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이 나쁜 자식!’
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
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
“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
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나를 그저 몸만 즐기는 파트너로 취급했다는 그의 확신에 가슴이 난도질당했다.
“전 아무하고나 침대를 달구지는 않아요.”
바에서 생수를 들고 걸어온 차준호는 내게 슬그머니 병을 내밀었다. 마치 ‘냉수 먹고 속 차려라’ 하는 무언의 조롱 같아 속내가 뒤틀리다 못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화가 치밀어 올랐기에 신경질적으로 병을 뺏어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 섹시한 옷도 입고 와서 나에게 고백하려고 했어?”
숨이 탁 막히는 순간이었다. 일순 목에 사레가 들려 볼썽사납게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완벽하게 고백 성공 시나리오를 쓰고, 오늘부터 진정한 연인 1일이 될 거라 철석같이 기대했던 나였기에 타격이 컸다. 단칼에 차인다는 예상은 전혀 못 했기에 당황스러움에 눈앞이 아찔했다.
“놀랐어? 귀엽긴.”
진심으로 이 상황이 흥미롭고 즐거운지, 그의 입가에는 호선이 만개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로브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내게 다가왔다. 온몸 가득 베인 시원하고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머릿속을 하얗게 마비시켰다.
딸깍. 정적을 깨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차준호는 길고 곧은 손끝으로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꺼내더니, 얼어붙은 내 목에 차가운 금속성 이물감을 선사했다.
“······대표님?”
그가 내게 선사한 것은 바로 근사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였다.
*** 그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애초에 내게 주려고 미리 준비했다는 건데, 이 모순적인 남자는 지금 내게 왜 이러는 거지?
“메리 크리스마스.”
가까이서 내 목덜미를 바라보는 그의 짙은 시선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숙여 목에 걸린 물건의 정체를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체인 끝에 매달린 목걸이였다.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도는 펜던트는 구름, 별, 달 모양이 다이아몬드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어서, 마치 그동안 우리가 남몰래 나눈 비밀스러운 밤을 새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펜던트 속 달 모양이 마치 그가 깊숙이 숨겨둔 진심을 투영하는 거울 같아, 혼란스러운 상념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나랑 연애도 안 하고, 고백도 하지 말라고 원천 차단하면서 왜 목걸이는 이토록 다정하게 쥐여주는 걸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크리스마스잖아. 선물 주는 거지. 신하늘이 예뻐서.”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건 또 무슨 행동일까. 방금 난 매몰차게 차인 게 아니었나.
그는 통유리창 너머로 무수히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입가에 걸린 알 수 없는 미소를 끝내 거두지 않았다.
그때 Rrrr Rrrr.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자 그는 내게서 벗어나 통화에 집중했다.
“허 실장, 뭐라고? 일치한다고?”
전화를 받는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창에 비친 그의 냉정한 실루엣만 응시했다.
몇 마디 주고받던 통화를 황급히 끊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급한 일이 생겼어. 다음 주 스케줄 비워.”
차준호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묻어났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얼른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당연히 오늘 같은 날, 급한 일이 아니더라도 더 붙어 있을 명분이 없었다.
“데려다줄게. 허기찬 불렀어.”
“아시잖아요. 여기서 세종동은 가까워요.”이렇게 나의 크리스마스이브 고백은 대실패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룸을 나가기 위해 가방을 들자 평소와 다른 무게라 잠시 몸을 움찔했다.
그에게 선물로 줄 [당신 덕분에 매일 행복했습니다]라고 적힌 신간 도서가 지금의 나를 조롱하듯 가방 속에서 존재감을 내비쳤다.
“대표님. 오늘 이곳에서 나눴던 대화는··· 없었던 일로 생각해 주세요.”
난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죽인 채 억지로 웃어 보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래. 오늘 일은 깨끗이 잊어 줄게.”
차준호의 목소리 끝에는 묘한 여운이 맴돌았다.
*** 역시 내 인생은 이런 식이지. 다시 블루 크리스마스로 돌아왔다.도국과 이아준 두 친구 녀석 덕분에 남자를 모르고 살았던 내 모태솔로 인생이었건만.
갑자기 3년 전, 운명처럼 등장한 차준호라는 사람과의 3D로 펼쳐진 혼자만의 핑크빛 로맨스는 착각으로 끝이 났다.
고개 위로 눈발이 하늘에 아름답게 수를 놓았지만, 발밑은 질척하고 칙칙한 풍경뿐이었다.
따뜻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환상이었으나 현실은 이리 춥고 진창인 것을.
핑크 스틸레토 힐에 튀어 오른 흙탕물이 발목을 휘감으며 신경질을 자극했고, 입안의 온기는 하얗게 부서져 얼굴마저 얼게 했다.
니트 원피스가 보기엔 따뜻해 보여도 보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코트 깃을 바짝 세웠다. 한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열이 오른 머리를 식혔다.
주말도 없이 야근을 밥 먹듯 한 3년. 그래도 그와 함께여서 즐거웠다. 비서는 회사의 이미지라며 좋은 옷도 선물 받고 국내외 대단한 출장길도 함께여서 행복했는데.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또래보다 험난한 길을 걸어온 나. 물려받은 보육원 땅을 지키고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건 오직 입사 덕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C호텔을 바라보자, 유리창의 찬란한 불빛은 내 것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것 같아 아득했다.
차준호와 함께할 따뜻한 봄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엉망인 땅바닥처럼 추운 겨울이나 신경 써야 했다. 잊어 달라 했지만, 이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연봉 협상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만둬야 하나 마음이 뒤숭숭해 한숨만 터져 나왔다.
그에게 받은 목걸이 펜던트만 만지작거리며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굴욕을 지워버리려 해도 목덜미에 닿은 목걸이의 서늘한 감각이 굴욕적인 기억을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도록 차준호는 연락 두절이 되었다. 그의 소식은 새해 아침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 1월 1일.차준호가 사라진 지 일주일째, 그의 이름이 갑자기 속보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재벌가의 황태자 차준호와 독보적인 한류 스타 강소희. 두 사람의 세기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세기의 스캔들? 굴지의 CC그룹 황태자 차준호와 글로벌 톱 여배우 강소희 사고!]
[현재 차준호와 강소희는 대한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
·가운데 점을 수정하였습니다. 먼저 읽으신 분들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최대한 하루 1~2회차는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차진철 회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내가 원하는 건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네. 확실한 정답이지.”어떤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일까. 지금의 판도에서는 그 수가 최선일 텐데.그때, 옆에 있던 차준호가 내게 훈수를 두듯 차분하게 설명을 보태었다.“신하늘, 이미 끝난 게임이야. 헛된 희망을 내비치는 건 오히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지.”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난 단 1%의 반전 가능성을 믿었을 뿐인데.현실의 법칙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그 순간, 벽면의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김희주 의원의 모습이 비쳤고 선거 관련 뉴스가 이어졌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뉴스 화면으로 시선이 쏠렸다.다행히 나를 둘러싼 스캔들 파문은 언급되지 않았다.하지만 김희주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새장 안의 새처럼 미친 듯이 퍼덕였다. 그럼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모니터를 꼿꼿이 응시했다.나 역시 피가 도는 인간이었기에, 김희주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했던 그날 이후로 어떻게 해야 그 여자의 뒤통수를 화끈하게 후려쳐 줄 수 있을지만을 남몰래 갈구해 왔다.계란으로 바위를 쳐봐야 깨어지는 것은 계란뿐이라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거늘, 어째서 인간은 거대한 벽 앞에서 한낱 희망 따위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하지만 난 하나 나는 정답은 아닐지라도, 가능성은 믿는 여자였다.나는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차진철 회장을 향해 대답을 건넸다.“회장님, 판을 흔들 수는 있습니다, 상대의 멘탈을 건드려 치명적인 허점을 노린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커지니까요.”그 말을 들은 차준호는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려 보이며 차진철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차진철은
예기치 못한 차진철 회장의 등장에 숨이 턱 막혀왔다.어쩌면 차준호는 이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아침부터 보란 듯이 점심을 함께하자 청했던 것은 아닐까.결국 두 거물의 움직임과 이 점심 약속의 중심에 내가 놓여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었다.그렇다고 감히 도망칠 이유는 없었기에,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하면 될 일이었다.허기찬 비서관이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을 흘깃 담은 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단단한 발걸음으로 대표실 내부로 들어섰다.***대표실 중앙 소파에 마주 앉은 차진철과 차준호 사이에는 고급스러운 체스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벽면에 걸린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를 향한 구설수를 일부러 보여주며 망신이라도 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나는 묵직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며 차진철 회장에게 다가갔다.“안녕하십니까, 회장님.”비록 오늘 차림새는 캡모자에 항공 점퍼를 걸친 캐주얼한 전투복이었으나, 서 있는 자세만큼은 단정한 정장을 입었을 때처럼 허리를 세웠다.“신 비서. 앉게.”통속적인 드라마처럼 아들에게서 당장 떨어지라며 고함을 치거나 뺨을 때리는 상투적인 손찌검은 없었다.그건 차라리 고미주의 역할이겠지. 차진철은 의외로 담담하고 우아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팽팽한 긴장감에 두 주먹을 꽉 쥔 채, 그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 소파 끝자리에 정갈하게 앉았다.달리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체스판으로 눈길을 돌렸다.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차준호의 격렬하고 공격적인 수가 점차 승리를 예고하고 있었다.“그래서, 준호 너 요즘 기억은 좀 어찌 된 거냐?”차진철이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슬쩍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김희주 의원이 쏘아 올린 잔인한 화살이었다.설령 최기범 팀장이 어머니의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들, 그가 나를 막아주고 보호해 줄 생각이었다면 진작 행동으로 보였어야 했다.지금 그와 마주 앉아봐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구구절절 비겁한 변명으로만 들릴 게 뻔했다.물론 그가 직속 상관인 만큼 업무 이야기만 건조하게 주고받을 수도 있겠지만, 급한 일이라면 메신저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나 역시 한 명의 인간이기에, 제 가슴을 파헤친 사람과 나란히 앉아 편안하게 담소를 나눌 여유 따위는 없었다.[게임 오류 수정 작업부터 우선 마무리해 두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급하신 업무는 사내 메신저로 주십시오.]직속 상관에게 감히 먼저 거절의 툇자를 놓다니. 하지만 이 바쁜 와중에 그를 찾아가 사적인 감정 따위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오늘만큼은 최기범의 얼굴을 마주하며 두유를 얻어 마실 기분이 전혀 아니었으니까.모니터 화면에 오늘 처리해야 할 과제들을 체크하고 프로그램을 띄운 뒤, 얼마 남지 않은 휴대전화 배터리를 충전기에 꽂았다.그러고 보니 주말 내내 차준호와 L호텔에서 함께 지내느라 핸드폰을 들여다볼 겨를조차 없었던 터였다. 그제야 쌓여 있던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아니나 다를까, 액정 위에는 도국과 이아준이 남긴 염려 섞인 문자들이 가득했다.[하늘아, 몸은 좀 어때? 사람 붙여줄까? 집으로는 절대 가지 마.][언론 완전 미쳤네. 막아보려고 손쓰는데도 소문이 너무 퍼졌어.][차준호 대표님 우리 호텔에 오셨다면서? 대단하네.][오늘 출근은 절대 하지 마. 기자들이 붙들어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역시 녀석들이었다. 특히 내가 또다시 언론의 날 선 칼날에 상처 입
기자들은 마치 신하늘이라는 먹잇감을 뜯어발기라는 지시라도 받은 듯, 사옥 로비를 지나치는 직원들마다 붙잡고 눈을 번뜩이며 추궁 섞인 질문을 퍼부어댔다.대표 차준호와 신하늘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한 것인지, 비서로서의 업무 자질에는 문제가 없었는지.신하늘을 둘러싼 무성한 추측성 질문과 최기범, 이아준, 심지어 슈퍼스타 도국과의 관계에 대한 은밀한 제보를 요구하며 기자들은 직원들의 손에 명함을 수북하게 쥐여주었다.“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 신 과장님이 설마 진짜 악녀겠어? 언론이 너무 자극적으로 소설을 쓰는 거 같아.”나정아가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한은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하지만 기사가 전부 사실이라면요? 우리 대표님은 물론이고 슈퍼스타 도국에, 최기범 팀장님, 심지어 L-DS 이아준 사장님까지. 그 대단한 남자들이랑 전부 은밀하게 얽혀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나정아가 입술을 깨물자 한은숙은 나직하게 덧붙였다.“근데 진짜 대표님이랑 연인사이였다면, 예전에 강소희 사건 터졌을 때 신 과장님이 오히려 피해자 아니야?”다른 부서는 몰라도, 게임개발실 직원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신하늘과 함께 일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녀가 누구보다 진심으로 뼈를 갈아 넣으며 성실하게 임했다는 사실을.특히 무엇보다 차준호라는 남자에게 철저하게 냉정한 선을 긋던 모습 역시 그들이 직접 목격한 진실이었다.“보통 여자라면 사귀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대형 스캔들이 났는데 눈 하나 안 깜빡이고 옆을 지키기는 힘들죠. 그때 대표님이 기억을 잃어버리셨을 때도 그렇고.”“그런데, 딱 그 표정이었어. 차갑다 못해 쎄- 한 느낌.”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사이, 뒤에서 김강무가 나타나 파티션을 위협적으로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가슴팍을 실크 이불로 살짝 가린 채, 협탁 위 생수를 집어 들어 목을 축였다.“가만히 숨어 있어도 어차피 바늘방석인걸요. 당연히 출근해야죠.”“착각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회사는 신하늘 하나 없어도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가.”물론 내가 게임 개발실에서 뼈를 갈아 넣는다고 한들 전체적인 대세에 거창한 영향을 주진 못할 터였다.하지만 이까짓 스캔들 따위엔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다는 걸, 몸소 출근해서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직장생활 3년 동안 뼈저리게 깨달은 생존 법칙이 하나 있었다.때로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진실을 외쳐본들, 그들이 귀를 기울여 주는 데에는 철저히 '타이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돈을 받았으니 제값을 해야죠. 계약서대로라면 내 몫은 다해야 하지 않겠어요? 제 공백 때문에 남한테 피해 주는 건 질색이라서요.”“기특하네.”늘 차가운 거리를 두면서도 지독하게 내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그의 전매특허였건만, 어느 순간부터 저 오만하고 얄미운 차준호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돌고 있었다.스스로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지 않은 채 항상 타인의 상황을 관찰하는 방관자 역할만 하던 그가, 나 하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거리를 좁혀 주다니 고마운 일이었다.“대표님 덕분에 아주 달콤한 휴가를 보낸 기분이네요.”밉고도 미웠던 남자가 옆에 밀착해 있는데도, 주말 내내 단잠을 이룰 수 있었던 이상한 나날이었다.시간이 멈춘 듯 까마득한 101층 상공에 매달려, 이 지옥 같은 도심에서 견뎌내게 해준 그에게 인사는 건넬 필요가 있었다.“나도 즐거웠어. 내 호텔 비밀번호 안 잊어버렸지? 언제든지 와.&r
깊은 밤.그 시각, CH-컴퍼니 테헤란로 본사 10층 휴게실.걸그룹 ‘에스텔라’는 신곡 발매를 앞두고 땀에 젖은 안무 연습을 이어가다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하나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경멸과 은밀한 호기심이 뒤섞인 열띤 목소리로 비난을 쏟아냈다.“어머, 신하늘 그 여자.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악녀네. 증거도 쫙 깔렸잖아?”하나의 말에 두나는 신하늘이 명품을 두른 채 차준호와 공식 석상에 등장했던 기사 사진들을 훑으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그러게 말이에요, 언니. 김희주 의원이 터트린 게 마냥 억지는 아닌가 봐. 새벽에 대표님이랑 그렇게 은밀하게 가까이 지내면서도 뒤로는 참 여러 남자를 만났네요.”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나까지 입을 삐죽이며 한마디를 거들었다.“처음엔 신 비서님 동정했는데, 알고 보니 최악이네요. 나 같아도 내 아들이 이 남자 저 남자 어장 관리하는 여자랑 친하게 지내면 질색할 것 같은데.”동료들의 험담이 이어지는 내내, 세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제 코가 석 자였으니까.도국과 한창 달콤하게 관계를 이어가던 차에 이런 대형 스캔들이 터져 버린 것이다.이번에 만나면 함께 밤을 보내기로 은밀하게 약속까지 했던 터였다. 아무리 비즈니스 계약 연애라 해도 아직 50일이라는 기한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이대로 유야무야 끝나는 건 아닐까, 불안에 애가 탔다.“세나 언니 속 터지겠다. 도국 오빠도 이름만 안 나왔지 사실상 거론된 거나 마찬가지잖아.”나나의 말에 갑자기 어깨가 찌릿하게 움찔거렸다.자신이 마음을 품은 남자가 다른 여자의 스캔들 한가운데에 얽히는 것을 보고 기분 좋을 여자가 세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