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이 깊은숨을 들이켰다.“그럼 내가 당신을 설득할 방법은 없어.”“설득할 수도 있지.”박진성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갖고 있는 장점을 충분히 발휘해 봐.”민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한편.수영장에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며 주변을 둘러보던 안솔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멈췄다. 울적한 기분에 친구를 불러 술이나 마시며 안 좋은 기억을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박진성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순간 넋을 잃은 안솔은 이 모든 것이 두 사람은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 사이임을 알려주려는 하늘의 뜻은 아닐까, 생각했다.“솔아. 너 뭘 봤기에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그러게. 다들 네가 기분 안 좋다고 해서 나온 건데 주인공이 이렇게 얼이 빠져 있으면 어떡해.”번뜩 정신을 차린 안솔이 말했다.“미안해. 못 들었어.”“못 들었다고? 우리가 하는 얘기도 못 듣고 너 무슨 생각 하고 있었던 거야. 뭐라도 본 거야?”아니라며 부정하려던 안솔의 시선이 박진성 맞은편에 앉아 있는 민여진에게 향했다. 그에 주먹을 꽉 움켜쥔 안솔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그 자리는 내 거라고!’안솔이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말투로 박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는 사람을 봐서 그래. 지난번 진시호 대표님이 주최한 파티에도 참석한 사람이야.”그 말에 순간 호기심이 생긴 안솔의 친구들이 안솔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박진성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한 순간, 하나 같이 눈을 반짝였다.“저 사람 너무 잘생긴 거 아냐? 연예인이야? 난 왜 저런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정말 너무 잘생겼어. 완전 차도남 스타일이잖아. 내가 봤던 남자 중에서 제일 잘생겼어.”“평범한 남자는 아닌 것 같은데? 시계만 몇억이 넘는 거야.”“누구야? 진 대표님이 파티에 초대한 거면 일반인은 아닐 거잖아. 게다가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대체 누구냐니까.”그들은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듯 흥분을 감추지
집중이 깨진 민여진이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박진성이 먼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에는 종업원 한 명이 서 있었다.그 종업원은 웃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박 대표님, 저희 호텔 수영장에서 파티가 열리고 있어요. 야외 풍경이 좋다고 매니저님께서 대표님께 예약이 필요하신지 여쭤보라고 하셨어요.”“파티요?”“네. 반년에 한 번 있는 행사라 재미있을 거예요.”박진성이 고개를 돌려 민여진을 쳐다보았다. 계속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민여진에게 좋을 건 없었다. 가끔은 외출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박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녁 시간으로 예약해 줘요. 시간 맞춰서 갈게요.”“네.”저녁이 되자 박진성이 민여진과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할 얘기가 없었던 터라 두 사람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예약된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주변의 소음을 들으면서도 민여진은 전혀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밖에서 밥을 먹자는 박진성의 뜻에 따르긴 했지만 그 이상은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오자 박진성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진시호가 내일 집으로 초대한 거, 넌 어떻게 생각해?”민여진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는 흐릿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입 모양도 잘 보이지 않았던 탓에 일부러 놀리기 위해 꺼낸 말인지, 진심으로 민여진의 생각이 궁금해 묻는 것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민여진이 대답했다.“진시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파티에서의 행실만 봤을 땐 날 싫어해야 맞는 것 같은데 오히려 집에 초대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하나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널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은 거겠지.”박진성도 민여진과 같은 생각이었다.“만약 진시호의 목적이 그 첫 번째라면... 무서울 것 같아?”“내가 왜?”“정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라면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박진성의 눈빛이 복잡하게 빛났다.“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안 무서워?”파스타를 한 입 먹
“그 자식은 처음부터 미친 X였어!”진시호가 분노를 터뜨리며 고안에게 지시했다.“고 비서는 일단 이호현과 관련된 프로젝트부터 해결해. 최대한 빨리 넘겨. 그리고 온야 쪽은 내가 연락해 볼게. 도와줄 수 있다면 최대한 도와야지.”“네.”“그리고 박진성은...”진시호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거실로 고개를 돌려 진시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둡던 진시호의 눈빛에 한 줄기의 빛이 반짝였다.“나한테 맡겨.”...이호현이 경찰에 체포된 일은 다음 날 바로 민여진의 귀에 들어갔다.일부러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워낙 이슈가 된 일이라 티브이만 틀어도 전부 그 얘기뿐이었다.물론 온야의 일도 이호현과 함께 이슈가 되었다.누구의 짓인지, 민여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든 민여진이 욕실에서 나오는 박진성에게 물었다.“이호현 일, 당신이 한 거야?”그 이름에 박진성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응.”“그럼 온야는?”“그것도.”민여진이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목적이 뭐야?”박진성이 대답하기도 전에 민여진이 말을 이었다.“이호현을 처벌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잖아. 다른 목적이 있을 거 아냐. 그게 아니라면 온야까지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박진성이 민여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이호현을 처벌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진시우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은 진시우에게는 좋은 핑곗거리가 될 것이다. 물론 원래의 계획보다 훨씬 앞당겨 긴 했지만.박진성은 대답이 없었고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박진성이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진 대표님.”민여진이 휙 고개를 들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수화기 너머로 넉살 좋은 진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박 대표님 아직도 동진인가요?”“네. 항공권을 아직 못 사서요. 왜 그러시죠?”“다행이네요.”진시호가 말했다.“아버지께서 어제 민여진 씨가 시우를 도와준 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 많을까 봐서 걱정인 거야, 아니면 네 마음이 아파서 그래?”진시호가 쯧, 혀를 찼다.“하지만 어쩌지. 네가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이 사람은 이미 네 형수야. 내가 어떻게 갖고 놀든 그건 내 마음이지만 넌 만질 수조차 없는 네 형수라고.”“시호 씨...”심나연의 얼굴이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그렇게 말하지 마.”“왜 그러면 안 되는데? 내 말 틀린 거 있어?”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든 진시호가 도발하듯 진시우를 쳐다보았다.눈을 가늘게 뜬 진시우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컵에 물을 따랐다. 그때, 진시호가 불쑥 입을 열었다.“너, 그 민여진이라는 여자와 아는 사이지?”진시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게슴츠레 눈을 뜬 진시호가 말을 이었다.“예전 그때도 그저 가만히 있던 네가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위해 이호현에게 밉보일 각오까지 하면서 그 여자를 도와준다고?”그날의 일을 진시호는 누구보다 똑똑히 기억했다. 심나연과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보면 진시우는 분명 미친 듯이 날뛸 것이던 진시호의 예상과는 달리, 진시우는 오히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진을 떠났다.그렇게 3년이 흘렀고 그동안 온 연락이라고는 전화 한 통이 전부였었다.진시호는 심지어 진시우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것만큼 심나연을 사랑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심나연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진시우가 입을 열었다.“그땐 그 사람이 내 형이라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던 거예요. 이호현 따위가 뭐 별거라고.”“하지만 그동안 난 단 한 번도 네가 날 형으로 대한다고 느낀 적 없는데?”진시호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뭐가 됐든, 네가 민여진 씨를 남다르게 대한다는 건 사실이야. 너 설마 민여진 씨 좋아하는 거야?”진시우의 목소리보다 진시호의 휴대폰 벨소리가 먼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진시호는 심나연에게 방으로 올라가라고 한 후 베란다로 걸음을 옮겼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진시호가 말했다.“어떻게 됐어.”고안이 이를 악물었다
“네가 운이 좋아서 진시우가 발견할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만약 진시우가 그 타이밍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런 일은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서 내가 해결하게 했어야지.”“그 인간을 평생 후회하게 할 방법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넌 뭘 했는데?”민여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숙인 민여진은 그저 가만히 남자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넌 나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또 날 속였어. 내가 너에게 준 신분을, 그리고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내가 눈치를 챘었던 그 순간에도 너는 날 속이는 걸 택했어. 내가 널 도울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야?”“아니면... 네 마음엔 애초부터 나란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야?”민여진은 괜히 울컥해 목이 멨다.“난 그저 너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어.”곧, 민여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손에 힘을 싣는 박진성 탓에 민여진은 아픈 숨을 들이켰다.“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넌 대체 왜 널 민폐라고 생각하는 건데.”눈을 동그랗게 뜬 민여진에게로 또다시 박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아무리 우리가 곧 이혼할 사이라고 해도 난 내 아내가 이런 일을 당하는 건 못 참아. 그리고 그런 짓을 한 새끼가 그 어떤 처벌을 받지 않는 것도 용납할 수가 없다고. 이런 일은 이번 한 번이면 충분해. 다음은 없어.”“그리고 다시는 날 네 일을 마지막으로 알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마.”박진성의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민여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박진성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혼자 남겨진 민여진은 돌멩이가 가슴을 꽉 누르고 있는 것 같아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그러니까 진성 씨가 내게 화가 났던 이유가... 내가 그 일을 숨겼기 때문이라는 거야?’민여진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든 말든 박진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경은커녕 관심조차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금 전의 말에 민여진은 박진성을 다시 돌아보았다.하지만 번뜩 정신
민여진은 그저 잔을 부딪친 후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술에 취해 박진성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박진성이 혹시라도 민여진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한다면 술을 마신 채로는 반항조차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진시우의 일이 해결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조금은 술을 마시고 싶었던 탓인지 빙그레 미소 지은 민여진이 말했다.“아녜요. 몇 모금 정도는 괜찮아요.”그 말에 진시호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잔을 부딪치고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던 진시호의 눈빛이 조금씩 어둡게 빛났다. 진시호의 눈동자엔 음흉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잠시 후, 박진성이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박진성이 진시우를 훑어보더니 냉담하게 시선을 옮겼다.“여진아, 우린 이만 돌아가자.”“응.”술잔을 내려놓은 민여진이 말했다.“진 대표님, 시우 씨. 시간이 늦어서 저희는 먼저 돌아갈게요. 나중에 연락해요.”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진시호가 심나연을 불러 두 사람을 배웅했다.차에 타자 좁은 공간은 박진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한기로 가득 찼다. 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민여진은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이호현의 일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한 민여진이 손을 창문틀에 올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진 대표님이 조용하게 잘 넘겼을 거야. 이 일을 아는 사람도 몇 명 없어. 그러니까 네가 쪽팔릴 일도 없을 거야.”그 말에 박진성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곁눈질로 민여진을 빤히 쳐다보던 박진성이 입을 열었다.“너 지금 내가 쪽팔려서 이러는 것 같아?”‘아니면?’민여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반문하는 박진성에게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민여진은 떠보듯 되물었다.“그럼 설마 진 대표님이 널 무시하는 것 같아서 그래? 그것도 아니면... 너와 이호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귀를 찌르는 타이어 마모 소리가 들리며 민여진의 몸이 앞으로 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