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은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박진성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참 뒤, 안쪽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문 열려 있어.”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기침 소리는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박진성은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서원아, 내려가서 물 좀 떠 와.”민여진은 대꾸도 없이 발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끓여둔 물이 없었기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데우고는 작은 약상자까지 챙겨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그녀가 내민 컵을 받으려 몸을 일으킨 순간, 박진성의 시선이 그녀의 가늘고 흰 손가락에 닿았다. 그제야 눈길이 얼굴로 옮겨졌다.“왜 네가...”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오늘 민여진이 이 집에 머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서원은 진작에 퇴근했을 시간이었다.민여진은 대답하지 않고 약상자를 침대 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기침약은 어디 있어?”박진성은 답하지 않았다. 물을 반쯤 마시고는 곧장 몸을 다시 눕히며 말했다.“나가.”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박진성, 지금은 고집부릴 때가 아니야. 이렇게 심하게 기침하는 걸 약도 안 먹고 그냥 두면 병원에 가야 할 거야.”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낮게 이어 말했다.“아니면 박 여사님께 전화할까?”이정화는 박진성의 건강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박진성의 상태를 알면 곧장 병원으로 데려가려 할 것이 분명했다.박진성의 눈빛은 그제야 움직였다.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민여진은 시선을 떨구고 되물었다.“기침약, 어디 있어?”“없어. 다 유통 기한 지나서 못 먹어.”“유통 기한이 지났다고?”민여진이 멈칫했다.“왜?”박진성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긴, 그 약상자는 원래 네가 챙기던 거였잖아. 네가 떠난 뒤로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니 당연히 유통 기한이 지났을 수밖에 없지.”민여진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서원 씨께 전
박진성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그 납치 사건에 대해서는...”“대표님, 민여진 씨.”언제 나왔는지 모를 서원이 차 문을 열며 말했다.“필요한 것 다 챙겼습니다.”“그래.”박진성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짧게 말했다.“가자.”서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다시 시동을 걸었다.구청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정오가 되는 시간이었다.민여진은 정신을 추스르고는 서원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얼떨떨함과 아득함이 한꺼번에 스쳐 갔다.‘이제 정말 이혼하는구나.’불과 2년밖에 안 되는 결혼 생활이었지만 반평생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것이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민여진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사이, 박진성도 차에서 내렸다. 둘은 함께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직원이 물었다.“혼인신고 하러 오셨어요? 앞쪽 창구로 가시면 됩니다.”박진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이혼하러 왔습니다.”“이혼이요?”직원은 놀란 기색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너무 잘 어울리셔서 그만... 이혼 창구는 저쪽입니다.”“감사합니다.”박진성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민여진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절차는 혼인신고와 다르지 않았다. 복잡한 것도 없었다. 책자 같은 것이 손에 떨어지는 순간, 그녀는 험난했던 결혼 생활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차에 오르자 마음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서원이 물었다.“민여진 씨,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 귀국 항공편은 오늘은 매진이라 내일로 예약하셔야 합니다. 우선 별장으로 모셔다드릴까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그녀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어느 별장으로 가는 거예요?”서원이 대답했다.“당연히 대표님 댁이지요.”그곳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민여진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입을 열기도 전에 박진성이 말했다.“호텔로 모
다행히 별장에 직접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서원이 안전벨트를 풀며 물었다.“대표님, 서류들은 어디에 두셨습니까?”박진성이 몸을 일으켰다.“내가 가져올게.”서원이 곧장 막아섰다.“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날도 춥고 제가 가는 게 더 빠를 겁니다.”박진성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신분증은 서재 맨 오른쪽 서랍에 있어. 혼인관계증명서는...”박진성은 멈칫하더니 덧붙였다.“혼인관계증명서는 침실 베개 밑에 있어.”‘베개 밑?’민여진은 순간 멍해졌다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가슴 언저리가 저릿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혼인관계증명서를 베개 밑에 숨겨두었다니... 왜지?’이해할 수 없었다.처음 증명서를 발급받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것을 정성스럽게 면포에 싸 두었다. 그러나 박진성은 무심하게 거실 탁자 위에 내던졌고 두 번 다시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버티는 것에 불과했다. 혼인관계증명서 역시 이혼할 때 써먹을 도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장 보이지 않는 구석에 처박아둬야 했다.서원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 문을 닫고 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뒤쪽에서 박진성의 목소리가 한발 빠르게 들려왔다. 차가운 말투였다.“오해하지 마.”“베개 밑에 둔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너랑 이혼할 준비를 진작에 해뒀으니까 저번에 양성에 왔을 때 서랍에서 미리 꺼내서 베개 밑에 둔 거야. 언제든지 쉽게 꺼내 쓰려고.”적당히 합리적인 대답이었다. 민여진도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게 정답이어야 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응.”박진성은 말없이 창문을 열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차 안에 연기가 퍼지진 않았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는 민여진의 귀에 또렷이 들어왔다.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아직 기침하잖아. 그러니까 담배는 피우지 마.”담배를 입술에 가져가던 박진성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빨아들였다. 그는 차
민여진은 눈치를 채고는 말없이 차에 오른 뒤 안전벨트를 매었다.이동하는 내내 박진성은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때로는 숨이 넘어갈 듯, 마치 장기를 다 토해내려는 것처럼 거세게 쿨럭거렸다.서원도 듣다못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약국에 들러 약이라도 사시는 게...”“운전이나 해.”박진성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시간 낭비하지 마.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해.”서원은 어쩔 수 없이 페달을 더 깊이 밟았다.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탑승수속이 시작된 뒤였다. 서원은 민여진에게 항공권을 내밀며 말했다.“여진 씨, 좀 있다가 승무원에게 말씀드리면 퍼스트 클래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뭐지?’뜻밖의 말에 민여진은 멈칫했다.“그럼 두 분은요? 같이 안 타세요?”“그럴 리가요.”서원이 머뭇거렸다.“퍼스트 클래스 자리가 하나밖에 안 남아서요. 저와 대표님은 비즈니스석입니다.”너무나도 절묘한 우연이었다.민여진은 의아했으나 더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눈을 붙이고 잠시 쉬다가 깨어나니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퍼스트 클래스 구역은 텅 비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그녀는 승무원에게 물을 부탁하며 물었다.“퍼스트 클래스는 꽉 찼다고 들었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없죠?”“꽉 찼다니요?”승무원은 부드럽게 웃었다.“빈자리는 많아요. 잘못 들으신 것 같아요.”‘잘못 들었다고? 분명 서원이 그렇게 말했는데.’민여진은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승무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시야에서 뿌연 빛이 끝없이 번져갔다. 오래전부터 먹지 않은 약이 떠올랐다. 뇌 속의 혈전을 완화해 주는 약이었다.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기내의 공기는 따스했지만 몸은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다.박진성을 증오하고 그와 멀어지는 것, 이혼 서류를 손에 쥔 뒤 각자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가장 나은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사이의 오해는 많은 원망 속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할
“별일 아니에요. 애초에 이혼할 생각이었고 다른 일들 때문에 지금까지 미뤘던 거예요.”민여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박진성을 둘러싸고 했었던 오해가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우리 사이에는 원래 사랑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그렇구나...”장정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그럼 박진성 씨와 함께 가시는 건가요?”“네, 금방 돌아올 거예요.”“그럼 제가 병실 문 앞까지 모셔다드릴게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리며 외투를 걸친 박진성이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생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고 끊이지 않는 기침에 붉게 물든 눈가는 버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민여진을 발견한 박진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차가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스치듯 지나갔다.“서원아, 가자.”그는 옆에 선 남자에게 짧은 지시를 내릴 뿐, 민여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 곁을 스쳐 지나갔다.민여진의 어깨가 잠시 흔들렸고 장정아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여진 씨...”“괜찮아요.”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민여진은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먼저 돌아가요. 저는 양성에 들렀다가 이혼 절차를 밟고 돌아올게요.”“그럼... 돌아오시면 꼭 전화해요. 공항으로 마중 나갈게요.”민여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알겠어요.”멀어져 가는 박진성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그녀도 발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에 함께 몸을 실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숨막히는 침묵이 밀려들었다.기침을 참으려 애쓰는 박진성의 소리만이 좁은 공간을 메울 뿐이었다.민여진은 몸을 틀며 무심한 듯 물었다.“그렇게 서둘러서 양성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어젯밤에 깨어난 걸로 아는데 며칠은 쉬고 가도 되잖아.”박진성은 손으로 피곤이 깃든 눈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나 걱정해 주는 거야?”그는 민여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네가 날 걱정할 리 없지. 날 그렇게
그녀는 박진성처럼 냉혈한이 아니었다. 온기와 감정을 지닌, 인간다운 사람이었다.그런 일을 전해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오히려 더 이상할 터였다.“내일 갈 거예요.”민여진은 깊이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내일 같이 가 줘요.”“그래요.”장정아는 곧장 민여진의 팔짱을 끼며 친근하게 말했다.“오늘은 푹 쉬어요. 내일 제가 운전해서 모시러 올게요.”“네.”하지만 이튿날 아침이 되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민여진이 병원에 가기도 전에 박진성이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나야.”민여진은 몇 초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알아.”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박진성은 몇 번 기침을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병원에 와 줘. 양성으로 돌아갈 거야.”“응.”잠시 뜸을 들이던 박진성이 말을 이었다.“너도 나랑 같이 돌아가자, 이혼하러.”그 말과 함께 통화는 끊겼다.민여진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혼이라는 말을 먼저 꺼낼 사람도, 누구보다 이 관계를 간절히 끝내고 싶었던 사람도 자신이라고 여겨왔다.“여진 씨! 여진 씨!”장정아가 코트를 털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밖에서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또 잠드신 줄 알았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얼굴을 한 번 비비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가요.”“네, 갑시다!”장정아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박진성 씨께서 깨어나셨대요. 이제 만나시면 얘기도 나누실 수 있겠네요.”민여진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는 장정아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병원까지는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장정아가 간호사 하나를 불러 세웠다.“안녕하세요. 저희 박진성 씨 친구인데요, 그분 병실이 어디죠?”간호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1208호요.”말을 마친 간호사는 무심히 민여진을 훑어보더니 약간 놀란 듯 물었다.“어?“무슨 일이에요?”장정아가 영문을 모르고 물었다.민여진도 간호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