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이 나쁜 자식!’
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
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
“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
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나를 그저 몸만 즐기는 파트너로 취급했다는 그의 확신에 가슴이 난도질당했다.
“전 아무하고나 침대를 달구지는 않아요.”
바에서 생수를 들고 걸어온 차준호는 내게 슬그머니 병을 내밀었다. 마치 ‘냉수 먹고 속 차려라’ 하는 무언의 조롱 같아 속내가 뒤틀리다 못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화가 치밀어 올랐기에 신경질적으로 병을 뺏어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 섹시한 옷도 입고 와서 나에게 고백하려고 했어?”
숨이 탁 막히는 순간이었다. 일순 목에 사레가 들려 볼썽사납게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완벽하게 고백 성공 시나리오를 쓰고, 오늘부터 진정한 연인 1일이 될 거라 철석같이 기대했던 나였기에 타격이 컸다. 단칼에 차인다는 예상은 전혀 못 했기에 당황스러움에 눈앞이 아찔했다.
“놀랐어? 귀엽긴.”
진심으로 이 상황이 흥미롭고 즐거운지, 그의 입가에는 호선이 만개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로브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내게 다가왔다. 온몸 가득 베인 시원하고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머릿속을 하얗게 마비시켰다.
딸깍. 정적을 깨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차준호는 길고 곧은 손끝으로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꺼내더니, 얼어붙은 내 목에 차가운 금속성 이물감을 선사했다.
“······대표님?”
그가 내게 선사한 것은 바로 근사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였다.
*** 그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애초에 내게 주려고 미리 준비했다는 건데, 이 모순적인 남자는 지금 내게 왜 이러는 거지?
“메리 크리스마스.”
가까이서 내 목덜미를 바라보는 그의 짙은 시선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숙여 목에 걸린 물건의 정체를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체인 끝에 매달린 목걸이였다.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도는 펜던트는 구름, 별, 달 모양이 다이아몬드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어서, 마치 그동안 우리가 남몰래 나눈 비밀스러운 밤을 새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펜던트 속 달 모양이 마치 그가 깊숙이 숨겨둔 진심을 투영하는 거울 같아, 혼란스러운 상념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나랑 연애도 안 하고, 고백도 하지 말라고 원천 차단하면서 왜 목걸이는 이토록 다정하게 쥐여주는 걸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크리스마스잖아. 선물 주는 거지. 신하늘이 예뻐서.”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건 또 무슨 행동일까. 방금 난 매몰차게 차인 게 아니었나.
그는 통유리창 너머로 무수히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입가에 걸린 알 수 없는 미소를 끝내 거두지 않았다.
그때 Rrrr Rrrr.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자 그는 내게서 벗어나 통화에 집중했다.
“허 실장, 뭐라고? 일치한다고?”
전화를 받는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창에 비친 그의 냉정한 실루엣만 응시했다.
몇 마디 주고받던 통화를 황급히 끊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급한 일이 생겼어. 다음 주 스케줄 비워.”
차준호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묻어났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얼른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당연히 오늘 같은 날, 급한 일이 아니더라도 더 붙어 있을 명분이 없었다.
“데려다줄게. 허기찬 불렀어.”
“아시잖아요. 여기서 세종동은 가까워요.”이렇게 나의 크리스마스이브 고백은 대실패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룸을 나가기 위해 가방을 들자 평소와 다른 무게라 잠시 몸을 움찔했다.
그에게 선물로 줄 [당신 덕분에 매일 행복했습니다]라고 적힌 신간 도서가 지금의 나를 조롱하듯 가방 속에서 존재감을 내비쳤다.
“대표님. 오늘 이곳에서 나눴던 대화는··· 없었던 일로 생각해 주세요.”
난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죽인 채 억지로 웃어 보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래. 오늘 일은 깨끗이 잊어 줄게.”
차준호의 목소리 끝에는 묘한 여운이 맴돌았다.
*** 역시 내 인생은 이런 식이지. 다시 블루 크리스마스로 돌아왔다.도국과 이아준 두 친구 녀석 덕분에 남자를 모르고 살았던 내 모태솔로 인생이었건만.
갑자기 3년 전, 운명처럼 등장한 차준호라는 사람과의 3D로 펼쳐진 혼자만의 핑크빛 로맨스는 착각으로 끝이 났다.
고개 위로 눈발이 하늘에 아름답게 수를 놓았지만, 발밑은 질척하고 칙칙한 풍경뿐이었다.
따뜻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환상이었으나 현실은 이리 춥고 진창인 것을.
핑크 스틸레토 힐에 튀어 오른 흙탕물이 발목을 휘감으며 신경질을 자극했고, 입안의 온기는 하얗게 부서져 얼굴마저 얼게 했다.
니트 원피스가 보기엔 따뜻해 보여도 보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코트 깃을 바짝 세웠다. 한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열이 오른 머리를 식혔다.
주말도 없이 야근을 밥 먹듯 한 3년. 그래도 그와 함께여서 즐거웠다. 비서는 회사의 이미지라며 좋은 옷도 선물 받고 국내외 대단한 출장길도 함께여서 행복했는데.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또래보다 험난한 길을 걸어온 나. 물려받은 보육원 땅을 지키고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건 오직 입사 덕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C호텔을 바라보자, 유리창의 찬란한 불빛은 내 것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것 같아 아득했다.
차준호와 함께할 따뜻한 봄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엉망인 땅바닥처럼 추운 겨울이나 신경 써야 했다. 잊어 달라 했지만, 이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연봉 협상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만둬야 하나 마음이 뒤숭숭해 한숨만 터져 나왔다.
그에게 받은 목걸이 펜던트만 만지작거리며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굴욕을 지워버리려 해도 목덜미에 닿은 목걸이의 서늘한 감각이 굴욕적인 기억을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도록 차준호는 연락 두절이 되었다. 그의 소식은 새해 아침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 1월 1일.차준호가 사라진 지 일주일째, 그의 이름이 갑자기 속보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재벌가의 황태자 차준호와 독보적인 한류 스타 강소희. 두 사람의 세기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세기의 스캔들? 굴지의 CC그룹 황태자 차준호와 글로벌 톱 여배우 강소희 사고!]
[현재 차준호와 강소희는 대한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
·가운데 점을 수정하였습니다. 먼저 읽으신 분들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최대한 하루 1~2회차는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명절 연휴의 첫날이자 토요일 정오.잠실 L-DS 전자 사장실 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차준호와의 통화를 끝낸 이아준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툭 던져놓았다. 서류 뭉치를 훑어 내리는 그의 입꼬리가 길게 틀어쥐어졌다.“이제야 몸이 달아올랐다 이거지? 쳇.”혼잣말을 내뱉으며 피식 웃는 순간,Umm Umm-.책상 위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이아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아, 도국이가 영상 통화를?’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면 가득 화려한 조명과 함께 짙은 메이크업을 한 도국의 얼굴이 떠올랐다.이아준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도국이 무심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 통화 중이던데.이아준은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특유의 살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와, 풀 메이크업하니까 근사한데? 왜, 내 얼굴 보고 싶어서 영상 전화를 건 거야?”― 이 와중에 농담은. 아직 세종동일까 봐 궁금해서.화면 너머 도국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쳤다. 이아준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스르륵 내려놓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빠르게 마무리돼서 사무실 온 거야. 뒷수습은 차준호가 했고.”― ······이아준, 애썼네.“애는······ 우리 하늘이가 썼지.”팽팽하게 서 있던 도국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정하게 풀려나갔다. 화면 너머는 촬영 현장인지 스태프들이 바쁘게 오가는 소리로 어수선했다.
[신하늘이 쏘아 올린 구원의 손길, 세종동 주민에게 명절 선물처럼 다가와][그 지역구 국회의원 김희주는 그 시각 모 기업 행사 참여, 끝내 세종동에 발길조차 닿지 않아][세종동 서쪽 판자촌 화재 발생은 인명 피해는 없이 진화되어, 과연 재개발을 부추기는 방화일까?][세종동 화재 사건으로 본 우리 사회의 민낯, 가장 먼저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일반인 신하늘][신하늘과 그녀의 연인 CH-컴퍼니 차준호, 밤새 라온초 체육관 대피소 지켜. 지역 관계자는 모두 끝내 미등장]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아침부터 언론은 온통 세종동 화재 사건으로 뜨거웠다.민족 대이동 귀향이 시작된 시각에 금요일이라 각종 행사도 많아 상대적으로 세종동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하지만 신하늘은 온갖 비난을 받는 와중에도 늘 그렇듯 서쪽 동네 주민들에게 제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그와 동시에 신하늘에게 씌워져 있던 '꽃뱀'과 '악녀'라는 악의적인 프레임 역시 거센 반전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라온초에 정상적으로 허가를 받아 밤새도록 이재민을 위한 공간을 구축하고, 사재를 동원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적인 봉사는 귀감이 되었다.***지난밤, 짙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신하늘은 기꺼이 세종동으로 향했고 차준호는 그런 그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이었지만, 차준호의 스위트룸 안에서 신하늘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침대 곁에 걸터앉아 가만히 내려다본 신하늘의 얼굴은 아무리 좋은 음식을 챙겨 먹여도 이전보다 훨씬 핼쑥해져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었다.어제 신하늘은 평소 세종동 사람들과 끈끈한 신뢰를 쌓아온 덕분인지, 주민들은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안도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대한민국은 설 연휴가 시작되어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일본은 그저 평범한 토요일 아침이었다.일본 아키하바라의 벨X르 전관을 대관하는 대규모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최기범은 요 며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실장님! 이번 주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호텔 조식 뷔페에서 만난 한규련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운 채, 접시에 초밥부터 소복이 담아 올렸다.최기범은 초밥 대신 생선회 몇 점을 담고는 즉석 오믈렛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참, 대리 승진 축하해.”“하하, 명절 지나고 정식 발령장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이번 일본 출장길에 한 대리가 큰 도움이 됐어.”활기찬 한규련이 옆에 붙어 다녀주니 최기범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한규련 역시 오믈렛을 받으려 셰프 앞 줄에 서며 신나게 대화를 이어갔다.“저야 원래 게임 마니아라 행복한 출장이었습니다. 심지어 3월 1일에는 우리 게임이 아키하바라 한복판에 큰 획을 긋게 되잖아요. 생각만 해도 전율이 돋습니다, 하하!”한규련의 말에 최기범의 마음속에서도 기분 좋은 고양감이 피어올랐다.3월 1일이라는 역사적 상징성과 아키하바라 특유의 서브컬처 문화가 빚어낼 시너지가 이제는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차준호가 왜 하필 이날을 고집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너무 늦어지면 8월 15일에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던 차준호였다.최근 신하늘과 얽힌 스캔들 탓에 사내 분위기가 어수선해 일정을 미룰까 고민도 했지만, 그래도 3월 1일을 향해 정면 돌파를 감행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이번 일을 겪으며 최기범은 차준호를 다시 보게 되었다.&ldquo
세종동에 무슨 일이 터지다니.“신 과장님!”고요하던 23층 게임 개발실 사옥 내에 사색이 된 김강무 과장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헐레벌떡 달려오던 김강무는 내 곁을 굳건히 지키고 서 있는 차준호를 발견하고는 굳어버린 얼굴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아, 대표님도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너무 급한 일이라 제가 그만 정신이 없었습니다.”“김 과장, 큰일이라니.”차준호가 묵직하게 묻자, 김강무는 숨을 가쁘게 헐떡이면서도 내게 바짝 다가와 입을 열었다.“세종동에 무슨 일이요······?”두려움을 감춘 채 내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김강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저! 신 과장님이 사시던 그 세종동 서쪽 동네에 큰불이 났어요!”“네······?”순간 뇌리가 하얗게 마비되는 기분에 나는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거기 판자촌 전체에 불이 나서 완전히 난리가 났나 봅니다. 위험하니까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차준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기는커녕, 더 힘을 주어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서늘하지만 묵직한 어조로 김강무에게 응대했다.“알려줘서 고맙군, 김 과장.”그제야 김강무는 쭈뼛거리며 차준호의 단호한 시선과 그와 단단히 얽혀 있는 내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결연하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저, 응원합니다. 신 과장님, 힘내십시오.”
한 주가 흘러 드디어 금요일을 맞이했다.이제 점심을 먹고 나면 설 명절을 지내기 위해 하나둘 조퇴하거나 일찍 퇴근하는 직원들이 생길 터였다.길고 길었던 일주일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나는 회사에서 계속 먹고 자며 내가 맡은 바 임무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몰두했다. 최기범도 게임 데모 버전이 안정화에 접어들자 일본 출장길에 오른 상태였다. 다른 직원들 역시 번갈아 가며 야근을 감수했고, 다들 미친 듯이 일에만 매여 지냈다.“신하늘 씨, 퀵 배달입니다!”그리고 차준호가 보낸 쇼핑백 역시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배달되었다.옷과 음식, 각종 생필품 등 세심하게 챙긴 물품들을 가득 보내주었지만, 정작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간결한 메모나 메시지 몇 줄만 전해올 뿐이었다.내가 악착같이 일에 매달리자, 게임 개발실 직원들도 조금씩 예전의 편안한 태도로 나를 대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배제했던 TF팀 회의에도 어제부터 공식적으로 합류했다.무엇보다 업무 외에도 내가 잠을 줄여가며 데모 버전 게임을 플레이해 '만렙'을 찍은 덕분에, 유저 입장에서 낸 다양한 의견들이 유의미하게 반영된 공도 컸다.물론 언론은 여전히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마녀사냥은 여전했지만, 난 아무 대응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사내 직원들만큼은 나를 더 이상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점심시간에도 나정아와 한은숙이 다시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나를 불러내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혹시 신 과장님, 사람이 아니라 AI 아니세요? 혼자서 몇 사람 몫을 하시는 거예요? 와······ 오늘도 호화 고급 도시락이네요! 집에는 대체 언제 갔다 오신 거예요?&r
'또 뭘 들고 와서 저렇게 날뛰는 건지.'자연스럽게 이아준의 차가운 시선이 이아정의 손에 들린 신경질적인 종이 뭉치로 향했다.“너 말 다 했어?! 내가 너 누나야! 그리고 네 앞길에 똥물 뿌릴 수 있는 사람도 나야! 이번에 XX당 보좌관으로 들어갔거든? 제발 내가 가는 길 좀 막지 마!”이아정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라리며 서슬 퍼렇게 악을 썼다. 이아준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을 보듯, 무심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받았다.“반대 상황도 생각해야지. 김희주한테 줄이라도 섰나 봐? 그쪽 당 보좌관 자리 하나 꿰찼다고 지금 유세 떠는 거야?”“신하늘이나 어떻게 좀 해봐! 외국으로 보내든가, 조용히 찌그러져 있게 하든가! 어차피 흙수저 밑바닥 출신 아이는 평생 거기서 굴러야지, 어디 감히 근본도 없이 위를 쳐다봐? 차준호는 내 남자야!”그 오만한 발언에 이아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L그룹이 제 손에 들어올 거라 꿈을 꾸던 이아정이었다. 자신이 세상에 나타난 순간 아버지 사망 이후 할아버지 이왕춘의 모든 애정과 기대가 이아준에게로 쏠렸다. 그런 연유로 그녀가 매번 이렇게 찾아와 속을 긁어대는 것도 이제는 이력이 난 터였다.늘 세상 꼭대기에 서 있다는 오만한 재벌가의 특권 의식과 선민사상에 이아준은 진절머리가 났고, 속에서 신물이 울컥 올라왔다.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조심해. 하늘이 이름 한 번만 더 그 더러운 입에 올리면, 이아정 너는 물론이고 나지란 여사까지 저 밑바닥에 제대로 굴러다니게 만들어 줄 테니까.”지독하게 낮고 냉정한 경고에 이아정이 순간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눈치는 비상하게 빠른 편인지, 그녀는 목구멍 너머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너&mi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