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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밀의 밤, 잔인한 선물

مؤلف: silver구슬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5-17 14:11:26

‘이 나쁜 자식!’

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

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

“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

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나를 그저 몸만 즐기는 파트너로 취급했다는 그의 확신에 가슴이 난도질당했다.

“전 아무하고나 침대를 달구지는 않아요.”

바에서 생수를 들고 걸어온 차준호는 내게 슬그머니 병을 내밀었다. 마치 ‘냉수 먹고 속 차려라’ 하는 무언의 조롱 같아 속내가 뒤틀리다 못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화가 치밀어 올랐기에 신경질적으로 병을 뺏어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 섹시한 옷도 입고 와서 나에게 고백하려고 했어?”

숨이 탁 막히는 순간이었다. 일순 목에 사레가 들려 볼썽사납게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완벽하게 고백 성공 시나리오를 쓰고, 오늘부터 진정한 연인 1일이 될 거라 철석같이 기대했던 나였기에 타격이 컸다. 단칼에 차인다는 예상은 전혀 못 했기에 당황스러움에 눈앞이 아찔했다.

“놀랐어? 귀엽긴.”

진심으로 이 상황이 흥미롭고 즐거운지, 그의 입가에는 호선이 만개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로브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내게 다가왔다. 온몸 가득 베인 시원하고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머릿속을 하얗게 마비시켰다.

딸깍. 정적을 깨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차준호는 길고 곧은 손끝으로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꺼내더니, 얼어붙은 내 목에 차가운 금속성 이물감을 선사했다.

“······대표님?”

그가 내게 선사한 것은 바로 근사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였다.

***

그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애초에 내게 주려고 미리 준비했다는 건데, 이 모순적인 남자는 지금 내게 왜 이러는 거지?

“메리 크리스마스.”

가까이서 내 목덜미를 바라보는 그의 짙은 시선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숙여 목에 걸린 물건의 정체를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체인 끝에 매달린 목걸이였다.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도는 펜던트는 구름, 별, 달 모양이 다이아몬드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어서, 마치 그동안 우리가 남몰래 나눈 비밀스러운 밤을 새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펜던트 속 달 모양이 마치 그가 깊숙이 숨겨둔 진심을 투영하는 거울 같아, 혼란스러운 상념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나랑 연애도 안 하고, 고백도 하지 말라고 원천 차단하면서 왜 목걸이는 이토록 다정하게 쥐여주는 걸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크리스마스잖아. 선물 주는 거지. 신하늘이 예뻐서.”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건 또 무슨 행동일까. 방금 난 매몰차게 차인 게 아니었나. 

그는 통유리창 너머로 무수히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입가에 걸린 알 수 없는 미소를 끝내 거두지 않았다.

그때 Rrrr Rrrr.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자 그는 내게서 벗어나 통화에 집중했다. 

“허 실장, 뭐라고? 일치한다고?” 

전화를 받는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창에 비친 그의 냉정한 실루엣만 응시했다.

몇 마디 주고받던 통화를 황급히 끊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급한 일이 생겼어. 다음 주 스케줄 비워.”

차준호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묻어났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얼른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당연히 오늘 같은 날, 급한 일이 아니더라도 더 붙어 있을 명분이 없었다.

“데려다줄게. 허기찬 불렀어.”

“아시잖아요. 여기서 세종동은 가까워요.”

이렇게 나의 크리스마스이브 고백은 대실패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룸을 나가기 위해 가방을 들자 평소와 다른 무게라 잠시 몸을 움찔했다.

그에게 선물로 줄 [당신 덕분에 매일 행복했습니다]라고 적힌 신간 도서가 지금의 나를 조롱하듯 가방 속에서 존재감을 내비쳤다.

“대표님. 오늘 이곳에서 나눴던 대화는··· 없었던 일로 생각해 주세요.”

난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죽인 채 억지로 웃어 보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래. 오늘 일은 깨끗이 잊어 줄게.”

차준호의 목소리 끝에는 묘한 여운이 맴돌았다.

***

역시 내 인생은 이런 식이지. 다시 블루 크리스마스로 돌아왔다.

도국과 이아준 두 친구 녀석 덕분에 남자를 모르고 살았던 내 모태솔로 인생이었건만.

갑자기 3년 전, 운명처럼 등장한 차준호라는 사람과의 3D로 펼쳐진 혼자만의 핑크빛 로맨스는 착각으로 끝이 났다. 

고개 위로 눈발이 하늘에 아름답게 수를 놓았지만, 발밑은 질척하고 칙칙한 풍경뿐이었다. 

따뜻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환상이었으나 현실은 이리 춥고 진창인 것을.

핑크 스틸레토 힐에 튀어 오른 흙탕물이 발목을 휘감으며 신경질을 자극했고, 입안의 온기는 하얗게 부서져 얼굴마저 얼게 했다. 

니트 원피스가 보기엔 따뜻해 보여도 보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코트 깃을 바짝 세웠다. 한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열이 오른 머리를 식혔다.

주말도 없이 야근을 밥 먹듯 한 3년. 그래도 그와 함께여서 즐거웠다. 비서는 회사의 이미지라며 좋은 옷도 선물 받고 국내외 대단한 출장길도 함께여서 행복했는데.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또래보다 험난한 길을 걸어온 나. 물려받은 보육원 땅을 지키고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건 오직 입사 덕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C호텔을 바라보자, 유리창의 찬란한 불빛은 내 것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것 같아 아득했다. 

차준호와 함께할 따뜻한 봄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엉망인 땅바닥처럼 추운 겨울이나 신경 써야 했다. 잊어 달라 했지만, 이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연봉 협상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만둬야 하나 마음이 뒤숭숭해 한숨만 터져 나왔다.

그에게 받은 목걸이 펜던트만 만지작거리며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굴욕을 지워버리려 해도 목덜미에 닿은 목걸이의 서늘한 감각이 굴욕적인 기억을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도록 차준호는 연락 두절이 되었다. 그의 소식은 새해 아침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

1월 1일.

차준호가 사라진 지 일주일째, 그의 이름이 갑자기 속보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재벌가의 황태자 차준호와 독보적인 한류 스타 강소희. 두 사람의 세기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세기의 스캔들? 굴지의 CC그룹 황태자 차준호와 글로벌 톱 여배우 강소희 사고!]

[현재 차준호와 강소희는 대한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

silver구슬

·가운데 점을 수정하였습니다. 먼저 읽으신 분들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최대한 하루 1~2회차는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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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63. 깊은 밤, 애달픈 아이러니

    택시가 강남역 한복판을 지나가자, 도로변 곳곳에 세나가 속한 걸그룹 ‘에스텔라’의 대형 광고판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걸그룹 센터가 남자 톱스타의 프라이빗 숙소를 찾는 일은 막대한 스캔들 리스크를 동반했지만, 지금의 세나는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큼 절박했다.‘오늘 난 오빠의 여자가 될 예정이야.’드디어 도국이 자신과 밤을 함께 보내주겠다는 뜻 같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몽글몽글한 설렘이 차올랐다.도국에게 전달할 선물과 함께, 백팩 안에는 속옷과 화장품, 그리고 다음 날 갈아입을 여분의 티셔츠까지 세심하게 챙겨둔 상태였다.건물 외벽과 버스 정류장 곳곳에서 다시금 도국의 근사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하필 대한민국을 뒤흔든 대형 스캔들이 터진 데다, 국민적 악녀로 낙인찍힌 신하늘과 엮여버렸으니.오늘 이 만남을 계기로, 어쩌면 자신과 도국 사이의 스캔들이 다시 불거지면서 신하늘의 사건이 자연스럽게 묻히고 상쇄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섰다.어차피 신 비서는 차준호 대표와 연인 관계일 테고, 도국은 그저 신 비서를 혼자 짝사랑하는 것뿐일 텐데.참으로 애달프고도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천하의 차준호는 이미 신하늘에게 깊이 빠져있는 듯했다. 멤버들 사이에 감도는 소문에 따르면, 최근 차준호가 신 비서에게 더욱 적극적이고 거침없이 대시하고 있다고 했다.하긴, 차준호 정도의 거물이 단지 누군가 자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쫓아다닌다고 해서 선뜻 마음을 받아줄 위인이던가.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차갑고 철두철미한 이미지의 남자였으니 말이다.사실 세나는 차준호라는 사람이 몹시 무서웠다.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냉철한 데다, 범접할 수 없는 중압감을 풍기는 존재였으니까.그때 택시 라디오에서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62. 비밀, 이용 당하는 사이잖아

    차준호라는 남자의 진심은 차치하고라도, 현재 그는 벼랑에 매달린 나를 끌어 올려줄 가장 튼튼하고 견고한 밧줄임이 분명했다.김희주가 이렇게 도를 넘어 저열하게 나오는 이상, 나 역시 차준호라는 가장 확실한 카드를 쥐고 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어쨌든 지금 당장은 그를 밀어내기보다는 적당히 달래야 할 때였다.[대표님, 대신 며칠 뒤에는 신세 좀 질게요.]조만간 그의 호텔로 들어가겠다는 뜻이었다.차진철 회장에게 서늘한 경고를 받긴 했으나, 내가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쓴 것도 아니니 당분간은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다.[설마 그 껄끄러운 사람들하고 계속 이렇게 지낼 건가?]그래도 내가 직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에 마음을 써주는 걸까.[저야 어차피 이미지 바닥을 찍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일만 하면 되니까 의외로 견딜 만해요.][내가 품었던 여자가 고생하는 건 싫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간이 침대 보내 줄 테니까 참고해.]그의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말투에서 예전과 다른 다정함이 묻어난 동시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나는 대체 어떤 부분에서 이토록 놀란 걸까.거침없는 표현? 아니면 다정한 배려?어느 것 하나 예상치 못한 의외의 연속이었기에, 나는 복잡한 마음을 눌러 담으며 다시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그리고 한 시간이 더 흘렀다.차준호의 사내 메신저 상태 창이 꺼져 있는 것을 보니, 그도 이제는 퇴근한 모양이었다.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차준호에게 늘 투덜대면서도, 나를 챙겨주는 그의 다정함이 내심 싫지 않아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그렇게 묵묵히 업무를 이어가던 그때.갑자기 개발실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정신 바짝 차리자며 마음을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61. 최상의 포식자가 되어서라도

    이런, 망할. 김희주는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나를 완전히 매장하기 위해 강소희에게 보낸 이 문자는 내게 강력한 반격의 무기이자, 그녀의 추악한 범죄를 입증할 대단한 증거가 되어 주었다.나는 강소희의 휴대전화 액정에 뜬 문자를 내 휴대전화 카메라로 신속하게 찍어 두었다.“강소희 씨야말로 뭐 약점이라도 잡혔어요?”그녀로서도 이 문자가 세상에 공개되면 리스크가 상당할 터였다. 내 질문에 강소희는 눈을 얄밉게 흘기며 다시 병 두유를 홀짝였다.“김희주는 내가 세종동 서쪽에서 살던 어린 시절을 언론에 까발린다고 그동안 협박을 일삼았거든. 자기 아들이랑은 절대 놀지 말라고 윽박지르면서.”역시 김희주라면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누군가의 불우하고 가난했던 과거를 약점 삼아 무려 20년 동안이나 부려 먹다니.나는 이를 악물고 찍어둔 문자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강소희 씨,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세종동 출신이 뭐 어때서요? 연기 잘하고, 예쁘잖아요. 연예인이 그거면 됐지.”그러자 강소희는 내 뜻밖의 칭찬에 머쓱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큼큼 헛기침을 뱉어냈다.시선을 피하며 눈동자를 천장으로 향하더니, 아랫입술을 떨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성형한 것도 그렇고, 금수저에 고급스러운 이미지도 전부 거짓된 거니까······. 밝혀지면 이미지 추락은 한순간이라······. 토끼 비서님도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그 여자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상처만 입을 거야.”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60. 빌런이 내민 손을 잡을까?

    강소희와의 예기치 못한 마주함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가르는 서늘한 벼락과도 같았다.“강소희 씨, 참 뜬금없으시네요.”완벽하게 공들인 풀 메이크업에, 당장이라도 화보를 찍어도 될 만큼 화려한 초록빛 시폰 원피스를 입고 어깨에는 숄까지 멋스럽게 걸친 모습이었다.그녀는 주말 내내 포털 사이트를 도배한 내 몰락을 지켜보며 남몰래 은밀한 희열을 느꼈을 터였다.분명 차준호 대표를 보러 사옥에 들렀다가, 무너져 가는 나를 비웃고 놀리려 찾아왔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비서님하고 단둘이 나눌 볼일이 좀 있어서요.”“저는 지금 아주 바쁩니다.”나는 이제 대표실 비서가 아니었기에, 강소희의 투정을 친절하게 받아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온 회사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매장당하기 직전인 마당에, 위선적인 가면 따위를 쓸 여유조차 없었으니 이판사판이었다.“바쁜 것으로 치면 내가 비서님보다 훨씬 더 바쁠 텐데요?”그렇게 바쁜 여자가 도대체 왜 남의 일터에 와서 기웃거리느냐는 반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 이제 비서 아니라는 냉정한 말이 입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시간 절약을 위해 결론만 간단히 말하세요.”“준호 보러 온 게 아니라, 비서님한테 무기를 주려고 왔답니다.”설마 김희주랑 싸울 때 필요한 그 무엇이란 말인 걸까.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미소는 조각처럼 완벽했지만, 그 눈빛 속에는 스포트라이트 뒤편의 지독한 피로함이 짙게 스며 있었다.강소희에게 받을 무기 따위는 사실 별 관심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 힐끔대는 직원들 시선은 신경 쓰였다.“사실 그 무기도 별 관심 없지만, 일단 카페테리아로 가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59. 평온을 깨는 피곤함

    차진철 회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내가 원하는 건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네. 확실한 정답이지.”어떤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일까. 지금의 판도에서는 그 수가 최선일 텐데.그때, 옆에 있던 차준호가 내게 훈수를 두듯 차분하게 설명을 보태었다.“신하늘, 이미 끝난 게임이야. 헛된 희망을 내비치는 건 오히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지.”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난 단 1%의 반전 가능성을 믿었을 뿐인데.현실의 법칙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그 순간, 벽면의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김희주 의원의 모습이 비쳤고 선거 관련 뉴스가 이어졌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뉴스 화면으로 시선이 쏠렸다.다행히 나를 둘러싼 스캔들 파문은 언급되지 않았다.하지만 김희주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새장 안의 새처럼 미친 듯이 퍼덕였다. 그럼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모니터를 꼿꼿이 응시했다.나 역시 피가 도는 인간이었기에, 김희주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했던 그날 이후로 어떻게 해야 그 여자의 뒤통수를 화끈하게 후려쳐 줄 수 있을지만을 남몰래 갈구해 왔다.계란으로 바위를 쳐봐야 깨어지는 것은 계란뿐이라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거늘, 어째서 인간은 거대한 벽 앞에서 한낱 희망 따위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하지만 난 하나 나는 정답은 아닐지라도, 가능성은 믿는 여자였다.나는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차진철 회장을 향해 대답을 건넸다.“회장님, 판을 흔들 수는 있습니다, 상대의 멘탈을 건드려 치명적인 허점을 노린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커지니까요.”그 말을 들은 차준호는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려 보이며 차진철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차진철은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58. 쓰고 버리는 도구 따윈 질색이야

    예기치 못한 차진철 회장의 등장에 숨이 턱 막혀왔다.어쩌면 차준호는 이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아침부터 보란 듯이 점심을 함께하자 청했던 것은 아닐까.결국 두 거물의 움직임과 이 점심 약속의 중심에 내가 놓여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었다.그렇다고 감히 도망칠 이유는 없었기에,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하면 될 일이었다.허기찬 비서관이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을 흘깃 담은 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단단한 발걸음으로 대표실 내부로 들어섰다.***대표실 중앙 소파에 마주 앉은 차진철과 차준호 사이에는 고급스러운 체스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벽면에 걸린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를 향한 구설수를 일부러 보여주며 망신이라도 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나는 묵직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며 차진철 회장에게 다가갔다.“안녕하십니까, 회장님.”비록 오늘 차림새는 캡모자에 항공 점퍼를 걸친 캐주얼한 전투복이었으나, 서 있는 자세만큼은 단정한 정장을 입었을 때처럼 허리를 세웠다.“신 비서. 앉게.”통속적인 드라마처럼 아들에게서 당장 떨어지라며 고함을 치거나 뺨을 때리는 상투적인 손찌검은 없었다.그건 차라리 고미주의 역할이겠지. 차진철은 의외로 담담하고 우아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팽팽한 긴장감에 두 주먹을 꽉 쥔 채, 그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 소파 끝자리에 정갈하게 앉았다.달리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체스판으로 눈길을 돌렸다.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차준호의 격렬하고 공격적인 수가 점차 승리를 예고하고 있었다.“그래서, 준호 너 요즘 기억은 좀 어찌 된 거냐?”차진철이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슬쩍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8. 내가 미쳤지.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7. 완벽한 타인의 숨결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6. 천하의 나쁜 남자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5. 뒤틀린 소유욕: 폭풍 전야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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