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시간은 다시 한 계절을 지나 흘러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까지, 두 사람에게는 나름의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업실 책상 위, 휴대폰이 울린 건 오후 무렵이었다. 한창 원고 마감에 몰두하던 지호는 잠시 손을 멈추고 화면을 확인했다.낯선 번호였다. 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작가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전화를 건 사람은 십수 년 전 지호가 응모했던 단편 공모전 관계자였다. 지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스무 살 무렵의 일이니,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연락이 온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죄송한데, 어떤 일로…….”“그때 당선작이었던 「첫사랑」 있잖아요. 그 대본이, 이번에 영화로 제작하기로 확정됐어요.”지호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정말요? 그게, 진짜예요?”“네, 진짜예요. 제작사 쪽에서 원작자이신 작가님께 판권 계약 관련해서 곧 연락드릴 거예요. 축하드려요.”몇 마디 더 인사를 주고받은 뒤, 통화는 끝이 났다. 전화를 끊고도, 지호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사실 오늘 오전에는 또 다른 일이 있었다. 며칠째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지호는, 아침 일찍 병원을 다녀왔다. 진료실에 들어서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의사가 건넨 소식에, 지호는 한참 동안 실감하지 못한 채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작은 초음파 사진 한 장을 손에 쥐고 나오는 길, 지호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떠 있었다. 이 소식을 어떻게, 언제 전해야 할지, 지호는 병원을 나서면서부터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 저녁에 조용히 이야기할지, 아니면 깜짝 놀래켜 줄지, 마음이 자꾸만 오락가락했다.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첫사랑」 소식이 겹쳐서 찾아온 것이었다. 하루에 이렇게 큰 소식이 두 개나 겹치다니, 지호는 그저 얼떨떨할
오후 일정 사이, 잠시 짬이 났다.그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정신없이 흘러갔던 시간들이, 잠깐이나마 느슨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작은 유리 문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몇 년 전, 지호가 선물이라며 무심하게 건넸던 물건이었다.“이거 그냥 예뻐서 산 거야. 딱히 의미 없어.”그때 지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그 문진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곤 했다. 별거 아닌 그 말 한마디도, 지호다운 무심한 다정함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값비싼 것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직접 골라 건넨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휴대폰을 들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문득,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을 뿐이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렇게 답장 하나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마저도, 요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조바심이 났을 법한 순간인데, 지금은 오히려 그 기다림조차 여유롭게 느껴졌다.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음... 아무거나? 근데 오늘 나 원고 잘 풀려서 기분 좋아!]이어서 이모티콘 몇 개가 따라왔다. 그는 그 짧은 메시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화면 속 몇 글자만으로도, 오늘 그녀가 얼마나 신나 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루가 한결 밝아지는 기분이었다.[잘됐네. 그럼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좋아!]짧은 대답 하나에 붙은 느낌표가, 그녀의 들뜬 기분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 저녁, 어느 식당으로 갈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몇 년째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런 순간들이 새롭게 느껴졌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결혼한 지도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신혼 초의 어색함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일상만이 남아 있었다.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지호는 먼저 눈을 떴다.창밖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이불에 남은 온기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말해 주었다.지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온기를 조금 더 느껴 보았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있었다.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지호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섰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주방 불빛 아래 어렴풋이 비쳤다.식탁 위에는 이미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토스트와 계란프라이,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매일 아침 이렇게 소박한 식사를 준비해 주는 손길이, 언제부터인가 지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접시 위 계란프라이의 노른자가 유독 예쁘게 익어 있었다.“일어났어?”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 몇 년째 듣고 있는 목소리인데도, 아침마다 이렇게 듣는 게 여전히 좋았다.“오늘도 일찍 나가야 해?”“응,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서.”그가 짧게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했다.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겉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눈에 들어왔다.지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사소한 아침 풍경이 여전히 낯설고도 감사하게 느껴졌다.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이, 지호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기적처럼 느껴지곤 했다.“다녀올게.”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가 말했다.“응, 조심히 다녀와.”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을 나갔다.문 앞에 선 그가 몸을 숙여, 지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손끝이 지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그 짧은 손길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할 힘이 절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매일 반복되는 이 인사가, 지호에게는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었다.현관문이
맑게 갠 어느 토요일, 웨딩홀 대기실 거울 앞에 선 지호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새하얀 드레스, 정성스럽게 올린 머리, 평소보다 훨씬 진하게 그려진 눈매. 거울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오늘따라 유독 눈부셨다. 지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짧게 심호흡을 했다.“지호야, 너 진짜 예쁘다.”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유진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화사한 색의 하객 드레스를 입은 유진의 얼굴에도, 이미 감격이 가득했다. 손에는 작은 꽃다발까지 챙겨 온 상태였다. 뒤따라 들어온 동학도 헛기침을 하며 눈시울을 훔쳤다.“야, 너 우는 거야?”“아니거든?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동학이 애써 딴청을 피우자, 유진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의 이런 실없는 농담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함께 걸어온 오랜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떨려?”유진이 지호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응, 조금.”지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는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려 왔던 오늘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그래도 좋아 보여. 진짜 행복해 보인다, 너.”동학이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지호는 그 말에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늘 곁을 지켜 준 이 친구들이, 오늘도 이렇게 함께해 준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웨딩홀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환하게 밝혀진 홀 안으로 하객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 하객석 맨 뒤쪽 구석 자리로 시선이 스쳤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다른 하객들과는 조금 떨어진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윤용석이었다. 초대장을 보낸 기억은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먼발치에서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옅게 고개를
노을이 붉게 번지는 해변, 휘웅과 지호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녁 식사 자리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지호야!”휘웅의 부름에 지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휘웅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스쳐 있었다. 지호는 이 순간이 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왜요.”담담한 지호의 목소리에, 휘웅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몇 주간, 아니 몇 년간 참아 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해변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그냥…… 궁금해서.”한참 만에야, 휘웅이 겨우 그렇게 말을 이었다.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 결국 가장 단순한 문장 하나만 남았다.“우리, 이대로 괜찮은 건지.”지호는 잠시 말없이 휘웅을 바라봤다. 노을이 완전히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래도록 참아 왔던 말을 이제야 꺼낼 시간이라는 걸, 지호는 알고 있었다.“나, 대표님 덕분에 지난 십 년 동안 많이 성숙해졌어요.”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눌러 왔던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그 십 년을 놓아주고 싶어요. 스무 살의 강휘웅이랑 윤지호는요.”휘웅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직접 듣자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대신…….”지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문장을 위해, 지호는 며칠 밤을 뒤척였다.“작가 윤지호랑, 대표 강휘웅으로. 이 드라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정적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이 그 사이를 채웠다. 휘웅은 그 말의 뜻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별을 고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청하는 말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지호의 눈빛만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진지해 보였다.“그 말은…….”휘웅이
휴가 둘째 날, 다 함께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물놀이를 하거나 파라솔 아래 누워 여유를 즐겼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낯설던 리조트 풍경이, 하루 만에 벌써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오후 늦게, 지호는 잠시 바람을 쐬러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뜨거웠던 해가 조금씩 기울며, 바닷바람도 한결 선선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지호는 오랜만에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 지호를 발견한 진섭이 자연스럽게 옆에 따라붙었다.“같이 걸어도 돼요?”“네, 좋아요.”지호가 웃으며 자리를 내주듯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진섭이 그 옆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췄다.두 사람은 나란히 모래사장을 걸었다. 파도가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붉은 노을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여기 오니까, 예전에 우리 같이 갔던 우유니가 생각나요.”진섭의 눈빛이 잠시 아련해졌다. 그날의 기억은 그에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낯선 나라, 낯선 하늘 아래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때가, 벌써 몇 년 전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인연이었다.“저도 가끔 생각나요. 그때 그 새하얀 소금사막.”“그때는 정말, 평생 못 잊을 것 같았거든요. 지금도 그래요. 꼭 다시 한번 가 볼 거예요.”지호가 아득한 눈빛으로 수평선을 바라봤다.“지금이라도 가시게요?”진섭이 웃으며 물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목소리에는 옅은 긴장이 배어 있었다.“사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고 싶어요.”지호가 웃으며 답했다.“그때는 마음이 복잡해서 그 풍경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완전히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진섭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지호가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오래도록 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