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맨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 #2. 비밀의 밤, 잔인한 선물

공유

#2. 비밀의 밤, 잔인한 선물

작가: silver구슬
last update 게시일: 2026-05-17 14:11:26

‘이 나쁜 자식!’

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

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

“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

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나를 그저 몸만 즐기는 파트너로 취급했다는 그의 확신에 가슴이 난도질당했다.

“전 아무하고나 침대를 달구지는 않아요.”

바에서 생수를 들고 걸어온 차준호는 내게 슬그머니 병을 내밀었다. 마치 ‘냉수 먹고 속 차려라’ 하는 무언의 조롱 같아 속내가 뒤틀리다 못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화가 치밀어 올랐기에 신경질적으로 병을 뺏어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 섹시한 옷도 입고 와서 나에게 고백하려고 했어?”

숨이 탁 막히는 순간이었다. 일순 목에 사레가 들려 볼썽사납게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완벽하게 고백 성공 시나리오를 쓰고, 오늘부터 진정한 연인 1일이 될 거라 철석같이 기대했던 나였기에 타격이 컸다. 단칼에 차인다는 예상은 전혀 못 했기에 당황스러움에 눈앞이 아찔했다.

“놀랐어? 귀엽긴.”

진심으로 이 상황이 흥미롭고 즐거운지, 그의 입가에는 호선이 만개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로브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내게 다가왔다. 온몸 가득 베인 시원하고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머릿속을 하얗게 마비시켰다.

딸깍. 정적을 깨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차준호는 길고 곧은 손끝으로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꺼내더니, 얼어붙은 내 목에 차가운 금속성 이물감을 선사했다.

“······대표님?”

그가 내게 선사한 것은 바로 근사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였다.

***

그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애초에 내게 주려고 미리 준비했다는 건데, 이 모순적인 남자는 지금 내게 왜 이러는 거지?

“메리 크리스마스.”

가까이서 내 목덜미를 바라보는 그의 짙은 시선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숙여 목에 걸린 물건의 정체를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체인 끝에 매달린 목걸이였다.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도는 펜던트는 구름, 별, 달 모양이 다이아몬드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어서, 마치 그동안 우리가 남몰래 나눈 비밀스러운 밤을 새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펜던트 속 달 모양이 마치 그가 깊숙이 숨겨둔 진심을 투영하는 거울 같아, 혼란스러운 상념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나랑 연애도 안 하고, 고백도 하지 말라고 원천 차단하면서 왜 목걸이는 이토록 다정하게 쥐여주는 걸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크리스마스잖아. 선물 주는 거지. 신하늘이 예뻐서.”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건 또 무슨 행동일까. 방금 난 매몰차게 차인 게 아니었나. 

그는 통유리창 너머로 무수히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입가에 걸린 알 수 없는 미소를 끝내 거두지 않았다.

그때 Rrrr Rrrr.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자 그는 내게서 벗어나 통화에 집중했다. 

“허 실장, 뭐라고? 일치한다고?” 

전화를 받는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창에 비친 그의 냉정한 실루엣만 응시했다.

몇 마디 주고받던 통화를 황급히 끊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급한 일이 생겼어. 다음 주 스케줄 비워.”

차준호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묻어났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얼른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당연히 오늘 같은 날, 급한 일이 아니더라도 더 붙어 있을 명분이 없었다.

“데려다줄게. 허기찬 불렀어.”

“아시잖아요. 여기서 세종동은 가까워요.”

이렇게 나의 크리스마스이브 고백은 대실패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룸을 나가기 위해 가방을 들자 평소와 다른 무게라 잠시 몸을 움찔했다.

그에게 선물로 줄 [당신 덕분에 매일 행복했습니다]라고 적힌 신간 도서가 지금의 나를 조롱하듯 가방 속에서 존재감을 내비쳤다.

“대표님. 오늘 이곳에서 나눴던 대화는··· 없었던 일로 생각해 주세요.”

난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죽인 채 억지로 웃어 보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래. 오늘 일은 깨끗이 잊어 줄게.”

차준호의 목소리 끝에는 묘한 여운이 맴돌았다.

***

역시 내 인생은 이런 식이지. 다시 블루 크리스마스로 돌아왔다.

도국과 이아준 두 친구 녀석 덕분에 남자를 모르고 살았던 내 모태솔로 인생이었건만.

갑자기 3년 전, 운명처럼 등장한 차준호라는 사람과의 3D로 펼쳐진 혼자만의 핑크빛 로맨스는 착각으로 끝이 났다. 

고개 위로 눈발이 하늘에 아름답게 수를 놓았지만, 발밑은 질척하고 칙칙한 풍경뿐이었다. 

따뜻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환상이었으나 현실은 이리 춥고 진창인 것을.

핑크 스틸레토 힐에 튀어 오른 흙탕물이 발목을 휘감으며 신경질을 자극했고, 입안의 온기는 하얗게 부서져 얼굴마저 얼게 했다. 

니트 원피스가 보기엔 따뜻해 보여도 보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코트 깃을 바짝 세웠다. 한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열이 오른 머리를 식혔다.

주말도 없이 야근을 밥 먹듯 한 3년. 그래도 그와 함께여서 즐거웠다. 비서는 회사의 이미지라며 좋은 옷도 선물 받고 국내외 대단한 출장길도 함께여서 행복했는데.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또래보다 험난한 길을 걸어온 나. 물려받은 보육원 땅을 지키고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건 오직 입사 덕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C호텔을 바라보자, 유리창의 찬란한 불빛은 내 것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것 같아 아득했다. 

차준호와 함께할 따뜻한 봄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엉망인 땅바닥처럼 추운 겨울이나 신경 써야 했다. 잊어 달라 했지만, 이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연봉 협상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만둬야 하나 마음이 뒤숭숭해 한숨만 터져 나왔다.

그에게 받은 목걸이 펜던트만 만지작거리며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굴욕을 지워버리려 해도 목덜미에 닿은 목걸이의 서늘한 감각이 굴욕적인 기억을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도록 차준호는 연락 두절이 되었다. 그의 소식은 새해 아침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

1월 1일.

차준호가 사라진 지 일주일째, 그의 이름이 갑자기 속보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재벌가의 황태자 차준호와 독보적인 한류 스타 강소희. 두 사람의 세기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세기의 스캔들? 굴지의 CC그룹 황태자 차준호와 글로벌 톱 여배우 강소희 사고!]

[현재 차준호와 강소희는 대한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

silver구슬

·가운데 점을 수정하였습니다. 먼저 읽으신 분들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최대한 하루 1~2회차는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11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80. 도를 넘어온다면 나 역시 선 밖으로

    화요일 늦은 밤, 최기범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일주일 남짓 이 나라를 비웠을 뿐인데, 기분만큼은 몇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유학생처럼 생경하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신작 게임이 출시될 때까지 일본에 계속 머물고 싶기도 했으나, 하나뿐인 아들이 보고 싶다며 성화를 부리는 부모님의 요청을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곧장 본가로 향하기 위해 인천공항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워둔 차의 꼴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희뿌연 공기 탓인지 수북하게 쌓인 먼지 때문에 방치된 남의 차를 보는 듯했다.다행히 배터리가 방전되지는 않아 곧바로 가까운 주유소로 향했다. 기름을 가득 채우고 세차까지 마치자, 차체는 비로소 제 빛깔을 되찾았다.최기범은 운전대를 잡은 채 룸미러에 비친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 밑에 그늘진 짙은 다크서클이 마치 어머니의 악행을 묵인해 온 죄의 증거처럼 느껴졌다.신하늘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 입술을 깨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런 평화로운 명절 연휴에 자신 같은 사람의 연락이 오히려 그녀에게 짐이 될 것 같았다.'회사에서 만나면 제대로 사과하고 정면으로 마주해야지.'3월 1일이 지나면 신하늘은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터였다. 회사에 남아 있는 동안만큼은 그녀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었다.잠시 확인한 포털 사이트에는 다행히 그녀를 향해 날을 세우던 자극적인 기사들이 한풀 꺾여 있었다. 인간적으로 베푼 그녀의 선행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차준호가 손을 썼거나 친구인 이아준이 언론에 압박을 가한 게 아니더라도, 미디어 스스로 자정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보였다.하지만 신호가 바뀌고 차를 몰아가면서도 최기범의 손끝은 끊임없이 떨려 왔다. 기사가 가라앉을수록 제 어머니는 더욱 자극적이고 파괴적인 건을 터뜨릴 준비를 할 테니까. 불길한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79. 어차피 내 인생은 내 발로 나아가는 것

    차준호는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거실의 통유리창 앞에 서서 신하늘과 통화를 이어가던 중, 천천히 몸을 돌렸다.“내가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체스판 위에 얼굴을 묻을 듯 깊이 숙인 채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차진철 회장의 모습에 차준호는 가벼운 실소를 흘렸다.승리를 놓친 아쉬움이 저리도 큰 걸까. 나이가 몇인데 자신과 마주 앉아 이토록 아이처럼 승부욕을 드러내는지.하지만 차진철 회장의 그 천진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오늘만큼은 그에게 살가운 아들 노릇을 해낸 것 같아 차준호 역시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기특한 녀석. 이렇게 아비를 이겨 먹으려고 작정을 하고 덤볐단 말이지. 이건 도저히 수가 없군. 졌어, 졌어.”투덜거리면서도 내심 싫지 않은 기색을 내비친 차진철 회장은 이내 판을 물리며 새로이 체스 기물들을 세팅하기 시작했다.오늘 신하늘에게도 판정패를 당하고, 아들에게마저 판을 내주었으니 아마 이길 때까지 체스를 두자고 고집을 부릴 터였다. 아니나 다름없이 그의 얼굴에는 껄껄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준호야, 한 판 더 하자. 얼른 이리 와.”“저 지금 통화 중이잖아요.”하지만 신하늘의 답장이 지체되자 차준호의 신경이 이내 날카롭게 곤두섰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삐걱거리는 불협화음이 아슬아슬하게 울리고 있었다.명절 내내 그녀는 마치 거꾸로 뒤집힌 모래시계처럼, 마지막 모래알이 전부 떨어져 내리면 미련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풍겼다.이렇게 혼자 돌려보내는 게 영 마음에 걸렸는데.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녀의 음성 역시 전과 달라져 있었다.― 3월 2일에 말씀해 주세요.신하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단호한 가시가 돋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78. 장막을 걷어 내고 세상에 고하다

    한남동 저택을 벗어난 나는 곧바로 택시를 불러 타고는, 편안하게 뒷자리에 젖혀 앉아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인지 스르르 눈이 감기며 잠시 졸기까지 했다.어느덧 한낮을 넘어선 시간이라 그런지, 다행히 차가운 공기는 아침보다 한결 부드럽고 투명해진 기분이었다.갈비찜에 따뜻한 떡국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고, 회장님과의 체스판에서도 사실상 승기를 잡은 채 나왔으니 오늘 하루의 큰 위기는 무사히 넘긴 셈이었다.차준호는 아버지와의 체스를 이어가야 했기에 다행히 나를 따라 나오지 못했다. 이런 날만큼은 차진철 곁에서 효자 노릇이라도 좀 해주는 편이 오히려 그의 신상에 훨씬 이로울 것 같았다.웅-.휴대전화 진동이 울려 확인해 보니, 이아준이 보낸 명절 안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하늘아, 아, 난 명절이라는 게 진짜 없어졌으면 좋겠어. 이 집안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니까 숨이 막혀 죽겠다.]이아준은 이번 명절 역시 괴로운지 푸념 어린 문자를 보내왔다.나 역시 명절이란 그저 학교나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긴 휴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날이었다. 오히려 남들의 행복과 대비되어 내 마음이 한층 더 황량해지는 날이라, 차라리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내 코가 석 자인 처지였지만, 그래도 오랜 친구인 이아준에게만큼은 조그만 숨통이라도 틔워 주고 싶었다.[그래, 조금만 더 버텨. 그 사람들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인다며. 얼마 안 남았잖아?]나는 살포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이아준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아준이 머무는 저택에는 이왕춘 회장은 물론이고, 녀석을 피 말리게 만드는 나지란과 이아정 같은 이들이 바글거리고 있을 터였다.녀석이 짊어진 시름의 깊이를 감히 다 가늠할 수는 없어도, 친구로서 따뜻한 위로 한마디쯤은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77. 이기는 여자의 행보는?

    나와 차진철 회장이 체스판을 펼칠 즈음, 차준호는 검은 슬랙스에 단정한 화이트 니트로 갈아 입고 계단을 내려왔다.그러고는 내 옆자리에 무심한 태도로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그의 시선이 체스판에 닿는 순간, 입가에 걸린 미소는 오래된 유화 속 인물처럼 은은하게 빛났고, 이따금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한 귓전을 맴돌았다.어느덧 한 시간이 흘렀다.차진철 회장의 공격적인 수가 체스판을 조여 오기 시작하자, 내 손바닥에는 기분 나쁜 땀이 배어 나왔다.“신 비서, 체스는 상대방의 실수를 기다리는 게임이 아니야.”차진철 회장의 목소리에는 세월이 묵직하게 배어 있는 전략가의 여유가 서려 있었다. 그렇다고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한 뉘앙스도 아니었다.누군가 말했던가. 체스는 인생과 같다고.변화무쌍하게 흔들리는 체스판은 마치 요즘 내 위태로운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았다.하지만 100%의 승리도, 100%의 패배도 결국 끝까지 가봐야 아는 법. 내게도 분명 남은 길이 있으리라 믿었다.체스판 위에서 차진철의 퀸이 대각선으로 크게 이동하며 내 킹을 위협했고, 두 개의 룩은 직선으로 촘촘한 포위망을 구축했다.마치 그의 절대적인 권력이 내 삶을 바짝 옥죄어 오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내 비숍은 외곽에 고립되어 있었고, 나이트는 중앙에서 초조하게 숨을 죽인 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퀸을 이용해 아주 좋은 수를 찾으셨네요. 하지만 제게도 아직 가능성은 보이네요.”단순한 허세로 뱉은 말이 아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 돌파구가 존재한다는 직감이 나를 강렬하게 지배했다.경험이 풍부한 차진철 회장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나를 반드시 굴복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76. 모든 일에는 대가가 걸려 있지

    그때 고미주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여겼는지, 떡국을 뜨던 숟가락을 놓더니 차진아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가만히 뒤로 넘겨주었다.“엄마, 오빠가 비밀로 하는 게 뭐가 있긴 있나 보구나?”“그냥 때가 되면 다 밝혀질 거야.”차진아는 떡국을 삼키며 장난기 어린 애교를 담아 눈매를 휘어 접었다. 그러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겠어? 거짓말도 결국 다 밝혀진다고.”“입은 똑똑한 내 딸이라니까.”고미주는 그리 말하며 피식 웃고는 주방으로 향해 문어를 더 가져왔다. 국자로 차진아의 그릇에 문어를 듬뿍 얹어주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이 카페는 다음 달부터 내가 운영 잘할 테니까 나한테 맡겨. 엄마는 이제 새 출발해도 돼.”그 소리에 고미주는 냄비를 내려놓자마자 손바닥으로 찰싹! 차진아의 등짝을 후려쳤다.“새출발? 게다가 카페 운영을 지금 한다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대학이나 가!”“아우, 아파! 알았어, 알았다고!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외국인 손님들이 욕하겠네! 한국사람 이상하다고!”고미주는 외국인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며 어깨를 찔끔 움찔거렸다.그러고는 차진아를 향해 눈을 한번 흘기고는 따뜻한 국물까지 그릇에 가득 채워주었다.“나중에 엄마 나이 들면 이 카페 너 줄 테니까, 아프지나 마. 난 너만 행복하면 되니까.”고미주의 나지막한 한숨에는 자식을 향한 깊은 모정과 지나온 세월에 대한 탄식이 엉켜 있었다.“우리 엄마, 명절 아침부터 딸을 울릴 작정이야?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내가 나중에 성공해서 이 건물 3층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75. 차가운 침묵 너머 숨어 있는 진실

    대한민국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굴지의 대기업 CC그룹 회장이 머무는 한남동 저택.명절 특유의 분주함이 깨끗이 사라진 넓은 공간은 적막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예전에는 부산한 움직임으로 활기가 넘쳤지만, 이제는 벽면에 내걸린 장식마저 무기력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오늘이 설 연휴의 마지막 날임에도 불구하고, 고미주와 차진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그림자처럼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던 선우현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고, 조용히 움직이는 도우미들 사이에서 오직 차진철 회장만이 고독한 군주처럼 홀로 서 있었다.지난번 방문 때는 팽팽한 긴장감 탓에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그 압박감이 걷히자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고, 일도 쉬엄쉬엄 하십시오.”차준호의 목소리에는 지난 1월보다 훨씬 깊은 여유와 은은한 차분함이 배어 있었다.반면에 차진철 회장의 입술 끝에 걸린 미소는 찰나에 사라졌다. 역시 내게 벽을 세우는 것인가. 그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이 선 채로 나를 향했다.“그래, 알았다. 신 비서도 내게 인사하러 온 건가.”차진철의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차준호의 수행 비서일 뿐이었다. 조금 전 정원을 내려다봤기 때문인지, 그의 말투에는 묘한 경계심이 스며 있었다.“네, 회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약소하지만 명절 선물입니다.”그가 선물이 든 쇼핑백을 받아 들자, 손가락 끝으로 무게를 가늠하는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뭘 이런 걸 다. 이따 식사하고 풀어 보지. 요즘 준호 게임 출시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며?”차준호는 차진철 회장 대신 쇼핑백을 소파 위에 내려놓고는, 마치 내 마음을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6. 천하의 나쁜 남자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8. 내가 미쳤지.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7. 완벽한 타인의 숨결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5. 뒤틀린 소유욕: 폭풍 전야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