝 타박했지만 눈빛에는 딱히 불쾌함이 담기지 않았다.

“아니에요, 전 진심인걸요? 형 마음도 똑같을 거예요.”

그 말에 변도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미간은 더욱 잔뜩 찌푸렸다.

신지아는 그 정적 속에서 속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상관없어. 그날이 머지않아 오겠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4)
goodnovel comment avatar
김나영
오랜만에~잼잼하구만
goodnovel comment avatar
이호정
2025. 11. 21. AM. 12:56
goodnovel comment avatar
Y J
뭘 더써야하나요??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첫사랑만 구한 남자   제551화

    그래도 그녀는 외투를 벗지 않은 채 소매를 여미며 윤형우와 대화를 이어갔다.그녀가 남자 정장을 걸친 모습은 또 그 나름대로 색다른 분위기가 있었다.멀지 않은 곳의 부스석, 양준명은 맞은편에 앉은 변도영의 눈치를 보며 속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신지아를 발견한 순간부터 변도영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게다가 지금 신지아가 윤형우의 재킷까지 걸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변도영의 손에 들린 숟가락이 거의 휘어질 지경이었다.“변 대표님, 아니면 우리 다른 식당으로 옮길까요?”양준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는 단지 인터넷 여행 후기를 보고 이 식당을 예약했을 뿐이었다.세상이 이렇게 좁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밥 한 끼 먹으러 왔다가 하필 신지아를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신지아 혼자였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문제는 윤형우까지 같이 있었고, 두 사람의 사이가 누가 봐도 무척 좋아 보였다.변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거둔 채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변 대표님?”양준명이 다시 조심스럽게 불렀다.변도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며 혼잣말하듯 읊조렸다.“이나은이 귀국했을 때 클럽에서 환영 파티를 열어준 적이 있었지. 그날 밤 신지아가 날 찾아왔는데 난 귀찮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사람을 시켜 문밖으로 쫓아냈어.”“그 뒤에 신지아는 클럽 문 앞 화단에 앉아서 밤을 꼬박 새우며 날 기다렸어.”‘그때의 신지아도 지금 이런 기분이었을까?’양준명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지난 몇 년 동안 비슷한 일이 너무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다.사실 그가 줄곧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하나 있었다.변도영이 아무리 애써 다시 쫓아간다 해도, 신지아가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식사를 마친 뒤 신지아는 윤형우와 근처 시장도 구경하며 고우빈과 연미주 일행에게 줄 현지 기념품도 몇 가지 샀다.그렇게 볼일을 모두 마친 뒤에야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왔다.그 후 이틀 동안 신지아와 윤형우는 근처

  • 첫사랑만 구한 남자   제550화

    신지아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창밖에서 어스름한 노란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침실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신지아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저녁이라는 걸 보자 거의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서둘러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거실 소파에 윤형우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살며시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신지아는 얇은 담요 하나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윤형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예상치 못한 힘에 휘말린 신지아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놀란 가슴을 안고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윤형우의 팔이 단단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놓아주질 않았다.“널 먹고 싶은데 당장은 먹지도 못하니 잠깐만이라도 안고 있게 해 줘.”윤형우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신지아는 조금 어이없었지만 더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막 잠에서 깬 탓인지 윤형우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조명을 받아 맑고 예쁜 빛이 번졌다.이 얼굴만큼은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나가서 뭐 좀 먹을래요?”신지아가 물었다.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한 탓인지 신지아도 허기가 느껴졌다.윤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몇 군데 있어. 네 입맛에도 잘 맞을 거야.”“그럼 옷 갈아입고 올게요.”신지아는 몸을 일으켜 침실로 돌아가 검은색 슬립 원피스로 갈아입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위에 작은 숄을 하나 더 걸쳤다.“숄 없는 게 더 예쁜데.”윤형우가 문틀에 느긋하게 기대선 채 의견을 냈다.신지아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요?”윤형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뽀얀 피부를 가진 신지아가 검은색 슬립 원피스를 입으니 피부가 한층 더 눈부시게 만들었다. 청순한 얼굴과 은근히 요염한 몸매가 어우러져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 첫사랑만 구한 남자   제549화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신지아는 윤형우의 얼굴이 전보다 조금 더 창백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에 크게 다친 뒤부터 윤형우의 몸 상태는 계속 그다지 좋지 않은 듯했다.그런데 오늘은 유독 평소보다 더 가냘프고 병약해 보였다.“왜 그래? 아까부터 계속 그렇게 쳐다보고.”윤형우가 웃으며 신지아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내가 그렇게 잘생겼어?”신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형우 씨가 연예계에 안 간 건 정말 연예계의 큰 손실인 것 같아요.”윤형우가 웃었다.신지아는 잠시 망설이다 슬쩍 떠보듯 물었다.“요즘 몸은 좀 어때요?”윤형우는 잠시 멈칫하며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이후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오늘 밤 네가 직접 확인해 볼래?”신지아는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그날 밤은 확인해 볼 기회가 없었다.신지아는 생리가 시작되었다.윤형우는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지난번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무척 능숙하게 몸보신용 보양식까지 끓였다.그것도 수십 가지의 값비싼 재료를 한데 때려 넣은 것이었다.덕분에 신지아는 그걸 마시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새벽이 되어서야 비몽사몽인 상태로 겨우 잠이 들었다.원래 윤형우는 그녀를 데리고 밖에 나가 구경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신지아가 너무 피곤하게 잠든 모습을 보고는 깨우지 않았다.대신 그녀의 곁에 누워 책 한 권을 들고 조용히 읽었다.오후가 되자 윤해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윤형우는 신지아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가 전화를 받았다.연결되자마자 윤해원이 물었다.“지아 씨와 변도영 씨는 어떻게 된 거야?”윤형우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그러다 윤해원이 기사 하나를 보내주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했다.어떤 매체가 비행기 안과 공항에서 신지아와 변도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그리고 그 사진만 가지고 두 사람이 재결합하려는 게 아니냐며 제멋대로 추측성 기사를 써낸 모양이었다.“지

  • 첫사랑만 구한 남자   제548화

    공항 대합실.양준명은 전화를 끊은 뒤 카드 위에 펜으로 몇 줄을 적어 변도영에게 건넸다.“변 대표님, 여기가 윤형우 씨의 현재 거주지입니다.”말을 마친 양준명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신지아를 힐끗 바라봤다.순간 마음속에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그뿐만이 아니었다.어느 순간 변도영마저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자기가 전처에게 현 남자친구의 주소를 알려주고 있다니?하지만 조금 전 비행기에서 그 여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변도영은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내쉬며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과거 신지아가 그를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으니 이 정도는 자신이 빚진 셈 치면 됐다.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게 이토록 괴로운 일일 줄은 몰랐다.변도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뜬 뒤 신지아에게로 걸어갔다.그때 신지아는 고개를 숙인 채 윤형우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신지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눈앞의 사람을 확인하고 잠시 멍해졌다.“형우 씨가 왜 여기 있어요?”신지아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연락조차 닿지 않던 사람이 지금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흰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윤형우는 여전히 우아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더니 신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꿈에 지아가 여기 나오더라고. 그래서 혹시나 해서 공항에 와봤지. 그런데 정말 왔네.”윤형우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리고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여전히 멍하니 있는 신지아를 바라봤다.“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안 안아줄 거야?”신지아는 몇 초간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곧장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윤형우를 힘껏 끌어안았다.윤형우는 아예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공중에서 두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신지아를 내려놓은 뒤에는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살 빠졌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그

  • 첫사랑만 구한 남자   제547화

    게다가 변도영의 기억에 신지아는 연애 시절 놀이공원에서 바이킹처럼 아찔하고 높은 놀이기구를 타자며 자신을 이끌던 사람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고소공포증이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어설픈 핑계로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는 건가.그녀가 이토록 냉정하게 면박을 줄 줄은 몰랐기에 변도영은 짜증과 서글픔이 밀려왔지만,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래, 지아가 나를 쫓아다닐 때 나 역시 이렇게 매정하게 굴었던 적이 있었지. 비긴 셈 치고 천천히 다가가자.’변하늘이 말해준 것처럼 신지아는 자신을 깊이 사랑했으나 상처를 받아 떠난 것뿐이었으니 예전의 그 마음에 닿아 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깨우다 보면, 다시 시작할 기회는 분명 있었다.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자리를 바꾼 여자가 변도영의 옆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속삭였다.“저기, 실례지만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될까요?”울적했던 변도영은 못 들은 체하며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버렸고 이내 몽롱한 잠결 속으로 빠져들었다.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몸에는 따스한 담요가 덮여 있었다.변도영의 숨결이 찰나의 순간 멎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신지아의 자리를 보았다.고요함이 가라앉은 기내 속에서, 신지아 역시 눈을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이전에 신지아와 함께 외출할 때마다 그가 잠들었다 깨어날 때면, 신지아는 늘 세심하게 얇은 담요를 덮어주곤 했다.변도영은 통로 건너편의 양준명을 바라보며 떠보듯 조용히 물었다.“내 몸에 덮인 이 담요 말이야...”비행기 신문을 보며 시간을 때우던 양준명이 황급히 대답했다.“그거 옆에 앉은 여자분이 승무원한테 달라고 해서 덮어준 건데요.”순간 변도영의 마음에 번졌던 불씨가 차갑게 식어버렸다.하지만 곧 그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묘책이 지나갔다.그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 여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읽고 있던 여자는 난데없는 변도영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그녀가 이어폰을 빼자, 변도영이 낮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

  • 첫사랑만 구한 남자   제546화

    다음 날, 신지아는 밀린 업무를 모두 정리하고 퇴근하기 전 고우빈의 사무실에 보고하러 갔으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잠시 뒤, 서인호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고우빈이 오늘 하루 종일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이야기를 꺼내자 서인호는 잔뜩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신지아를 은밀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얼마 전에 어떤 여자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더니, 둘이 차를 타고 같이 가더라고요. 설마 연애라도 시작한 건 아니겠죠?”그의 호들갑스러운 모습에 신지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선배도 나이가 있으니까 연애하는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잖아요.”“신기하죠, 당연히.”서인호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고 대표님은 보기보다 지조 있는 편이라, 전에는 분명히...”그러나 서인호는 끝내 뒷말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신지아에게 지금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예전에는 서인호 역시 신지아가 윤형우와 헤어지면 고우빈에게도 기회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고우빈에게 정말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었다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가 말을 아끼자 신지아도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신지아는 새벽 비행기 표를 예매해 둔 터라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가 가볍게 씻고 짐을 챙겨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비행기에 탑승한 신지아는 혹시라도 이동 중에 윤형우에게 연락이 올까 걱정되어, 전원을 끄기 전 야근 때문에 전화를 받기 어려울 것 같다는 거짓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알았어.]윤형우도 별다른 의심 없이 짤막하게 답장을 해왔다.메시지를 확인한 신지아는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한 뒤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그렇게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누군가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와서 앉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신지아는 처음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내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남성 향수 냄새에 온몸이 굳어졌다.천천히 눈을 떠 보니 역시나 변도영이었다.예전과 다름없이 몸에 딱 맞는 블랙 정장 차림을 한 그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