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별아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 승낙도, 거절도 아니었다.사실 별아는 이 제안을 두고 고민하고 있지도 않았다. 이미 마음속에는 답이 정리돼 있었고, 이 상황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수술대에서 무사히 내려오면, 그때는 너랑 다시 한번 해 볼게. 하지만 내려오지 못하면... 나는 네 아내로서 장례를 치를 거고, 아들은 ‘하은준’이라는 이름으로 네 상주가 될 거야.”강준이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내가 바란 건 재혼이지, 이런 식의 결말은 아니야.’‘결국 살아 있어야만,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거구나.’실망이 밀려왔지만, 강준은 더 할 말이 없었다....나무이파리마저 거의 다 떨어진 11월 말. 겨울의 기척이 조용히 스며들 무렵이었다.긴 준비와 까다로운 사전 검사 끝에, 강준의 수술 날짜가 확정됐다.솔직히 말하면, 강준의 몸 상태는 이전보다 더 나빠져 있었다.의학적으로는 수술을 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수술을 결정한 사람은 별아였다.하씨 가문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남정에게만 전화로 간단하게 전했다.전 시어머니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담담하고 부드러웠다.“별아야, 네가 판단한 대로 해. 결과가 좋든, 나쁘든... 강준이는 널 원망하지 않을 거고, 나도 그러지 않을 거야.”강준이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별아는 손을 꼭 잡았다.“강해져야 해. 나... 여기서 기다릴게.”강준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별아가 몸을 숙이고 귀를 가까이 댔다.“할 말 있어?”“여보... 이번에 정말 내가 못 나오면... 기억해 줘. 나... 너 사랑했어.”강준은 그 한 문장을 말하는 데 거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얼굴이 붉게 변하면서 숨이 막힐 듯했다.“그런 말 하지 마. 수술 잘 될 거야.”눈시울이 붉어진 별아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죽음이라는 불확실함 앞에서 별아의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아팠다.강준이 수술실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별아는
“배호민, 너 맞을 짓 했다는 생각 안 드냐?”감정이 고조되자, 강준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거칠게 기침을 했다.별아는 곧바로 물컵을 들어 강준에게 건넸다.호민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됐어. 괜히 흥분하지 마. 널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공통점은 하나야. 아무도 네가 죽는 건 바라지 않아. 다들 네가 살아서 버텨 주길 바라는 거지.”강준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이겸이 한 걸음 다가왔다.강준과 삼십 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이렇게 병색이 짙은 모습은 처음이었다.이겸은 속이 쓰렸지만, 여전히 말은 거칠게 내뱉었다.“그래. 네가 진짜로 죽으면 허전할 것 같긴 해. 그러니까 강준아, 제발 이렇게 허무하게 가지는 마. 우리한테 웃음거리도 되지 말고.”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견디지 못한 강준이 고개를 돌렸다. 이겸에게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은 분명히 불편해 보였다.수지가 급한 일이 있다면서 먼저 자리를 뜨자, 이겸도 함께 병실을 나섰다.호민이 남아서 별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수술을 받는 게 최선이야. 성공률이 30%이라고 해서 낮다고만 볼 수는 없어. 줄리안 교수는 더 낮은 확률의 수술도 성공시킨 사람이야. 30%이면, 교수 기준에선 충분히 도전할 만한 수치야.”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했지만 문제는 강준이었다.‘하강준은 고집이 센 사람이야. 천천히 죽어 가는 건 받아들이면서도 수술대에서 바로 끝나는 건 두려워하지.’‘하강준을 설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아.’별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강준이랑... 이혼했다면서?”호민이 불쑥 물었다.별아는 호민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네.”“강준은 늘 자기 혼자 감동하는 선택을 해. 과하고, 예민하고, 충동적이고... 솔직히 얼굴 말고는 장점을 찾기 힘든 사람이지.”호민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지막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 하강준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별아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묻어
강준이 숨을 고르며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은준은 강준의 몸에 매달리듯 꼭 안고 놓지 않았다.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마치 이별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처절했다.그 모습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마음을 저리게 만들었다.“은준아, 아빠는 지금 좀 쉬어야 해. 재환 아저씨랑 먼저 집에 갈까?”별아는 조심스럽게 은준의 손을 잡았다.은준은 울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길은 여전히 강준을 향해 있었다.그리고 엄마를 향해 진지하게 당부했다.“엄마, 아빠한테 약 먹이면 안 돼.”“왜?”“텔레비전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아저씨한테 약 먹였는데, 그 아저씨가 죽었어.”은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 아저씨 이름이 ‘나쁜놈’이었어.”별아는 잠시 대답을 못했다.“괜히 그런 생각 하는 거 아니야.”별아는 은준을 재환에게 넘겼다.“강 비서님, 남정 여사님 댁까지 좀 부탁드릴게요.”“알겠습니다.”은준이 떠난 뒤, 강준은 다시 수술실로 옮겨졌다.의사는 강준이 지나치게 흥분해서 호흡이 끊어질 뻔했다고 말했다.별아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며칠 뒤.강준의 병실에 수지와 이겸, 그리고 해외에서 돌아온 호민이 함께 나타났다.“호민 오빠, 들어왔어요?”별아는 놀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었다.“수지랑 이겸이 약혼하잖아. 오빠로서 안 올 수가 있나?”호민의 시선은 곧바로 강준에게로 향했다. 강준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호민의 표정이 굳어졌다.“그것보다... 친구가 이렇게 아픈데, 내가 안 돌아올 수가 없지.”이겸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약혼이야 나중 문제고, 강준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걱정이 돼요.”강준은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갑게 한참 동안.“하 대표, 이 정도면 다들 네 걱정 엄청 하는 거야.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 먼저 죽어 버리면 내가 누구 붙잡고 욕하겠어.”수지가 툭 던지듯 말했다. 말투는 거칠었지만, 악의는 없었다.별아는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
별아는 잠시 시간을 내서 작업실에 들렀다.수지가 약혼을 앞두고 있어서, 가장 가까운 친구인 별아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수지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직접 디자인한 주얼리 목걸이였다.중앙에 세팅된 라운드 컷 다이아몬드는 별아가 지인을 통해 해외 경매에서 낙찰 받은 것이었다.가격은 상상을 초월했고, 솔직히 말하면 별아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에 가까운 금액이었다.“사장님, 이 목걸이 드디어 주인이 생기네요. 수지 언니가 받으면, 분명히 행복해서 울 거예요.”도설은 가장 고급스러운 케이스에 목걸이를 담아서 별아에게 건넸다.별아는 씩 웃었다. 최근 들어 거의 느끼지 못했던 기분 좋은 감정이었다.“수지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네.”“분명히 그럴 겁니다, 사장님.”도설은 공손히 서서 차분한 미소를 유지했다.별아는 도설을 바라보다가 뭔가 떠오른 듯 서랍을 열었다.그리고 카드 한 장을 꺼내서 도설에게 내밀었다.“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시천 씨가 나간 뒤로, 작업실 안팎을 도설 씨 혼자서 다 감당했잖아. 그 점, 진심으로 고마워.”“아니에요, 사장님.”도설은 놀라 손을 내저었다.“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연말 보너스라고 생각해.”전생에서는 별아가 도설에게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이번 생에서도 카드 안의 금액이면, 충분히 괜찮은 집을 살 수 있었다.“받아 둬.”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카드를 받은 도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앞으로도 당분간은 도설 씨가 조금 더 고생해야 할 것 같아. 하 대표 병원에 함께 있어야 해서... 대신, 최대한 빨리 도설 씨를 도와줄 사람을 붙여줄게.”별아가 신뢰를 담아 말했다.도설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사장님, 맡겨 주신 일은 꼭 잘 해내겠습니다.”“그리고... 도설 씨, 어머니 모시고 K시로 오고... 이제는 가정폭력에 단호해져도 돼.”도설은 잠시 동안 말을 못했다.“사장님, 그걸 어떻
강준은 턱밑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솔직히 말하면, 배호민은 좋은 사람이었다.여러 면에서 강준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별아가 정말로 배호민과 함께한다면, 강준은 마음이 조금 놓일 것 같았다.적어도 유이겸보다는 훨씬 낫기에.“내가 배호민을 싫어하긴 해.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배호민은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야.”“속에 있는 걸 숨기지 않고 드러내 놓고 사는 사람이지. 유이겸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타입은 아니야. 유이겸만 아니면, 네가 누구하고 결혼하든 상관없어.”별아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강준이 왜 그렇게까지 이겸을 못마땅해하는지.이겸이 음흉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강준이 얼마나 떳떳한 사람인지는 별개의 문제였다.하지만 그걸 따질 기회도 이제는 많지 않았다.“유 변호사님, 수지랑 약혼해.”별아가 말했다.강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놀람과 의문이 동시에 섞인 표정이었다.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다음 달 초야. 청첩장도 받았어. 근데 네 치료 때문에, 난 아마 못 갈 것 같아. 나중에 시간 나면 수지한테 제대로 된 선물이나 준비하려고.”별아는 담담하게 말했다.강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이 소식이 강준에게는 갑작스러웠을 것이다.강준은 이겸이 평생 별아를 마음속에서 내려 놓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강준은 늘 확신에 찬 오해를 많이 했다. 그게 별아가 가장 안 좋아하는 점이기도 했다.별아는 생각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 성숙하고 너그러워져야 한다고.별아와 강준은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랑과 증오를 지나왔다.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강준에게 기회가 있다면 말이다.“이런 얘긴 다 필요 없어. 괜히 머리 쓰지 말고, 얼른 나아. 은준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래야지. 아빠가 있어야 할 아이잖아.”강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말수도 더 줄면서 별아와의 대화도 거의 끊어졌다.별아는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호민에게 강준의 검사 결과와 영상 자
“말을 왜 그렇게까지 해? 나한테도 내 생활이 있어. 사람답게 숨 쉴 자유도 없는 거야?”또다시 ‘미안하다’, ‘떳떳하지 않다’는 이야기로 흘러가려는 분위기였다.호민은 그런 대화를 더 이상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호민은 말없이 리나를 밀어냈다.리나는 돌아서며 호민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이러지 마. 나 헤어질 생각 없어. 그냥 네가 다른 여자들이랑 가까워지는 게 싫은 거야. 내가 너무 널 좋아하고, 너무 사랑해서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굴지 마.”“지금은 좀 진정해. 오늘은 회사 가서 잘게.”호민은 리나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고는 그대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리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목소리는 점점 제어를 잃었다.“회사 가는 거 아니잖아. 또 다른 여자한테 가는 거지? 배호민, 너 그러면 안 돼.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뒤에서 들려오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호민은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미간을 눌렀다....별아가 호민에게서 전화를 받은 건 꽤 늦은 시간이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배호민이 먼저 말했다.[오늘 일은 미안해.]“괜찮아요, 호민 오빠. 오빠 바쁘신 거 아는데, 제가 괜히 연락을 드린 거죠.”호민은 짧게 웃었다.[무슨 소리야. 수지가 메시지 보냈어. 강준이 아프다고?]“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그래서... 오빠한테 부탁을 드리고 싶었어요. 해외 쪽에 폐 질환 잘 보는 전문가나 기관이 있는지 말이에요. 오빠가 그쪽 사람들 많이 아시잖아요. 비용은 상관없어요.”별아는 조심스러웠다. 사람의 호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별아가 내밀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오빠, 혹시...”[별아야, 우리 사이에 무슨 부탁이야. 나랑 강준도 친한 사인데, 그런 큰일이 생겼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 걱정 마. 며칠 안에 관련 전문가들한테 연락해 볼게. 조금 이따가 강준 병력 차트하고 영상 파일 보내 줘.]호민의 말에 별아의 마음이 한결 느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