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이 나쁜 자식!’
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
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
“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
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나를 그저 몸만 즐기는 파트너로 취급했다는 그의 확신에 가슴이 난도질당했다.
“전 아무하고나 침대를 달구지는 않아요.”
바에서 생수를 들고 걸어온 차준호는 내게 슬그머니 병을 내밀었다. 마치 ‘냉수 먹고 속 차려라’ 하는 무언의 조롱 같아 속내가 뒤틀리다 못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화가 치밀어 올랐기에 신경질적으로 병을 뺏어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 섹시한 옷도 입고 와서 나에게 고백하려고 했어?”
숨이 탁 막히는 순간이었다. 일순 목에 사레가 들려 볼썽사납게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완벽하게 고백 성공 시나리오를 쓰고, 오늘부터 진정한 연인 1일이 될 거라 철석같이 기대했던 나였기에 타격이 컸다. 단칼에 차인다는 예상은 전혀 못 했기에 당황스러움에 눈앞이 아찔했다.
“놀랐어? 귀엽긴.”
진심으로 이 상황이 흥미롭고 즐거운지, 그의 입가에는 호선이 만개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로브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내게 다가왔다. 온몸 가득 베인 시원하고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머릿속을 하얗게 마비시켰다.
딸깍. 정적을 깨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차준호는 길고 곧은 손끝으로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꺼내더니, 얼어붙은 내 목에 차가운 금속성 이물감을 선사했다.
“······대표님?”
그가 내게 선사한 것은 바로 근사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였다.
*** 그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애초에 내게 주려고 미리 준비했다는 건데, 이 모순적인 남자는 지금 내게 왜 이러는 거지?
“메리 크리스마스.”
가까이서 내 목덜미를 바라보는 그의 짙은 시선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숙여 목에 걸린 물건의 정체를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체인 끝에 매달린 목걸이였다.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도는 펜던트는 구름, 별, 달 모양이 다이아몬드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어서, 마치 그동안 우리가 남몰래 나눈 비밀스러운 밤을 새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펜던트 속 달 모양이 마치 그가 깊숙이 숨겨둔 진심을 투영하는 거울 같아, 혼란스러운 상념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나랑 연애도 안 하고, 고백도 하지 말라고 원천 차단하면서 왜 목걸이는 이토록 다정하게 쥐여주는 걸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크리스마스잖아. 선물 주는 거지. 신하늘이 예뻐서.”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건 또 무슨 행동일까. 방금 난 매몰차게 차인 게 아니었나.
그는 통유리창 너머로 무수히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입가에 걸린 알 수 없는 미소를 끝내 거두지 않았다.
그때 Rrrr Rrrr.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자 그는 내게서 벗어나 통화에 집중했다.
“허 실장, 뭐라고? 일치한다고?”
전화를 받는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창에 비친 그의 냉정한 실루엣만 응시했다.
몇 마디 주고받던 통화를 황급히 끊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급한 일이 생겼어. 다음 주 스케줄 비워.”
차준호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묻어났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얼른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당연히 오늘 같은 날, 급한 일이 아니더라도 더 붙어 있을 명분이 없었다.
“데려다줄게. 허기찬 불렀어.”
“아시잖아요. 여기서 세종동은 가까워요.”이렇게 나의 크리스마스이브 고백은 대실패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룸을 나가기 위해 가방을 들자 평소와 다른 무게라 잠시 몸을 움찔했다.
그에게 선물로 줄 [당신 덕분에 매일 행복했습니다]라고 적힌 신간 도서가 지금의 나를 조롱하듯 가방 속에서 존재감을 내비쳤다.
“대표님. 오늘 이곳에서 나눴던 대화는··· 없었던 일로 생각해 주세요.”
난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죽인 채 억지로 웃어 보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래. 오늘 일은 깨끗이 잊어 줄게.”
차준호의 목소리 끝에는 묘한 여운이 맴돌았다.
*** 역시 내 인생은 이런 식이지. 다시 블루 크리스마스로 돌아왔다.도국과 이아준 두 친구 녀석 덕분에 남자를 모르고 살았던 내 모태솔로 인생이었건만.
갑자기 3년 전, 운명처럼 등장한 차준호라는 사람과의 3D로 펼쳐진 혼자만의 핑크빛 로맨스는 착각으로 끝이 났다.
고개 위로 눈발이 하늘에 아름답게 수를 놓았지만, 발밑은 질척하고 칙칙한 풍경뿐이었다.
따뜻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환상이었으나 현실은 이리 춥고 진창인 것을.
핑크 스틸레토 힐에 튀어 오른 흙탕물이 발목을 휘감으며 신경질을 자극했고, 입안의 온기는 하얗게 부서져 얼굴마저 얼게 했다.
니트 원피스가 보기엔 따뜻해 보여도 보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코트 깃을 바짝 세웠다. 한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열이 오른 머리를 식혔다.
주말도 없이 야근을 밥 먹듯 한 3년. 그래도 그와 함께여서 즐거웠다. 비서는 회사의 이미지라며 좋은 옷도 선물 받고 국내외 대단한 출장길도 함께여서 행복했는데.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또래보다 험난한 길을 걸어온 나. 물려받은 보육원 땅을 지키고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건 오직 입사 덕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C호텔을 바라보자, 유리창의 찬란한 불빛은 내 것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것 같아 아득했다.
차준호와 함께할 따뜻한 봄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엉망인 땅바닥처럼 추운 겨울이나 신경 써야 했다. 잊어 달라 했지만, 이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연봉 협상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만둬야 하나 마음이 뒤숭숭해 한숨만 터져 나왔다.
그에게 받은 목걸이 펜던트만 만지작거리며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굴욕을 지워버리려 해도 목덜미에 닿은 목걸이의 서늘한 감각이 굴욕적인 기억을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도록 차준호는 연락 두절이 되었다. 그의 소식은 새해 아침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 1월 1일.차준호가 사라진 지 일주일째, 그의 이름이 갑자기 속보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재벌가의 황태자 차준호와 독보적인 한류 스타 강소희. 두 사람의 세기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세기의 스캔들? 굴지의 CC그룹 황태자 차준호와 글로벌 톱 여배우 강소희 사고!]
[현재 차준호와 강소희는 대한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
·가운데 점을 수정하였습니다. 먼저 읽으신 분들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최대한 하루 1~2회차는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차준호, 내 남자의 생사가 걸린 수술실의 붉은 등은 비정할 만큼 선명한 빛을 토해내며 벌써 한 시간째 복도를 물들이고 있었다.폐쇄적인 병원의 적막 속에서 그 붉은 빛은 마치 누군가의 쏟아진 혈흔처럼 내 망막에 눌어붙었다.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차올랐고, 이유 없는 메스꺼움이 명치끝을 비틀어댔다. 기분 나쁜 축축함과 울렁거림이 가시지 않았다.아직 갈아입지 못한 선거용 점퍼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조차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내 신경을 긁어댔다.인간이 절대자에게 무릎을 꿇고 의지하는 순간은 수없이 많겠지만, 나는 항상 그 신이라는 존재에게 외면만 당해온 처지였다.축복보다는 저주에 익숙했고, 온기보다는 서늘함에 길들여진 삶이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라, 사투를 벌이고 있을 차준호에게 빌고 또 빌었다.‘대표님, 제발······.’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따가운 햇살이 가득할 때는 그의 넓은 그늘에 머물며 안식하고 싶었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가 막아주는 튼튼한 우산 속에서 비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보호받고 싶었다.눈물이 나고 슬픔이 넘쳐흐를 때는, 오만하리만큼 단단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직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그 특별한 위로에 젖고 싶은데.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그 어떤 풍파에도 꺾이지 않을 것 같던 그 무소불위의 남자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다. 그러니 절대자를 믿지 않던 오만한 생(生)이 고작 붉은 등 하나에 명줄을 잡힌 채 바닥까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차준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사로잡혀 있었다.
대체 차준호는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저, 15% 조직 적합성(HLA) 일치하는 공여자가 바로 저예요. 대표님, 제발 수술받으세요. 또 좋은 날 오겠죠.”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 사이에 15%의 조직 적합성이 나왔다는 건 의학적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수치였다. 이건 분명 우리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유일한 줄기였다.“신 비서, 아이를 가졌는데 그럼 안 되지!”“어머나, 내가 못 살아. 그럼 안 돼!”차진철 회장과 고미주가 가슴을 치며 내게 달려들어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나 역시 알고 있었다. 지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몸이 심하게 쇠약해져 있었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의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차준호는 대체 어떻게 이 모든 진실을 다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대표님, 이 고비를 넘겨야 미래도 있는 거예요!”절규에 가까운 나의 고백이 터져 나온 순간, 차준호를 둘러싸고 있던 병원 전체에 비현실적인 정적이 사정없이 감돌았다.그때 차준호는 만사 귀찮다는 듯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어설프게 내걸며 낮게 대답을 건넸다.“신하늘, 나 비정한 사람 만들 거야? 아이 벌써 포기하면 안 되지. 나 말고 그동안 과로한 신하늘이 좀 입원해야겠네. 어차피 선거는 이길 테니까.”이 남자는 죽어가는 이 순간마저 지독할 만큼 든든하게나를 지키려고 했다.“어떻게 할까요, 회장님.”강진욱 박사는 덤덤한 표정으로 차진철 회장을 바라보았다.“회장님, 도와주세요!”나 역시 광기 어린 눈으로 강진욱 박사의 어깨너머 우뚝 서 있는 차진철 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차진철 회장은 형
3년 전,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세상에 이토록 아름답고 견고한 사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난 두 눈을 의심했었다.평범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채, 중세 시대 거대하고 웅장하게 지어 올려진 성(城) 같이 철벽처럼 느껴진 남자였다.물론 손꼽히는 명문 재벌가의 후계자이자 거대 기업의 대표라는 배경이 그를 더욱 대하기 어렵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이아준이나 도국처럼 완벽한 미남들을 매일 보고 자라 심미안이 남다르다고 자부하던 나조차, 차준호라는 사내가 가진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체격도, 혈색도, 타고난 건강미마저 넘쳐나던 그 압도적인 사내가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쓰러져 있었다.이런 위태로운 모습을 그동안 몇 번이고 지켜봐 왔지만, 오늘도 나는 인생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 속에서 그를 병원으로 끌고 와야 했다.“대표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 제발요!”불과 조금 전, 출구조사 발표 직후 나는 이젠 다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그에게 수술받을 것을 종용했었다.라온초등학교 운동장 위, 가슴 벅찬 당선의 환희가 불꽃처럼 터져 나오던 그 순간, 그에게 빈틈이 생겼을까 싶어 슬그머니 파고들었었다.이렇게 가슴 뜨거운 순간을, 오래 살다 보면 자주 만날 수 있을 텐데. 그와 함께 더 많이 웃고, 그 삶의 행복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어서, 참아왔던 애원을 다시 한번 그에게 쏟아부었었다.하지만 그는 꼿꼿하게 서서 늘 그렇듯 나의 절박함을 가볍게 거절했다. 자꾸 쓸데없는 수를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냉정한 말만 내뱉으며.그리고 그 아슬아슬한 실랑이가 이어지던 바로 그 순간, 그가 거목이 베어지듯 무너져 내렸다.허기찬과 선우현이 사력을 다해 뒷수습을
JW소속사 프라이빗 주원형의 펜트하우스 거실.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서는 자막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하며 잔인한 숫자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속보] 현재 개표율 10% 돌파, 세종동 신하늘 후보 1위 우세![개표 결과] 신하늘, 압도적인 표 차이로 일찌감치 선두 유지! 서울의 중심 세종동 지각변동![정가 분석] 김희주 사퇴 효과 무색, XX당의 몰락과 신진 세력의 약진!강소희는 홀린 듯 화면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화면 속, 승리의 영광을 입은 신하늘의 곁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차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린 시절 처음 본 순간부터 송두리째 영혼을 빼앗긴 압도적인 존재. 차준호는 강소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하지만 결국 자신은 그의 삶에 단 한 줄의 각주조차 될 수 없었다. 그 잔인한 진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녀의 목구멍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수술을 거부한 채 저 몸으로 대체 얼마나 버티려는 걸까. 그녀의 마음속에 늘 뜨겁게 자리했던 차준호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빛을 독점했던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연모를 품는 것조차 과분해 숨을 죽여야 했던 어린 날의 자신이 비참하게 일렁였다.“지금 생각해 보니, 신 비서와 난 악연이었던 것 같아요.”강소희가 고해성사하듯 낮은 목소리를 뱉어내자, 주원형은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의 다정한 위로조차 닿지 않을 만큼 강소희의 세계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난 세종동 서쪽 마을 판자촌 출신이었거든요. 할머니 손에 맡겨져 그곳을 전전하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하마터면 ‘하늘 보육원’이라는 곳으로 갈 뻔했죠. 그러다 운 좋게 해외로 입양된 거고요.”“··&midd
드디어 아침이 밝았다.선거 당일의 공기는 미세먼지와 황사가 어제보다 한층 지독해져, 대지마저 내 마음만큼이나 무겁고 탁하게 눌려 있었다.창밖으로 건너다보는 세종동의 풍경은 불투명한 회색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은 이미 거대한 전쟁터였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속보들이 섬광처럼 눈을 찔러왔다.[속보! 김희주 후보, 어젯밤 돌연 사퇴! 과연 그 표심은 신하늘에게 향할까?][운명의 시간, 세종동 민심의 향방은? 신하늘, 승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나][정가 이슈, 신진 정치인의 화려한 탄생 예고! 금배지 거머쥘까······ 해외 언론도 조명][글로벌 시선! 전 세계에 K-선거 열풍 일으킨 신하늘, 최종 성적표는?]김희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치졸했다. 패배를 직감하자마자 비겁하게 도망치듯 사퇴하며 마지막까지 내 탓이라고 독화살을 쏘아댔다.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으려는 그 악의적인 셈법에 치가 떨렸지만, 그런 정치적 소음 따위는 지금 내게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대세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내 온 신경은 오직 곁에 서 있는 차준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평소라면 이미 거실에서 노트북을 열어 두고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을 텐데, 그는 정오가 다 되도록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차준호의 안색은 잿빛이었고, 표정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예민하게 서 있었다. 뒤늦은 식사를 마치고 옷을 차려입고 나오는 동안에도 그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집 앞을 가득 메운 [스카이 블루] 지지자들 앞에서도 차준호는 특유의 오만하고 도도한 미소를 유지했지만, 내 손
폭풍 전야의 고요가 세종동의 초라한 침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모두가 떠나고, 서로의 노고에 감사하며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 지금. 시계는 이미 새벽 2시를 지나치고 있었다.하루 중 가장 짙고 참담한 어둠이 방 안을 집어삼키고 있는 시간이었다.요 며칠 미세먼지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종일 야외 유세를 하며 들이마신 공기는 폐부 깊숙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목이 까끌거려 침 한 번 삼키는 것조차 버거운 밤이었다. 온종일 세상을 흔들던 확성기 소리와 지지자들의 환호성은 유리창 너머 아득한 소음으로 밀려났고, 실내에는 오직 우리 두 사람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짙게 깔려 밀도를 높였다.어스름한 간접 조명만이 은밀하게 침실에 부서지는 가운데, 나는 그의 서늘한 체온에 기대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선거 운동이라는 잔혹한 레이스를 마친 뒤 마주한 이 시간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처럼 치명적으로 위태롭고도 아름다웠다.이제 정말 끝인가.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내일의 해가 뜨면 오늘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리라는 예감이 전신을 훑었다.“후련하네요.”내 말이 끝나자마자 차준호는 복잡한 내 속내를 정돈해 주듯,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나를 향한 그의 시선은 평소의 오만함을 벗어던진 채,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는 깊은 애틋함으로 일렁이고 있었다.“신하늘, 잘 버텼어.”“또 하라면 절대로 못 할 것 같아요. 정말······ 죽을 만큼 피곤했거든요.”내 몸 상태는 최악이었고, 차준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귓가를 간지럽힐 만큼 다정한 웃음소리를 흘렸다.차준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여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