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평온한 수요일 오후. 지상파 음악 방송의 대기실 안.
도국은 과거 같은 그룹의 멤버였으나 최근 홀로서기를 하며 솔로 앨범을 발매한 마현을 지원 사격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주원형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더 괴물처럼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신하늘에게 대놓고 명함을 건네며 접근한 이유만큼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강소희에게 미친 듯이 집착하던 인간이, 대체 왜 신하늘에게?’
벽면에 걸린 큐시트 모니터에서 '에스텔라'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도국은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리허설 끝나면 대기실로 와.]
대기실로 찾아올 세나에게 간결한 문자를 보낸 뒤, 그는 대기실 내 미니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 두 병을 꺼냈다.
“도국아, 진짜 고맙다! 급하게 부탁한 피처링인데 아주 완벽하더라. 역시 넌 프로야.”
세나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모니터 화면 제일 상단에 뜬 닉네임과 아이디를 거듭 확인했지만,진짜 도국이었다.대한민국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톱아이돌이자, 지난 5년간 숨 막히는 집안 환경 속에서 세나를 버티게 해 준 단 하나의 우상. 그 도국이 직접 비밀 쪽지를 보내온 것이었다.“역시 오빠는 다정해······.”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혼잣말이 잘게 떨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그대로 뚫고 나올 것처럼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손끝이 떨려 키보드 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어놓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숨을 몇 번이고 깊게 내쉬며 백스페이스와 자판을 번갈아 누른 끝에, 가까스로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네, 오빠! 저 아마 그곳에서 데뷔하게 될 것 같아요! 거기 비서님이 축제 때 절 캐스팅해 주셨거든요!]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알림음과 함께 도국의 답장이 도착했다.[비서님이 유능하시네.]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도국의 다정한 다독임에 세나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몽글몽글하게 피어올랐다. 단순한 팬 서비스를 넘어, 연예계 선배로서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듯한 어조에 머릿속이 어지러울 정도로 들떠 왔다.세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오랫동안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던 아껴둔 옛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메시지를 써 내려갔다.[저······ 혹시 예전에 오빠께서 저보고 연예인 된다고 공부 접지 말고, 대학 가서 연예인 되면 제 소망 하나 꼭 들어주신다고 하셨는데······ 기억하세요?]메시지를 보낸 직후,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병을 하나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편하게 통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남의 사적인 영역을 엿듣는 묘한 거북함을 피하려 통유리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차준호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거나, 나처럼 친밀한 이성이 있을 수 있는 법이었다. 지금은 토요일 저녁이었고, 아무리 일에 미친 경영자라 한들 사적인 여유를 누릴 권리는 충분했다.그 뒤로도 인터폰 너머의 대화는 낮은 저음으로 이어졌지만, 나는 일부러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25층 대표실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은 아득했고, 발밑의 도시 불빛들은 당장이라도 삼켜질 듯 까마득한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의 말 한마디, 미세한 눈짓 하나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생수 뚜껑을 열었다. 차가운 수분이 입안을 적시고 목덜미를 따라 시원하게 넘어갈 때쯤, 흐릿했던 정신이 비로소 팽팽하게 곤두섰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수화기 너머 여자의 절박한 질문을 서늘하게 잘라내는 차준호의 음성이 귓가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난 누구하고도 연애 안 해. 현재도, 미래도.”단단하고 여지없는 선언이었다. 분명 나를 향한 대답이 아니었음에도, 순간 가슴 밑바닥이 덜컥 내려앉으며 심장이 유난히 기묘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현재도, 미래도 연애는 하지 않는다니.물을 다시 마셔도 달아오르는 열기까지 가라앉히지는 못했다.***차준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조금 전의 날 선 한기는 온데간데없다는 듯,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세나의 영상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신하늘이 인재를 잘 뽑았어.”인터폰 너머의 여자가 남긴 잔상과 차준호의 차가운 단언을 머릿속에서 털어내
봉사를 천천히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잠깐 숨을 돌리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버렸다.그런데 차준호가 회사에 급한 일이 터졌다며 연락을 해오는 바람에,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CH-컴퍼니로 달려온 참이었다.하루 종일 어르신들 봉사활동을 하느라 몸에 육개장과 김치 냄새가 뱄을까 봐, 이아준이 선물로 준 정갈한 셔츠에 슬랙스를 급하게 입고 나왔다.평소 차준호가 선물해 주던 화려한 원피스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격식 없는 차림은 아니었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해 보니 대표실 테이블 위에는 최고급 초밥과 신선한 과일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마치 나와 느긋하게 식사나 같이하자는 듯 말이다.“대표님? 급한 일이 뭔가요?”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차준호는 일단 테이블에 앉으라며 턱짓을 하더니 대표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모니터 화면을 띄웠다.오늘 회사에 대형 사고라도 일어난 걸까. 혹시 도국이가 봉사하러 와서 나랑 스캔들라도 터진 건가 싶어 긴장한 채 화면을 주시했다. 하지만 모니터 안에는 뜻밖에도 세나의 연습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신하늘,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하루 종일 어르신들께 음식을 대접하느라 어제부터 육개장과 김치 냄새에 치여 사실 입맛은 싹 달아난 상태였다. 하지만 은은한 단초물의 향과 함께 윤기가 흐르는 초밥을 보니, 평소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는 그제야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다.“아, 네.”차준호는 세나와 하루빨리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며 현재 상황을 함께 점검하자는 명목으로 식사를 권했다.대체 이게 무슨 주말 긴급 업무인가 싶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기도 귀찮았던 터라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신하늘,
차준호는 신하늘에게 모든 신경이 쏠려 있어 옆에서 터져 나오는 허기찬의 푸념 따위는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빠르게 사업 확장이나 해야 하는데 한가하게 여자 꽁무늬나 따라다닐 때인가.어쩌자고 이런 이례적인 행보를 이어가는 건지, 스스로에게도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대표님? 자꾸 저 혼잣말하게 하시면 그냥 집에 가서 쉴겁니다!”“여름부터 집에서 영원히 쉬게 해줘?”“아이고, 협박도 참 일관성 있게 하시네요.”허기찬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준호는 팔짱을 낀 채, 저 멀리 천막 아래에서 웃고 있는 신하늘을 빤히 바라보며 나직하게 물었다.“신 비서 옆에 있는 저 둘은 알아봤어?”허기찬은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준비해 온 보고서를 읊었다.“JW엔터 소속의 도국, 그리고 L-DS 사장 이아준입니다. 셋 다 여기 라온초등학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더군요.”차준호의 짙은 시선은 여전히 천막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신하늘에게 고스란히 가닿아 있었다.“참, L그룹과 JW엔터 측에서는 철저하게 어린 시절 정보는 막아 놓은 상태고요.”“그래도 점심 배식 봉사는 종종 하나 보지?”허기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신 비서의 부모님이 처음 시작하신 일인데, 한 달에 한 번씩, 벌써 7년째 끊이지 않고 이어서 하고 있다고 합니다.”그 말에 차준호는 고개를 살짝 빼고 천막 아래에서 하얀 김을 내뿜으며 끓기 시작한 커다란 들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기특하네, 다들.”그도 신하늘을 격려하고 기부라도 좀 해주
손끝에 와닿는 절인 배추의 서늘하고 축축한 감촉에 순간 내 손길이 굳은 듯 딱 멈춰 섰다.모든 선자리를 단칼에 거절했다는 차준호.그 소식이 왜 이토록 가슴 밑바닥을 무겁게 흔들어 놓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자신에게 닿는 세상의 모든 호의와 타협을 당연하게 거부해 버리는 남자의 오만한 기개는 역시 그와 어울린다고 여겨졌다.매일 저녁 9시 뉴스만 틀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차진철 회장이나 이왕춘 회장 같은 재벌가의 거두들인데.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차준호나 이아준 역시 그 엄숙하고 냉혹한 권력의 자리에 앉아 누군가의 인생을 손쉽게 휘두르고 있을 터였다.현재 느껴지는 이 신분의 격차는 앞으로 세월이 흘러도 메워질 수 없는 아득한 절벽이었다.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서늘한 상실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세종동을 떠나게 되면······ 당연히 아준이나 도국이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겠지.’어쩌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먼저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친구라는 다정한 이름표를 달고 있어도, 결국 우리가 서 있는 바닥의 높이는 완전히 달랐으니까.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방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어둠이 짙게 깔린 마당 구석, 오래전 불타버린 보육원 건물 터에 위태롭게 얹혀 있는 이 낡고 작은 집이 내 초라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낮 동안 차마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담벼락의 붉은 낙서들과, 대문 철판 위에 거칠게 칠해진 빨간 페인트 자국들이 환영처럼 뇌리를 스쳤다.“당장 이곳을 떠나야 하는 행정명령이 내려진 것도 아닌데, 회사 몇 년만 더 바짝 다니면 이 지긋지긋한 빚도 다 갚을지 모르고.”나는 짐짓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속을 짓누르던 답답한 공기를 한꺼번에 내뱉었다.
금요일 밤, 어두운 세단 차 안.시트 깊숙이 몸을 묻은 강소희가 살짝 거친 숨을 내쉬며 주원형을 살며시 밀어냈다.“대표님, 메이크업 무너져요. 너무 짓뭉개지 마세요.”주원형이 낮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강소희의 턱끝을 감싸 쥐었다.“고맙다고 먼저 키스한 건 너잖아. 사람 흥분시켜 놓고 무슨.”입을 삐죽인 강소희는 이내 두 팔을 넓게 벌려 주원형의 목을 꽉 껴안았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치마를 위로 말아 올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애교라는 것을 부리고 있었다.“대표님, 나 백 감독님 새로 들어가는 로코 영화 주인공 하고 싶어요. 그것 좀 꼭 따주세요, 네?”이제 내년이면 30살이라 로코는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찍어 두고 싶은 그녀였다. 10년째 주원형을 이렇게 길들여온 그녀였기에 오늘도 그리 칭얼거려 보았다.강소희의 애교 섞인 떼쓰기에 주원형이 쯧, 소리를 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너 진짜 사람 너무 굴리네. 아주 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들지.”강소희는 주원형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가며, 그의 목덜미에 야릇하게 입을 맞추었다.“대신 흥행도 제대로 내줄게요. 나 연기력 대단한 거 대표님이 제일 잘 알잖아요?”주원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예능 나가.”그 말에 강소희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대신 딱 두 군데만 나갈 거예요. 나는 T 프로그램이 좋아요. D 방송국은 패스. 거기 PD들은 너무 공격적이라 기분이 별로거든요.” “알았어. 그럼 도국이랑 같이 예능 한 번 나가.”도국의 이름이 나오자 강소희의 얼굴에 금세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어머, 그건 너무 좋아요!”대세 아이돌 도국이니 저번에 키스신도 찍었고 화제성도 좋고 도국과 친해져서 나쁠 것 같지 않은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